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스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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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스 한(Hans "Assi" Hahn : 1914. 4. 14~1982. 12. 18)'''

1. 서훈
2. 작가의 아들
3. 육상선수 출신 조종사
4. 유럽 전선
5. 동부전선으로
6. 포로 생활과 노년


1. 서훈


2급 철십자 훈장 (1940년 5월 30일)
1급 철십자 훈장 (1940년 6월 13일)
기사 철십자 훈장 (1940년 9월 24일)
곡엽기사철십자 훈장 제32호 (1941년 8월 14일)
독일 황금십자장 (1942년 7월 16일)

2. 작가의 아들


독일 제국이 저물어가던 시대인 1914년 4월 14일, 튀링겐 지방의 5대 도시 중인 하나인 고타(Gotha)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나고 나서 3개월 후, 유럽은 전쟁의 광풍이 불게 되었고, 갓난 아기인 한스의 아버지는 문필가였지만 군대에 징집되었다가 부상을 입고 돌아왔다. 아들에게 '''한스 로베르트 프리츠 한(Hans Robert Fritz Hahn)'''이란 조상들의 이름들을 붙여주었던 아버지는 전선으로 돌아온 후 활달하게 자라나는 아들과 큰딸 케이트를 키우며 낙으로 삼았다.

3. 육상선수 출신 조종사


어린 한스 소년은 커가면서 운동선수로서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아마 전쟁이 아니었다면 그는 유명한 육상선수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제3제국의 수도 베를린에서 개최된 1936년 하계 올림픽에서 근대 5종 경기에 국가대표 육상선수로 선발되었을 정도였으니, 그가 어느 정도 운동에 재능이 있었는지는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러나 청년 한스는 나이를 먹으면서 관절에 문제가 생겼고, 일상 생활에는 문제가 없지만 결코 선수 생활을 계속 할 수는 없다는 진단을 받게 된다.
올림픽 선수로 뽑히기 전에 청년 한스는 1934년에 육군사관학교 생도로 입대했다. 1935년 11월에는 독일 공군에 전출을 가서 기본 조종 훈련을 받았다. 바로 이 시절에 더 이상 육상 선수의 길을 걸을 수 없다는 판정을 받은 한스 한은 한때 절망했지만, 다시 심기일전해서 누구보다도 뛰어난 조종사가 되겠다고 굳게 마음을 먹었다. 갓 소위 계급장을 단 한스 한은 도르트문트 근교에 주둔하고 있던 제134전투항공단(JG 134 "호르스트 베셀")의 제4비행중대에 배속되었고, 1937년 11월 1일에는 베르노이헨(Werneuchen)에 새로 세워진 전투비행학교에 비행 조교 겸 제1비행중대의 지휘자(Staffelführer)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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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5월 한스 한의 탑승기 Fw 190A-3'''


4. 유럽 전선


1939년 2월 1일에 중위로 승진하고 반년 후에 2차 대전이 시작되었고, 제르브스트에 새로 편성된 제2전투항공단/제 II 비행단(JG 2/2 Gruppe)에 배속된 그는 연말에는 제4비행중대의 중대장에 임명되었다. 한스 한이 전쟁에서 처음 거둔 전과는 프랑스 침공 작전 중인 1940년 5월 14일에 2대의 호커 허리케인 전투기였다. 이 전역에서 5대를 더 격추하고, 이어진 배틀 오브 브리튼에서는 1940년 9월까지 20대를 헤아리는 준수한 에이스가 되었다. 이 싯점에서 한스 한 중위에게는 기사철십자 훈장이 수여되면서 대위로 승진함과 동시에 JG 2/제 III 비행단장 보직이 주어졌다.
1941년 8월에 한스 대위는 41기 격추 전과를 치하하는 의미로 곡엽기사 철십자 훈장이 전군에서 32번째로 수여되었다. 이듬해인 1942년 9월 16일에는 스핏파이어를 격추하며 서부 전선에서만 66대의 격추 스코어를 기록하게 된다.

5. 동부전선으로


그 후 한스 한 대위는 1942년 11월 1일자로 동부전선으로 가게 되었고, 레닌그라드 근교에 주둔하는 제54전투항공단(JG 54) 예하의 제 II 비행단장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사실 이 시기는 소련 공군이 독소전 초기의 충격에서 서서히 벗어나 장비나 전술면에서 점차 그 수준이 높아지기 시작하고 있었지만, 도버 해협에서 영국 공군의 스핏파이어와 허리케인과 박터지게 싸워본 그가 보기엔 소련 조종사들은 자신의 전공을 더해주기 좋은 만만한 적기일 따름이었다. 한스 한은 이 전역에 오고 나서 3개월 만에 무려 42대의 소련 공군기를 포식해버렸고, 1943년 1월 27일에는 자신의 전과를 드디어 100기까지 늘려놓게 된다.
그로부터 20여일이 지난 2월 21일, 이제는 소령이 된 한스 한은 스타라야 상공에서 108번째 제물로 라보츠킨 La-5를 격추한 직후 상대방 윙맨이 응사한 반격에 왼쪽 날개에 피탄을 당했다. 곧 교전에서 이탈한 그는 기지쪽으로 돌아가다가 엔진이 과열되어 불이 났고, 한스 한은 어쩔 수 없이 자신의 탑승기 Bf 109G-2/R6(W.Nr. 13949)를 적진에 불시착시킬 수밖에 없었다. 소련 공군 전투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한스 한을 격추한 노련한 소련 조종사는 그때까지 13대의 독일기를 떨군 제169친위전투기 연대(169-го ИАП)의 에이스 파일럿인 파벨 그라즈다니노프(Павел Андреевич Гражданинов : 1920~1943) 중위였다고 한다.

6. 포로 생활과 노년


한스 한은 소련군 병사들에게 잡혀 포로가 되었다. 혹독하기 짝이 없는 소련 수용소라는 가혹한 환경에도 한스 한은 전혀 굴복하지 않고 소련군 간수들을 오히려 약을 올렸고, 틈만 나면 탈주를 시도해 수감 기간이 늘어나 7년 후인 1950년까지 갇혀 있게 된다. 이미 전쟁이 끝난지가 오랜 후에야 겨우 석방된 한스 한은 이제 민간인이었다.
독일이 전쟁에서 이겼다면 한스 한은 돌아온 전쟁 영웅 대접을 받으며 호의호식하기 좋았겠지만, 그렇지 못했다. 다행히도 그런 한스 한을 알아 본 독일의 대기업 바이엘 레버쿠젠 제약회사는 그를 간부로 고용했고, 고슬라에서 화약을 생산하는 공장(Wano Schwarzpulver Company)의 중역이 되었다. 1977년에 공직에서 은퇴한 그는 자신의 전성기에 해협 전투를 하며 매료되었던 프랑스 남부로 이주해 노년을 즐겼다.
한스 "오시" 한은 1982년 12월 18일에 뮌헨에서 사망했다. 전쟁 동안 그는 560회 출격하며 공인 격추 108기를 기록했다.
서부전선에서 거둔 66대 중에서 무려 53기가 Bf 109의 강력한 라이벌 스핏파이어였는데, 이 기록은 요셉 프릴러의 68기와 요제프 부름헬러의 56기 바로 다음에 해당되는 것이다. 또한 동부전선에서 거둔 42대의 스코어 중에는 7대 이상의 IL-2 슈톨모빅이 포함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