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토니오 비발디
'''나는 그의 음악이 싫증난다. 스트라빈스키가 그를 '똑같은 협주곡을 500번 쓴 사람'이라고 했다는데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 대신에 나는 비발디가 500곡의 작곡을 시작만 했을 뿐 아무런 결말과 성공을 거두지 못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계속 쓰고 또 쓰려고 시도만 했을 뿐이다.'''
― 찰스 로젠(Charles Rosen)
'''그의 음악은 야성적이고 불규칙적이다.'''
― 존 호킨스 경, 『음악원리의 실천과 역사 개관''A General History of the Science and Practice of Music(1776)''』 中,
'''비발디는 가장 인기있는 바이올린 음악의 작곡가이자 연주자이다. 라 스트라바간차(La Stravaganza)[4]
라는 비발디의 작품은 자신의 솜씨를 뽐내려는 연주자들 사이에서 제일 선호되는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내 어릴 때만 해도 그의 협주곡은 음악회에 자주 참석하는 모든 사람들의 경탄과 즐거움의 대상이었다. 만일 날카롭고 빠른 음들이 나쁜 것이라면, 비발디는 속죄해야 할 거리가 많다.'''
― 찰스 버니(Charles Burney)
1. 개요
이탈리아의 음악 선생 겸 작곡가 겸 사제 겸 바이올리니스트. 바로크 시대의 가장 유명한 음악가 중 한 명으로, 그가 작곡한 몇몇 작품, 특히 《사계》(특히 '봄 제1악장')는 들어보지 않은 이가 없을 정도로 유명하다.
2. 생애
2.1. 어린 시절
1678년 3월 4일 조반니 바티스타 비발디와 카밀라 갈리치오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그때부터 몸이 약했는지 칠삭둥이[5] 가 얼마나 살까 했던 부모는 일단 집에서 급하게 세례를 한 후 정식적인 유아세례를 주지 않고 백 일을 넘겼는데, 비발디가 그 때까지 죽지 않자 5월 6일에야 유아세례를 주었다고 한다. 유전인 적발 때문에 붙은 별명은 '붉은 사제(il Prete Rosso)'인데, 붉은 머리를 주변 사람들이 썩 좋게 보지 않았다고 한다. 왜 그런지는 적발 문서 참고.
연약했던 비발디는 15세 때인 1693년 9월 18일 올레오 수도원에 입회했지만 건강 문제로 집에서 출퇴근 배려를 받았는데, 그 때 산 마르코 대성당의 바이올리니스트였던 아버지에게서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했다. 25세 때인 1703년 3월 23일에는 사제 서품을 받았지만 사제로서 직무에 충실하지 않았고, 바이올린 연주에 심취하거나 건강 문제를 핑계 삼아 미사 집전을 거르는 날이 많았다고 한다. 아예 1706년부터는 미사를 집전하지도 않았다.
2.2. 피에타 고아원 1기
1703년 3월에 비발디는 베네치아의 소녀 고아원 중 하나인 오스페달레 델라 피에타(Ospedale Della Pieta)[6] 의 바이올린 교사로 임명되었다. 말만 교사지 실직적으로는 지휘나 모든 악기와 합창의 감독도 했다. 직장 상사인 프란체스코 가스파리니가 1713년 베네치아를 떠난 뒤로부터 비발디의 직함은 '합주 교사'로 바뀌었으며 그냥 비발디가 다 한걸로 추정된다.
아무튼 비발디는 나름 열심히 했는지[7] 1715년에 피에타의 높으신 분들로부터 표창장을 받고 50 두카트의 돈도 지급되었다. 샤를 드 브로스가 언급한 것처럼 당시 피에타의 음악 수준은 매우 뛰어났으며, 정기연주회를 열고[8] 행사가 있을 때는 고아원들이 연합해서 음악회를 크게 개최하기도 했다.
아무튼 자유로운 베네치아 풍경과 위의 배경을 통해 비발디는 당시 고아원에 방문하시는 높으신 분들과 친교를 맺을 수 있었으며 1708년말에는 베네치아로 놀러온 프레데리크 4세에게 자신의 바이올린 소나타집 Op. 2를 헌정했다. 예술 애호가로 이름높았던 프레데리크왕은 베네치아에서 피에타의 연주를 자주 들었으며 돌아가서도 자신의 궁정에서 비발디의 바이올린 소나타를 자주 연주시켰다고 한다.
