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제프 피우수트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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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ózef Klemens Piłsudski (1867년 12월 5일 ~ 1935년 5월 12일)
1. 소개
2. 생애
3. 평가


1. 소개


폴란드군인, 정치가, 독재자이다.

2. 생애


폴란드의 귀족 출신으로 지금의 리투아니아에 속하는 잘라바스 지방에서 출생했다. 잘라바스 지방은 폴란드-리투아니아에 위치했는데 폴란드 분할로 인해 러시아 제국의 지배하에 들어오게 되었다. 그의 가문은 원래 리투아니아 귀족 출신이었지만 대대로 폴란드-리투아니아인이라 생각했고[1] 자연히 유제프 역시 그런 영향을 받았다. 1887년 유제프는 형인 브로니스와프 피우수트스키(Bronisław Piłsudski)가 러시아의 차르 알렉산드르 3세를 암살하려고 한 모임에 연루되어 체포되었고 5년 형을 받아 시베리아로 유배를 떠났다.
1892년 유배를 마친 유제프는 폴란드로 돌아와 폴란드 사회당에 가입한 후 폴란드의 주권회복을 위해 여러가지 비밀 활동을 했다. 1900년 결국 러시아 당국에 의해 활동이 들통나 다시 체포되어 수감되었지만 탈옥하는데 성공한다.
1904년 그는 러시아 제국과 싸우기 위해선 군대가 있어야 한다는 것과, 조만간 열강들이 식민지를 놓고 커다란 전쟁을 벌일거라 예상하고 비밀 군사 조직을 만들었고, 1910년 적극적인 활동을 위해 당시 러시아 제국의 적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 이동하여 오스트리아 당국의 허락을 받고[2] 비밀 군사조직을 적극 저항 연맹으로 재편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유제프는 폴란드 군단의 장군이 되어 그들을 이끌고 러시아와 싸워 다대한 성과를 냈다. 그러나 독일오스트리아러시아령 폴란드 지역을 차지한 후에도 폴란드 부활을 위한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오히려 괴뢰국폴란드 섭정왕국을 수립하자 폴란드 군단은 오스트리아에 대한 충성 맹세 서약을 거부했다. 이에 오스트리아는 폴란드 군단을 해체한 후 유제프를 체포하여 마그데부르크 감옥에 수감했다.
1차대전이 협상국의 승리로 끝난 후 폴란드 제2공화국이 수립되었고 마그데부르크 감옥에 수감되어 있던 유제프는 석방되어 1918년 11월 10일 폴란드로 돌아온 후 임시정부의 임시국가원수(Tymczasowy Naczelnik Państwa)[3]으로 선임되었다.
이 무렵 폴란드는 소련과 국경문제로 잦은 교전이 있었는데 유제프 피우수트스키는 벨로루시우크라이나를 독립시켜 러시아와 폴란드의 완충지대로 만들려는 계획을 세우고 소련에 대대적인 공격을 가해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을 일으켰다.[4] 1920년 5월 폴란드군은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예프를 점령하는 등 승승장구했으나 붉은 군대가 폴란드 북쪽 전선을 돌파하고 남부 전선으로 기병대를 보내 폴란드 후방에 역공을 가했고 폴란드군은 우크라이나와 벨로루시에서 후퇴해 비스와 강에 이르러서야 멈출 수 있었다.
