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자국
1. 개요
古資國
원삼국시대 변한(경상도) 지역의 소국들 중 하나. 일명 소가야로 알려진 가야연맹의 일원이다. 지금의 경상남도 고성군에 있었다. 삼국지에 의하면 변한 시대부터 있었던 나라이며, 위치 비정에 논란이 없는 몇 안 되는 나라 중 하나다.
삼국시대 초중반 남부에 있었던 흔한 성읍국가 중 하나로 존재감이 낮지만, 남해 바다에 바로 맞닿은 위치에서 고고학적으로 보면 멀리는 북쪽으로는 영산강 유역을 넘어 서울 풍납토성이나 청주시 지역까지, 남쪽으로는 고령 대가야는 문물을 교환하지 않았던 신라나, 심지어 일본 북규슈까지 넓은 수많은 지역에서 고성계 유물이 출토되고 있다. 마치 고대 한국의 베네치아와 같은 작지만 활발한 상업국가였던 것이다. 옆동네 사천시 소속 작은 섬 늑도가 가야 이전 초기 철기시대에 남해안의 국제 무역거점 중심지였던 것이 고고학적으로 밝혀졌는데 비교적 가까운 고성군의 이 나라와의 연관성도 연구 대상이다.
다만 특별히 주변지역보다 우세한 수장층 고분이 잘 관찰되지 않아 확실한 중심지가 없고[1] 고만고만한 중소세력들이 고성계 소가야 양식을 공유하면서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신라의 중심지 경주나 대가야와 거리가 비교적 멀었기 때문에 오랫동안 자체 세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2. 국명 명칭
가야연맹의 6개국 중 소가야(小伽倻)로 알려져 있지만, XX가야란 이름은 먼 훗날 고려시대에 대충 그 동네에 있었던 소국들에 일괄적으로 붙인 이름으로, 정작 이 나라가 존재하던 시절에는 소가야라는 이름을 전혀 쓰지 않았다. 다만 다른 가야지역과 달리 고자가야 같은 이름도 아닌 작은(小) 가야라는 이름이 붙은 점에서 후반기 가야의 강국이었던 고령 대가야와 대칭이 되기 때문에, 고령세력과 모종의 특별한 관계가 있지 않았나 하는 연구도 있다.
중국의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는 고자미동국(古資彌凍國), 그 외에 고사포국(古史浦國), 고차국(古差國), 한자가 다른 고자국(古自國), 구차국(久嵯國) 등 여러가지 표기가 있다. 이렇게 표기는 제각각이지만 모두 표기상의 차이일 뿐 같은 나라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며, 삼한 소국들 대부분이 그렇듯 지금은 정확히 알 수 없는 어떤 당시의 고유어를 여러가지 한자로 음차한 이름으로 보인다. '고자'의 '고(固)'는 우리말 '곶(串)'의 음차이며 '자'(재, 잣)는 '성(城)'이나 나라를 의미하는 고대 한국어 단어로, 신라 경덕왕 때 전국의 고유어 지명을 한화(漢化)하면서 '자'를 '성'으로 바꿔 오늘날의 '고성(固城)'이 되었다. 따라서 삼국시대 당시 고차국은 곶나라, 곶재, 곶자(?)로 불리었을 것이다. 이처럼 경덕왕대에 지명이 모두 중국식으로 바뀌기 전에는 순우리말 지명이 아주 많았다. 당장 소국 중에 사로국, 다벌국, 거칠산국, 빛벌(비사벌), 구야국 등등... 모두 자연 지형이나 동물 등의 우리 고유어와 관련있는 지명들이다. 미동(彌凍)은 지모밀지(枳募蜜地) 지내미지(知乃彌知) 고마미지(古馬彌知)등 미디(蜜地)[2] 와 같은 말이다. 미디(彌知)는 저(渚)와 대응하므로 물가, 고을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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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사진은 현재 고성 송학동 고분군, 동의동 고분군의 위치를 표시한 것이다. 지금이야 그 주변으로 넓은 평탄지가 형성되어 있지만, 삼국시대에는 이 평탄지가 모두 바다였다. 실제로 고성 송학동 1호분 위에 올라서면 송학동 고분군과 남쪽의 동외동 고분군을 회랑처럼 연결하는 일부 고지대를 빼고는 동서쪽으로는 굉장한 저지대이고, 서쪽에는 고성 도심지가, 동쪽으로는 농경지가 형성되어 있다. 이 도심지와 농경지는 15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벌어진 퇴적과 인간의 개간 및 간석 활동으로 생겨난 땅이다.
