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회탈

 



[image] '''대한민국 국보 제121호'''
'''안동 하회탈 및 병산탈'''
安東 河回탈 및 屛山탈


'''소재지'''
경상북도 안동시
'''분류'''
유물 / 생활공예 / 목공예 / 가구류
'''수량/면적'''
13개
'''지정연도'''
1964년 3월 30일
'''제작시기'''
고려시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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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설명
3. 하회탈의 특징
4. 대중문화 속의 하회탈
5. 바깥고리
6. 국보 제12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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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하회탈'''은 경상북도 안동하회마을 및 병산마을에서 전해져 내려온 한국민속탈이다. 흔히 보통명사로 알려져 있으나, 고려 중기 혹은 후기에 만들어져 병산탈과 함께 현전하는, 국보 제121호로 지정된 탈을 지칭하는 고유명사이기도 하다.

2. 설명


흔히 하회탈을 연상하면 떠오르는 웃음을 짓고 있는 탈은 양반탈이며, 이를 포함해 열두 가지 종류의 하회탈이 존재했으나 그 중 총각탈[2], 떡다리탈[3], 별채탈[4]이 언제부터인가 실전되었다.[5]
그래서 주로 양반, 부네, 각시, 선비, 초랭이, 백정, 할매, 중, 이매 등이 있고 병산탈은 대감과 양반탈로 분류되어 있다. 그 중에서 이매탈은 전설의 영향 때문이었는지 현재까지도 유일하게 턱이 없는 탈로 남아있어서 '바보탈', '병신탈'이라는 별명이 붙여졌다. 참고로 양반탈 등의 경우에도 턱이 분리되어 움직이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대화 시의 생동감을 살려주는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다.
하회탈이 언제부터 탄생되었는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으나 허도령 전설이 시기를 대략적으로 짐작케 한다. 전설에 따르면, 고려시대 중엽 하회마을에 각종 우환이 생기게 된 가운데 산신령이 나타나서 탈을 만들면 우환이 그칠 것이라 했다고 한다. 이에 허씨 성을 가진 도령이 산신령의 명에 따라 탈을 만들기 시작했다. 단, 어느 누구도 허도령이 탈을 만드는 모습을 봐서는 안된다는 말에 따라 허도령 혼자 탈을 만들고 다른 이의 출입을 금했다. 그러다가 허도령을 사모하던 용띠 김 씨 처녀가 허도령을 보고 싶어하는 마음에 몰래 엿보았다가 허도령이 피를 토하면서 즉사하는 바람에 턱부분을 만들지 못한 이매탈은 턱이 없는 탈이 되었다고 한다.[6] 김 씨 처녀는 슬픔과 미안함을 견디지 못해 자살하였고, 마을 사람들은 김 씨 처녀를 위로하기 위해 서낭당을 지어 제사를 지내고 그때부터 탈놀이를 시작했다.
각시탈은 '김씨 처녀가 자살한 후 서낭이 된 모습 VS 15세 과부가 죽어서 서낭신이 됨'으로 갈린다. 또한 각시탈을 허 도령이 제작한 것이 아니라 안 도령이 제작했기 때문에, 김씨 처녀의 배우자는 안 도령이라는 주장도 있다.
문화재청의 연구로는 하회마을에 본래 허씨 일가가 살다가 후에 안씨 일가가 들어왔고 이후 조선 전기에 류씨 일가가 들어왔기 때문에 대체로 고려 중기 무렵에 만들어졌을 것이라고 본다.
하회탈은 주로 오리나무로 만들어 옻칠을 거친 후 완성된다. 이 탈을 사용한 하회별신굿탈놀이는 조선 후기까지 음력 정월 초에 계속해서 공연되었는데, 현재 중요무형문화재 69호로 지정되어 있다. 국내에서는 산대놀이, 오광대놀이, 국외에서는 북송중국에서 활성화된 서민 공연극과 가마쿠라 시대 후기부터 무로마치 시대의 일본에서 유행한 노가쿠(能) 등 여러 사례와 함께, 11세기 이후 동아시아 세계 내에서 탈을 이용한 서민극의 활성화를 알려주는 주요한 사례 중 하나이다.
그러던 중 2007년도에 별채탈로 추정되는 탈이 일본에서 발견되었다.[7] 별채탈 복원을 다룬 2015.03.13 매일신문 기사인데 기사에선 전문가들이 잃어버린 하회탈 중 하나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강하게 제기하고 있다고 한다. 또한 2002년에 80년전에 실종된 총각탈#도 사진이 남아 발견되기도 했다.매일일보 기사 대구일보 영국에서도 분실된 3탈 중 별채탈로 추정되는 하회탈을 발견했다. #
분실된 3탈 중 떡달이가 에초에 별신굿에 등장하지 않는 배역 혹은 본래부터 없었던 탈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총각[8]이나 별채[9]는 각각 다른 탈이 대신 배역을 맡아서 한다. 그러나 떡달이의 경우 정확한 배역을 찾을 수 없고[10], 그 정체도 불투명 하고, 애초에 떡달이가 어떤 인물인지도 유추 할 수 없다.
현재 하회별신굿 탈놀이 보존회 하회탈 개요에는 아직 '허도령이 제작한 것은 모두 14개 3개 분실(총각, 별채, 떡달이)'라고 게시돼 있다. 하지만, 사진으로 발견된 총각탈이나 최근 복원된 별채탈을 별신굿에 사용 하지 않는 것 봐서는 현재까지 분실상태로 남아 있을 가능성이 크다.

