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신령
한국 신화에 자주 등장하는 신적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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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암미술관 소장 산신도(출처)
말 그대로 산에 사는 신령. 주로 백발에 긴수염을 가지고 흰옷을 입은 할아버지로, 등장 장소는 꿈 속이나 산중의 알 수 없는 곳, 또는 연못, 옹달샘 등이다.
무속에서는 조금 더 격이 높아져 산 하나와 가까운 지역을 관리하며, 호랑이를 수하로 부리며 타고 다니는 경우도 있다. 선도에서는 수행을 열심히 하는 이를 직접 보호하거나 부하를 시켜 보호하게 하는 경우도 있다. 대충 취미로 산삼 등의 희귀식물을 키우며 애완동물로 야수를 키우는, 늙지 않는 산 관리인 정도라고 보면 되겠다. 다시 말해 산의 인격화.
또한 산신도 위격에 따라 등급이 있어 낮은 산신들은 야트막한 산을 다스리지만 높은 산신은 특정 지역에서 가장 높고 지역 산줄기의 중심이 되는 높고 거친 산에 살면서 다스린다고 한다. 산신기도를 지낼 때도 낮은 산신은 조금만 소원을 빌어도 잘 받어주지만 큰 일은 잘 못하며, 높은 산신은 어지간해서는 기도를 잘 받지 않지만 정성이 닿으면 큰 일도 쉽게쉽게 들어준다고 한다.
일설에 따르면, 고대 사회에서 산은 풍부한 물자를[1] 품고 있으나, 호랑이나 늑대, 곰 등 맹수들의 서식처이기 때문에 보고이자 동시에 공포의 대상이었고, 그에 따라 산신이나 산신령등 산을 관리하거나 주인의 역할을 하는 신들은 매우 격이 높은 신으로 여겨졌다고 한다.[2] 하지만 사회의 규모가 커지고, 불교나 유교 사상이 들어서고, 기술이 발달해 산의 위험이 줄어들면서 점점 그 격이 떨어졌다고 한다.
산이 많은 한국답게 전래동화에 단골로 출연하며, 주로 심마니에게 산삼의 장소를 가르쳐주거나[3] 도끼를 빠뜨린 나무꾼에게 귀금속 도끼를 막 주거나[4][5] 한다.
산악에 대한 숭배 관념은 전세계적으로 퍼져 있고, 한국의 경우에도 단군신화에서도 등장할만큼 오래되었다. 환웅이 처음 지상에 내려와 좌정한 곳이 태백산 꼭대기 신단수였고, 단군이 나라를 다스리다 마지막에 들어간 곳이 아사달산(阿斯達山)이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황해도 구월산에는 환인, 환웅, 단군을 모시는 삼성사가 있었고, 강화도 마니산에는 단군이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는 참성단이 남아 있다.
한국의 역대 왕조는 모두 중국의 제사 제도를 본따서 국토의 중요한 명산 다섯 곳을 골라 오악(五嶽)으로 지정하고 국가에서 제사를 거행했다. 신라에서는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난 뒤 토함산(吐含山), 계룡산(鷄龍山), 지리산(智異山), 태백산(太伯山), 팔공산(八公山) 이렇게 다섯 산을 국가의 오악으로 지정했는데, 이들 산은 모두 국가적으로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이기도 했다. 토함산의 경우는 신라 4대 왕(이사금)이었던 석탈해가 죽어서 묻힌 곳이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문무왕의 꿈에 석탈해가 나타나 "내 무덤을 파서 내 뼈와 진흙을 섞어서 소상을 만들고 토함산에 모시라"고 명령했고 이후 석탈해가 동악대신(東岳大神)으로 모셔졌다고 적고 있다. 오악 외에도 신라삼산(新羅三山)이라고 해서 김유신이 고구려의 간첩 백석에게 속아 고구려로 납치될 뻔한 위험을 막아준 호국신이 이들 삼산신이었고, 삼산신은 국가 제사 편제에서 격이 가장 높은 대사(大祀)로 쳤다. 삼산의 위치는 분명하지는 않지만 신라가 진한 소국이었을 때부터 존재했던 신앙이라고.