2.3. 피에타 고아원 2기
비발디는 합주 교사 직을 유지한 채 오페라 작곡가로도 활약하기 시작했다. 비발디는 1714년부터 4년간 자신이 작곡한 10곡의 오페라를 무대에 올리게 된 것이다. 현대의 시선에서 봤을 때 이는 어마어마한 양이지만, 당시의 음악과 비발디 특유의 작곡속도를 고려해봤을 때 많은 양은 아니다.
2.4. 탈베네치아(1718~)
또 45세 때인 1723년 이후로는 나이 차가 20살이 넘게 나던 여제자인 안나 지로의 심상치 않은 염문으로 비난받았다. 콘트랄토 가수였던 그녀는 비발디의 많은 오페라에서 주역을 맡았는데, 그녀는 언니와 같이 비발디가 병상에 있을 때 그의 집에서 그를 간호하면서 사랑에 빠졌다고 한다.
2.5. 말년과 사망
말년에 안면이 있었던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였던 카를 6세를 만나러 갔지만, 그만 황제가 죽어버려서... 이도 저도 못하게 되었다. 전성기 때는 전 유럽에 비발디의 이름이 알려져 있었지만, 말년에는 그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차게 식었기 때문에 빈이라는 타지에서 쓸쓸하게 객사하였다. 앞서 말했던 특유한 낭비벽 때문에 오페라 상영이나 바이올린 연주로 벌었던 재산도 바닥난 상태였기 때문에 극빈자로서 장례식을 치렀으며, 요제프 하이든이 그 당시 소년 합창단으로서 장례식에 있었다고 하지만..... 극빈자 장례식이었기 때문에 합창단도 없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비발디의 유해는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처럼 묘지가 이장되는 과정에서 분실되어 행방이 묘연하다.
그 후로도 오랫동안 잊혀 있던 비발디는, 그를 존경했던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가 비발디가 작곡한 곡을 건반 악기 등으로 편곡한 비발디 편곡집이 20세기 초에 재평가받으면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숨겨져 있던 비발디의 곡들이 발굴되면서 합주협주곡과 바이올린 협주곡의 양식을 정립하는 데에 기여했다고 평가된다.
3. 기타
앞서의 안나와의 불륜으로 베네치아에서 쫓겨나고 나서도 "나는 사랑과 베네치아를 맞바꾸었을 뿐이다."라고 할 정도로 자존심도 상당했던 듯 하다. 아무튼 바흐나 텔레만 등의 다른 작곡가들 같은 묵직하고 엄숙한 느낌이 별로 없었던 건 분명해 보인다. 상술했듯이 사제 치고 미사에는 별 관심도 없었다고 하며, 흥청망청 즐기는 것도 잘 했다고 한다.
당시 베네치아에서 활약하던 극작가 카를로 골도니의 비발디 평인즉 "비발디는 바이올린 주자로서는 만점, 작곡가로서는 그저 그런 편이고, 사제로서는 0점이다." 비발디는 다음과 같은 골도니에 대한 평으로 응수했다. "골도니는 험담가로서는 만점, 극작가로서는 그저 그런 편이고, 법률가로서는 0점이다."[9] (...) 키배를 벌이긴 했지만 골고니는 비발디 오페라 대본을 두 편 써주는 등 같이 협력하기도 했다.
하지만 작곡할 때를 제외하고는 손에서 묵주를 놓지 않았으며, 작곡을 하면서도 비발디 본인의 신앙심의 흔적이 나타나 있어, 그가 결코 사이비 사제인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또 그 때 베네치아는 항구도시라 이런저런 사람들이 드나드는 곳이었고 그만큼 분위기가 많이 문란했다고 하니[10] 비발디는 그 당시의 평범인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실제로 이런저런 소문 때문에 그를 파문시키려는 세력이 있었지만 다행히도 끝내 파문은 당하지 않았다고 한다.
