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소 알비노니
1. 개요
베네치아의 부자이면서 작곡가인데, 문제는 옆 동네 누구 수학자처럼 아마추어였으면서도 쓴 곡들이 ㄷㄷㄷ하다는 게 문제. 협주곡으로 현대까지 알려졌지만, 당시에 오페라도 50편[1] 이나 쓴 괴수. [2] 보통 자신의 작품을 출판하면 자신의 직위를 썼는데[3] 여러 출판물에서 알비노니는 자기 자신을 musico di violino dilettante veneto(딜레탕트 베네치아의 바이올린 음악가)라고 지칭하고 있다.
2. 생애
2.1.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다
1671년 종이사업을 하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인 안토니오 알비노니는 베네치아 이곳저곳에 가게를 비롯한 부동산들을 가지고있었기 때문에, 풍족한 환경에서 음악을 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음악학자였던 레모 자초토(Remo Giazotto, 1910년 9월 4일 ~ 1998년 8월 26일)는 알비노니가 당시 저명한 베네치아 작곡가 조반니 레그렌치(Giovanni Legrenzi, 1626년 ~ 1690년 5월 27일)에게 음악을 배웠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환경때문에 알비노니는 드물게 돈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었으며 평생을 유럽을 여행하며 살았다. 또한 유럽 각국에서 자신의 작품을 출판하였다. 아무튼 교회의 윗대가리랑 싸우면서 일주일에 한곡씩 칸타타를 작곡해야했던 바흐나 말안듣는 가수들이나 귀족들때문에 오페라 흥행에 골머리를 썩고 있던 헨델과는 상당히 대조되는 부분이다.
2.2. 본격적 음악활동
1694년 23세가 되던 알비노니는 자신의 첫 번째 오페라 《제노비아, 팔미라의 여왕(Zenobia, regina de’ Palmireni)》을 카니발 기간 때에 베네치아의 산 조반니 에 파올로 극장에 올렸으며, 이듬해에는 첫번째 작품집인 《12곡의 트리오 소나타(12 Sonate a tre)》를 출판했고, 1700년에는 《6개의 신포니아와 6개의 5성 협주곡(6 Sinfonie & 6 Concerti a cinque)》과 이듬해에는 《3성의 발레(12 Balletti a tre)》등 기악곡들을 잇달아 내놓게 된다.
오페라 활동도 평생 꾸준히 해서 베네치아를 포함, 이탈리아의 피렌체, 피아첸차, 페라라 등지에서 자신의 오페라를 무대에 올렸으며 1709에는 프란체스코 가스파리니와 합작한 《엥겔베르타(Engelberta)》, 1717년에는 안토니오 비발디와 함께 작곡한 콜라보 오페라인 《승리자의 우쭐한 패배(Il vinto trionfante del vincitore)》를 상연하기도 하였다.
1700년에 알비노니가 만토바 공 페르디난트 카를로에게 고용되었다고도 하지만 아마도 자신의 《5성 신포니아와 협주곡집(Sinfonie e Concerti a 5, Op.2)》과 화려한 작품 몇 개를 헌정한 정도였을 것이다.[4] 또한 알비노니는 아내와 함께 성악 아카데미를 발족했다고 한다.
2.3. 위기
1705년에는 13살 연하의 소프라노 가수 마르게리타 리몬디(Margherita Rimondi)와 결혼해 슬하에 6명의 자식이 있었지만 1721년 그녀는 일찍 요절하고 말았고, 1709년 아버지가 죽은 후 사업을 동생에게 물려준 후에는 설상가상으로 아버지의 채권자가 제기한 소송에 휘말리는 바람에 가게들을 잃는 어려움도 겪었다. 덩달아 1718년부터 1722년의 4년간 이탈리아 극장에서 자신의 오페라도 상연하지 못했지만, 그 순간에도 알비노니는 걸작들인 협주곡집들을 잇달아 출판한다.
알비노니가 작품집에서 자신을 지칭하는 표현을 보면, 당시 그의 삶의 흐름을 대략 파악할 수 있다. Op. 6부터는 딜레탕트라는 표현이 빠져있고, Op.7 부터는 자신을 베네치아 귀족(Nobile Veneto)이라는 표현으로 새롭게 칭하고 있다. 바이에른 선제후에게 헌정한 Op.9, 루카 페르난도 파티뇨 후작에게 헌정한 Op. 10에서는 모든 표현을 삭제하고 단순히 바이올린 음악가라고만 자신을 소개하고 있다.
