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제프 부름헬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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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제프 부름헬러(Josef "Sepp" Wurmheller : 1917. 5. 4~1944. 6. 22)'''
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는 동안 102대의 적기를 격추한 에이스 파일럿으로, 최고 등급 훈장인 곡엽검 기사철십자 훈장을 추서받았다.
전상장 흑장
공군 최전선비행 금장
파일럿 겸 관측수 기장
2급 철십자 훈장 (1939년 10월 19일)
1급 철십자 훈장 (1940년 10월 16일)
공군 명예컵 (1941년 8월 30일)
독일 황금십자장 (1942년 8월 21일)
기사 철십자 훈장 (1941년 9월 4일)
곡엽 기사철십자 훈장 제146호 (1942년 11월 13일)
곡엽검 기사철십자 훈장 제108호 (1944년 10월 24일)
독일 제국 시대인 1917년 5월 4일에 제국 남부인 바이에른 왕국의 하우스함(Hausham)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를 일찍 여윈 요제프 소년은 고향과 가까운 슐리에르제(Schliersee)에 있는 삼촌의 농장에서 자라나게 되었고, 청년이 되어서는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광산의 노동자로 4년간 일했다. 젊은 요제프 청년은 열광적인 비행 애호가였고 다행히도 당시의 독일은 글라이더 같은 항공 스포츠가 국가적으로 장려되고 있었던 탓에 조종 적성만 어느 정도 좋고 열의만 있다면 얼마든지 글라이더 조종사가 될 수 있었다. 이런 배경을 바탕으로 요제프 부름헬러는 스무 살이 되던 1937년에 독일 공군에 입대했다.
부름헬러는 비행교육에 매우 열심이었고, 2년 후인 1939년에는 전투조종사로 훈련을 마친 후 상병 계급장을 달고 제53전투항공단(JG 53)의 제2비행단에 배속되었다.
1939년 9월 1일, 독일군이 폴란드 국경을 넘어 침공을 개시하면서 2차 대전이 시작되었다. 9월 30일, 대전 초기의 앉은뱅이 전쟁 기간 동안 JG 53 제 I 비행단에서 근무하고 있던 요제프 상병은 자르브뤼켄 근처에서 영국 공군(RAF) 제150스쿼드론 소속의 페어리 배틀 전투기 5대로 이루어진 편대를 만나면서 난생 처음으로 적기를 마주하게 되었다. 이 우발적인 교전에서 부름헬러는 페어리 배틀 K9283호기를 격추시키면서 자신의 첫 전과를 기록했다. 이때 격추된 영국 공군기에는 메장에서 자르브뤼켄까지의 항공 정찰 임무에 나선 윌리암 맥도날드 소령이 타고 있었는데, 소령은 부근의 유명한 승마장인 에큐리 델라 쿠르(Ecurie de la Cour)의 잔디밭에 불시착했다. 루프트바페는 1차 대전 조종사들의 관습에 따라 장교를 격추시키면 그 무공을 더 높게 평가해주고 있었는데, 부름헬러 상병은 이 공로를 인정받아 첫 격추였을 따름이었는데 10월 19일에 2급 철십자 훈장을 수여받게 된다. 동료들도 비행병에 불과한 요제프 상병의 조종 실력만큼은 높게 평가했는데, 이런 주변의 평가로 인하여 부름헬러는 같은 해 11월에는 베르노이헨에 있는 전투조종사 학교의 교관 보직이 주어졌다.
루프트바페는 지금까지 만난 최고의 강적 영국 공군과 일진일퇴를 거듭하게 되는 도버 해협 전투가 시작되자 전투기 조종사가 딸리기 시작했다. 1940년 6월, 배틀 오브 브리튼의 개전에 맞춰 후방에서 교관 생활을 하던 부름헬러는 JG 53 제5비행중대로 되돌려 보내졌다. 그는 이 전투 동안에, 전투기와 전투폭격기 조종사로 공대공 전투는 물론 공대지 임무까지 수행하게 된다. 9월 28일에는 슈퍼마린 스핏파이어를 한번의 교전에서 2기나 격추시켰다. 10월 16일에는 5번째 제물로 쌍발 폭격기 브리스톨 블레니엄을 떨구자 드디어 에이스 파일럿으로 등극하며 1급 철십자훈장을 받았다.