현대 작곡가 막스 리히터에 의해 《사계》가 재작곡된 바 있다. 전곡 듣기
4. 비판
그가 작곡한 곡들은 구성들이 비슷해서 자기표절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11][12] 대표적으로 이고르 스트라빈스키는 '''"비발디는 작품을 수백 개 쓴 게 아니라 한 곡을 수백 번 베껴 쓴 사람이다."'''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사실 헨델 등 바로크 음악 작곡가들도 이런 비판에서 벗어날 수는 없고 그 당시에는 특별히 비난받을 일로 여겨지지도 않았지만, 비발디는 유독 심한편.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바로크 시대에는 자기 곡을 재사용하는것을 요즘만큼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현대 기준으로 비난할 일은 아니다. 위에 비발디 본인이 말한 것처럼 작곡속도도 엄청 빨라서 오페라 <티토 만리오>(Tito Manlio)는 심지어 5일만에 써내려갔다고 한다.'''비발디는 작곡에 대한 엄청난 열정을 가진 노인이다. 나는 그가 사보가가 사보하는 속도보다 훨씬 빨리 협주곡 하나를 작곡해내겠다고 하는 것을 들었다.'''
- 샤를 드 브로스, 1739년 쓴 편지에서
한 번은 바이올리니스트인 프리츠 크라이슬러(F.Kreisler)가 비발디의 모작을 쓴 적이 있다. 크라이슬러는 처음에는 이것이 비발디의 실전된 작품이라고 대대적으로 언플을 했는데,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다.(…) 결국 이 작품의 진짜 정체는 그가 훗날 이 작품을 자신이 썼다고 실토하면서 밝혀졌다. 문제의 곡 듣기[13] 근데 사실 크라이슬러 이 양반은 평소에도 이것저것 자주 위작을 쓰곤 했었다고. 프랑수아 쿠프랭, 아르칸젤로 코렐리, 주제페 타르티니 등 바로크 시대의 거장들 중에 그에게 봉변(?)을 당하지 않았던 인물은 없었다고 해도 될 정도다.(…)
5. 음악세계
클래식에 조예가 깊지 않은 일반인들은 사계 외에는 거의 알지 못하고, 클래식덕후들 사이에서도 비발디에 대해서는 그냥저냥한 작곡가로 평가하는 분위기지만 비발디는 사계의 작곡가라고 생각하고 넘기기에는 아쉬운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창의성, 구성에 있어서 선배들을 뛰어넘는 베네치아 바로크 음악의 최고봉이라 할 만한 인물이기 때문. 애당초 비발디 이전에 비발디만한 작곡가가 있었는가? 100~200년 뒤의 후배들의 레피토리와 작품성과 직접 비교하는 것이 오히려 실례다.
그 외에는 2012년 이전의 서도철 이용자라면 당시 환승음이었던 조화의 영감 또한 익숙할 것이다.
5.1. 기악곡
비발디는 그 자신이 바이올리니스트이기도 했으며, 과연 바이올린 협주곡들을 가장 많이 작곡했다.[14] 바순을 위한 협주곡도 다량 썼으며[15] , 첼로 협주곡[16] , 비올라 다 모레 협주곡[17] , 플루트 협주곡[18] , 오보에[19] , 소프라노 리코더 [20] 등 솔로 협주곡들뿐 아니라 화려한 대편성의 합주 협주곡도 여러곡 썼다. 오르간과 바이올린이 들어간 협주곡을 제외하고 건반음악은 쓰지 않았다.[21]
첫 협주곡집인 <화성의 영감>(L'estro armonico, Op. 3)을 시작으로 <라 스트라바간차>(La Stravaganza, Op. 4), <화성과 창의의 결합>(Il cimetno dell' armonia e dell' inventione, Op. 8), <라 체트라>(La cetra, Op. 9)등 다양한 협주곡집을 출판했는데, 바로크 후기에는 이미 바이올린 또는 협주곡하면 비발디라는 이름이 떠오를 정도로 많은 유학 음악가들이 그를 만났고, 사사했다. 바흐도 그의 협주곡집들을 쳄발로와 오르간곡으로 편곡했다.
