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드리히 빌헬름 에른스트 부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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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iedrich Wilhelm Ernst Busch
프리드리히 빌헬름 에른스트 부슈
1900년 1월 22일 ~ 1980년 6월 8일
독일의 공산주의자이자 연극 배우 겸 가수. [1]
1900년 1월 22일 킬에서 출생했으며, 1906년부터 1915년까지 고향에서 교육을 받았다. 1915년부터 킬의 게르마니아 조선소에서 기계공 일을 시작하였으며, 1916년 사회주의 노동자 청년단(Sozialistische Arbeiterjugend)에 가입했으며, 1918년 독일 사회민주당에 입당했다. 1918년 킬 군항에서의 수병 반란에 인상을 받아 독일 사회민주당에서 독일 독립사회민주당(USPD)으로 갈아탔다.
1920년 직장을 잃게 된 그는 배우에 눈길을 돌려 연극 및 음악 분야에 발을 들이기 시작했으며, 1921년부터 1924년까지 킬 시립 극장에서 일하였다. 그는 그곳에서 오페라, 연극 등의 다양한 분야에서 배우로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는 1924년부터 프랑크푸르트와 포메른에서도 활동하기 시작했다. 1927년부터 그는 베를린 놀렌도르프 광장에 있는 극장인 피스카토어 무대(Piscator-Bühne)에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이 극장에서 프리드리히 볼프, 베르톨트 브레히트, 에른스트 톨러 등의 인물과 함께 활동했으며, 브레히트의 대본과 쿠르트 바일의 작곡으로 만들어진 뮤지컬 스타일의 오페라인 <서푼짜리 오페라(Die Dreigroschenoper)>가 영화로 제작됐을 때 극중에서 가장 유명한 곡인 <칼잡이 맥[2] (Die Moritat von Mackie Messer)>를 불렀다.
▲ 영화 <서푼짜리 오페라(Dreigroschenoper, 1931)>에서 <칼잡이 맥>를 부른 에른스트 부슈
이외에도 여러 영화에 참여했으며, 당시 독일 사회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던 <쿨레 밤페: 세상은 누구의 것인가?(Kuhle Wampe: Wem gehört die Welt?)>[3] 에서 주연을 맡았다. 참고로 그는 이전에 출연한 영화에선 모두 <서푼짜리 오페라>처럼 노래를 부르는 인물로만 등장하였다.
이후 나치가 권력을 장악하자 그는 나치의 탄압을 피해 네덜란드로 도피했다. 이후 벨기에, 취리히, 파리, 빈처럼 다양한 곳을 거치며 도피 생활을 했으며, 결국 소련으로 이동했다. 그가 소련에 있는 동안에는 영화 작업에 참여했으며, 1937년 국제 여단[4] 의 가수로서 스페인으로 이동했다. 스페인에서 그는 국제 여단에서 파시즘에 맞서기 위해 다양한 좌파 선전가를 불렀으며, 국제 여단의 노래책(Canciones de las Brigadas Internacionales)을 만들었다. 1938년 그는 벨기에에서 국제 여단의 선전가를 녹음했으며, 공연했다.
▲ 스페인 내전 당시 만들어진 국제 여단의 선전가 <Spaniens Himmel(스페인의 하늘)>. 에른스트 부슈가 부른 버전이다.