그렇지만 부름헬러 본인도 RAF 전투기와 격전을 거듭하면서 3회나 격추되었으나 다행히도 매번 비상 탈출에 성공했다. 그의 세 번째 추락은 11월 23일 오후 5시 10분경, 영국 해협 상공에서 Bf 109E-4(기체번호 5242)를 탄채 피탄 당하자 가까스로 해상에 불시착한 것이다. 깊은 바다로 가라앉는 기체에서 간신히 빠져나온 그는 독일 해군의 고속정에 의해 구출될 때까지 4시간 반 동안이나 필사적으로 수영하고 있었다.
이 때 입은 부상을 치료하기 위해 1941년 3월까지 입원한 그는 상처가 완치되자 또다시 전투에 나섰다. 5월 7일에 또다시 스핏파이어 2대를 동시에 해치운 그는 10대 격추를 달성했다. 그 후 부름헬러의 부대는 6월 22일에 시작한 바르바로사 작전을 위해 동부전선 각지를 전전하였다. 작전 기간 동안, 부름헬러의 항공단은 남부군 사령부에 배속되었다. 그동안 부름헬러는 8대의 투폴레프 SB 폭격기와 1대의 폴리카르포프 I-16 전투기를 격추시키며 자신이 동토의 땅에 왔음을 알리게 된다. 7월 15까지 부름헬러는 러시아에서 계속 싸우면서 19대째 전과를 거두었다.
강력하고 고성능 전투기로 무장한 RAF 조종사들과 연일 혈투를 벌이며 공중전이라면 도가 튼 요제프 부름헬러에게 경험없고 장비의 수준도 떨어지는 소련 조종사들은 그야말로 어른과 아이의 싸움과도 같았다. 러시아로 건너온 후 부름헬러는 격추는 고사하고 피탄 한번 당하지 않고 무패의 격추 행진을 계속하고 있었던 것이다.
7월 20일, 다시 서부 전선으로 돌아오게 된 요제프 부름헬러는 이제 중사 계급장을 달고 있었다. 요제프 중사는 제2전투항공단(JG 2) 제II비행단의 참모에 임명되었다. 7월 24일에 20대째 격추를 달성한 그는 8월에는 자신의 스핏파이어 격추 기록을 10대로 만들었다. 8월 30일부로 공군 명예컵을 받은 그는 9월 4일에는 31기 격추의 무공에 대하여 기사철십자훈장을 수상했다. 이 서훈에는 부름헬러가 예전에 머물렀던 JG 53의 상관과 동료들의 추천에도 힘입은 바가 컸었다. 그렇지만 규정은 규정이라서 이 훈장은 JG 2로 공식 배속 명령이 떨어지기 전까지는 승인되지 않았다.
같은 날, 제II비행단의 동료 조종사인 쿠르트 뷜리겐(112대 격추)이 기사 철십자훈장을 수여받았다. 그 사이 부름헬러는 가벼운 부상을 입고 다시 베르노이헨 전투조종사 학교의 교관 임무를 맡게 되며 잠시 전선에서 떠나있을 수 있었다. 1942년 5월, 다시 최전선에 돌아온 그는 제1비행단에 배속되어 5월에 10대, 6월에 11대의 스핏파이어를 줄지어 격추키는 기염을 토했다. 이 전과에는 5월 31일에 촬영된 4대와 6월 5일에 건카메라에 찍힌 4대를 포함되어 있다.