비발디의 음악은 굉장히 열정적이고 생기가 약동하는 느낌이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비발디는 자신의 작품들의 거의 대부분을 협주곡으로 썼다. 협주곡 중에서도 주로 3악장 형식의, 빠름 - 느림 - 빠름 구성이 대비되는 곡들을 많이 썼다. 느린 악장은 빠른 악장과 장단조를 반대로 해서 작곡하는 경우가 많았다.[22]
비발디 음악에서 강조되는 것이 이러한 '''대비 효과'''인데, 위의 악장 간의 대비와, 리토르넬로(ritornello)라 불리는 형식을 통해서 전체 협주(tutti) 부분과 독주악기의 솔로(solo) 부분이 극단적으로 대비되어 보인다. 협주 내에서도 셈여림(다이내믹스)을 바꾸면서 일종의 "메아리 효과" 를 주어서 동일한 동기나 악절이라도 상황에 맞게 대비시키는 것이 자주 나타나곤 했다.
바로크 당대에 비발디는 '''셈여림의 활용'''에 있어서는 뛰어난 테크닉을 갖추고 있었다고 알려지는데, 그가 사용했던 셈여림 지시들은 현대에 활용되는 ppp - pp - p - mp - mf - f - ff - fff 구분보다 세분화됐다고 한다. 비발디의 셈여림 지시를 크기 순으로 일렬로 늘어놓으면 현대의 크레센도(crescendo)나 디크레센도(decrescendo)와 정확히 일치한다고 한다. 바로크 시대 자체가 포르테랑 피아노 정도 외에는 찾아보기도 어렵던 시대였고, 특히 건반 악기의 경우에는 음량을 일정하게 유지하며 연주하는 것이 정격연주까지는 아니어도 시대적 트렌드를 잘 반영한 연주라는 평을 받을 정도였음을 생각한다면, 그의 안목을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5.1.1. 협주곡의 악장
빠른 악장에서의 협주는 대부분의 경우 4번 등장하는 것이 기본인데, 거의 동일한 악절이 조성만 바뀌면서 등장한다. 조성의 변화는 규칙성이 있어서, 예를 들어 C major 에서 시작했다면 2번째 등장하는 협주는 G major, 3번째는 A minor,[23] 4번째는 C major 이런 식으로 계속 옮겨간다. 하여간 잊을 만하면 자꾸 똑같은 내용을 반복적으로 들려주므로(…) 테크닉이 중시되는 독주 파트와는 별개의 중독성 있는 존재감을 갖게 된다. 대조적으로 독주 파트의 경우 선율 중심보다는 화성 중심으로 '''현란한 아르페지오'''가 두드러지며, 첼로의 통주저음(basso continuo) 혹은 제1 바이올린의 은근한 반주가 따라붙는다.
빠른 악장에서의 또 다른 유별난 특징은 바로 리듬감으로, 어떤 하나의 리듬을 정해놓고 처음부터 끝까지 그걸 작정하고 밀어주는 모습을 보인다.(…)[24] 그렇기 때문에 이런 부분들을 잘 캐치해서 강약약 강강강약 강중약을 뚜렷하게 강조할 경우, 비발디의 음악은 가장 무도회 수준의 '''흥겨움'''을 자아내게 된다. 에우로파 갈란테(Europa Galante)가 이런 측면을 잘 잡아내고 있으며, 좀 더 하드코어(…)한 해석으로는 앙상블 마테우스(Ensemble Matheus)[25] 가 있다. 이런 식으로 연주한다.[26]
느린 악장의 경우 악보 자체는 굉장히 단순하다. 특히 독주 파트에서 뜻밖에도 어린이용 교재 수준(…)으로 간략하게 쓰인 악보를 볼 수 있는데,[27] 이대로 연주하는 건 당연히 아니고(…) 바로크적인 모든 가능한 꾸밈음들과 소소한 애드립들을 넣어서 그럴싸하게 꾸미라는 얘기다. 즉 '''독주 멜로디의 기본 얼개는 비발디가 대충 던져주고, 그걸 멋있게 꾸미는 건 연주자의 재량.''' 바로크 당대에 이런 일이 드물진 않았지만 비발디가 유독 그런 게 심했다. 그래도 잘 꾸미면 이건 그야말로 지중해의 우아하고 느긋한 풍미를 제대로 즐길 수 있는 분위기가 나온다.