산신은 신라 말기에는 나라가 멸망할 것을 경고하기 위해서 왕의 앞에 나타나는 경우도 있었는데, 49대 헌강왕의 앞에 남산신이 나타나서 춤을 추어 "지혜롭고 현명한 자들이 모두 떠나버려서 나라가 멸망하고 말 것"을 경고했지만 신의 모습은 왕 말고는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았고, 왕은 신이 추는 춤을 따라 추면서도 그게 그냥 신이 나타나서 내 태평성세를 축하해 주시고 있구나 정도로 생각하고 말았다고...
고려 시대 부소산이라고도 불렸던 송악산 산신의 경우는 고려 태조의 외가쪽 조상이기도 한 성골장군 호경이[6] 송악산신의 남편이 되어 또한 자신도 산신이 되었으며, 몽골의 침공 때는 산의 소나무가 일제히 사람 우는 듯한 소리를 내는 바람에 몽골군이 "신이 있는 산이다"라며 물러갔다고 하고, 고려 혜종의 외가이기도 했던 나주의 금성산은 삼별초를 진압하는데 도움을 주었다고 해서 정녕공(定寧公)에 봉해지기도 했다.
조선 왕조가 세워진 뒤에는 새로운 수도가 된 한양의 사방에 위치한 산신에게 작호를 내려 한양의 방호를 청했다고 한다. 이때 북악산을 진국백(鎭國伯), 목멱산을 목멱대왕(木覓大王)이라고 작호를 주었다고. 하지만 아무리 낮은 위격의 산신[7] 이라 해도 서낭신이나 솟대, 장승 등 마을신보다는 높은 위격의 신으로 모셔진다.[8] 다만 지역에 따라 분류가 애매모호한 경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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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산신도. 당시로는 보기 드문 여성 산신을 묘사했다.(출처)
보통 할아버지로 많이 묘사되지만 할머니나 아줌마, 부부 산신도 존재한다. 일설에 따르면 본래 산신은 농경신/지모신적인 여신이었는데 이에 짝을 지우고, 유교 전통이 깊숙히 침투함에 따라 그 남편이 산신으로 대체되는 경향을 보인다고 한다.
여성 산신의 일례로 꼽을 수 있는 것이 첩자의 꼬임으로 적성국(고구려) 탐험여행(?)을 떠나려다 세 미녀의 만류로 돌아온 김유신 설화이다. 이때 김유신을 구한 세 미녀가 서라벌을 지키는 세 산의 산신이었다.[9] 대가야의 시조 이진아시왕의 어머니도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가야산의 산신 정견모주로 여신으로 되어 있는데, 가야산 해인사의 산신각에는 한동안 수염이 난 남자 산신의 그림이 모셔져 있었다.[10] 삼국유사에는 남해 차차웅의 부인으로 노례 이사금의 어머니인 운제부인이 운제산성모가 되었다거나, 중국 공주였던 사소가 바다 건너 진한으로 와서 박혁거세와 알영 두 사람을 낳았고 선도산에 들어가 선도성모라는 산신이 되었다는 전승도 싣고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의 외가 쪽 5대조인 호경도 부소산(송악산) 여신에게 장가들어서 신이 되었다고 고려사 고려세계에 남아 있다. 지리산 산신도 지리산성모라는 이름의 여신으로 그 석상이 지금도 남아 있으며, 고려 태조의 어머니인 위숙왕후 한씨가 지리산성모라고 하는 전승도 있다. 조선 시대의 천예록에는 북악산의 산신이 여신으로 마주 보고 있는 목멱산(남산)의 신과 부부사이로 설정되어 있는데, 권필이라는 선비가 북악산 여신의 제사를 지내는 자리에서 "이까짓 여자 귀신 따위가 뭐라고" 하고는 산신의 초상화를 찢고 제삿상도 엎어버렸다가 산신의 저주를 받아 귀양을 가게 되고 유배지로 가는 길에 죽었다는 이야기를 싣고 있다. 강릉단오제에서 범일국사(성황신)와 함께 모시는 정씨 처녀(여성황) 역시 산신의 범주로 볼 수 있다. 덧붙여 일본에서는 산의 신은 질투가 심한 여자라고 한다.
