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성 전투(66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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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고구려의 수도인 평양성을 두고 벌인 당과 고구려의 전투로 고구려-당 전쟁과 삼국통일전쟁에 포함된다.
2. 상세
2.1. 당군의 침공
645년의 대패 이후 당나라는 고구려에 대해 정면 대결을 피하고 소모전을 통한 국력 고갈, 인접국 공략을 통한 고구려의 고립을 시도하여 어느 정도의 성과를 거두었으나 하지만 650년대 고구려는 전장을 초원 지대로 옮김으로써 소모전의 효과를 경감하였다.
백제를 멸망시킨 당과 신라는 백제부흥운동으로 인해 골치를 앓고 있던 상황이었다. 남잠(南岑)과 정현(貞峴), 임존(任存)[5] 에서 대대적인 반란이 일어났으며 660년 9월 23일에는 사비성으로 대규모 백제 잔존군들의 공격이 있었으며 이에 동참한 성의 수만해도 20여개가 넘는다는 기록이 엿보인다. 이후 20여개의 성도 제압하는 등의 백제의 잔존 세력들을 소탕하기 시작했으나 661년 8월 또다시 사비성이 공격 당하고 빈골양(賓骨壤)이라는 지점에서는 신라군이 백제 잔존 세력에 의해 몰살 위기를 겪기도 했다. 여전히 백제 부흥군과 왜는 고구려 남쪽의 신라군을, 거란과 해, 철륵 방면에서는 당나라군의 전력을 소모시켰다.
하지만 당고종은 자신의 아버지가 실패했던 고구려 정벌이라는 목표에 심혈을 기울이기 시작했고 660년 겨울, 당 고종은 대대적인 병력을 소집해 고구려를 침공을 계획한다. 이때 당고종은 김인문을 직접 불러 다음과 같은 말로 신라의 고구려 정벌 동참을 명한다.
그리고 8월, 당나라의 대병력이 고구려로 진군한다. 당군은 크게 세 갈래로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먼저 전통적인 중화 왕조의 한반도 침공 루트인 요동 지방으로는 소사업의 부여 도행군, 정명진의 루방 도행군이 침공해왔고 지난 1차 여당 전쟁 때 활약한 계필하력의 요동 도행군은 압록강 하구로 침입하였다. 그리고 육상에서의 고구려의 강력한 군사력을 회피한 평양 직공으로 결정타를 노린다. 660년 해로를 통해 백제 수도 사비성을 공격한 경험이 있는 소정방의 평양 도행군, 임아상의 패강 도행군, 방효태의 옥저 도행군은 황해를 건너 고구려의 수도 평양성으로 침공했다.용삭(龍朔) 원년(서기 661년)에 당 고종이 불러 말했다.
“짐이 이미 백제를 멸하여 너희 나라의 근심을 제거하였는데, 이제 고구려가 지리의 험함을 믿고 예맥(穢貊)과 함께 악한 짓을 하여 큰 나라를 섬기는 예를 어기고 이웃 나라와 사이좋게 지내는 의리를 저버리고 있다. '''짐은 병사를 보내어 치려고 하니, 너도 돌아가 너희 국왕에게 고하여 군대를 출동시켜 우리와 함께 망해가는 오랑캐를 섬멸케 하라.”'''
'''《삼국사기》 제44권 열전 제4 김인문'''
2.2. 신라의 상황
앞서 언급했다시피 백제의 잔존 세력들의 궐기로 정신이 없던데다 무열왕이 사망한지 얼마 되지 않은 상중이었던 신라는 이 소식에 곧바로 대응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아예 무시하지는 못한듯 김인문 열전에는 김유신과 김인문으로 하여금 신라군을 정비하고 대기토록했다는 기록이 나와있다.“황제께서 이미 소정방을 보내 수군과 육군 35도(道)의 병사를 거느리고 고구려를 치게 하고, 임금께 병사를 일으켜 서로 응원하라고 명하였습니다. '''비록 상중이지만 황제가 직접 내린 명을 어기기는 어렵습니다'''.”