당시의 부름헬러는 임무 대부분을 루돌프 플란츠(Rudolf Pflanz : 1914~1942 / 52대 격추) 대위의 윙맨을 맡고 있었다. 루프트바페에서 윙맨은 철저히 편대장기를 엄호하고 보좌하는 역할에 국한되어 있던 사정을 감안하면, 부름헬러에게 격추 기회가 주어졌다면 더 많은 전공을 세웠을지도 모른다. 8월 19일에 디에프 전투에서 부름헬러는 그 유명한 전설적인 활약을 펼쳤다. 이 날, 연합군은 독일이 점령하고 있던 디에프에 교두보를 마련하는데 실패했다. 그 무렵 오른발에 석고를 댄 채 교관 생활을 하고 있던 부름헬러는 하루 동안 4회나 실전 출격을 감행하며 스핏파이어 6대와 블레니엄 1대(어쩌면 오인된 A-30)를 격추시켜 대망의 1일 에이스(ace in a day) 호칭을 얻게 된다.
이 날 첫 출격에서는 엔진이 고장나 기지로 돌아오며 불시착하다가 가벼운 뇌진탕 사고를 겪은 그였지만, 재차 다른 기체로 갈아타고 두 번째 출격에 나서 스핏파이어 2대와 블레니엄 폭격기 1대를 떨구었다. 3회째 출격에서 스핏파이어 3대를 단숨에 해치운 그는 연이어 4회째 출격에서도 스핏파이어 1대를 격추시켰고, 이로써 1일 에이스와 함께 자신의 59번째 전과를 새롭게 고쳐쓰게 된다.
이튿날인 8월 20일에 가볍게 60번째 격추를 달성한 요제프 부름헬러는 다음날인 8월 21일에 독일금십자 훈장을 수여받았다. 1942년 10월 1일에 소위로 승진한 그는 150회의 전투 임무를 치루는 동안 67기 격추를 기록했고, 그 무공으로 11월 14일에 독일군 전체를 통틀어 146번째로 곡엽기사철십자훈장을 수여받았다.
8월 17일부터 영국 공군의 제8폭격비행단은 노르망디 지방의 소트빌르루앙(Sotteville-lès-Rouen)에 공습을 개시했고, 미국의 제8공군도 정기적인 폭격 항정의 막을 열었다. 부름헬러는 의심할 나위 없이 뛰어난 전투조종사였지만, 폭격기 상대로는 더욱 치명적인 전사라는 것이 드러났다. 1943년 1월 3일에 부름헬러는 B-17을 4대나 격추시키며 중폭격기 에이스로서 자신의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다. 4월 1일에 그는 제54전투항공단(JG 54) 제 III 비행단으로 전속을 간 부름헬러는 이제 연합군 폭격기를 물어뜯기 위해 온 신경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제국 원수이자 공군 총사령관 헤르만 괴링은 이즈음부터 일선의 수퍼 에이스들을 유력한 전투기 부대의 지휘관으로 임명하는 조치를 취하고 있었는데, 부름헬러 또한 그런 인사 정책의 일환으로 지크프리트 슈넬 대령의 후임으로 JG 2의 비행단 지휘관으로 임명한 것이다.
5월 17일에 또다시 B-17을 지상에 처박은 부름헬러의 전과는 이제 70기까지 올라 있었다. 9월 23일에 연합군 폭격기 부대가 프랑스 북서부의 반(Vannes)을 공습하는 동안 부름헬러가 탄 Fw 190A-6가 불시착했는데, 기체의 주변에 떨어진 폭탄의 파편으로 부상을 입었다. 8월 1일에 중위로 진급한 그는 석 달 후인 11월 1일에 대위 계급장이 주어졌다. 1944년 2 월 8 일, 독일 본토 항공전이 시작되었을 때 부름헬러 대위는 르 뜨헤뽀흐(Le Tréport) 근처에서 미군 전투기를 처음 격추시켰다. 두려운 적인 연합군기를 상대로도 물러나지 않으며 차근차근 전과를 쌓아올린 요제프 부름헬러 대위는 3월 8일부로 90대 격추를 달성했다.