이런 점을 감안하고 보면, 정말 '곶의 나라', 즉 고자국이라고 불릴 만한 땅의 형세임을 알 수 있다. 참고로 고성 송학동 1호분의 경우 굉장히 거대한 고분이지만 모두 6세기 고분이고, 심지어 이 고분은 전방후원분일 가능성도 지적되기 때문에[3] 다른 고분과 크기를 단독으로 비교하는 것은 무리이다.[4] 나머지 고분에서는 고성의 동쪽 지역에 위치한 내산리 고분군과 별다른 우세를 찾기 어렵다. 따라서 고자국의 권력구조는 지금의 고성 시가지 쪽과 동쪽의 내산리 일대의 세력 등 최소 2개 세력의 연합체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3. 역사
설화에서는 말로왕이 이 나라를 건국했다고 한다. 말로는 금관국 초대 왕 수로왕과 함께 김해 구지봉에서 나온 6동자 중 제일 막내라고 기록되어 있다. 고성 김씨의 시조.
말로왕 이후 대아왕, 미추왕[5] , 소간왕, 아도왕, 질노왕, 거아왕, 달나왕, 이형왕 순으로 왕위가 이어졌다고 하는데, 출처가 고성 김씨 족보뿐이다. 족보는 위조의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역사 연구에서는 사용되지 않는다. 한편 말로왕과 이형왕 사이에 ‘현왕, 덕왕, 신왕, 정왕, 보국왕, 인왕, 중문왕’이라는 계승도 전해지는데, 출처는 알려져 있지 않다.
삼국유사 건국신화(1세기), 삼국지 기록(2세기)부터 6세기 가야멸망기 일본서기 기록까지 같은 이름으로 계속 등장하는 가야 속의 장수 국가 중 하나다. 2차 사비회의에는 왕이라 할 수 있는 한기가 직접 백제 사비성까지 행차해 참여했다. 그러나 백제와 신라 사이에서 위태로운 국제정세 끝에 6세기 중반 관산성전투 패배 후 사물국과 함께 멸망하면서 신라에 편입되었다.
3.1. 포상팔국의 난
209년(삼국사기의 연대이다.) 포상의 여덟 나라[6] 가 연합해서 경상도 지역에서 꽤나 잘 나가던 안라국 또는 금관국을 공격한 포상팔국의 난에도 참여했지만 신라의 명장 석우로와 날음(捺音)이 안라국을 도우러 참전해 신라군에 의해 대패했다.
3년 후 소가야,골포,칠포의 세 나라가 신라의 갈화성을 공격하지만 안라,가라,신라의 협공으로 대패한다.[7]
이 포상팔국의 난이 언제 일어났는가는 고대사의 뜨거운 감자이다. 삼국사기 기년이 정확하지 않기 때문인데, 이 대사건의 기년이 고정된다면 삼국사기 초기기록의 연대에 접근할 수 있는 하나의 실마리를 확보하는 셈이기 때문이다. 학계에서 여러 안이 제출되었지만 고고학적 발굴 성과와 그에 따른 가야에 대한 역사상이 성립되면서 1~2세기라고 설명하는 안들은 거의 폐기되었고, 보통 3세기 후엽이나 4세기 전반의 어느 시점에 일어났던 사건으로 판단되고 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고차국은 포상팔국의 난에서 신라에 대패함에도 불구하고 그다지 세력의 타격은 입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포상팔국의 난은 이름과는 다소 다르게 무려 10개 국가가 얽힌 전쟁이었고, 주 전장 또한 안라국과 신라였기 때문에 신라에 대패하더라도 별다른 타격을 입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고차국이 심대한 타격을 받아 이전 버전의 서술처럼 근근히 자기 권역내에 머물렀다면 포상팔국 전쟁의 패배 후유증으로 주저 앉아버린 것이겠지만, 실제 고고자료 양상은 완전히 정반대이기 때문이다.
4. 고고학으로 본 고자국
영남지역의 다른 정치체들이 그렇듯 고성 지역에서 4세기대까지는 자신들만의 토기 양식은 확인되지 않는다. 이 시기 내산리 고분군이나 고성 주변에서 발견되는 토기들은 모두 안라국의 중심지였던 함안 양식(=범영남 양식) 토기이다. 이는 고차국 등 경남 서부의 여러 나라들이 안라국에게 칼을 겨눈 이유를 알려준다. 안라국이 이 지역 관계망에서 가장 우위에 위치해 주변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으며, 고차국이나 사물국 등 남해안 해상교역 세력들은 모종의 불만을 품고 관계망에서 가장 우위에 있던 안라국을 공격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400년, 고구려 남정의 여파로 금관가야 세력이 급격하게 쇠퇴하는 가운데, 영남 각지에서는 자신들만의 독특한 토기 스타일 등이 지역 단위로 창안된다. 특히 가야지역인 낙동강 서안지역에서는 기존의 함안토기가 특징적인 기종을 더하면서 계속 발전하는 가운데, 함안 양식 토기를 모방하던 고령의 반파국과 고성의 고차국 토기 양식이 함안양식에서 분화된다. 이 고차국의 토기들은 고배류의 대각 하단에 굉장히 강한 돌대가 돌아가는 것이 특징이며, 주요 특징적인 기종은 일단다투창고배, 삼각투창고배, 수평구연호 등이다. 특히 신라토기와 비슷한 이단교호투창고배도 제작되어 전공하는 학부생들은 신라토기로 오판하곤 하는데[8] 토기의 두께나 배신 및 대각의 형태, 그리고 결정적으로 대각 하부에 강한 돌대가 돌아가서 조금만 토기에 대한 공부를 하면 구분하기 아주 쉽다.