5.2. 오페라
당대의 비발디는 기악 작곡가보다는 오히려 오페라 작곡가로 알려져 있었다.[29] 비발디 자신의 말로는 94편이나 되는 오페라를 썼다고 하는데, 이는 과장이 없지않아 보인다. 그러나 현재 알려진 비발디의 오페라만 해도 51개나 되기 때문에 오페라를 많이 쓴 편은 사실이나, 그 중에도 많이 소실되었고, 미완성 작품들만 해도 15개 정도나 되기 때문에 온전히 남아있는 작품은 별로 없다
당대의 정기 간행물인 『팔라데 베네타』(Palade Veneta) 1717년 1월판에 보면, '웅장한 《다리오의 대관''Incoronazione di Dario''》(RV 719)이 발수갈채 속에 초연되었다'라는 기록이 있어서 당시 비발디의 오페라의 인기가 어떠했는지 알 수 있다. 비발디의 오페라는 베네치아 이외에도 피렌체, 로마, 빈, 프라하 등 전 유럽에서 상연되었다.
5.3. 종교음악
비발디는 오페라뿐 아니라 모테트, 미사곡, 성모송, 시편 등 종교음악 부분에서도 뛰어났다. 비발디는 뛰어난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작곡가이기 이전에 피에타의 음악 감독이었으므로 전례에 맞춰 미사에 사용할 음악을 만들어야 했다. 비발디는 자신의 특기인 기교적인 협주곡 양식을 종교음악에서도 어김없이 집어넣어서, 비발디 종교음악 중 독창을 듣고 있게 되면 마치 바이올린 협주곡의 솔로를 연상하는 경우가 많다. 동시대의 한 평론가는 비발디가 바이올린의 목(넥, neck)과 성악가의 목(neck)을 구분하지 못한다면서(...) 깠다.
이중에서도 특기할 만한 작품은 비발디가 쓴 4개의 오라토리오 중 유일하게 온전히 남아있는 <승리한 유딧>(Juditha triumphans)으로, 이 작품을 쓴 이유가 당시 베네치아 공화국과 오스만 제국이 벌이고 있던 전쟁에서의 승리 염원이라는 설이 있다. 피에타에서 초연된 이 화려하고 웅장한 작품은 피에타 소녀들의 독창 5부와 혼성 4부에, 비발디가 전에 써본적 없었던 대규모 기악, 즉 어느정도 트럼펫에 팀파니, 오보에에 추가로 리코더, 샬뤼모, 비올라 다 모레, 비올라 다 감바, 류트, 만돌린까지 사용했는데, 이는 피에타에서 끌어올 수 있는 모든 악기를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6. 작품 목록
기록상으로 대략 760곡 가량의 많은 곡을 남겼음에도 대중적으로는 '사계' 외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비발디의 작품번호는 모차르트의 쾨헬 번호처럼 '''Ryom-Verzeichnis(RV, 뤼옴 번호)'''라는 고유 표기가 있는데, 20세기 덴마크의 음악학자 '페터 뤼옴(Peter Ryom)'이 비발디의 악곡들을 분류한 것이다.
'사계' 말고도 그가 작곡한 유명한 곡으로 작품번호 3번 '화성의 영감' 또는 '조화의 영감'(L'Estro Armonico)이 있다. 제목은 사람들에게 낯설지만 이 음악도 광고, 영화, 드라마 등등에서 많이 쓰여서 들어보면 아 그 음악!하고 알 수 있을 정도로 인지도가 있다. 한때 서울특별시도시철도공사가 운영하는 지하철 노선들 환승 알림음이 이 화성의 영감 중 6번곡인 바이올린 협주곡 가단조(RV 356) 1악장이었다. 보다 정확히는 예후디 메뉴인 경의 협주.
물론 상술했듯이 이제 이것도 옛말이다. 비발디의 RV.356 1악장은 17년동안 절찬리에 서울특별시도시철도공사 환승 알림음으로 이용되고 있었지만, 국악을 이용하자는 제안 때문에 얼씨구야로 대체되었다.
▲ 모테트 'Nulla in mundo pax sincera(세상에 참 평화 없어라)' RV. 630. 《샤인》 OST로 유명해진 곡이다.
▲ "Cessate, omai cessate" 中 "Ah ch'infelice sempre", RV. 684, 2nd mov. 《친절한 금자씨》 OST로 유명해진 곡이다.
▲ Bassoon Concerto in E Minor , RV. 484. 3rd mov. 위에 곡보다 덜 알려졌지만 이것도 《친절한 금자씨》 OST다.