6월 6일, 연합군이 노르망디 상륙 작전을 성공시킨 후에도 부름헬러는 격추 행진을 멈추지 않았다. 6월 8일, 칸느 부근 상공에서 격추된 헤르베르트 후페르츠(Herbert Huppertz : 1919~1944 / 68대 격추) 대위의 후임자로 JG 2 제 III 비행단장으로 임명되었다. 6월 12일에는 폭격기를 요격하다가 덤으로 P-47을 격추시키면서 독일 공군에서 80번째로 100대 격추를 달성했다. 물론 부름헬러의 전과는 그 대부분이 미영 공군기를 상대로 거둔 것이므로 독소전의 100대 격추와는 그 격을 달리하고 있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6월 16일, 부름헬러는 자신의 생애 마지막 전공이 될 P-51을 잡아냈다.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난 6월 22일에 Fw 190A-8에 타고 있던 부름헬러 대위는 알랑송(Alençon) 근처에서 미 육군 P-47과 캐나다 공군의 스핏파이어와 뒤얽혀 격렬한 선회전투를 벌이다가 윙맨으로 뒤를 따르던 쿠르트 프란츠케(Kurt Franzke) 상사의 탑승기와 충돌하고 말았고, 이 불의의 사고로 인해 어이없는 최후를 맞이하고 말았다.
루프트바페 사령부는 그로부터 4달이 흐른 10월 24일에 탁월한 하늘의 투사이자 연합군에게 가장 큰 피해를 입히고 있던 요제프 부름헬러 대위에게 소령 계급장과 함께 사실상의 최고훈장인 곡엽검 기사철십자훈장을 추서해주었다. 그의 이름을 따서 제프(Sepp)라는 콜사인으로 불리던 요제프 부름헬러 소령은 전쟁 동안 300회 이상을 출격하면서 102대의 적기를 격추시켰다. 동부 전선에서 떨군 9대를 제외하면 그 모두가 미영 공군기였으며, 그중에서 적어도 18대는 4발 중폭격기였다.
'''요제프 부름헬러(Josef "Sepp" Wurmheller : 1917. 5. 4~1944. 6. 22)'''
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는 동안 102대의 적기를 격추한 에이스 파일럿으로, 최고 등급 훈장인 곡엽검 기사철십자 훈장을 추서받았다.
1. 서훈
전상장 흑장
공군 최전선비행 금장
파일럿 겸 관측수 기장
2급 철십자 훈장 (1939년 10월 19일)
1급 철십자 훈장 (1940년 10월 16일)
공군 명예컵 (1941년 8월 30일)
독일 황금십자장 (1942년 8월 21일)
기사 철십자 훈장 (1941년 9월 4일)
곡엽 기사철십자 훈장 제146호 (1942년 11월 13일)
곡엽검 기사철십자 훈장 제108호 (1944년 10월 24일)
2. 청년 시절
독일 제국 시대인 1917년 5월 4일에 제국 남부인 바이에른 왕국의 하우스함(Hausham)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를 일찍 여윈 요제프 소년은 고향과 가까운 슐리에르제(Schliersee)에 있는 삼촌의 농장에서 자라나게 되었고, 청년이 되어서는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광산의 노동자로 4년간 일했다. 젊은 요제프 청년은 열광적인 비행 애호가였고 다행히도 당시의 독일은 글라이더 같은 항공 스포츠가 국가적으로 장려되고 있었던 탓에 조종 적성만 어느 정도 좋고 열의만 있다면 얼마든지 글라이더 조종사가 될 수 있었다. 이런 배경을 바탕으로 요제프 부름헬러는 스무 살이 되던 1937년에 독일 공군에 입대했다.
부름헬러는 비행교육에 매우 열심이었고, 2년 후인 1939년에는 전투조종사로 훈련을 마친 후 상병 계급장을 달고 제53전투항공단(JG 53)의 제2비행단에 배속되었다.
