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상팔국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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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대 한반도 남부에 있었던 8개 작은 나라들이 일으키고 신라가 지원군으로 참여한 전란. 고고학과 일치하지 않는 삼국사기의 초기 기년을 그대로 믿기 힘들지만, 본기와 열전에서 사건이 구체적으로 기술되고 있어서 학계에서 대체로 '일어난 시기는 삼국사기 기록과 다를지 몰라도 사건 자체는 실존했던 역사'로 보고 많은 연구의 대상이 되는 사건이다.
사실 문서명도 삼국사기의 표현인 난, 즉 반란처럼 느낄 수도 있지만 '란'은 전란을 뜻하는 말이기도 하다. 최신 학설에서는 옛날 교과서에 실려있던, 가야를 하나의 연맹체 안의 소국들로 보는 가야연맹설이 부정되는 추세라, 반란이 아니라 나라들 간의 전쟁이라고 이해하는 게 좀 더 맞다. 그러나 옛날부터 써온 '포상팔국의 난'으로 용어가 고정된 편이므로 문서명도 그렇게 되어있다. 아래의 '난이 아니라 전쟁이다' 단락 참조. 임진왜란, 병자호란이 반란이나 단순한 난리 정도가 아닌 국제전쟁이었음에도 과거부터 정착한 표현인 '란'을 관례적으로 사용하는 것과 비슷하다.
2. 소개
8개 소국이 연합해 '금관국(김해시) 또는 안라국(함안군)'을 침범했고, 여기서 침범을 당한 '금관국 혹은 안라국'이 낙동강 동쪽의 강국이던 신라에 도움을 요청해 이를 물리쳐낸 사건이다.
'포상(浦上)'은 이 당시에 포구(강이나 바다 포함)를 낀 육지 고을이라는 뜻이다. 거제도나 남해도처럼 섬지역을 나타낼 때는 '해상'으로 썼다.[* 다산 정약용의 '아방강역고'에 따르면 당시 바닷가 용어인 '해상(海上)'이란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도서(섬)지역(남해 거제)은 이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기록하고 있다.(사천에서 창원까지 육지 지역이라 비정한다) 1859년(철종 10) 윤정기(尹廷琦)가 지은 동환록(東寰錄)에도 [案旣云浦上。不云海中。則今巨濟南海不在計也。"땅의 경계에 있는 '포상'이란, 바다 섬은 아니라 전한다. 즉 '거제' '남해'는 포함되지 않는다"라 적고 있다.[[http://m.newsngeoje.com/news/articleView.html?idxno=8072|#]] ]
여덟 나라는 변한-가야지역의 소국이지만 삼국지 위지 동이전의 변진소국 명단에도 없는 나라가 많아 어디에 있던 어떤 나라들인지에 대해서 현대 사학계에서 오랫동안 논의의 대상이 되었다, 여덟 중 이름이 확실하게 확인되는 나라는 골포국(마산), 칠포국(함안군 칠원읍 지역), 고차국(고성군), 사물국(사천시)정도이다. 위치를 보면, 그리고 포상(浦上)이라는 한자 뜻으로도 알 수 있듯 남해를 통한 수로 교통과 밀접한 공통점이 있는 나라들이다. 보라국은 지금의 전라남도 나주시 지역으로 비정되기도 하는데, 이 때문에 남방 교역권에 관련이 깊은[6] 영산강 세력도 이 전쟁에 참여했을 가능성도 있다고도 하지만 나머지 국가들과 거리가 너무 멀어서 호남 세력의 참전을 부정하고 보라국을 서부경남 지역의 어딘가로 비정하기도 한다.
이 사건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데, 첫째는 진변한 소국들이 힘을 모아서 대규모 원정을 일으킬 만큼 사회 복잡도가 충분히 진전되었다는 점이며, 둘째는 변한시절부터 이어진 안라국/금관국이 주도하는 낙동강 서쪽 지역의 기존 질서가 무너지는 것의 징조라는 점[7] , 셋째로는 원격지로 군대를 파견하여 8:1의 전쟁을 수행하여 승전으로 이끄는 등 신라의 국력 향상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3. 용어의 문제: 난(亂)이 아니라 전쟁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와 물계자전에 실린 이 사건은 흔히 포상팔국의 난(亂), 즉 반란으로 알려져 있다. 당연히 원 사서에서는 이러한 표현은 쓰인 적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용어가 쓰이는 데에는 위에서 말한대로 '가야'를 하나의 나라, 또는 작은 나라들이 서로 뭉친 연맹체로 인식하는 사관에서 비롯된 것이다.
포상팔국의 나라는 안라국/금관국과 힘의 강약, 세력의 대소의 차이, 약간의 영향력은 있을지언정 그들이 안라국/금관국에 완전히 예속된 상태였다는 것을 나타낼 만한 하등의 사료나 고고자료가 없다. 따라서 포상팔국의 亂이라는 표현은 옳지 못하며, 차라리 표현한다면 포상팔국과 안라의 전쟁, 줄여서는 포상팔국 전쟁 정도로 불러야 함이 옳겠다. 다만 포상팔국의 난이라는 표현은 수십 년간 계속해서 쓰여져 온 용어이고, 이 용어에 대한 근본적이고 타당한 비판이 가해진지는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 항목은 포상팔국의 난으로 하되, 올바른 역사상이나 사료, 내용을 전달해야할 일부 기술 포상팔국의 전쟁으로 쓰도록 한다.