6.1. 표제가 붙은 곡 모음
비발디 작품들 중 표제가 붙어 있는 것만 따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축일을 위한 협주곡은 제외.
- 바이올린 협주곡
- Op.8 No.1 RV.269 "봄" (La primavera) (▶) Il Giardino Armonico
- Op.8 No.2 RV.315 "여름" (L'estate) (▶) Il Giardino Armonico
- Op.8 No.3 RV.293 "가을" (L'autunno) (▶) Il Giardino Armonico
- Op.8 No.4 RV.297 "겨울" (L'inverno) (▶) Il Giardino Armonico
- Op.8 No.5 RV.253 "바다의 폭풍" (La Tempesta di Mare) (▶) Venice Baroque Orchestra
- Op.8 No.6 RV.180 "기쁨" (Il Piacere) (▶) Venice Baroque Orchestra
- Op.8 No.7 RV.242 "피젠델을 위하여" (Per Pisendel) (▶) Il Giardino Armonico
- Op.8 No.10 RV.362 "사냥" (La Caccia) (▶) Venice Baroque Orchestra
- Op.11 No.2 RV.277 "좋아하는 것" (Il Favorito) (▶) L'Arte dell'Arco
- RV.199 "의심" (Il Sospetto) (▶) I Musici
- RV.208 "대(大) 무굴 제국" (Grosso Mogul) (▶) Il Giardino Armonico
- RV.229 "안나 마리아를 위하여" (Per Anna Maria) (▶) L'Arte dell'Arco
- RV.234 "불안" (L'inquietudine) (▶) Europa Galante
- RV.256 & RV.294 "Il ritiro" (▶) Musici di San Marco(RV.256)
- RV.270 "휴식" (Il riposo) (▶) I Sonatori de la Gioisa Marca
- RV.271 "연인" (L'amoroso) (▶) I Sonatori de la Gioisa Marca
- RV.335a "나이팅게일" (Il rosignuolo) (▶) L'Arte dell'Arco
- RV.341 "암스테르담 협주곡" (Amsterdam Concerto) (▶)
- RV.352 "공(球)" (Il Ballo) (▶) Ensemble I Barocchisti
- RV.363 "마차 나팔" (Il Cornetto da Posta) (▶) Accademia I Filarmonici
- RV.366 "Il Carbonelli" (▶) L'Arte dell'Arco
- RV.552 "멀리서 들려오는 메아리" (Per Echo in Lontano) (▶) Europa Galante
- 플루트 협주곡
- Op.10 No.1 RV.433 "바다의 폭풍" (La Tempesta di Mare)[30] (▶) I Solisti Veneti
- Op.10 No.2 RV.439 "밤" (La Notte)[31] (▶) I Solisti Veneti
- Op.10 No.3 RV.428 "붉은 방울새" (Il Gardellino) (▶) Musica ad Rhenum
- 신포니아
- RV.169 "성묘" (Al Santo Sepolcro) (▶) Accademia Bizantina
- 현을 위한 협주곡
- RV.151 "전원풍으로" (Alla Rustica) (▶) Camerata Musica
- 협주곡집/작품집
- 합주 협주곡집 Op.3 "조화의 영감" (L'Estro Armonico)
- 바이올린 협주곡집 Op.4 "화려함" (La Stravaganza)
- 바이올린 협주곡집 Op.8 "화성과 창의의 시도" (Il Cimento Dell'amonia e Dell'invenzione)
- 바이올린 협주곡집 Op.9 "La Cetra"
- 플루트 소나타집 Op.13 "충직한 양치기" (Il Pastor Fido)