3. 전쟁이 터지다
1939년 9월 1일, 독일군이 폴란드 국경을 넘어 침공을 개시하면서 2차 대전이 시작되었다. 9월 30일, 대전 초기의 앉은뱅이 전쟁 기간 동안 JG 53 제 I 비행단에서 근무하고 있던 요제프 상병은 자르브뤼켄 근처에서 영국 공군(RAF) 제150스쿼드론 소속의 페어리 배틀 전투기 5대로 이루어진 편대를 만나면서 난생 처음으로 적기를 마주하게 되었다. 이 우발적인 교전에서 부름헬러는 페어리 배틀 K9283호기를 격추시키면서 자신의 첫 전과를 기록했다. 이때 격추된 영국 공군기에는 메장에서 자르브뤼켄까지의 항공 정찰 임무에 나선 윌리암 맥도날드 소령이 타고 있었는데, 소령은 부근의 유명한 승마장인 에큐리 델라 쿠르(Ecurie de la Cour)의 잔디밭에 불시착했다. 루프트바페는 1차 대전 조종사들의 관습에 따라 장교를 격추시키면 그 무공을 더 높게 평가해주고 있었는데, 부름헬러 상병은 이 공로를 인정받아 첫 격추였을 따름이었는데 10월 19일에 2급 철십자 훈장을 수여받게 된다. 동료들도 비행병에 불과한 요제프 상병의 조종 실력만큼은 높게 평가했는데, 이런 주변의 평가로 인하여 부름헬러는 같은 해 11월에는 베르노이헨에 있는 전투조종사 학교의 교관 보직이 주어졌다.
4. 배틀 오브 브리튼
루프트바페는 지금까지 만난 최고의 강적 영국 공군과 일진일퇴를 거듭하게 되는 도버 해협 전투가 시작되자 전투기 조종사가 딸리기 시작했다. 1940년 6월, 배틀 오브 브리튼의 개전에 맞춰 후방에서 교관 생활을 하던 부름헬러는 JG 53 제5비행중대로 되돌려 보내졌다. 그는 이 전투 동안에, 전투기와 전투폭격기 조종사로 공대공 전투는 물론 공대지 임무까지 수행하게 된다. 9월 28일에는 슈퍼마린 스핏파이어를 한번의 교전에서 2기나 격추시켰다. 10월 16일에는 5번째 제물로 쌍발 폭격기 브리스톨 블레니엄을 떨구자 드디어 에이스 파일럿으로 등극하며 1급 철십자훈장을 받았다.
그렇지만 부름헬러 본인도 RAF 전투기와 격전을 거듭하면서 3회나 격추되었으나 다행히도 매번 비상 탈출에 성공했다. 그의 세 번째 추락은 11월 23일 오후 5시 10분경, 영국 해협 상공에서 Bf 109E-4(기체번호 5242)를 탄채 피탄 당하자 가까스로 해상에 불시착한 것이다. 깊은 바다로 가라앉는 기체에서 간신히 빠져나온 그는 독일 해군의 고속정에 의해 구출될 때까지 4시간 반 동안이나 필사적으로 수영하고 있었다.
5. 독소전
이 때 입은 부상을 치료하기 위해 1941년 3월까지 입원한 그는 상처가 완치되자 또다시 전투에 나섰다. 5월 7일에 또다시 스핏파이어 2대를 동시에 해치운 그는 10대 격추를 달성했다. 그 후 부름헬러의 부대는 6월 22일에 시작한 바르바로사 작전을 위해 동부전선 각지를 전전하였다. 작전 기간 동안, 부름헬러의 항공단은 남부군 사령부에 배속되었다. 그동안 부름헬러는 8대의 투폴레프 SB 폭격기와 1대의 폴리카르포프 I-16 전투기를 격추시키며 자신이 동토의 땅에 왔음을 알리게 된다. 7월 15까지 부름헬러는 러시아에서 계속 싸우면서 19대째 전과를 거두었다.
강력하고 고성능 전투기로 무장한 RAF 조종사들과 연일 혈투를 벌이며 공중전이라면 도가 튼 요제프 부름헬러에게 경험없고 장비의 수준도 떨어지는 소련 조종사들은 그야말로 어른과 아이의 싸움과도 같았다. 러시아로 건너온 후 부름헬러는 격추는 고사하고 피탄 한번 당하지 않고 무패의 격추 행진을 계속하고 있었던 것이다.