2.4. 말년의 삶
이러한 어려움은 1722년 바이에른 선제후국의 군주였던 막시밀리안 엠마누엘 2세의 초청으로 벗어나게 된다. 알비노니는 뮌헨에서 선제후 아들[5] 과 당시 신성로마제국 황제 요제프 1세의 딸이었던 마리아 아말리아의 결혼 축하연에서 자신의 오페라 《(I veri amici)》 《(II trionfo d’Amore)》[6] 를 두 차례에 걸쳐 감독하였고, 협주곡집 Op.9를 선제후에게 출판하면서 음악 활동을 이어나가게 된다. 이런저런 인연을 통해 알비노니는 황제 카를 6세 의 1724년 축일을 위해 세레나타 《이 땅의 영광스런 그 이름(Il nome glorioso in terra)》을 작곡하게 된다. 이렇듯 알비노니는 평생을 자유롭게 유럽을 여행하며 살았고 속해있는 궁정이나 교회가 없었으므로 기록이 별로 남아있지 않다.
마지막으로 작품번호가 붙은 작품인 《(12개의 5성 협주곡(12 Concerti a cinque)》를 1735년경 암스테르담에서 출판하게 된다. 여기 담긴 협주곡들은 알비노니의 음악들이 세련된 갈랑 양식으로 쏠린다는 것을 보여주는 활기찬 작품들이다. 한편으로는 베네치아에서 오페라 상연도 꾸준히 해서 알비노니가 70세되던 해였던 1740년까지 프라하나 로마에서도 알비노니의 오페라가 상연되었다. 이후에 완전히 기록이 끊겨서 학자들은 알비노니가 죽었다고 생각했으나, 당시 베네치아의 교구 기록이 발견되어 이후 알비노니가 음악 활동을 완전히 접고 1751년 베네치아에서 당뇨로 숨을 거두었다는 것을 확인 할 수 있었다.
3. 작품세계
직업 음악인이 아니었지만 알비노니의 작품들은 굉장히 독창적이다. 코렐리 등의 선배들에게 형식적인 영향을 받기도 했지만 별로 영향을 받았다고 할 만한 것이 없다. 오히려 그의 작품들이 후대 작곡가들에게 영향을 줬다 해야 할 정도. 다소 두루뭉실했던 악장 별 빠르기를 빠름-느림-빠름의 정형화된 양식을 사용한 것과 세 부분으로 된 리토르넬로 형식을 확립한 것 또한 알비노니의 업적이다. 바로크 후기에는 '이탈리아 양식'하면 비발디나 코렐리, 알비노니를 떠올릴 정도로 대중적이고 유명한 작곡가로 인식되었으며 독일의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나 요한 고트프리트 발터의 오르간 협주곡, 요한 게오르크 피젠델 같은 음악가들에게 상당한 음악적 영감을 제공하게 되고 많은 신예 작곡가들이 그의 작품을 편곡하기도 했다. 피젠델의 바이올린 소나타 g단조같은 작품을 들어보면 알비노니의 영향이 확 드러난다. 맨 위에 있는 알비노니의 a단조 소나타와 함께 들어보자.
오늘날에는 알비노니의 아다지오 라는 위작 작품으로만 기억되지만 그의 협주곡들이나 소나타들은 충분히 들어볼만한 가치가 있는 걸작들이다. 또한 오보에의 독주악기로써의 가능성을 알아보고 오보에 협주곡을 가장 처음으로 작곡한 인물이기도 하다. [7]
알비노니의 작품들은 현재까지도 적지 않은 수가 남아있는데 출판된 작품들을 비롯해 드레스덴에 여전히 알비노나의 기악 작품 필사본이나 자신이 피젠델에게 헌정한 바이올린 소나타 자필악보가 남아있다. 다만 말했듯이 알비노니의 아다지오는 그의 작품이 아니며 토대가 된 파편악보도 알비노니의 것이라는 증거는 없다. 또한 알비노니의 오페라들은 베네치아의 오페라 극장들이 폐쇄되면서 동시에 악보가 사라져 버린 것으로 추정된다. 비슷한 케이스는 안토니오 비발디.
또한 바로크 작곡가로써는 드물게 종교곡을 거의 남기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