스페인 내전에 즈음하여 에른스트 부슈가 부른 노래들 듣기
그러나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고, 독일군이 베네룩스 3국을 침략하자 그는 네덜란드의 안트베르펀에서 독일군에게 체포되었고 남부 프랑스의 Camp de Gurs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그는 1942년까지 그곳에 감금되었으며, 스위스의 국경을 넘어 탈출하려고 했다. 그러나 프랑스 헌병들이 그를 국경에서 체포했고, 게슈타포에게 넘겨진 뒤 파리를 거쳐 베를린의 알렉산더 광장 경찰서 유치장에 구류되었고, 재판 결과 공산주의 선동 등의 죄목으로 징역을 선고받아 1943년 3월 베를린 모아비트 교도소에 수감됐다. 재판부는 원래 사형을 염두에 두고 있었지만, 당시 독일 연극계의 거물이었던 구스타프 그륀트겐스가 막후에서 감형을 위한 로비를 벌여서 징역형으로 감형되었다고 한다.[5]
하지만 11월 22일에 연합군 공군의 야간 폭격이 있었을 때 자고 있다가 폭격이 교도소 건물을 직격했을 때 침대에서 튕겨나가 책상에 머리를 심하게 부딪혀 의식을 잃었다. 폭격 후 사상자를 수습할 때 다른 사망자들과 함께 시체더미에 쌓여 있다가 동료 죄수가 아직 숨을 쉬고 있는 것을 발견했고, 교도소 병원으로 후송되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이후 브란덴부르크 교도소로 옮겨가 계속 옥살이를 하던 도중인 1945년 4월 27일 소련군에 의해 감옥에서 풀려났다. 감옥에서 풀려난 직후에는 소련군과 함께 베를린 전투에도 참가했다. 흠좀무.
1945년 5월에는 1933년부터 자기가 살던 베를린의 예술가 집단 거주지로 돌아갔으며, 독일 공산당(KPD)에 입당했다. 1946년 동베를린 지역의 독일 공산당(KPD)과 독일 사회민주당(SPD)이 독일 사회주의통일당(SED)으로 강제 통합되자, SED에 입당했다. 1949년에는 동베를린으로 영구 이주했다. 이후 베르톨트 브레히트가 설립한 연극단인 베를린 앙상블에서 전쟁 전처럼 같이 작업했다.
에른스트 부슈는 한스 아이슬러가 작곡한 노래와 국제 노동운동가 혹은 사회주의 선전가를 부른 가수로서 유명하다. 유튜브에서 에른스트 부슈를 검색하면 그가 부른 곡이 수두룩하게 나올 만큼, 이 양반이 안 부른 독일 노동운동가, 좌파 선전가는 거의 없을 정도다. 그는 동독에서 선전가 뿐만이 아니라 발라드, 칸타타 등의 다양한 종류의 노래를 불러 음원으로 남겼다. 이러한 활동 때문에 1956년, 1966년, 1979년 동독 국가상(Nationapreis der DDR)을 받았으며, 1970~71년 소련에선 국제 레닌 평화상을 받았다.
▲ 1930년 에른스트 부슈가 부른 <비밀스러운 행진(Der heimliche Aufmarsch)>[6] 을 부르는 노동자들의 모습. 한스 아이슬러가 작곡했으며, 에리히 바이네르트[7] 가 작사한 곡이다. 영상은 독일과 프랑스가 공동으로 운영하는 문화/예술 방송 arte에서 제작한 한스 아이슬러 다큐멘터리의 일부다.
1961년에는 건강상의 이유로 배우 활동을 접었는데, 연극 연출이나 노래의 녹음 등의 활동은 계속 했다. 하지만 1977년부터 건강이 악화되어 사실상 은퇴 상태에 들어갔으며, 1980년 6월 8일 타계했다. 사후 그의 유산은 독일 예술대학을 계승한 베를린 예술대학이 소유하고 있다.
