팔레올로고스 왕조

 



'''팔레올로고스 왕조
Δυναστεία τῶν Παλαιολόγων
'''
'''1259/1261 ~ 1453년'''
[image] [image]
'''황실기와 문장'''
'''성씨'''
'''팔레올로고스(Παλαιολόγος)'''[1]
'''표어'''
'''Βασιλεύς Βασιλέων,
Βασιλεύων Βασιλευόντων'''[2]
(임금들의 임금, 통치자들의 통치자)
'''창건자'''
'''미하일 8세''' (1259/1261~1282)
'''주요 황제'''
미하일 8세
안드로니코스 2세
안드로니코스 3세
요안니스 5세
요안니스 6세 칸타쿠지노스[3]
마누일 2세
요안니스 8세
콘스탄티노스 11세 드라가시스

'''로마 제국의 왕조'''
니케아 제국
(라스카리스 왕조)
'''로마 제국 멸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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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259년미하일 8세 팔레올로고스가 니케아 제국의 공동황제로 즉위하고, 그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수복해 1261년 8월 15일 로마 황제로 즉위하면서 시작된 왕조로 로마 제국의 마지막 왕조다.

2. 기원


팔레올로고스(Παλαιολόγος)라는 성씨를 해석하면 "오래된(palai) 말(언어 : logos)"이 되는데, 이 성씨의 뜻은 분명하지 않다.
팔레올로고스 가문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은 로마노스 4세 시대다. 니키포로스 팔레올로고스(Νικηφόρος Παλαιολόγος)가 그 시조인데, 그는 만지케르트 전투의 패배 이후 프랑크인 바이욀(Bailleul) 출신의 루셀(Rousell)이 일으킨 반란을 진압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러나 병사들이 도망치는 바람에 전투에서 패배했다. 루셀의 반란은 후일 황제가 되는 청년 알렉시오스 콤니노스가 진압하게 된다. 이후 미하일 7세는 그를 메소포타미아의 절도사(στρατηγός, 스트라티고스)로 보냈는데, 니키포로스 팔레올로고스는 니키포로스 3세 보타니아티스를 도와 미하일 7세를 내쫓았다.
니키포로스의 아들 요르요스 팔레올로고스(Γεώργιος Παλαιολόγος)는 알렉시오스 콤니노스의 아내이자 훗날 황후가 되는 이리니 두케나의 동생인 안나 두케나와 결혼했고, 동서 알렉시오스의 쿠데타를 도왔다.[4] 쿠데타 과정중에 '''아버지와 아들이 군대를 이끌고 수도 시내에서 대치하는 상황'''이 벌어지게 되었고, 결국 니키포로스 3세가 퇴진하면서 알렉시오스 콤니노스가 알렉시오스 1세로 즉위하게 된다. 쿠데타 성공 이후 요르요스는 디라히온의 도독(δούξ, 둑스)으로 임명되었고, 로베르 기스카르와 그 아들 보에몽의 침략 때 군대를 이끌며 활약했다. 자세한 내용은 디라히온 공방전 항목 참고. 여담으로 이 때 황제 알렉시오스 1세에게 얼마나 자주 보고를 했는지 '쿠로필라티스(Kouropalates)이자 디라히온의 관구장인 요르요스 팔레올로고스'라는 인장 유물이 남아 있다고 한다.
이렇게 황실과 강력한 연결을 가지고 되고 전공도 쌓으면서 이후 팔레올로고스 가문은 중요 명문가가 되었으며, 테오도로스 라스카리스니케아 제국을 세울 때도 함께하고 제국 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3. 역사



3.1. 미하일 8세



3.2. 안드로니코스 2세



3.3. 안드로니코스 3세



3.4. 요안니스 5세요안니스 6세 칸타쿠지노스



3.5. 안드로니코스 4세요안니스 7세



3.6. 마누일 2세



3.7. 요안니스 8세콘스탄티노스 11세



3.8. 멸망 이후


토마스 팔레올로고스 등 명목상의 왕위 요구자들은 항전 끝에 이탈리아를 통해 서유럽으로 망명했고, 이후로도 제위 복귀를 노렸으나 소수의 피난민들 외에는 지지를 얻지 못해서 실패하고 안드레아스 팔레올로고스를 마지막으로 흐지부지되어버렸다.
마지막 공주 소피아 팔레올로기나모스크바 대공 이반 3세에게 시집가, 러시아가 동로마의 정통성을 잇는 제3의 로마를 자칭하는 근거가 되기도 했다.