이와 비슷하게 실수하는 것이 전기가야, 후기가야라는 용어이다. 가야사를 논할 때 습관적으로 전기가야, 후기가야로 구분하는데, 이를테면 전기가야는 금관국이 주도, 후기가야는 반파국이 주도했다는 식으로 인식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그런데 이러한 인식은 매우 위험한데, 이러한 인식 자체가 결과적으로 보면 꼭 틀린 것까지는 아니지만,[8] 어디까지나 고고학적, 역사적으로 복원된 사상에 대한 결과론적인 서술일 뿐이라는 걸 명심할 필요가 있다. 즉, 전후기 가야 구분은 문헌사료나 고고자료에 대한 사학자와 고고학자의 통찰의 결과로 결과론적으로 제시된 용어일 뿐이며, 당연히 당대에는 가야를 전과 후로 칼로 자르듯 나누는 그런 식의 인식이 없었다는 것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당장 이 문서만 봐도 포상팔국이 전기 가야를 깨트리려고 했다 등의 마치 전기 가야라는 존재가 실제 역사상의 실체처럼 묘사된 부분이 있다. 당연히 이러한 기술은 당대 현실과 동떨어진 기술이므로 삼가야 한다.
4. 포상팔국이 공격한 대상은 어디인가?
위에서 보다시피 삼국사기 신라본기에서는 포상팔국의 공격을 받은 나라를 가야의 다른 표현 중 하나인 '가라국'이라고 표현했으며, 삼국사기 열전 물계자전에서는 안라의 다른 표현 중 하나인 '아라국'으로 적확하게 표현했다.[9]
사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서 '가라'라는 표현과 일본서기, 광개토대왕비 등에서 보이는 '임나'라는 표현은 금관국[10] 그 자체를 표현하기도 하지만, '여러 가야 혹은 그것을 포함한 지방'을 폭넓게 이르는 용법으로도 많이 쓰였다. 즉 김해의 가야라는 나라가 가장 잘 나가다보니 그 김해 가야국의 영향을 간접적으로 받는 한반도 남동부 지역 전체를 가야라고 부르게 됐다는 것이다. 나중에 고령군의 반로국/반파국이 잘나가자 그 '가야' 타이틀을 뺏어가게 되고 원조 가야국은 금관국, 남가라 같은 다른 이름으로 불리게 되고.
아무튼 삼국사기 본기에서는 가야라고 통칭되는 각기 다른 정치체들이 했던 행동을 모두 '가라'로 뭉뚱그려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대표적으로 대가야 멸망 기사를 전하는 562년의 기사로, '가라반(加羅反)'이라고 표현하고 있다는 점이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아마 삼국사기 신라본기 찬자는 이는 532년 '加羅'가 항복했는데 다시 가라가 멸망하다니? 그렇다면 가라가 반란을 일으킨 것이로구나고 단정한 경우이다. 이러한 오해가 벌어지는 이유는 삼국시대에서 거의 1천 년이 지난 먼 훗날인 고려시대의 삼국사기 신라본기 찬자가 가라와 임나의 이러한 애매한 용법차이를 자세히 몰랐던 데서 기인한다.
하지만 삼국사기 본기와 달리 삼국사기 열전 편찬자는 각 인물의 전기, 구전을 정리하면서 각각의 정치체를 정확하게 기재하는 것이 특징이다. 앞서 예를 든 532년 가라 항복 기사에서는 그 항복 주체가 금관국임을, 562년 대가야 멸망기사에서는 대가야국임을 적시하고 있는 것에서도 이를 잘 알 수 있다.
삼국사기에서 이러한 차이가 생기는 이유는 본기와 열전의 편찬자가 다른 것 외에도, 편찬 목적이 달랐기 때문이다. 본기의 경우 역사를 전체적으로 정리하는 데 목적이 있다. 당시의 편찬자들이 과거부터 전해지던 각종 사서에 나타나는 정치체 및 이름들을 나름의 기준으로 정리할 필요가 있었지만, 열전의 경우는 한 인물의 일대기를 정리고 전달하는 것에 목적이 있기 때문에 굳이 시대흐름을 나름 깔끔하게 정리할 필요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오히려 과거의 구전을 잘 정리하여 그대로 전달하는 것이 열전의 목적에 부합한다.
무엇보다 이런 인식차이가 발생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삼국사기 본기의 편찬자들은 당시까지 내려오던 사서와 금석문, 각지의 구전을 나름대로 판단하여 가야 지역에 존재했던 여러 나라들을 마치 백제나 신라 같은 다른 나라들처럼 하나의 덩어리처럼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다. 앞서 설명한 대로 가야 및 임나라는 표현은 금관국을 표현하기도, 대가야를 표현하기도, 어떤 경우는 광의의 가야지역 전체를 이르기도 한다. 그렇지만 고려시대 당시만 해도 국명 하나에 당연히 1국가였던 시대였으므로 당시의 사관들은 이러한 여러 옛날 기록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러한 용어의 차이에 대해 나름대로 고심은 많이한 흔적이 삼국사기 곳곳에 보이는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일 것이지만, 결국 본기의 편찬자들은 여러 가야들의 행위를 '하나의 가야'였던 것처럼 편찬해버리고 말았다.[11]
위와 같은 사료비판 과정을 거치면 포상팔국의 공격을 받은 주체는 안라국일 가능서이 높다. 이는 고고학 자료와도 부합하는데 포상팔국이 금관국이 주도하는 질서에 반기를 일으킨 것이라면, 고고학 자료로서도 금관국의 퇴조가 명확히 보여야하겠지만, 오히려 3~4세기 금관국 자료는 아직 전성기 그 자체라서 그렇다고 반영하기 어렵다. 반대로 안라국은 4세기대 전성기를 지나면서 5세기대 그 권역이 축소되는 양상을 보이기 때문에 어느정도 관련있는 분포정형을 보인다.