6. 다시 서부 전선으로
7월 20일, 다시 서부 전선으로 돌아오게 된 요제프 부름헬러는 이제 중사 계급장을 달고 있었다. 요제프 중사는 제2전투항공단(JG 2) 제II비행단의 참모에 임명되었다. 7월 24일에 20대째 격추를 달성한 그는 8월에는 자신의 스핏파이어 격추 기록을 10대로 만들었다. 8월 30일부로 공군 명예컵을 받은 그는 9월 4일에는 31기 격추의 무공에 대하여 기사철십자훈장을 수상했다. 이 서훈에는 부름헬러가 예전에 머물렀던 JG 53의 상관과 동료들의 추천에도 힘입은 바가 컸었다. 그렇지만 규정은 규정이라서 이 훈장은 JG 2로 공식 배속 명령이 떨어지기 전까지는 승인되지 않았다.
같은 날, 제II비행단의 동료 조종사인 쿠르트 뷜리겐(112대 격추)이 기사 철십자훈장을 수여받았다. 그 사이 부름헬러는 가벼운 부상을 입고 다시 베르노이헨 전투조종사 학교의 교관 임무를 맡게 되며 잠시 전선에서 떠나있을 수 있었다. 1942년 5월, 다시 최전선에 돌아온 그는 제1비행단에 배속되어 5월에 10대, 6월에 11대의 스핏파이어를 줄지어 격추키는 기염을 토했다. 이 전과에는 5월 31일에 촬영된 4대와 6월 5일에 건카메라에 찍힌 4대를 포함되어 있다.
당시의 부름헬러는 임무 대부분을 루돌프 플란츠(Rudolf Pflanz : 1914~1942 / 52대 격추) 대위의 윙맨을 맡고 있었다. 루프트바페에서 윙맨은 철저히 편대장기를 엄호하고 보좌하는 역할에 국한되어 있던 사정을 감안하면, 부름헬러에게 격추 기회가 주어졌다면 더 많은 전공을 세웠을지도 모른다. 8월 19일에 디에프 전투에서 부름헬러는 그 유명한 전설적인 활약을 펼쳤다. 이 날, 연합군은 독일이 점령하고 있던 디에프에 교두보를 마련하는데 실패했다. 그 무렵 오른발에 석고를 댄 채 교관 생활을 하고 있던 부름헬러는 하루 동안 4회나 실전 출격을 감행하며 스핏파이어 6대와 블레니엄 1대(어쩌면 오인된 A-30)를 격추시켜 대망의 1일 에이스(ace in a day) 호칭을 얻게 된다.
이 날 첫 출격에서는 엔진이 고장나 기지로 돌아오며 불시착하다가 가벼운 뇌진탕 사고를 겪은 그였지만, 재차 다른 기체로 갈아타고 두 번째 출격에 나서 스핏파이어 2대와 블레니엄 폭격기 1대를 떨구었다. 3회째 출격에서 스핏파이어 3대를 단숨에 해치운 그는 연이어 4회째 출격에서도 스핏파이어 1대를 격추시켰고, 이로써 1일 에이스와 함께 자신의 59번째 전과를 새롭게 고쳐쓰게 된다.
이튿날인 8월 20일에 가볍게 60번째 격추를 달성한 요제프 부름헬러는 다음날인 8월 21일에 독일금십자 훈장을 수여받았다. 1942년 10월 1일에 소위로 승진한 그는 150회의 전투 임무를 치루는 동안 67기 격추를 기록했고, 그 무공으로 11월 14일에 독일군 전체를 통틀어 146번째로 곡엽기사철십자훈장을 수여받았다.