그리고 고성 지역의 무덤은 분구묘로, 거대한 분구를 먼저 쌓고 매장주체부가 들어갈 자리를 다시 되파기하여 무덤을 쓰는 것이 특징이다. 이는 지하에 무덤을 만들고 그 위에 봉토를 씌우는 영남지역에서 흔히 보는 고총과는 현격히 다른 특징이다. 이러한 분구묘는 한 분구에 여러개의 무덤들이 덧대어 축조되는 것이 특징이며, 아파트처럼 아래위로도 계속해서 누세대로도 축조된다. 이러한 형식의 무덤은 한성 백제의 중심 고분군인 서울 석촌동 고분군과 태안반도 등 서해안 지역, 그리고 무엇보다도 전라도 지역에서 흔히 관찰되는 것이다.
5세기대에 이르면 영남지역 각지에서 고총이 축조되는데, 외형은 다른 영남지역의 지역의 그것과 유사하지만, 사실상 조영기술과 장례적 습속은 호남, 호서지역과 관련이 있는 점에서 고차국이 해상교역집단임을 다시 상기케한다.
아무튼 이 소가야양식 토기들과 분구묘들은 5세기 전반 무서운 기세로 뻗어나가 진주, 함양, 산청 등 경남 서부 대부분이 그 세력권안으로 들어가며, 최성기대에는 순천, 남원 등 호남 동부 지역, 즉 섬진강 유역에도 일정 부분 영향력을 미친 것 같다. 또 동쪽으로도 마산, 거제 등지에도 소가야 토기가 반출되어 그 위상을 짐작케 한다.
이 시기 소가야 토기들은 호남지역에도 발견되며, 그를 모방한 수평구연호 및 기대 등이 호서지역의 내륙인 연기 송원리 고분군 등지에서 발견된다. 결정적으로 서울 풍납토성 경당지구 우물 유구에 소가야토기들이 일본 스에키, 중국 도자들과 같이 출토되었다. 이 유구는 각지의 토기들을 차곡차곡 우물에 집어넣은 듯한 양태였으며, 이로 보아 모종의 의례가 행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고차국이 백제국과도 교역한 사실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아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일본열도 초기 스에키 중에는 고성 소가야 양식의 것들도 있어, 소가야 공인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스에키 제작 기술을 전수했던 것으로 보인다. 도질토기 제조 기술은 당대 최고의 세라믹 제조기술이었고, 숙련된 공인집단과 시스템, 막대한 자원을 요한다는 점에서 이 공인들이 건너간 것은 단순히 이주로 설명할 수는 없고, 역시 고차국과 왜국간의 정치적인 행위의 결과로 보아야 한다.
이처럼 5세기 전반 고자국은 무서울 정도로 세력권을 넓혀나가며 백제, 왜와 교류하였다. 그렇지만 고차국의 세력권을 면밀히 뜯어보면 여러 지역에서 고차국 토기가 많이 발견되기는 하지만 고령 반파국 토기와 경쟁하고 있으며, 동쪽에서는 안라국 토기와 같이 부장되어 있는 것이 보통이다. 그리고 분구묘 전통도 고성 인근과 합천 삼가 등 고성과 그 근처에서만 발견되며 나머지는 제각기이기 때문에 고차국의 세력권이라는것은 넓어도 그리 깊은 관계망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고차국 세력권에 뒤이어 진출하는 반로국과는 판이하게 다른 양상으로, 반로국은 대가야식 묘제, 대가야토기, 대가야식 장제 등이 베풀어지는 경우가 많다는 점에서 양 세력의 격차를 알 수 있다( [9]
그러나 소가야의 전성시기는 이것이 끝으로, 이후에는 고령 반파국의 무시무시한 팽창속도에 순식간에 호남 동부 지역, 서부 경남 지역의 고분군 부장품이 대가야 문물 일색이 된다.