다만 이는 포상팔국 전쟁이란 사건이 4세기에 있었다고 가정할 때이다. 물론 안라국 양식 토기 분포정형의 퇴조는 4세기 말 정도에나 나타나기 때문에 시간적으로 완벽하게 부합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포상팔국 전쟁이 4세기 전반대에 일어났다고 단정할 이유는 없으며 4세기 말 5세기 초에 일어난 전쟁으로도 판단할 수 있다. 또 발발연도가 4세기 전반대라 하더라도 이때 위협받은 안라국의 리더십, 그리고 이때 부상한 고차국의 면모가 4세기 말 5세기 초의 고고자료의 골든 크로스로 이어질 수 있다고 판단할 수 있다. 고고자료는 그 시대를 정확하게 반영하기도 하지만 우리가 판단하는 고고자료에서 관찰되는 '징후'들은 결과론적이기 때문에 진짜 사건은 앞에 일어났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물론 그렇다고해서 고고자료로 볼 때 안라국이 공격받은 주체라는 것이 확실하다는 것은 아니다. 안라국보다는 금관국이 낙동강 동쪽 신라에서 훨씬 가깝기 때문에, 위기에 빠져 신라에 지원을 요청하고 신라가 구원군을 파병하는 상황을 봐서 금관국이 공격받았다는 해석이 자연스럽다는 정황상 해석도 존재한다. 만약 고고자료의 분포정형이 이 전쟁의 원인과 결과를 어느정도 반영한다면 '''금관국보다는 안라국과 관련이 높을 것이라는 의견으로 참고만 하면 된다''' 애초에 이 문제는 기적적으로 결정적인 근거가 나오지 않는 이상 100% 단언은 영원히 불가능할 가능성이 높다.
소수설로 안라와 가라(김해 금관국) 둘 다 맞는다고, 두 나라 모두 엮였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5. 발발 연도
十四年秋七月 浦上八國謀侵加羅 加羅王子來請救 王命太子于老與伊伐飡利音 將六部兵往救之 擊殺八國將軍 奪所虜六千人 還之
14년, 가을 7월에 포상의 여덟 나라가 가라(加羅)를 침범하려고 하였으므로 가라 왕자가 와서 구원을 요청하였다. 왕이 태자 우로(于老)와 이벌찬 이음(利音)에게 명하여 6부의 군사를 이끌고 가서 구원하여, 여덟 나라의 장군을 공격하여 죽이고 포로가 되었던 6천 명을 빼앗아 돌려주었다.
八浦上國同謀伐阿羅國阿羅使來請救尼師今使王孫股音率近郡及六部軍往救遂敗八國兵...三年骨浦柒浦古史浦三國人來攻竭火城王率兵出救大敗三國之師
(중략)이때에 포상팔국이 함께 모의하고 아라국을 침입하므로 아라가 사신을 보내 구원을 청하였다. 이사금이 왕손 내음(股音)으로 하여금 가까운 군(郡)과 6부의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구원케 하니, 드디어 팔국병이 패하였다. (중략) 그 뒤 3년에 골포ㆍ칠포ㆍ고사포의 3국인이 와서 갈화성을 공격하니 왕이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 구원하여 삼국의 군사가 대패하였다.
'''《삼국사기》권5 물계자전'''
삼국사기 나해 이사금편에선 재위 14년, 물계자전엔 재위 17년에 벌어진 일로 기록되어 있어서 같은 책인데도 년도차이가 3년이 난다. 삼국사기의 기년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209년 7월에 벌어져서 212년까지 지속된 것으로 볼 수 있지만 이 기년과 가장 가까운 당대 기록인 《삼국지》위지 동이전에는 포상팔국의 국명이 고자국[12] 을 제외하면 나타나지 않고 고고학 자료와도 일치하지 않아 실제로 이 시기에 발생한 사건인지, 좀 더 후대에 벌어진 일이라면 언제 일어난 일인지 설이 분분하다.第十奈解王卽位十七年壬辰保羅國古自國【今固城】史勿國【今泗州】伐等率兵拒之八國皆降勿稽子軍功第一
제10대 나해왕 즉위 17년 임진에 보라국ㆍ고자국【지금의 고성이다.】ㆍ사물국【지금의 사천이다.】등의 팔국이 힘을 합하여 변경을 침략하므로 왕이 태자 이음과 장군 일벌 등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이를 막게 하니, 팔국이 모두 항복하였다. 이때에 물계자의 군공이 으뜸이었다.
'''《삼국유사》제8 피은 물계자전'''
또한 나해 이사금 기사에서는 공격을 받은 국가가 가라로 적혀 있고 물계자전에서는 아라로 적혀 있어 금관국과 안라국 중 어느 국가가 공격을 당했는지에 대해서도 의견이 통일되지 않고 있지만, 위에서의 엄밀한 사료비판을 통해서 안라국이 공격받은 주체라는 것이 어느정도 명확해졌다.