'''《삼국사기》 제6권 신라 본기 제6 문무왕'''
당시 신라는 당군이 출정한 8월에도 백제 잔존 세력을 토벌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문무왕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나아가 9월 27일에 백제의 반란군이 저항 중이던 옹산성[6] 을 점령했고 우술성(雨述城)마저 무너뜨리는데 성공한 상황에서 때마침 당고종의 사신이 신라로 건너와 "어서 빨리 평양으로 군량을 보내라."는 황제의 명을 전달한다.
3. 전투
3.1. 평양성 혈전
가을 8월, 소정방이 패강(浿江)에서 우리의 군사를 물리쳐서 마읍산(馬邑山)을 빼앗고, 마침내 평양성을 포위하였다.
'''《삼국사기》 제22권 고구려 본기 제10 보장왕'''
소정방이 이끌던 평양 도행군은 8월, 황해를 건너 패강에서 고구려군을 물리치며 평양성에 도달하는 데 성공한다. 거기에 평양성 주위를 둘러싼 대동강마저 얼어 붙어 당군이 평양성을 포위할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다.소정방은 6군을 거느리고 만리길을 달려 패강(浿江)에서 고구려 군사를 마주하여 이를 격파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평양(平壤)성을 포위하였으나 고구려인들이 굳게 수비하자 이기지 못하고 오히려 병마가 많이 죽거나 부상당하였다. 뿐만 아니라 군량미의 수송도 여의치 않았다.
'''《삼국사기》 제44권 열전 제4 김인문'''
평양성은 3중성이기도 했지만 대동강이 천연 해자 역할을 해서 난공불락의 요새이기도 했다. 그런데 대동강이 얼어 붙어 육지와 다름 없어졌으니 사실상 중요 방어 체계가 무용지물이 된 셈.
하지만 수백년간 동아시아를 호령했던 고구려의 수도, 평양성은 쉽사리 점령되지 않았다. 《일본서기》에는 "오히려 고구려군이 당의 군대를 밀어붙여 당의 병사들이 눈물을 흘리며 곡을 했다. 후회막급이라는 말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라는 기록까지 나오며 김인문 열전에도 "고구려 인들의 저항이 매서웠고 오히려 당군이 보급에 문제가 생겨 위기에 빠졌다."라고 나와있다. 더군다나 662년 시점에서는 누방 도행군 지휘자인 정명진과 부장 양사선, 패강 도행군의 지휘자인 임아상의 사망이 확인된다. 당나라 35군을 편제한 6개 도행군 가운데 2개가 사령관을 잃고 1개는 무력해지며 2개는 전선을 이탈한 상황인 것이다. 그리고 연개소문은 사수로 나아가 방효태의 당군과 대회전을 펼쳐 전멸시켰다. 당나라로서는 평양성의 저항이 거센 것을 넘어 살수대첩의 재현을 걱정할 판.12월에 고구려가 “이번 12월에 고려국[高麗國][7]
은 몹시 추워 패강(浿江)이 얼었습니다. 당군(唐軍)은 운차(雲車), 충붕(衝輣)을 끌고 북과 징을 울리며 진격하였습니다. '''고구려의 군사는 용감하고 웅장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다시 당(唐)의 두 보루를 빼앗았습니다. 다만 두 진터만이 남아 있었습니다. 이것은 밤에 빼앗을 계획을 세워 놓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당의 군사가 무릎을 껴안고 울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날카로움이 둔하여지고 힘이 빠져 빼앗을 수가 없었습니다.”라고 보고하였다. 후회막급이라는 것이 이것이 아니고 무엇이랴【승려 도현(釋道顯)[8] 이 말하였다. 김춘추(金春秋)의 뜻은 본래 고구려를 치는 데 있었다. 그런데 먼저 백제를 쳤다. 근자에 백제가 침공당해서 몹시 괴로움을 당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렇게 한 것이다.】.