그러나 산신을 원시시대 수렵이 주 경제수단이던 시절의 사냥의 신에서 유래했다고 보는 설에서는 남신이라고 하며, 과거 주요 사냥터였던 산을 다스리는 점과 사나운 맹수인 호랑이와 관계되거나 호랑이를 부리는 것을 그 근거 중 하나로 들고 있다. 제주도의 산신멩감신앙이 대표적인데, 여기서 산신멩감은 수렵신으로 산신군졸들을 거느리고 다니는 남성적인 성향을 보인다.
1.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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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암미술관 소장 산신도(출처)
2. 개요
말 그대로 산에 사는 신령. 주로 백발에 긴수염을 가지고 흰옷을 입은 할아버지로, 등장 장소는 꿈 속이나 산중의 알 수 없는 곳, 또는 연못, 옹달샘 등이다.
무속에서는 조금 더 격이 높아져 산 하나와 가까운 지역을 관리하며, 호랑이를 수하로 부리며 타고 다니는 경우도 있다. 선도에서는 수행을 열심히 하는 이를 직접 보호하거나 부하를 시켜 보호하게 하는 경우도 있다. 대충 취미로 산삼 등의 희귀식물을 키우며 애완동물로 야수를 키우는, 늙지 않는 산 관리인 정도라고 보면 되겠다. 다시 말해 산의 인격화.
또한 산신도 위격에 따라 등급이 있어 낮은 산신들은 야트막한 산을 다스리지만 높은 산신은 특정 지역에서 가장 높고 지역 산줄기의 중심이 되는 높고 거친 산에 살면서 다스린다고 한다. 산신기도를 지낼 때도 낮은 산신은 조금만 소원을 빌어도 잘 받어주지만 큰 일은 잘 못하며, 높은 산신은 어지간해서는 기도를 잘 받지 않지만 정성이 닿으면 큰 일도 쉽게쉽게 들어준다고 한다.
일설에 따르면, 고대 사회에서 산은 풍부한 물자를[1] 품고 있으나, 호랑이나 늑대, 곰 등 맹수들의 서식처이기 때문에 보고이자 동시에 공포의 대상이었고, 그에 따라 산신이나 산신령등 산을 관리하거나 주인의 역할을 하는 신들은 매우 격이 높은 신으로 여겨졌다고 한다.[2] 하지만 사회의 규모가 커지고, 불교나 유교 사상이 들어서고, 기술이 발달해 산의 위험이 줄어들면서 점점 그 격이 떨어졌다고 한다.
3. 한국에서의 산신
산이 많은 한국답게 전래동화에 단골로 출연하며, 주로 심마니에게 산삼의 장소를 가르쳐주거나[3] 도끼를 빠뜨린 나무꾼에게 귀금속 도끼를 막 주거나[4][5] 한다.
산악에 대한 숭배 관념은 전세계적으로 퍼져 있고, 한국의 경우에도 단군신화에서도 등장할만큼 오래되었다. 환웅이 처음 지상에 내려와 좌정한 곳이 태백산 꼭대기 신단수였고, 단군이 나라를 다스리다 마지막에 들어간 곳이 아사달산(阿斯達山)이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황해도 구월산에는 환인, 환웅, 단군을 모시는 삼성사가 있었고, 강화도 마니산에는 단군이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는 참성단이 남아 있다.
한국의 역대 왕조는 모두 중국의 제사 제도를 본따서 국토의 중요한 명산 다섯 곳을 골라 오악(五嶽)으로 지정하고 국가에서 제사를 거행했다. 신라에서는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난 뒤 토함산(吐含山), 계룡산(鷄龍山), 지리산(智異山), 태백산(太伯山), 팔공산(八公山) 이렇게 다섯 산을 국가의 오악으로 지정했는데, 이들 산은 모두 국가적으로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이기도 했다. 토함산의 경우는 신라 4대 왕(이사금)이었던 석탈해가 죽어서 묻힌 곳이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문무왕의 꿈에 석탈해가 나타나 "내 무덤을 파서 내 뼈와 진흙을 섞어서 소상을 만들고 토함산에 모시라"고 명령했고 이후 석탈해가 동악대신(東岳大神)으로 모셔졌다고 적고 있다. 오악 외에도 신라삼산(新羅三山)이라고 해서 김유신이 고구려의 간첩 백석에게 속아 고구려로 납치될 뻔한 위험을 막아준 호국신이 이들 삼산신이었고, 삼산신은 국가 제사 편제에서 격이 가장 높은 대사(大祀)로 쳤다. 삼산의 위치는 분명하지는 않지만 신라가 진한 소국이었을 때부터 존재했던 신앙이라고.