삼국사기 초기 기록은 고구려, 백제를 막론하고 3국 모두 외국 사서나 고고학과 일치하지 않고 연대가 불분명한 문제가 발견되는데, 이 문서에서 일일이 설명하기 힘들 정도로 학계에서 여러가지 해석이 있다. 그중 한 설은 신라가 여러 명의 왕이 병립하는 체제였는데, 6세기대 진흥왕대이 중국 남조에 견사하면서 왕계를 정리하여 남조에 바쳤는데, 이때 이 왕계를 편집할 때 병존한 왕들이 대대로 세습된 것처럼 정리해버렸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여러명의 왕들을 하나의 계보로 편집하면서 신라의 역사도 엄청나게 늘어나 버린 셈이다. 그래서 한 인물이 200년에 걸쳐서 활동하고 승진하고 사망하는 말도 안 되는 일들이 삼국사기에서는 벌어지는 것인데, 당시 편찬자들도 바보는 아니어서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당시 고려시대에 전해지던 기록들이 다 이런 식이니... 사관이 고민한 흔적들이 삼국사기 곳곳에서 관찰된다. 물론 이 외에도 역사가 구전되면서 실전되거나 착오를 일으키거나 혹은 편집 과정에서의 실수, 고의로 누락시키는 행위가 있었을 것이며, 최종적으로 김부식을 위시한 삼국사기 편찬자들의 사료의 취합, 선택, 수정이 가해지면서 남은 것이 현재의 삼국사기라는 점을 명확히 인식하고 삼국사기 초기기록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
포상팔국 전쟁도 연대가 전혀 안 맞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석우로의 활동 내용으로 봤을 때나 4세기대 신라의 고고학적 자료로 봤을 때 그 활동시기는 아무리 빨리 잡아도 4세기 이전으로 소급시키기는 어렵다. 또 석우로는 일본서기에도 나오는 인물[13] 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교차검증이 가능한데, 석우로와 관련된 기록들은 신공기 49년조보다 앞에 배치되어 있다. 만약 신공황후기를 주체교체론적 입장에서 전향적으로 받아들이는 입장을 취한다면 석우로의 활동시기는 4세기 중후엽을 하한으로 할 것이다. 따라서 포상팔국 전쟁은 아마도 4세기 전반, 혹은 중엽에나 발발했을 전쟁일 것이다.
이는 당시 신라, 안라 등의 여러 정치체들의 고고학 자료로 볼 때도 어느 정도 부합된다.
- 4세기는 영남지역에서 고식도질토기가 발생하고 유통되었을 시기이며 대형목곽묘가 축조되는 등 사회적으로도 영속 엘리트 계층이 등장했을 시점이다. 즉 이전 시기의 엘리트 계층, 특수 엘리트 계층을 넘어 영속적으로 권력과 재화를 차지하고 분배하는 지도자의 위치를 점유하는 계층, 즉 초기 왕권이 등장하는 시기이다.
- 또한 이 시기엔 금관국, 안라국을 포함한 포상팔국이 연계되어 있던 전통적인 중국-낙랑-마한-남해안-왜 관계망이 심대한 타격을 받던 시기이기도 하다. 당당 313년, 314년 낙랑 대방군이 고구려에 의해 멸망당했으며, 계속해서 무역에 종산하던 한인집단도 370년 백제 근초고왕의 활약으로 모두 기능을 상실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신라가 사로 6부의 군사 뿐만 아니라 주변 군현의 병사들을 동원하였다는 기술이다. 신라고고학의 성과에 따르면 4세기 중후엽 신라는 나름대로의 토기양식을 완성시키고 북방의 금공위세품 및 마구류, 무기류들을 빠르게 받아들이면서 주변으로 팽창하고 있을 시기이기이다. 따라서 신라가 주변 군현의 병사까지 동원할 수 있는 역량은 빨라도 4세기 전반 이전으로는 소급되지 못한다. 따라서 신라가 주변 군현을 동원하였다는 기사가 사실을 전하고 있는 것이라면, 그러한 역량이 갖춰진 시기는 빨라도 4세기 전엽이므로 포상팔국 전쟁도 4세기 이전으로는 소급되기는 어렵다.
이상을 종합하면 포상팔국 전쟁은 4세기 전반, 혹은 중엽에 벌어진 전쟁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늦게는 5세기의 사건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고성 송학동 고분군이나 김해 대성동 고분군의 고고학적 결과에 주목한 주장들인데 소수설에 그치고 있다.
6. 전쟁 발발의 원인
이렇게 보면 포상팔국과 안라, 신라 무려 10개국이 얽힌 국제전이었으나 그 원인은 분명하지 않다는 점이 문제이다.
금관국이 경쟁국인던 안라국을 배제시키기 위해 포상팔국을 사주했다거나, 아니면 안라국이 전기가야의 맹주이던 금관국의 세력 약화를 위해 인접국을 사주하여 전쟁을 일으켰다는 주장이 있었으나, 이는 별다른 근거가 없는 주장이다. 이는 근거가 없던 시절 성립한 가야연맹체론에 입각한 2차적인 추정일 뿐이며, 가야연맹체론 자체가 학계에서 거의 폐기된 학설인만큼 거기에 기반한 2차적인 추정도 아무런 기반이 없다.
다만 역사고고학적으로 어느 정도 이 전쟁의 발생원인을 추정해볼 수는 있다.