'''《일본서기》 권 27 고구려가 당을 물리쳤다고 알림'''
3.2. 김유신의 원군
661년 12월 10일. 김유신이 총지휘관으로 임명된 신라의 지원 부대는 평양성으로 진격하게 된다. 이때 투입된 병력은 불명이나 이때 투입된 수례만 해도 2,000여대가 넘고 쌀 4천 섬과 조 2만 2천여 섬을 담아갔다고 하니 그 규모는 신라로써는 상당한 정예 병력을 투입했을 것이다. 당연하지만 신라의 영토가 아니라 고구려의 영토로 직접 식량을 보급하러 가는 것이기에 상당한 위험도가 있는 작전이었고 그 때문에 신라의 기둥이었던 김유신이 직접 투입되었다고 볼수 있다. 한편 김인문 열전에는 이때 웅진도독부에 있던 유인원과 함께 출동했다고 기록되어 있기에 나당 연합군이 투입되었을 확률도 있다.(고구려가) 큰 나라를 섬기는 예법을 거스리자, 황제께서 발끈 성을 내어 (1자 불명) 왕께서 공에게 부대총관(副大總管)의 직위를 주고 성대하게 군사들을 모아 군량미를 옮기게 하였다.
신라 원군은 칠중하, 산양, 이현을 거치며 북상했다. 662년 2월 1일, 장새(獐塞)[9] 라는 지점에 도착한 신라군은 그곳에서 진을 치고 당군에 지원군이 도착했다는 소식을 전달한다. 이때 김유신은 보기감(步騎監)이라는 직책을 맡고 있던 열기(裂起)라는 인물을 불러 직접 편지를 가지고 고구려 진영을 뚫어 당군에게 "우리가 도달했다는 소식을 전하라"는 명령을 한다.
“나는 젊어서부터 그대와 교유하여 그대의 지조와 절개를 알고 있다. 이제 소 장군에게 우리의 뜻을 전달하려 하나 사람을 구하기 어렵다. 그대가 갈 수 있겠는가?”
“제가 비록 불초한데도 외람되게 중군의 직책에 있는데, 하물며 장군의 명령을 욕되게 하겠습니까? 설사 죽는다 하더라도 삶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삼국사기》 제42권 열전 제2 김유신 중'''
그리고 열기는 장사 구근(仇近) 등 15명과 함께 험난한 고구려 땅을 달려가 평양성을 에워싸고 있던 소정방의 군대에 도달한다. 소정방은 그들이 전해준 편지를 듣고 무척이나 기뻐했으며 그에게 답신을 전달해주어 김유신에게 되돌려 보낸다. 열기와 15명의 장수들은 이틀 동안 고구려 땅을 질주해 김유신에게 소정방의 답신을 전했으며 김유신은 크게 기뻐하며 열기에게 급찬의 벼슬을 내렸다.“제가 비록 둔하고 굼뜨지만 심부름하러 가는 사람들에 참여하고 싶습니다.”
'''《삼국사기》 제47권 열전 제7 열기'''
그후 신라군은 당군과 합류해 그들에게 가지고 온 식량을 건네주었고, 소정방에게는 따로 은자와 비단 등을 선물로 주었다.
6일, 양오(楊隩)[10]
에 당도하여 유신이 아찬 양도와 대감 인선(仁仙) 등을 보내 당나라 군영에 군량을 가져다 주었고, 정방에게 은 5천 7백 푼, 가는 실로 곱게 짠 베 30필, 머리털 30량과 우황 19량을 선물로 주었다.
'''《삼국사기》 제6권 신라 본기 제6 문무왕'''
3.3. 당군의 퇴각
비록 당군은 식량을 얻었지만 고구려의 동장군은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거기다 삼국사기의 기록만 보면 당군은 신라로부터 식량을 받자마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고 한다. 때마침 폭설이 내리는 바람에 결국 당군은 평양성 포위를 풀고 퇴각하게 된다.
소정방은 평양을 포위했는데, 마침 큰 눈이 내렸으므로 포위를 풀고 물러갔다. 이처럼 당나라는 앞뒤의 전쟁에서 매번 큰 성과 없이 물러갔다.
'''《삼국사기》 제22권 고구려 본기 제10 보장왕'''
당군은 식량을 얻었으나 큰 눈이 내렸으므로 포위를 풀고 돌아갔다.