산신은 신라 말기에는 나라가 멸망할 것을 경고하기 위해서 왕의 앞에 나타나는 경우도 있었는데, 49대 헌강왕의 앞에 남산신이 나타나서 춤을 추어 "지혜롭고 현명한 자들이 모두 떠나버려서 나라가 멸망하고 말 것"을 경고했지만 신의 모습은 왕 말고는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았고, 왕은 신이 추는 춤을 따라 추면서도 그게 그냥 신이 나타나서 내 태평성세를 축하해 주시고 있구나 정도로 생각하고 말았다고...
고려 시대 부소산이라고도 불렸던 송악산 산신의 경우는 고려 태조의 외가쪽 조상이기도 한 성골장군 호경이[6] 송악산신의 남편이 되어 또한 자신도 산신이 되었으며, 몽골의 침공 때는 산의 소나무가 일제히 사람 우는 듯한 소리를 내는 바람에 몽골군이 "신이 있는 산이다"라며 물러갔다고 하고, 고려 혜종의 외가이기도 했던 나주의 금성산은 삼별초를 진압하는데 도움을 주었다고 해서 정녕공(定寧公)에 봉해지기도 했다.
조선 왕조가 세워진 뒤에는 새로운 수도가 된 한양의 사방에 위치한 산신에게 작호를 내려 한양의 방호를 청했다고 한다. 이때 북악산을 진국백(鎭國伯), 목멱산을 목멱대왕(木覓大王)이라고 작호를 주었다고. 하지만 아무리 낮은 위격의 산신[7] 이라 해도 서낭신이나 솟대, 장승 등 마을신보다는 높은 위격의 신으로 모셔진다.[8] 다만 지역에 따라 분류가 애매모호한 경우도 있다.
4. 남녀 산신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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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산신도. 당시로는 보기 드문 여성 산신을 묘사했다.(출처)
보통 할아버지로 많이 묘사되지만 할머니나 아줌마, 부부 산신도 존재한다. 일설에 따르면 본래 산신은 농경신/지모신적인 여신이었는데 이에 짝을 지우고, 유교 전통이 깊숙히 침투함에 따라 그 남편이 산신으로 대체되는 경향을 보인다고 한다.
여성 산신의 일례로 꼽을 수 있는 것이 첩자의 꼬임으로 적성국(고구려) 탐험여행(?)을 떠나려다 세 미녀의 만류로 돌아온 김유신 설화이다. 이때 김유신을 구한 세 미녀가 서라벌을 지키는 세 산의 산신이었다.[9] 대가야의 시조 이진아시왕의 어머니도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가야산의 산신 정견모주로 여신으로 되어 있는데, 가야산 해인사의 산신각에는 한동안 수염이 난 남자 산신의 그림이 모셔져 있었다.[10] 삼국유사에는 남해 차차웅의 부인으로 노례 이사금의 어머니인 운제부인이 운제산성모가 되었다거나, 중국 공주였던 사소가 바다 건너 진한으로 와서 박혁거세와 알영 두 사람을 낳았고 선도산에 들어가 선도성모라는 산신이 되었다는 전승도 싣고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의 외가 쪽 5대조인 호경도 부소산(송악산) 여신에게 장가들어서 신이 되었다고 고려사 고려세계에 남아 있다. 지리산 산신도 지리산성모라는 이름의 여신으로 그 석상이 지금도 남아 있으며, 고려 태조의 어머니인 위숙왕후 한씨가 지리산성모라고 하는 전승도 있다. 조선 시대의 천예록에는 북악산의 산신이 여신으로 마주 보고 있는 목멱산(남산)의 신과 부부사이로 설정되어 있는데, 권필이라는 선비가 북악산 여신의 제사를 지내는 자리에서 "이까짓 여자 귀신 따위가 뭐라고" 하고는 산신의 초상화를 찢고 제삿상도 엎어버렸다가 산신의 저주를 받아 귀양을 가게 되고 유배지로 가는 길에 죽었다는 이야기를 싣고 있다. 강릉단오제에서 범일국사(성황신)와 함께 모시는 정씨 처녀(여성황) 역시 산신의 범주로 볼 수 있다. 덧붙여 일본에서는 산의 신은 질투가 심한 여자라고 한다.