그러나 소련군은 보급 문제가 심각해지기 시작했고 민족주의로 똘똘 뭉친 폴란드 노동자와 농민들은 소비에트에 협조하기는커녕 소비에트를 침략자로 인식하여 맹렬히 저항했다. 여기에 대(對)폴란드 전선의 소련군을 지휘한 미하일 투하쳅스키가 전선에서 멀리 떨어진 민스크에서 졸렬한 지휘를 펼치는 바람에 전장의 변화에 즉각적으로 대처할 수도 없었다.[5] 결국 폴란드군은 바르샤바를 방어하는데 성공하며 더불어 남쪽에서도 새롭게 조직된 폴란드군이 소련군의 후미를 쳐 전세를 유리하게 바꾸는 데 성공했다.
바르샤바 목전에서 소련군을 전멸시킨 폴란드군은 이후 동진하면서 소련군을 연파, 승승장구한다. 그러나 폴란드 역시 전쟁을 계속 끌고 가기에는 한계가 있었고[6] 결국 양측은 1921년 맺어진 리가 조약으로 벨로루시를 분할하여 3분의 2는 폴란드에게, 민스크를 비롯한 3분의 1은 러시아가 분할하는 강화 조약을 맺었다. 한편 폴란드는 리투아니아의 수도 빌뉴스에 폴란드인이 많다는 것을 빌미로 군대를 보내 괴뢰국 중앙리투아니아 공화국을 수립하고 후에 합병한다. 그러나 이 일로 리투아니아는 한때 폴란드와 한 나라를 구성했음에도 폴란드에 대한 감정이 매우 악화되었고 전운이 드리우는 1930년대 후반에 가서야 리투아니아 제1공화국과 수교하게 된다.
1922년 유제프는 총통자리에서 물러났지만 그와 그의 지지세력은 의회와 대통령의 통치에 불만을 가졌다. 원래 피우수트스키는 대통령을 꿈꾸었으나 1921년 제정된 3월 헌법으로 대통령의 권한이 매우 약화되자 정계를 은퇴하였다. 폴란드의 초대 대통령은 공학자로 이름을 날렸던 가브리엘 나루토비치(Gabriel Narutowicz)였으나 당선된 지 며칠만에 극우파에게 암살되었으며, 이후 농민당의 스타니스와프 보이치에호프스키(Stanisław Wojciechowski)가 대통령이 되었다. 그러나 전임 대통령이 극우파에게 암살된 것을 볼 수 있듯이 폴란드는 좌우 대립이 극심하였으며, 독일과의 대립과 1차 대전의 후유증으로 인해 경제적으로도 어려운 시기를 보냈다.
폴란드의 민주정이 혼란하여 국가를 제대로 이끌지 못한다고 판단한 피우수트스키는 결국 1926년 5월 12일 쿠데타를 일으켜 바르샤바를 장악한 후 국정을 좌지우지했다. 물론 이것은 친위쿠데타였다. 피우수트스키는 쿠데타 직후 1926년부터 1928년까지 수상[7] 또한 1926년부터 죽을 때까지 폴란드군 총사령관[8]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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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위에서 폴란드군을 지휘하고 있는 피우수트스키. 그가 폴란드군 총사령관을 맡았던 1928년 그려진 선전화다. #
폴란드 제2공화국은 반유대주의, 반독일 정서가 매우 강했다. 피우수트스키는 폴란드어를 사용하는 리투아니아 주민 출신이었다. 그리고 폴란드 제2공화국에는 유대인, 독일인, 우크라이나인, 벨라루스인, 리투아니아인 등 다양한 소수민족이 있었다. 그래서 피우수트스키는 '''폴란드 민족주의에 대해서는 매우 경계했다'''. 피우수트스키는 다양한 민족이 폴란드라는 그릇에 어울려 사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제2의 폴란드-리투아니아를 완성할 수 있다고 끊임없이 주장했다. 피우수트스키는 죽는 그 날까지 제2의 폴란드-리투아니아를 부르짖으며 카우나스부터 키예프, 민스크까지 차지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그러나 피우수트스키가 독재를 했어도 폴란드 정치권의 커져가는 폴란드 민족주의를 막지는 못했다. 결국 피우수트스키가 열심히 독재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영토 확장 노력은 멈추게 됐고 폴란드에는 가면 갈수록 폴란드인 민족주의가 강성해져 각종 테러폭력사태가 빈발했다.
1935년 5월 12일 향년 68세로 세상을 떠났다.