7. 중폭격기 킬러
8월 17일부터 영국 공군의 제8폭격비행단은 노르망디 지방의 소트빌르루앙(Sotteville-lès-Rouen)에 공습을 개시했고, 미국의 제8공군도 정기적인 폭격 항정의 막을 열었다. 부름헬러는 의심할 나위 없이 뛰어난 전투조종사였지만, 폭격기 상대로는 더욱 치명적인 전사라는 것이 드러났다. 1943년 1월 3일에 부름헬러는 B-17을 4대나 격추시키며 중폭격기 에이스로서 자신의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다. 4월 1일에 그는 제54전투항공단(JG 54) 제 III 비행단으로 전속을 간 부름헬러는 이제 연합군 폭격기를 물어뜯기 위해 온 신경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제국 원수이자 공군 총사령관 헤르만 괴링은 이즈음부터 일선의 수퍼 에이스들을 유력한 전투기 부대의 지휘관으로 임명하는 조치를 취하고 있었는데, 부름헬러 또한 그런 인사 정책의 일환으로 지크프리트 슈넬 대령의 후임으로 JG 2의 비행단 지휘관으로 임명한 것이다.
5월 17일에 또다시 B-17을 지상에 처박은 부름헬러의 전과는 이제 70기까지 올라 있었다. 9월 23일에 연합군 폭격기 부대가 프랑스 북서부의 반(Vannes)을 공습하는 동안 부름헬러가 탄 Fw 190A-6가 불시착했는데, 기체의 주변에 떨어진 폭탄의 파편으로 부상을 입었다. 8월 1일에 중위로 진급한 그는 석 달 후인 11월 1일에 대위 계급장이 주어졌다. 1944년 2 월 8 일, 독일 본토 항공전이 시작되었을 때 부름헬러 대위는 르 뜨헤뽀흐(Le Tréport) 근처에서 미군 전투기를 처음 격추시켰다. 두려운 적인 연합군기를 상대로도 물러나지 않으며 차근차근 전과를 쌓아올린 요제프 부름헬러 대위는 3월 8일부로 90대 격추를 달성했다.
8. 비행단장의 최후
6월 6일, 연합군이 노르망디 상륙 작전을 성공시킨 후에도 부름헬러는 격추 행진을 멈추지 않았다. 6월 8일, 칸느 부근 상공에서 격추된 헤르베르트 후페르츠(Herbert Huppertz : 1919~1944 / 68대 격추) 대위의 후임자로 JG 2 제 III 비행단장으로 임명되었다. 6월 12일에는 폭격기를 요격하다가 덤으로 P-47을 격추시키면서 독일 공군에서 80번째로 100대 격추를 달성했다. 물론 부름헬러의 전과는 그 대부분이 미영 공군기를 상대로 거둔 것이므로 독소전의 100대 격추와는 그 격을 달리하고 있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6월 16일, 부름헬러는 자신의 생애 마지막 전공이 될 P-51을 잡아냈다.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난 6월 22일에 Fw 190A-8에 타고 있던 부름헬러 대위는 알랑송(Alençon) 근처에서 미 육군 P-47과 캐나다 공군의 스핏파이어와 뒤얽혀 격렬한 선회전투를 벌이다가 윙맨으로 뒤를 따르던 쿠르트 프란츠케(Kurt Franzke) 상사의 탑승기와 충돌하고 말았고, 이 불의의 사고로 인해 어이없는 최후를 맞이하고 말았다.
루프트바페 사령부는 그로부터 4달이 흐른 10월 24일에 탁월한 하늘의 투사이자 연합군에게 가장 큰 피해를 입히고 있던 요제프 부름헬러 대위에게 소령 계급장과 함께 사실상의 최고훈장인 곡엽검 기사철십자훈장을 추서해주었다. 그의 이름을 따서 제프(Sepp)라는 콜사인으로 불리던 요제프 부름헬러 소령은 전쟁 동안 300회 이상을 출격하면서 102대의 적기를 격추시켰다. 동부 전선에서 떨군 9대를 제외하면 그 모두가 미영 공군기였으며, 그중에서 적어도 18대는 4발 중폭격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