그러나 산신을 원시시대 수렵이 주 경제수단이던 시절의 사냥의 신에서 유래했다고 보는 설에서는 남신이라고 하며, 과거 주요 사냥터였던 산을 다스리는 점과 사나운 맹수인 호랑이와 관계되거나 호랑이를 부리는 것을 그 근거 중 하나로 들고 있다. 제주도의 산신멩감신앙이 대표적인데, 여기서 산신멩감은 수렵신으로 산신군졸들을 거느리고 다니는 남성적인 성향을 보인다.
5. 대중문화 속의 산신령
- 아래의 관련 항목 문단에 주르륵 이름이 나열된 것처럼 스포츠 종목에서 상식적인 수준을 넘어서는 긴 활동 경력을 가진 노장들을 반 농담, 반 존경의 의미로 '산신령'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물론 8~90년대만 해도 대부분의 스포츠 종목의 노장을 가르는 기준이 30대였던 것에 반해 2010년대를 넘어서면 대개 30대 중후반에 접어들어야 노장 소리를 듣기 시작하는 것처럼 전체적인 선수 경력이 길어지는 경향이 있다보니 이 '산신령'의 기준도 자꾸 높아지고 있다. 평균적으로 일반적인 은퇴 시기보다 대략 5년에서 10년 정도 더 현역으로 뛰는 선수들에게 이 영예로운(??) 칭호가 붙는 편.
- 한국 비주얼 노벨 당신을 기다리는 여우에서는 모에선을 쬔 수영복 금발 엘프 산신령이 등장한다. 외모만 보면 뜬금없다.
- 웹툰 호랑이형님에서는 아린이 백두산의 신령으로 등장한다. 다만 흔히 알려진 산신령과는 달리 젊은 남자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신령 자리를 두고 동족끼리 전쟁을 벌인다는 설정도 있는 등 보다 세세한 묘사를 하고 있다.
6. 관련 문서
[1] 금은이나 철, 구리 같은 광맥, 집 짓는데 사용하는 목재나 식재료 및 각종 약재로 쓰이는 식물은 물론 주요 하천이 발원하는 수원지(水源地)이기도 하다.[2] 예로 무속에서는 보통 마을을 담당하는 당산신보다도 해당 마을과 인접한 산신령을 보다 상위로 취급한다.[3] 산신의 도상은 대부분이 지팡이 든 반대편 손에 산삼을 들고 있다.[4] 자신이 가진 도끼가 쇠도끼라는걸 솔직히 말한 나무꾼에게만 한정. 그렇지 않은 사람의 도끼는 호통과 함께 도끼마저 빼앗아가 버린다.[5] 다만 이 금도끼 은도끼 설화는 본래 한국의 전래동화가 아니라 이솝 우화에서 유래한 것이다. 거기다 산신령 역할은 본래 헤르메스가 맡은 것이다. 헤르메스는 원전에서는 도둑과 상업의 수호신이라고.[6] 호경은 남쪽으로 내려오기 전에는 백두산에 있었다고 언급된다.[7] 대체로 국가제사에서 소사(小祀)로 분류되는 경우.[8] 민속학에서 산신은 상당신, 장승이나 서낭신 등의 마을신은 하당신으로 분류된다.[9] 김유신은 나중에 '''그 본인이''' 대령산신(대관령 산신)으로 모셔진다. 조선 시대 이후에는 단종이 대관령 산신으로 모셔지기도 했다.[10] 지금은 여신의 그림으로 바뀌었고 원래 있던 남신의 그림은 따로 보관 중이라고.[11] 2019년 8월 현재, 만 52세의 나이임에도 아직 현역이다. 도하의 기적에서 눈물 흘렸고 황선홍, 홍명보랑 상대하던 그 미우라가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