포상팔국으로 추정되는 국가들의 대부분은 현재의 경상남도 고성, 사천 등 경남 서부 남해안의 해안가에 위치한 나라들이다. 3~4세기대 이 지역 고분에서는 함안양식토기, 즉 안라국 양식의 토기들이 출토되고 있다. 당시 도질토기가 가진 위상을 생각한다면 이 지역은 안라국의 강한 영향 아래에 놓여있었던 셈이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대로 4세기 전엽 국제 정세는 심각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특히 포상팔국은 낙랑-대방을 중심으로 하여 중국-한반도-일본열도 해상교역망 속에 연계되어 있었는데[14] , 3세기 말부터 시작된 군현의 약화와 고구려의 성장, 그리고 군현의 멸망은 이 교역망에 참가하고 있던 포상팔국과 안라국에게 심대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특히 이 지역은 안라국의 관계망 속에 속하고 있었으므로, 이때 발생한 모종의 체계의 불안과 균형의 흔들림은 자연스럽게 안라국에게로 향했을 것으로 쉬이 유추할 수 있다.
즉, 3세기 말~4세기대의 해상교역을 중심으로 한 국제교역망과 질서의 붕괴로 인해 포상팔국 지역에 미치고 있던 안라국의 리더십이 크게 금이 갔고, 이것이 포상팔국이 안라국을 공격하는 사건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이외에도 백승옥, 남재우 교수는 해상교역보다는 농경지 확보에 중점을 둬 포상팔국이 농경지 확보를 위해 내륙으로 진출하려는 과정에서 벌인 전쟁이라는 견해를 밝히기도 했다.
7. 전개
7.1. 포상팔국의 안라국 침공
원 사서에 '포상팔국(浦上八國)'이라고 기록될 정도로 이 나라들이 물가에 위치하면서 해상 및 수로 교역을 기반으로 했다는건 당대에도 명확하게 인식되었다.
앞서 말한대로 포상팔국은 안라국의 주도하에 중국-낙랑-대방-마한-변한- 왜로 이어지는 교역망에 참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교역망과 국제질서가 흔들리면서 안라국과 모종의 마찰을 겪거나 불만이 누적되었을 것으로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그동안 자국내에 축적된 정치, 사회적 역량이 충분히 신장하였고, 수로를 통해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던 포상팔국은 마침내 결의하여 안라국을 공격하기로 한다[15]
3~4세기 안라국의 위상이 당대 최강국으로 보이는 금관국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였다지만, 8:1의 다구리에는 장사가 없는지 결국 신라에 도움을 청한다.
7.2. 안라국은 왜 신라에 구원을 요청했는가?
그런데 구원을 왜 하필 낙동강 건너에 위치한 신라에 요청했을까? 이것 또한 당시 역사 고고학적 정황을 잘 살펴보면 쉬이 이해할 수 있다.
3세기 말~4세기 전반대에 신라는 위에서 말한 국제 교역망과 질서의 변동의 혜택을 잘 받은 케이스로 동해안 교역로를 통해서 북방-고구려-옥저-동해안 진한소국 - 신라로 이어지는 교역망에 참가하고 있었다. 즉, 금관국, 안라국, 포상팔국과는 다르게 동북아시아에서 떠오르는 강자 고구려 관계망에 속해있었던 것이다. 물론 이 교역망은 갑자기 생긴 것은 아니고, 자연적으로 신석기시대부터 문물이 오가던 전통적인 교역로였으며, 정치적인 이유로 인해 서남해안을 통한 교역이 위협을 받자 상대적으로 부각되고 있었다. 물론 이 교역로의 신장에는 여기에 참가하는 사로국을 포함한 진한 소국들의 경제력 신장, 무엇보다 북방의 고구려의 강성도 크게 작용하였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이렇게 보면 신라에서 4세기 중반을 전후하여 나타나는 북방의 황금문화와 고구려계 무기와 장신구들은 모두 고구려를 통해서 들어온 문화로 볼 수 있다.
이처럼 신라는 기존 질서에서 큰 힘을 발휘하던 금관국, 안라국에 비해 유리한 입장에 서 있었다. 따라서 포상팔국 전쟁 당시 경주 분지 내의 사로 6촌 뿐만 아니라 주변 지역을 병합해나간 상태로 그야말로 영남지역의 떠오르는 강자라 볼 수 있었다.
이에 반해 변한지역의 전통적인 강국 금관국은 안라국과 마찬가지로 리더십이 흔들리는 상태였다고 볼 수 있다. 금관국이야말로 해상교역로의 가장 큰 혜택을 받아 성장한 나라기 때문에 이는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금관국이 커다란 위기에 빠지지 않은 것은 금관국은 낙동강이라는 상대적으로 커다란 내륙 수운로를 통해서 진변한 각국의 교환망을 주도하고 있었고, 일본과도 바로 해로로 연결된다는 이점으로 어느 정도 상황이 변화함에도 버틸 수 있었기 때문이다.[16]
게다가 금관국과 안라국이 서로 인접하면서 경쟁하던 국가였음을 상기시켜 본다면, 금관국은 도와줄 형편이 되지 못했거나, 방조했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 이 때문에 멸망 위기에 놓인 안라국은 신라에 구원을 요청했던 것이다.
7.3. 신라의 구원성공과 포상팔국의 반격
마침내 석우로가 석리음, 물계자등의 부장과 함께 신라 6부의 군사, 그리고 주변 군현지역의 군사를 거느리고 안라국을 구원하는데, 본기와 물계자전, 석우로전의 기록대로 신라는 포상팔국의 군대를 패배시킴으로써 안라 구원에 성공한다.