4. 황제 목록



4.1. 니케아 제국


'''니케아 제국의 황제'''
이름, 별명

출생
즉위
퇴위
비고
미하일 8세
팔레올로고스
1223
1259.1.1.
1261.8.15


4.2. 로마 제국


'''로마 제국의 황제'''
이름, 별명

출생
즉위
퇴위
비고
미하일 8세
팔레올로고스
1223
1261.8.15.
1282.12.11

안드로니코스 2세
팔레올로고스
1259.3.25
1282.12.11
1328.5.24

미하일 9세
팔레올로고스
1277.4.17
1294/1295
1320.10.12
공동황제
'''1차 내전(1321, 1322, 1327~1328)'''
안드로니코스 3세
팔레올로고스
1297.3.25
1328
1341.6.15

요안니스 5세
팔레올로고스
1332.6.18
1341.6.15
1376.8.12

'''2차 내전 - 로마 시민전쟁(1341~1350)'''
요안니스 6세
칸타쿠지노스
1292
1347.3.31
1354.12.10

'''3차 내전(1352~1357)'''
마세오스
칸타쿠지노스
1325
1353
1357
공동황제
'''4차 내전(1373~1379)'''
안드로니코스 4세
팔레올로고스
1348.4.11
1376.8.12
1379.7.1

요안니스 7세
팔레올로고스
1370
1376
1379.7.1

요안니스 5세
팔레올로고스
1332.6.18
1379.7.1
1390.4.14
복위
요안니스 7세
팔레올로고스
1370
1390.4.14
1390.9.17

요안니스 5세
팔레올로고스
1332.6.18
1390.9.17
1391.2.16
복위
마누일 2세
팔레올로고스
1350.6.27
1391.2.16
1425.7.21

'''오스만 공위기(1402~1413)'''
요안니스 8세
팔레올로고스
1392.12.18
1425.7.21
1448.10.31

콘스탄티노스 11세 드라가시스
팔레올로고스
1405.2.8
1449.1.6
1453.5.29
마지막 황제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1453)'''
디미트리오스
팔레올로고스
1407
1453
1460
오스만에게 항복
토마스
팔레올로고스
1409
1460
1465.5.12
이탈리아로 망명
안드레아스
팔레올로고스
1453
1465
1502
마지막 제위요구자

5. 몬페라토 후국



5.1. 개요


몬페라토 후작 굴리엘모 8세의 딸 비올란테가 이리니라는 이름으로 안드로니코스 2세에게 시집을 갔는데, 그 후 이리니의 남동생으로 몬페라토 후작이 된 조반니 1세가 아들 없이 세상을 떠났다. 남계 후손이 없어지자 몬페라토 후작위는 안드로니코스와 이리니 사이에서 태어난 테오도로스 팔레올로고스에게 돌아갔고, 그 후 몬페라토 후국은 약 200년간 팔레올로고스 가문이 통치하게 된다.
1533년, 몬페라토의 팔레올로고스 가문은 남계 후손이 끊겼다. 몬페라토 후작 굴리엘모 9세의 딸이었던 마르게리타 팔레올로가는 만토바 공작이었던 페데리코 곤차가와 혼인하였으며 이로써 몬페라토 후작위는 곤차가 가문으로 이어지게 된다. 그 후 1574년 신성 로마 황제 막시밀리안 2세가 몬페라토를 공국으로 승격하였다.[5]
페데리코 곤차가의 증손녀인 마르게리타 곤차가는 로렌 공작 앙리 2세와 혼인하였는데, 둘 사이에서 태어난 클로드 프랑수아즈는 훗날 마리아 테레지아와 결혼하여 신성 로마 황제가 되는 프란츠 1세의 증조모이다. 따라서 오늘날의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가문은 팔레올로고스 가문과 아주 미약하게나마 연관이 생겼다.

5.2. 가계



5.3. 역대 후작 목록



[1] 라틴어로는 Palaeologus(고전: 팔라이올로구스/교회: 팔래올로구스)[2] 바실렙스 바실레온, 바실레본 바실레본톤[3] 이 사람만 성씨가 다르다. [4] 다만 알렉시아스에 의하면 사전에 포섭해놓은 상태조차 아니었고, 쿠데타 당시에도 그렇게 쉽게는 설득되지 않았던 모양이다.[5] 다만 적법한 남계 후손이 끊겼다는 것이지, 후손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부계로만 따져도 팔레올로고스계의 마지막 후작이었던 John George(1488~1533)에게는 Flaminio(1518~1571)라는 서자가 있었으며 Flaminio의 3남 4녀의 후손들 중 Theodore를 통해 Paleologo-Oriundi, Ferdinand를 통해 Paleologhi 성씨를 쓰고있는 후손임을 주장하는 가문이 현재까지 존재한다. 특히 Paleologo-Oriundi 같은 경우는 그 계보까지 확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