다른 예술가들과는 달리 사회주의 국가에서 별 탈 없이 살다 생을 마감한 인물이다. 공개적으로 당의 정책을 비판한 적이 없었으며, 당원과의 다툼이 몇 번 있었던 게 전부였기 때문이다. 물론 문제가 전혀 없었던 건 아닌데, 1951년 독일 사회주의통일당의 예술 정책이 스탈린주의로 변하자 이에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여 당과 충돌한 적이 있었는데, 이 때 당은 그를 당에서 제명시켰다. 그러나 제명됐음에도 자신의 예술 활동에는 별다른 제약이 없었으며, 1970년대 초에 다시 당원이 되었으니 별 문제는 없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사실 스탈린 시대의 피비린내 나는 숙청의 시기가 끝난 이후인 냉전기 당시 동구권은 탄압과 통제의 강도가 예전보다 한층 덜했다. 게다가 동독의 경우 자체적인 예술, 문화적 전통도 있어서 스탈린 치하 소련처럼 지식인이나 예술인들을 함부로 막 대하기 꺼려했고, 게다가 부슈는 나치가 집권할 당시 독일의 공산주의자들이 각지로 흩어져 목소리조차 제대로 못 냈던 시절의 독일, 아니 국제 좌파 혁명가들에게 희망을 주었던 음악가였기 때문에 감정적, 입지적 차원에서 함부로 조질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특히 부슈가 열성적으로 작곡한 스페인 내전 시절 독일/오스트리아 출신 부대였던 텔만[8] 대대의 노래들은 동독 당국에 의하여 공산주의 독일의 역사적 원류로 격상됐기 때문에 그의 예술 활동은 이념적 차원에서도 의미가 컸다.
Friedrich Wilhelm Ernst Busch
프리드리히 빌헬름 에른스트 부슈
1. 개요
1900년 1월 22일 ~ 1980년 6월 8일
독일의 공산주의자이자 연극 배우 겸 가수. [1]
2. 생애
1900년 1월 22일 킬에서 출생했으며, 1906년부터 1915년까지 고향에서 교육을 받았다. 1915년부터 킬의 게르마니아 조선소에서 기계공 일을 시작하였으며, 1916년 사회주의 노동자 청년단(Sozialistische Arbeiterjugend)에 가입했으며, 1918년 독일 사회민주당에 입당했다. 1918년 킬 군항에서의 수병 반란에 인상을 받아 독일 사회민주당에서 독일 독립사회민주당(USPD)으로 갈아탔다.
1920년 직장을 잃게 된 그는 배우에 눈길을 돌려 연극 및 음악 분야에 발을 들이기 시작했으며, 1921년부터 1924년까지 킬 시립 극장에서 일하였다. 그는 그곳에서 오페라, 연극 등의 다양한 분야에서 배우로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는 1924년부터 프랑크푸르트와 포메른에서도 활동하기 시작했다. 1927년부터 그는 베를린 놀렌도르프 광장에 있는 극장인 피스카토어 무대(Piscator-Bühne)에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이 극장에서 프리드리히 볼프, 베르톨트 브레히트, 에른스트 톨러 등의 인물과 함께 활동했으며, 브레히트의 대본과 쿠르트 바일의 작곡으로 만들어진 뮤지컬 스타일의 오페라인 <서푼짜리 오페라(Die Dreigroschenoper)>가 영화로 제작됐을 때 극중에서 가장 유명한 곡인 <칼잡이 맥[2] (Die Moritat von Mackie Messer)>를 불렀다.
▲ 영화 <서푼짜리 오페라(Dreigroschenoper, 1931)>에서 <칼잡이 맥>를 부른 에른스트 부슈
이외에도 여러 영화에 참여했으며, 당시 독일 사회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던 <쿨레 밤페: 세상은 누구의 것인가?(Kuhle Wampe: Wem gehört die Welt?)>[3] 에서 주연을 맡았다. 참고로 그는 이전에 출연한 영화에선 모두 <서푼짜리 오페라>처럼 노래를 부르는 인물로만 등장하였다.
이후 나치가 권력을 장악하자 그는 나치의 탄압을 피해 네덜란드로 도피했다. 이후 벨기에, 취리히, 파리, 빈처럼 다양한 곳을 거치며 도피 생활을 했으며, 결국 소련으로 이동했다. 그가 소련에 있는 동안에는 영화 작업에 참여했으며, 1937년 국제 여단[4] 의 가수로서 스페인으로 이동했다. 스페인에서 그는 국제 여단에서 파시즘에 맞서기 위해 다양한 좌파 선전가를 불렀으며, 국제 여단의 노래책(Canciones de las Brigadas Internacionales)을 만들었다. 1938년 그는 벨기에에서 국제 여단의 선전가를 녹음했으며, 공연했다.