이 전투가 어디서 벌어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정황상 안라국이거나 그 인근에서 벌어졌을 확률이 높다. 단순히 '패배'라고만 기록하고 있어 '대패'했다는 후속 전투보다는 그 피해가 적었음을 쉬이 유추할 수 있다. 이러한 결과로 고차국 등 포상팔국 중 대부분은 비록 안라-신라 연합군에 패배했지만 심대한 타격을 입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신라군의 구원은 육로보다는 해상으로 이루어 졌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인다. 육로로 함안까지 구원하기에는 상당힌 거리이며, 그 사이의 있는 여러 정치체의 협조를 구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3년 뒤 포상팔국 중 3국이 해상을 통해서 신라의 관문인 울산을 공격하는 것에서 현실화된다. 반대로 말하면, 신라의 남해안 지역 진출 루트 중 하나가 바로 울산이었던 셈으로, 이곳을 통해서 안라국 구원도 행해졌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아무튼 신라의 구원으로 일단락 되었다. 그러나 포상팔국 병사가 패배했다고만 전할 뿐이며 별다른 후속조치가 행해지지는 않았다. 아마도 신라는 안라 구원에 의의를 두었고, 다른 국가들을 병합하거나 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역사고고학적으로 보았을 때 신라가 이러한 역량을 갖추려면 5세기는 되어야 한다.
이러한 결과로 전쟁은 봉합되었으나, 완벽하게 뿌리를 자르지는 못했으며, 3년 뒤 포상팔국 중 골포국, 칠포국, 고사포국 3개의 나라가 신라에 반격을 가한다.
경주의 동남쪽인 갈화성, 즉 지금의 울산에서 전투가 벌어진다. 갈화성은 신라가 남해안 지방에 해상으로 힘을 투사하는 교두보이며, 반대로 말하면 신라국의 해상관문이기도 했다. 따라서 삼국의 군대가 해상을 통해서 이곳을 침공한 것은 3년 전 신라의 안라구원과 같은 일이 다시 반복되지 않도록 신라를 먼저 제압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신라왕이 직접 나와 응전하면서 삼국의 병사는 '대패'하고 만다. 당연히 안라의 후원국인 신라를 제압하지 못하면서 안라에 대한 도전도 포기하게 되면서 전쟁은 완전히 끝나게 된다.
8. 결과
국제정세의 변화로 리더십이 흔들리고 있던 안라는 신라의 구원을 통해서 일정기간 세력을 유지하고, 만약 이 전쟁이 4세기 중엽의 사건이라고 했을 때, 안라국(함안) 특유의 토기인 화염문투창고배가 이 무렵부터 주변 지역에서도 출토되고 있어 그 세가 좀 더 커졌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고성, 사천, 마산, 창원, 칠포를 비롯한 포상팔국 지역 대부분이 계속해서 안라국의 토기문화에 속하고 있다는 점에서 고고학적으로도 안라의 지속적인 우위가 확인된다.
그리고 이 전쟁은 당시 흔들리는 국제정세 속에서 영남의 진변한 각국이 얼마나 요동치고 있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바꾸어 말하면 남해안까지 군사력을 보낼 수 있고 변한 소국 8개 나라와 8:1로 맞짱을 뜰 정도로 신라의 국력이 신장했음을 결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으로 평가할 수 있겠다. 안라국이 일방적으로 당하고, 금관국이 방조하거나 별 힘을 못 쓴 것과 아주 대비되는 부분이다.
당시 동북아시아의 국제정세는 고구려 vs 낙랑에서 고구려 vs 백제로 전환되고 있었으며 물밑에서 전개되는 외교전도 치열했는데, 고구려의 파트너인 신라가 포상팔국 전쟁을 성공적으로 매조지음으로써 한반도에서의 정세는 일시적으로 고구려-신라의 우세로 쏠리게 되는 결과를 초래한다. 다만, 369년 백제 근초고왕이 가라 7국을 평정[17] 하고 종국적으로는 고구려왕마저도 참살하면서 백제 우위로 쏠렸다가 다시 4세기 말 광개토대왕의 등장으로 백제쪽 세력이 수세에 몰리게된다. 이때 신라에 힘겹게 저항하고 있던 금관국은 신라를 아주 멸망시키기 위해 왜-가야 연합군을 편성한여 신라를 공격했지만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직접 구원함으로써 심대한 타격을 입고 쇠퇴해버린다.
그러면서 포상팔국 전쟁의 일원이었던 고차국이 금관국을 대신하여 새로운 강자로 떠오른다. 아마도 고차국을 비롯한 포상팔국은 신라와의 전쟁에서 그렇게 심대한 타격을 받지 않았던 것을 알 수 있다. 고차국은 5세기 전반대에는 상당힌 영역권을 자랑하며 가야의 강국이 되며, 결국 안라국이 주도하던 질서를 벗어나 독자적인 질서를 세우게 된다.
금관국이 공격을 받았다고 가정한다면 이 사건을 계기로 금관국이 중심이 되어 있었던 전기가야연맹이 사실상 와해되는 결과를 맞았다고 보고 있다. 물론 전기가야연맹은 이후에도 버티긴 하지만 금관국의 힘은 약화가 되었고 이후 4세기 초 낙랑군, 대방군의 멸망 이후 그 약화는 더 가속화가 된다. 결국 광개토대왕 시기에 이르면 왜, 백제와 손을 잡게 되고, 고구려에 맞서 신라를 공격하다 광개토대왕의 5만 기병 원정군에 의해 전기가야연맹은 해체하기에 이른다. 물론 해당 학설에 대해서 고고학적으로 반문이 되는 사례가 나오고 있기도 하다.