3. 평가


폴란드 독립의 구국 영웅 vs 폴란드 제2공화국 몰락의 씨앗을 뿌린 인물로 긍정적 평가와 부정적 평가가 갈린다.
폴란드 독립에 있어서 피우수트스키는 없어서는 안될 인물이었다. 폴란드의 독립운동이 끊임없이 수포로 돌아갔음에도 포기하지 않고 폴란드 군단을 조직하고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에서 불리한 전세를 뒤엎은 것은 그가 아니면 아무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독립이 된 후 피우수트스키는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잡은 후 독재자가 되어 브와디스와프 시코르스키[9]와 같은 정적들을 탄압했다.
특히 폴란드군의 기계화에 부정적이었던 것은 그의 사후 나치 독일폴란드 침공 당시 폴란드군의 치명적인 약점이 되었다. 폴란드군은 군 장비는 나름 손색이 없었으나[10] 정작 그것을 대량생산하기 위한 시설은 전쟁 발발 불과 1년 전인 1938년에야 생겨났다.
외교적인 면에서도 실책이 있었는데 1932년에 소련과 불가침 조약을 맺은데 이어 1934년에는 나치 독일과 불가침 조약을 맺었다. 나치 독일과 불가침 조약을 맺은 건 독일과의 국경분쟁, 폴란드의 국제적 고립 타개, 독일-폴란드 무역 전쟁 때문이었다. 독일은 폴란드 회랑단치히 반환을 계속 요구하여 폴란드와 끊임없이 충돌해왔는데, 그 와중에 아돌프 히틀러가 불가침조약을 제의하자 피우수트스키가 받아들인 것이다.
피우수트스키는 독일과 소련 사이에서의 중립 추구를 주요 외교적 노선으로 잡았지만 문제는 중립을 유지할 수 없는 상황인 1938년에도 권력을 잡고 있는 피우수트스키의 추종자들은 과거의 망상에 빠져 소련과의 동맹을 거부했다는 것이다. 그 대가는 독소 불가침 조약독소 폴란드 점령이었다.
하지만 이런 과실이 있다 할지라도, 어쨌든 소비에트 혁명의 예봉을 결정적인 곳에서 꺾어 소련이 동유럽으로 세력을 넓히는 시기를 늦추었다. 피우수트스키가 세운 폴란드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폴란드가 결국 공산화되었어도, 그는 역사의 흐름을 영원히 바꾸어놓은 공이 있다.
[1] 피우수트스키의 정체성은 폴란드인보다는 폴란드-리투아니아인에 가까웠다. 1569년 루블린 합병 이래 폴란드와 리투아니아가 한나라로 지낸 역사가 200년이 넘었으며, 피우수트스키의 유년기(19세기 후반)는 오늘날의 민족의식(폴란드인, 리투아니아인, 우크라이나인 등)이 확고해지기 전이었으므로, 이 소위 변경지대의 귀족들은 폴란드-리투아니아인에 강한 귀속의식을 갖고 있었다. 한국사에 대입해서 말하자면 남한인-북한인이 아닌 조선인의 정체성을 가졌다고 보면 된다.[2] 폴란드와 지리적으로 가깝기도 하고 당시 오스트리아는 당대 유럽 국가들 중에서 검열과 통제가 제일 느슨했던 것으로 유명했다.[3] 1920년 이후 국가원수(Naczelnik Państwa)으로 명칭 변경.[4] 폴란드를 중심으로 하여 우크라이나, 벨로루시 등을 포함힌 다민족 연방국가(제2의 폴란드-리투아니아)를 만들고자 한 피우수투스키의 바람도 원인이기는 하였다[5] 이 패배의 원인은 이오시프 스탈린의 책임이 가장 크다고 알려져 있으나 사실 그 책임을 살펴보면 투하쳅스키의 책임이 더 크다. 전략적으로는 소련이 가진 역량의 한계를 무시하고 독일 혁명 원조를 이유로 폴란드 영내로 진군한 소련 정치가들의 판단이 더 큰 문제였고.[6] 1920년 당시 폴란드는 국가예산의 60%를 대소 전선에 투입했다.[7] 사실 직후라기에는 좀 어폐가 있는데, 중간에 카지미에시 바르텔(Kazimierz Bartel)이 수상을 맡았다. 물론 몇 달 안가 피우수트스키가 수상이 되었지만.[8] Generalny Inspektor Sił Zbrojnych. 직역하면 군부총감. 의회가 아니라 대통령 앞에서만 책임을 졌다. 물론 대통령이 피우수트스키의 꼭두각시인 이상, 사실상 피우수트스키가 전권을 가진 것이나 다름없었다.[9] 쿠데타 이전 1차대전 시절 폴란드의 영토 회복을 위해 싸웠던 시절이나 소비에트-폴란드 전쟁 당시에도 갈등이 있었음에도 시코르스키를 추천하여 정부 각료로써 중용하기도 했다. 하지만 쿠데타를 즈음하여 완전히 돌아서게 된다.[10] 가령 7TP 경전차는 독일군의 1호, 2호 전차를 상대하는 데 문제가 없었다. 문제는 수가 적었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