이후 소가야는 고성 지역 인근과 진주 지역에 일정부분 세력권을 유지하게 된다. 다만 5세기 중후반부터 일본 방면 교역이 활발해져, 대마도와 규슈에서 상당한 양의 소가야산 토기 및 이를 모방한 토기가 출토된다. 그리고 서쪽 진출이 반파국에 막혀서인지 대신 동쪽 마산[10] , 함안 칠원[11] , 김해 진례 [12] 쪽에 일부 진출했는지 소가야 양식 토기가 주류를 이룬다. 다만 소가야가 이 지역을 완전히 장악하지는 못했는지, 신라 양식 토기와 창녕 양식 토기도 같이 나온다.
그리고 6세기가 되면 고성 송학동 1호분에서 B호 석실이 축조되면서 왜계 고분이 등장하는 등의 특이 양상을 보인다. 이는 탁기탄, 탁국에 이어 금관국, 다다라, 비지(=비사벌?) 등 동쪽 신라와 인접한 가야 소국들이 잇달아 신라에 무너지면서 안라국을 중심으로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왜와 교섭 활동이 벌어지는데, 그 흔적으로 보인다. 실제로 이 시기 가야지역에는 의령 경신리 고분, 사천 향촌리 고분 등 여러 왜계 고분이 축조되고 있어, 상당 수의 왜인들이 가야지역에 상주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위기상황속에서 가야의 재건을 위해 행해졌던 안라회의, 백제 성왕이 추진했던 사비회의 등에 대표들을 보내고 있어 고차국이 그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6세기 중엽을 전후한 시점이 되면 최후까지 소가야양식 토기가 출토되던 고분군에서도 신라토기가 출토되며, 아예 신라 석실분들이 소가야 곳곳에 축조된다. 이는 소가야의 멸망을 상징하는 것으로 아마 대가야가 멸망하면서 같이 망해버린 것으로 추정된다.
[1] 송학동 고분군 정도가 중심지라고 볼 여지는 그나마 있다.[2] 知와 地는 ㄷ로 발음 되었다.[3] 고성 송학동 1호분은 정식 발굴 조사되기 전의 사진과 측량도면을 보면 영락없는 전방후원분이었다. 따라서 전라도 영산강 유역의 전방후원분과 함께 비슷한 성격의 것으로 추정되었다. 그러나 동아대학교의 발굴 이후 3개 무덤이 중첩된 것으로 밝혀졌으며, 이에 따라 분구도 삼봉낙타처럼 만들어버렸다. 그렇지만 원래 분구 모양은 아무리 따져봐도 전방후원분 모양이 맞다. 설사 남북으로 원분이 있었고, 그 가운데에 또다른 원분이 들어서서 그렇게 된것이라 할 지라도, 그 축조로 인해 무덤 모양이 전방후원분이 됐다는건 주지의 사실이다. 그마저도 마지막으로 들어간 송학동 1B 석실은 완벽한 왜계석실로, 주칠이 행해지는 등 일본계 매장의례까지 행해졌으며, 대다수의 고고학자들은 송학동1B 고분의 축조할 때 일부러 이 고부의 모형을 전방후원분으로 의도적으로 만들어 버린 것으로 판단한다. 이처럼 사실상 전방후원분과 다를바 없는 고분을 삼봉낙타식으로 복원해버린 것은 케케묵은 임나일본부 문제에 대한 열등감 그이상 그이하도 아니다.[4] 왜냐하면 삼국시대에 비해서 당시 일본 고분시대의 고분은 그야말로 어마어마하게 초대형 고분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송학동 1호분 같은 사례는 일본쪽 전통을 따른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에 그전에 있었던 토착 고분과 그 위상을 단순히 고분 크기로 비교하기는 어렵다.[5] 신라의 제13대 임금인 미추 이사금과는 한자가 다르다.[6] 고성군, 창원시, 마산, 사천시 등 지금의 경상남도 남부 해안 지역의 여덟 나라.[7] 이를 2차 포상팔국의 난이라 한다.[8] 이단교호투창이라고 무조건 신라토기가 아니다.[9] 소가야에 대해서 동외동 유적 출토 제철 유구 및 고성지역의 철제무기를 토대로, 쇠가야 였기 때문에 소가야로 기록되었다고 주장되어지기도 한다. 그렇지만 가야라는 표현은 4세기 가야국 중 가장 우세했던 금관국, 즉 구야국에서 온 표현이고 뒤이어 대국이 된 반로국이 가야의 정통성을 가져가면서 대가야라고 쓴것으로, 대가야 멸망 이후 신라가 그 국도를 '대가야군'으로 편제하였을 정도로 의외로 당대에 널리 쓰이던 국명이었다. 그것과 대비되어 작을 소자를 써서 소가야라는 용법을 쓰고 있기 때문에 당시에도 금관국 멸망 이후 가야 세력간에 두드러지던 양 세력 규모와 강함의 대-소가 어느정도 이름에 반영되었던 것으로 보인다..[10] 합성동 고분군[11] 오곡리 고분군[12] 외촌리 고분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