[1] 마지막 전투는 현 울산광역시에서 발발했다.[2] 일단은 안라국이 자신들과 관련 있던(그것이 지배인지 협력인지는 불분명하나) 포상8국으로부터 어떤 이유로 신뢰를 잃었고 그 결과 벌어진 전쟁이라고 보고 있다.[3] 포상8국이 공격한 대상이 안라국이 아닌 금관국이란 주장도 있다. 아래 '포상팔국이 공격한 대상은 어디인가?' 단락 참조.[4] 확인된 국가는 골포국, 칠포국, 고차국, 사물국, 고사포국 이상 5개국.[5] 해당 이미지에는 안라국에 대한 공격이 빠져있다.
전쟁 주체 및 당시의 세력권에 대해서 참고만 하자.[6] 엄연히 삼국지에서는 한반도 동남부의 철재와 같은 물산을 한반도 서북부 중국 한사군 군현까지 사고팔았다고 하고 있으며 한사군과 교역했던 건 고고학적으로도 밝혀진만큼, 그 물길의 중간쯤에 있는 전남 해안지역이 이해관계가 전혀 없다고 단정하기는 힘들다.[7] 포상팔국 전쟁 이후 이들의 결정적인 쇠퇴는 400년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남정으로 추정되고 있다. 남정이 쇠퇴의 결정적인 원인이 아니라는 설도 있지만, 어쨌든 그를 전후한 시기부터 낙동강 하류 세력이 쇠퇴하고 상류 내륙의 고령 반파국으로 가야세계의 주도권이 확실히 넘어가게 된다.[8] 경북대학교 주보돈 교수 등 아예 전후기가야 구분 자체를 부정하는 학자도 있다.[9] 금관국설이 우세하던 과거에는 이 삼국사기 물계자열전의 '아라'를 가라를 한자를 잘못 적은 것으로 보았다. 정약용 등.[10] 금관국이 쇠퇴하고 반파국이 떠오른 5~6세기 기록에는 수식어 없이 가야, 임나라고 하면 주로 반파국을 의미한다.[11] 이러한 인식은 의외로 최근까지 내려왔는데, 지금 국사교과서의 서술도 이러한 인식을 반영한다. 마치 가야가 하나의 목적 및 실체인 연맹체였던 것처럼 기술되고 있는 형편인데 빨리 이러한 기술 방법은 고쳐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3국'시대가 아닌 4국이 있었다는 사국시대설도 문득 보면 뭔가 새로운 이야기처럼 보였지만 섣불리 가야를 한 덩어리로 간주, 착각한 낡은 인식에 기반한 이야기였기도 하다.[12] 위지 동이전에 변진고자미동국(弁辰古資彌凍國)이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다.[13] 아이러니하게도 신라왕으로 등장하고 있다. 옛날에는 일본서기의 윤색과 과장으로 봤지만 요즘에는 꼭 그렇게 볼 필요가 없다는 것이 중론이다. 실제 석우로는 여러 명의 왕(간) 중에 한명이었고, 일본과의 외교에서 자신이 실수에 책임을 스스로건, 타의건간에 져야했을 처지였을 것이다. 다만 신라 후대,의 편집 과정에서 석우로는 모종의 이유로 왕이 아닌 것처럼 묘사된 것일 것이다[14] 이 시기 선진 문물이 해안선을 따라서 나타나고 있는 것이 그를 잘 반영한다. 한반도 동남쪽에 짱박힌 금관국이 가장 선진적인 문물을 흡수할 수 있었던 것도 해상교역 집단, 그 중에서도 일본과 한반도를 경유하는 결절지였기 때문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포상팔국 중 일원인 사천의 사물국 근방에는 늑도 유적이라고 기원전후한 시기 낙랑계열의 해상교역 기지 유적이 위치했었다. 물론 늑도 유적의 시기는 기원전후에서 1~2세기로 약간의 차이는 있다[15] 내륙인 함안에 위치한 안라국과 국제교역과 무슨 상관인가 싶겠지만, 안라국은 함안분지는 물론, 진동만, 창원, 마산 일대까지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다. 지금의 함안분지만 생각하면 안된다. 이렇게 보면 4세기 안라국이 지형상의 난점을 극복하고 여러 지역을 점유했음을 알 수 있어 금관국과 나란히 했다는 그 국력을 짐작케한다.[16] 여기서 주의해야될 것이 있다. 본문에서 기술하는 해상교역로는 313년, 314년 고구려의 낙랑, 대방 병합으로 갑자기 단절되는 것이 아니다. 해상교역로의 기점이 결국은 중국대륙이라는 점을 상기시켜볼 때 이 교역로는 중국의 정세에 커다란 영향을 받아왔다. 이 교역로는 한이 강성하던 시기인 1~2세기대 절정에 달했으며 이는 한반도 남부지역 고고학 자료로도 증명된다. 다만 2세기 후반을 후한 말기의 혼란이 가중되면서 중국대륙 뿐만 아니라 낙랑-대방군의 통제력도 심각하게 유실되었으며 이는 교역망의 약화로 드러난다. 이때 통제력이 약해지면서 한반도 남부 각지에 여러 소국들이 성장했고, 3세기 전엽 요동지역의 공손씨 세력이 대방군을 설치하면서 군현의 통제력이 다시 강해지지만, 3세기 말이 되면 고구려의 성장과 무관하게 군현 세력은 한반도 남부 마한 집단의 공격을 여러 차례 받는 등 심각하게 약해져 있었다. 이 교역망은 고구려에 의해 낙랑-대방이 멸망하는 4세기 중반대까지 명맥을 유지하다가 백제 근초고왕의 공격으로 이 지역 중국계 집단이 소멸하면서 마침내 끝난다.[17] 군사적으로 정벌해 완전히 수직적인 관계를 맺은 게 아니라 평정, 즉 동맹이나 형제관계를 체결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성왕시기 때 이 시절의 국제정세를 회고하는 사비회의 기록에서도 가야와 백제가 형제의 관계였다고 말하고 있다.