3. 하회탈의 특징


항상 웃고 있는 양반탈에서 우락부락한 모습을 보여주는 백정탈까지 하회탈은 한민족의 여러 계층의 특징을 따내 생생하게 가면이라는 도화지에 표현하였다고 할 수 있다. 때문에 어느 사람이 보더라도 매우 친숙하고, 오히려 바보같이 보이기도 할만큼 생생하다.
[11]
하지만 이건 탈을 정면에서 보았을 때의 이야기이다. 혹시 집에 양반탈이 있는 사람은 앞에서 양반탈을 보고 밑에서 양반탈을 봐 보자. 정면에서 보았을 때는 바보같이 웃는 얼굴이지만 밑에서 보았을 때에는 무척 무섭게 보이고 한편으로는 깔보는 것 같기도 하고 겁주는 것 같기도 한 그 표정은 방금 전에 보았던 바보 같은 얼굴을 당신의 뇌리에서 말끔하게 없애 줄 것이다.[12]
하회탈의 가장 큰 특징이라면 비록 남성 탈 한정이지만, 턱 부분이 분리되어 움직일 수 있다는 것. 이 특징 덕분에 제한적인 표정 변화가 가능했는데, 얼굴을 위로 들어 올리면 턱이 아래로 내려가고 입이 벌어지면서 크게 웃는 모습이 되며, 아래로 숙이면 턱이 윗입술과 붙어 성난 표정으로 변한다. 이러한 표정 변화는 관객들이 극중 등장인물들에게 더 잘 몰입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하회탈만의 장점이다.

4. 대중문화 속의 하회탈



5. 바깥고리



6. 국보 제121호


경상북도 안동군 하회마을과 그 이웃인 병산마을에 전해 내려오는 탈로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탈놀이 가면이다.

하회탈로는 11개가 전해지는데 주지 2개, 각시, 중, 양반, 선비, 초랭이, 이매, 부네, 백정, 할미 탈이 있다. 병산탈은 총각, 별채, 떡다리 탈이 있었다고 하나 분실되어 현재 2개가 남아 있다.

한국의 가면은 대개 바가지나 종이로 만든 것이 많아서 오래 보존된 예가 드물며, 그 해 탈놀이가 끝난 후 태워버리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하회탈과 병산탈은 드물게 보이는 목조탈이며, 격식과 세련됨을 갖춘 유물이다.

원래 해마다 정월 대보름에 거행되는 별신굿에 쓰이던 것이며, 마을마다 따로 가면들을 보존해 왔을 뿐만 아니라 탈에 대한 금기나 제약이 매우 엄격했다. 이 탈의 재료는 오리나무로서 그 위에 옻칠을 두겹 세겹으로 칠해 정교한 색을 내었다. 턱은 따로 조각되어 있어서, 아래턱을 노끈으로 달아 놀이할 때 말하는 것처럼 움직이게 함으로써 생동감을 주도록 만들었다. 하회 가면 중에서도 특히 양반과 백정은 입체감과 조각기술면에서 우수함이 돋보인다.

이 탈들의 제작자와 정확한 제작연대는 알 수 없으나 마을에는 허도령이 만들었다는 전설이 전한다. 다만 하회마을에 살았던 사람에 대한 기록으로 허씨가 살았고, 안씨 집안이 들어온 후, 유씨가 조선 전기에 살았다고 기록이 되어 있어 대체로 고려 후기쯤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1] 문화재청 홈페이지에서는 안동 하회탈 및 병산탈의 제작시기를 밝히지 않았다.[2] 사진으로 남아 있다.[3] 떡달이, 무언가 모자라고 우스꽝스러운 사람[4] 추정되는 탈이 복원[5] 총각탈은 일제강점기때 분실되었다.[6] 벼락에 맞아 즉사했다는 버전도 있다.[7] 이 탈이 진짜 하회탈 혹은 하회탈이라고 해도 별채탈인지 여부는 아직까지 불분명하다.[8] 신방마당[9] 주지마당[10] 할미마당에서 할미의 남편 혹은 광대로 추정[11] 해당 영상은 YTN 사이언스 '한국인의 얼굴, 하회탈'의 일부분을 따온 것이다. 원본 영상은 # [12] 이건 오버워치의 영웅인 아나의 스킨 중 하회탈을 쓴 “탈”이 좋은 예시다. 이러한 표정 변화는 3차원적 굴곡으로 인해 나타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