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제명
1. 소개
대한민국의 음악가, 성악가(테너), 작곡가. 본관은 연주(延州)이며 아호는 현석(玄石)이다. 홍난파와 함께 민족운동 단체 흥사단(興士團)의 국내 조직인 수양동우회에서 활동하다 체포된 후 전향서를 내고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변절하였다.
1903년 1월 6일 경상북도 대구군 서상면 남산동(현 대구광역시 중구 남산동)에서 아버지 현문구(玄文九)[2] 와 어머니 경주 최씨 최국희(崔菊姬) 사이의 2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위로 형 현명돌(玄命乭)[3] 이 있었고, 아래로 장녀 현복남(玄福南)과 차녀 현순남(玄順南) 등 2명의 여동생이 있었다.# 대구부 대남소학교와 계성학교를 다녔고, 대구제일교회에 들어가 교회 성가대에 입대하여 음악단원이 되었다. 이후 숭실전문학교에 입학하여 음악 교육을 받았고 1923년에 졸업한 후 전라북도 전주군에서 사립 신흥학교의 음악 교사로 근무했다.
1925년 미국으로 건너가 시카고에 있는 기독교계 무디성경학교에 입학했다가 인디애나에 있는 건 음악학교로 옮겨 1927년 졸업하였다. 귀국한 뒤에는 조선음악가협회를 창설하고 연희전문학교에서 음악을 가르쳤다.
1937년 5월 조선총독부 학무국이 주관한 조선문예회 정회원으로 가입하였는데, 같은 해 6월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체포되었다. 이듬해 6월 18일, 직전에 기소유예로 풀려났던 이묘묵(李卯默)을 비롯하여 정영도(鄭英道)·김여제(金與濟)·김여식(金麗植)·전영택(田榮澤)·류형기(柳瀅基)·이명혁(李明赫)·박태화(朴泰華)·차상달(車相達)·하경덕(河敬德)·갈홍기(葛弘基)·홍난파(洪蘭坡) 등 12인의 흥사단원과 김기승(金基昇)·김노겸(金魯謙)·노진설(盧鎭卨)·이기윤(李基潤)·최봉칙(崔鳳則) 등 5인의 동우회원 등 17인과 함께 전향성명서를 발표하고 친일단체 대동민우회(大同民友會)에 가입하였으며#, 8월 18일 위 사람들과 함께 흥사단에서 출단 처분을 받았다.#
이렇게 그는 수양동우회 사건 직후 정식으로 전향하여 친일반민족행위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총독부의 내선일체 정책의 일환으로 조선음악가협회를 해체하고 이후에도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 조선음악협회, 경성후생실내악단 등에도 가입하면서 친일 행위를 하였던 전적이 드러나게 되었으며, 특히 일제 찬양적인 성격의 '''후지산을 바라보며'''에 작곡자로 개입하면서 친일 논란에 휩싸이게 되었다.
1945년 해방 후에는 한국민주당에 가입해서 극우 보수파로 활동하여 반공, 반북 운동을 전개하였고 1946년에는 경성음악학교(서울대학교 음악대학의 전신)를 설립하여 교장이 되었다. 1953년 한국음악가협회 위원장, 1954년 대한민국 예술원 영구종신회원에 선임되었다가 1960년 10월 16일 서울특별시 성동구 신당동(현 중구 신당동)의 자택에서 간경변으로 생을 마감했다.
서울 강북구 수유동에 묘가 있는데, 그의 묘와 울타리 하나를 사이에 두고 제2공화국 대한민국 헌법을 기초한 법조인이자 정치인 엄상섭의 묘가 있다. 공교롭게도 둘 다 친일 경력이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4]
2. 그 외
국내에서는 '''희망의 나라로'''를 작곡한 사람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그가 친일 행적을 했다는 사실이 드러나게 되면서 논란에 휩싸였다. 결국 친일인명사전의 인명부에도 현제명이라는 이름이 올려져 있었다. 게다가 창씨개명에도 적극 동참해서 '''구로야마 사이메이(玄山濟明)'''으로 개명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일단 이 노래는 1931년에 작곡되었고, 친일로 변절했던 시기는 1937년이다. (희망의 나라로 문서 참조.)
역대 음악가들 중 친일 행적이 드러나거나 논란이 된 유사 인물로는 애국가의 작곡가인 안익태와 홍난파 등이 있다.
월간 객석에선 음악가들의 친일 행위를 옹호하다가 호되게 까인 바가 있다. 현제명이나 홍난파, 이흥렬 같은 이들은 살고자 그런 것이라고...
고향인 대구 중구에는 '현제명 나무'라고, 이 사람의 이름을 딴 이팝나무가 있는데, 대구에서는 친일파인 이 사람의 이름을 딴 나무가 있는 것이 싫어서 없애버리자고 난리다. 관련 보도
광동고등학교, 김천고등학교, 고창고등학교, 서울대학교, 경북대학교, 전북대학교 교가, 제일은행 시절 행가도 이 사람이 작곡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