전쟁 주체 및 당시의 세력권에 대해서 참고만 하자.[6] 엄연히 삼국지에서는 한반도 동남부의 철재와 같은 물산을 한반도 서북부 중국 한사군 군현까지 사고팔았다고 하고 있으며 한사군과 교역했던 건 고고학적으로도 밝혀진만큼, 그 물길의 중간쯤에 있는 전남 해안지역이 이해관계가 전혀 없다고 단정하기는 힘들다.[7] 포상팔국 전쟁 이후 이들의 결정적인 쇠퇴는 400년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남정으로 추정되고 있다. 남정이 쇠퇴의 결정적인 원인이 아니라는 설도 있지만, 어쨌든 그를 전후한 시기부터 낙동강 하류 세력이 쇠퇴하고 상류 내륙의 고령 반파국으로 가야세계의 주도권이 확실히 넘어가게 된다.[8] 경북대학교 주보돈 교수 등 아예 전후기가야 구분 자체를 부정하는 학자도 있다.[9] 금관국설이 우세하던 과거에는 이 삼국사기 물계자열전의 '아라'를 가라를 한자를 잘못 적은 것으로 보았다. 정약용 등.[10] 금관국이 쇠퇴하고 반파국이 떠오른 5~6세기 기록에는 수식어 없이 가야, 임나라고 하면 주로 반파국을 의미한다.[11] 이러한 인식은 의외로 최근까지 내려왔는데, 지금 국사교과서의 서술도 이러한 인식을 반영한다. 마치 가야가 하나의 목적 및 실체인 연맹체였던 것처럼 기술되고 있는 형편인데 빨리 이러한 기술 방법은 고쳐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3국'시대가 아닌 4국이 있었다는 사국시대설도 문득 보면 뭔가 새로운 이야기처럼 보였지만 섣불리 가야를 한 덩어리로 간주, 착각한 낡은 인식에 기반한 이야기였기도 하다.[12] 위지 동이전에 변진고자미동국(弁辰古資彌凍國)이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다.[13] 아이러니하게도 신라왕으로 등장하고 있다. 옛날에는 일본서기의 윤색과 과장으로 봤지만 요즘에는 꼭 그렇게 볼 필요가 없다는 것이 중론이다. 실제 석우로는 여러 명의 왕(간) 중에 한명이었고, 일본과의 외교에서 자신이 실수에 책임을 스스로건, 타의건간에 져야했을 처지였을 것이다. 다만 신라 후대,의 편집 과정에서 석우로는 모종의 이유로 왕이 아닌 것처럼 묘사된 것일 것이다[14] 이 시기 선진 문물이 해안선을 따라서 나타나고 있는 것이 그를 잘 반영한다. 한반도 동남쪽에 짱박힌 금관국이 가장 선진적인 문물을 흡수할 수 있었던 것도 해상교역 집단, 그 중에서도 일본과 한반도를 경유하는 결절지였기 때문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포상팔국 중 일원인 사천의 사물국 근방에는 늑도 유적이라고 기원전후한 시기 낙랑계열의 해상교역 기지 유적이 위치했었다. 물론 늑도 유적의 시기는 기원전후에서 1~2세기로 약간의 차이는 있다[15] 내륙인 함안에 위치한 안라국과 국제교역과 무슨 상관인가 싶겠지만, 안라국은 함안분지는 물론, 진동만, 창원, 마산 일대까지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다. 지금의 함안분지만 생각하면 안된다. 이렇게 보면 4세기 안라국이 지형상의 난점을 극복하고 여러 지역을 점유했음을 알 수 있어 금관국과 나란히 했다는 그 국력을 짐작케한다.[16] 여기서 주의해야될 것이 있다. 본문에서 기술하는 해상교역로는 313년, 314년 고구려의 낙랑, 대방 병합으로 갑자기 단절되는 것이 아니다. 해상교역로의 기점이 결국은 중국대륙이라는 점을 상기시켜볼 때 이 교역로는 중국의 정세에 커다란 영향을 받아왔다. 이 교역로는 한이 강성하던 시기인 1~2세기대 절정에 달했으며 이는 한반도 남부지역 고고학 자료로도 증명된다. 다만 2세기 후반을 후한 말기의 혼란이 가중되면서 중국대륙 뿐만 아니라 낙랑-대방군의 통제력도 심각하게 유실되었으며 이는 교역망의 약화로 드러난다. 이때 통제력이 약해지면서 한반도 남부 각지에 여러 소국들이 성장했고, 3세기 전엽 요동지역의 공손씨 세력이 대방군을 설치하면서 군현의 통제력이 다시 강해지지만, 3세기 말이 되면 고구려의 성장과 무관하게 군현 세력은 한반도 남부 마한 집단의 공격을 여러 차례 받는 등 심각하게 약해져 있었다. 이 교역망은 고구려에 의해 낙랑-대방이 멸망하는 4세기 중반대까지 명맥을 유지하다가 백제 근초고왕의 공격으로 이 지역 중국계 집단이 소멸하면서 마침내 끝난다.[17] 군사적으로 정벌해 완전히 수직적인 관계를 맺은 게 아니라 평정, 즉 동맹이나 형제관계를 체결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성왕시기 때 이 시절의 국제정세를 회고하는 사비회의 기록에서도 가야와 백제가 형제의 관계였다고 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