[1] 혹자는 저 하얀 가발 밑으로 붉은 머리카락이 보인다고도 한다.[2] 저 그림에서 바이올린을 다양한 물건들로 바꾸는 왜곡짤을 만들기도 한다. 예를 들면 이렇게.[3] 17세기~18세기초에 유행하던 작자 미상의 화성 진행이다.[4] 바이올린 협주곡집 op. 4[5] 지진 때문에 일찍 태어났다고 하나 그때 베네치아에는 지진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6] 당시로써 이 학교의 음악적 수준은 매우 뛰어났으며, 그들의 연주회는 수많은 대중들의 볼거리였다. 외국에서도 그 명성이 널리 알려져있었다. 장 자크 루소도 참회록에서 베네치아 고아원의 음악 수준을 높이 평가했다.[7] 1739년 프랑스의 여행가였던 샤를 드 브로스는 당시 피에타의 음악수준이 파리 오페라극장의 오케스트라보다 낫다며 칭찬했다.. 아마 이 뒷배경에는 비발디가 있지 않았을지.[8] 다만 이때는 연주자들이 보이지 않게 커튼을 치고 연주했다.[9] 골도니는 원래 법률을 공부하다 희곡을 쓰는 일로 전향한 사람이었다.[10] 당시 유럽에서는 "베네치아 사람들은 생애의 절반은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범죄를 저지르며 살아가고, 나머지 절반은 하느님께 용서를 비는 데 바치고 있다"라고까지 평하고 있다.[11] 심지어 RV.179 3악장 솔로와 RV.263a 1악장 솔로는 일부이긴 하지만 아예 대놓고 베꼈다고 봐도 좋을 수준이다. 심지어 RV.179 3악장의 첫 솔로 부분은 RV.180 1악장의 첫 솔로 부분과 아예 똑같다. 또한 RV.185 4악장과 RV.188 3악장, RV.447의 3악장, RV.729 서곡의 2,3악장의 도입부도 아예 대놓고 베꼈다고 봐도 된다.[12] 또한 RV.459의 1악장과 3악장이 아예 똑같다(...) 1악장 3악장 [13] 솔직히 엄밀히 말하자면 실제 비발디의 작풍과는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이런 차이를 찾아보는 것도 나름대로의 재미.[14] RV 170-391[15] 37개, RV 466-504 (RV 468와 482는 미완성)[16] RV 398-424[17] RV 392-397[18] RV 426-440 (RV 432는 미완성)[19] RV 446-463 (위에 서술했듯이 RV 459의 1악장과 3악장은 완전히 같다.)[20] RV 443-445[21] 거의 유일하다시피 한 솔로 건반 협주곡인 RV.780조차 애초에 그런 작품은 없음에도 후대의 오해로 인해 RV.546의 편곡 버전이라고 잘못 알려져 있다. 실제로 바이올린과 첼로를 위한 RV.546과는 달리, 동일 내용임에도 RV.780은 건반 독주를 위한 내용이라고 보기에는 영 아니다. 심하게 말해서 초등학교 근처 피아노 학원 다니는 꼬마들도 약간만 연습하면 칠 수 있을 정도로 단순하다.[22] 그래서 표제가 긍정적이고 밝은 것으로 붙어있는 작품의 경우, 1악장과 3악장은 표제에 걸맞는 밝은 분위기인데 2악장은 무지막지 어둡고 꿈도 희망도 없어 수준의 분위기가 만들어지는 경우도 있다.[23] 보통 여기서 협주 주제가 좀 더 심층적으로 전개되곤 한다.[24] 대표적인 사례가 RV.363의 3악장. 전체적으로 |♩ ♪♪♪♪| 리듬이 굉장히 강조되는 걸 알 수 있다.[25] 지휘자는 스피노시(J.C.Spinosi)라는 인물인데, 바이올린을 켜는 게 아니라 거의 두들겨대고, 연주중에 추임새를 넣는 것도 모자라서 펄쩍펄쩍 뛰기도 한다.[26] 이건 비발디 작품은 아니고 텔레만 작품이지만, 전체적으로 이 양반들이 어떤 식으로 연주하는지 감이 잡히는 영상이다.(…) 이런 자극적인 연주 탓에 매우 호불호가 갈린다.[27] 대표적인 사례가 RV.359 (Op.9 No.7) 2악장, RV.347 (Op.10 No.6) 2악장 등등.[28] 맨 처음에 나오는 신포니아는 RV. 723의 것이다.[29] 그의 작품이 이탈리아가 아닌 네덜란드 같은 타지에서 많이 출판되었고, 대중적인 음악회에서 보다는 피에타에서 종교음악을 많이 연주했기 때문이었다.[30] RV.253과 같은 부제이지만 전혀 다른 곡이며 둘 다 똑같이 유명하다.[31] 5악장은 가을 2악장을 재탕(?)한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