▲ 스페인 내전 당시 만들어진 국제 여단의 선전가 <Spaniens Himmel(스페인의 하늘)>. 에른스트 부슈가 부른 버전이다.
스페인 내전에 즈음하여 에른스트 부슈가 부른 노래들 듣기
그러나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고, 독일군이 베네룩스 3국을 침략하자 그는 네덜란드의 안트베르펀에서 독일군에게 체포되었고 남부 프랑스의 Camp de Gurs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그는 1942년까지 그곳에 감금되었으며, 스위스의 국경을 넘어 탈출하려고 했다. 그러나 프랑스 헌병들이 그를 국경에서 체포했고, 게슈타포에게 넘겨진 뒤 파리를 거쳐 베를린의 알렉산더 광장 경찰서 유치장에 구류되었고, 재판 결과 공산주의 선동 등의 죄목으로 징역을 선고받아 1943년 3월 베를린 모아비트 교도소에 수감됐다. 재판부는 원래 사형을 염두에 두고 있었지만, 당시 독일 연극계의 거물이었던 구스타프 그륀트겐스가 막후에서 감형을 위한 로비를 벌여서 징역형으로 감형되었다고 한다.[5]
하지만 11월 22일에 연합군 공군의 야간 폭격이 있었을 때 자고 있다가 폭격이 교도소 건물을 직격했을 때 침대에서 튕겨나가 책상에 머리를 심하게 부딪혀 의식을 잃었다. 폭격 후 사상자를 수습할 때 다른 사망자들과 함께 시체더미에 쌓여 있다가 동료 죄수가 아직 숨을 쉬고 있는 것을 발견했고, 교도소 병원으로 후송되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이후 브란덴부르크 교도소로 옮겨가 계속 옥살이를 하던 도중인 1945년 4월 27일 소련군에 의해 감옥에서 풀려났다. 감옥에서 풀려난 직후에는 소련군과 함께 베를린 전투에도 참가했다. 흠좀무.
1945년 5월에는 1933년부터 자기가 살던 베를린의 예술가 집단 거주지로 돌아갔으며, 독일 공산당(KPD)에 입당했다. 1946년 동베를린 지역의 독일 공산당(KPD)과 독일 사회민주당(SPD)이 독일 사회주의통일당(SED)으로 강제 통합되자, SED에 입당했다. 1949년에는 동베를린으로 영구 이주했다. 이후 베르톨트 브레히트가 설립한 연극단인 베를린 앙상블에서 전쟁 전처럼 같이 작업했다.
에른스트 부슈는 한스 아이슬러가 작곡한 노래와 국제 노동운동가 혹은 사회주의 선전가를 부른 가수로서 유명하다. 유튜브에서 에른스트 부슈를 검색하면 그가 부른 곡이 수두룩하게 나올 만큼, 이 양반이 안 부른 독일 노동운동가, 좌파 선전가는 거의 없을 정도다. 그는 동독에서 선전가 뿐만이 아니라 발라드, 칸타타 등의 다양한 종류의 노래를 불러 음원으로 남겼다. 이러한 활동 때문에 1956년, 1966년, 1979년 동독 국가상(Nationapreis der DDR)을 받았으며, 1970~71년 소련에선 국제 레닌 평화상을 받았다.
▲ 1930년 에른스트 부슈가 부른 <비밀스러운 행진(Der heimliche Aufmarsch)>[6] 을 부르는 노동자들의 모습. 한스 아이슬러가 작곡했으며, 에리히 바이네르트[7] 가 작사한 곡이다. 영상은 독일과 프랑스가 공동으로 운영하는 문화/예술 방송 arte에서 제작한 한스 아이슬러 다큐멘터리의 일부다.