'''《삼국사기》 제44권 열전 제4 김인문'''
3.4. 험난한 신라군의 퇴각로
한편 신라군도 당군이 돌아갔다는 소식에 더이상 머무를 이유가 없다고 판단하고 말머리를 돌린다. 그러나 고구려는 신라군의 이동로 마다 복병을 심어놓고 매복해 공격을 했다. 안 그래도 피곤에 찌들어 있던 신라군은 이런 고구려의 공격을 버티기 힘들었고, 이에 사령관이었던 김유신과 김인문은 한가지 꾀를 내어 한밤 중에 기동을 해 고구려군이 신라군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게 했다.신라 병사도 양식이 떨어져 역시 회군하였는데, 군사들은 굶주리고 추위에 떨었으며 손발에 동상이 걸려 도중에 죽은 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삼국사기》 제7권 신라 본기 제7 문무왕'''
김유신 열전에 따르면 기묘한 계책을 내어 고구려군이 쉬이 따라오지 못하게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기록의 묘사만 보면 소의 머리와 꼬리에 불을 질러 승리를 거둔 제나라의 명장 전단의 화우지계를 차용한 듯 보인다.
여튼 고구려군은 신라군이 이미 떠난 사실을 뒤늦게 알아채고 급히 병력들을 소집해 추격한다. 그리고 신라와 고구려는 과천이라는 지점에서 일대 회전을 벌이게 된다. 김유신은 1만의 쇠뇌병을 활용해 기선제압을 했고 이후 총 공세를 퍼부었다. 그 결과 고구려군 1만 명의 목을 베었고 소형 아달혜(阿達兮)를 비롯한 5천여 명의 포로를 사로 잡았으며 1만이 넘는 병장기를 획득하는 데 성공한다. 다만, 이는 과장일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이때 신라가 전공으로 내세운 것을 보면 사로잡은 고구려군 지휘관이 겨우 소형(小兄)이라는 것이 그 증거인데 소형은 고구려 관등 중 10위에 불과한 벼슬로 100명의 군사를 거느리는 당주(幢主)에 해당되기 때문.[11]북과 북채를 여러 마리 소의 허리와 꼬리에 매달고는 후려쳐서 요란한 소리가 나게 하고, 또한 섶풀을 쌓아놓고 불을 질러서 연기와 불이 끊이지 않게 하였다. 그리고는 밤에 몰래 행군하여 포하(薸河)에 이르자 급히 강을 건너 병사들을 쉬게 하였다.
'''《삼국사기》 제42권 열전 제2 김유신 중'''.
(신라의) 병사들은 적의 땅을 가로질러 (글자 불명) 하여 호노수(瓠盧水)[12]
로 되돌아갔다. (글자 불명) 물가 언덕에 이르렀다. 공은 곧 만여 명을 (목베었다). 이 때에 이르러 구름같이 많은 용맹한 장수들이 공의 뛰어난 병법 운용을 우러러 보았으며, (후략)
행렬이 호로하(瓠瀘河)에 이르렀을 무렵 고구려 병사가 뒤를 따라와 언덕에 나란히 진을 쳤다. 신라 병사들은 피로하고 굶은 지 오래였으나, 적이 따라올까 걱정이 되어 적이 강을 건너기 전에 먼저 강을 건너가서 교전했는데, 선봉이 잠시 교전하는 사이에 적의 무리가 와해되고 말았으므로 마침내 병사를 거두어 돌아올 수 있었다.
'''《삼국사기》 제7권 신라 본기 제7 문무왕'''
4. 전투 이후
당나라는 동방 전선에 대한 피로감을 유래 없이 노골적으로 표출한다. 그동안 전면전은 없더라도 만 단위의 자잘한(?) 소모전은 끊이질 않았지만 이번에는 기존에 시도하던 소모전조차도 자제했으며 백제 방면의 웅진 도독부에도 역시 철수를 명한다. [13]
대승을 거두었지만 고구려로서도 서북방 제민족에 대한 지배가 흔들리고 남방에선 백제와 왜가 나당 연합군에 작살나는 등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는 상황이었다. 이 때문인지 신라의 공격에도 크게 반응하지 않고 전쟁 확대를 피하며 당나라 봉선 의식에 태자를 보내는 등 기존에는 상상하기 힘들었던 수위의 친선 의사를 표한다.
그렇게 기나긴 전쟁은 끝이 보이고 평화가 오는 듯했으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