1961년에는 건강상의 이유로 배우 활동을 접었는데, 연극 연출이나 노래의 녹음 등의 활동은 계속 했다. 하지만 1977년부터 건강이 악화되어 사실상 은퇴 상태에 들어갔으며, 1980년 6월 8일 타계했다. 사후 그의 유산은 독일 예술대학을 계승한 베를린 예술대학이 소유하고 있다.
3. 여담
다른 예술가들과는 달리 사회주의 국가에서 별 탈 없이 살다 생을 마감한 인물이다. 공개적으로 당의 정책을 비판한 적이 없었으며, 당원과의 다툼이 몇 번 있었던 게 전부였기 때문이다. 물론 문제가 전혀 없었던 건 아닌데, 1951년 독일 사회주의통일당의 예술 정책이 스탈린주의로 변하자 이에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여 당과 충돌한 적이 있었는데, 이 때 당은 그를 당에서 제명시켰다. 그러나 제명됐음에도 자신의 예술 활동에는 별다른 제약이 없었으며, 1970년대 초에 다시 당원이 되었으니 별 문제는 없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사실 스탈린 시대의 피비린내 나는 숙청의 시기가 끝난 이후인 냉전기 당시 동구권은 탄압과 통제의 강도가 예전보다 한층 덜했다. 게다가 동독의 경우 자체적인 예술, 문화적 전통도 있어서 스탈린 치하 소련처럼 지식인이나 예술인들을 함부로 막 대하기 꺼려했고, 게다가 부슈는 나치가 집권할 당시 독일의 공산주의자들이 각지로 흩어져 목소리조차 제대로 못 냈던 시절의 독일, 아니 국제 좌파 혁명가들에게 희망을 주었던 음악가였기 때문에 감정적, 입지적 차원에서 함부로 조질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특히 부슈가 열성적으로 작곡한 스페인 내전 시절 독일/오스트리아 출신 부대였던 텔만[8] 대대의 노래들은 동독 당국에 의하여 공산주의 독일의 역사적 원류로 격상됐기 때문에 그의 예술 활동은 이념적 차원에서도 의미가 컸다.
[1] 사실 심영같이 극우와 극좌를 오간 기회주의자와 비교하는건 실례다.[2] 주로 17~19세기 동안 독어권 지역에서 유행한 강도나 강간, 살인 등 중범죄를 소재로 한 노래. 흔히 장터에서 불려졌고, 수동오르간으로 반주하는 경우가 많았다.[3] 무장 봉기로써 경제 대공황을 해결하자는 메시지가 담긴 충공깽스러운 좌파 성향의 영화다. 영화의 대본은 베르톨트 브레히트가 작성했다.[4] 각국에서 온 의용병들로 구성된 군대다.[5] 부슈는 전후 그륀트겐스가 나치 부역 혐의로 재판을 받게 되자, 반대로 그륀트겐스에게 유리한 증언을 해줘서 풀려나는 데 크게 기여했다.[6] 나치가 전쟁을 준비하니 노동자들이 무장 봉기를 해서 사회주의 공화국을 세워야 한다는 가사가 담긴 좌파 선전가다. 한국에 <투쟁의 물결>이라는 개사곡도 있다. 흠좀무.[7] 독일의 작가이며, 그의 이름을 딴 에리히 바이네르트 앙상블이라는 동독군 정예 군악대도 있다.[8] 독일의 대표적인 공산주의자 에른스트 텔만(Ernst Tählmann)의 이름을 딴 부대. 바이마르 공화국 당시 독일 공산당(KPD)의 지도자였으나, 나치 독일에 반대하다 게슈타포에게 체포당해 11년간 독방살이를 했으며, 1944년에 총살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