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익태
1. 개요
'''한국계 스페인인''' 작곡가이자 지휘자. 애국가의 작곡가로 유명하다.[2]
2. 생애
1906년, 대한제국 평양에서 태어났다. 평양보통학교와 숭실학교를 다니다가 1921년에 일본 도쿄의 세이소쿠 중학교에 음악 특기생으로 입학해 중학교 과정을 마치고, 1926년에 도쿄고등음악학원(현재 구니타치[3] 음악대학)에 입학해 첼로를 전공한 뒤 1930년 졸업하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미국에서는 신시내티 음악원, 필라델피아의 커티스 음악원, 템플 대학교 음악대학원에서 첼로와 지휘를 배웠고 1932년에는 신시내티 대학의 학생 오케스트라에서 첼로 수석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이 시절에 당대의 유명 지휘자였던 레오폴드 스토코프스키와 알게 되어 교류했다고 하며 카네기홀에서 독주회를 갖기도 하는 등 첼리스트로서 활약했다고 알려졌다.
1935년 11월,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작곡되었고(허영한, 「미주 <한인학생회보>를 통해 본 안익태의 미국 유학시절」, [낭만음악] 제40호, 낭만음악사, 1998, 18쪽.), 그해 12월 28일 안익태의 애국가가 초연되었다.(이해영, [안익태 케이스], 19쪽.)
1938년에는 아일랜드의 더블린 방송 교향악단을 객원 지휘했고, 이 자리에서 애국가를 발전시켜 만든 곡인 한국환상곡이 처음 공연되었다. 이후 헝가리에 머무르면서 부다페스트 음악원에서 코다이 졸탄과 도흐나니 에르뇌에게 작곡을 배웠고, 헝가리와 이탈리아, 독일, 유고슬라비아, 루마니아, 불가리아 등 유럽 각지의 관현악단들을 객원 지휘했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와의 관계도 친일 논란과 결부되어 있다. 당초 알려진 것으로는 안익태는 1930년대 후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를 만나 그의 제자가 되었고 이후에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보조 지휘자로서 활동하면서 그의 지원을 받아 유럽 각국의 오케스트라들을 지휘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일부 음악학자들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와의 관계는 안익태의 친일 행적을 감추기 위한 페이크나 쉴드일 개연성이 크다고 주장하고 있다. 2006년 음악학자 이경분의 연구를 통해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와 관계를 맺게 된 것은 1942년이고 관계의 중심에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일본 정부를 위해 작곡해준 "일본 축전 음악"과 관련이 있어서 친일 행적과 결부된 탓에 논란이 뜨겁다. 연구에 의하면 안익태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를 만난 시점은 1942년일 가능성이 크고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와 만날 수 있게 된 것도 '일본독일친선협회'[4] 가 다리를 놓아준 덕이었다는 것이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와의 관계를 주선한 사람으로 지목되는 사람이 만주국 고위 관료인 에하라 고이치라는 점에서 의심은 더욱 깊어질 수 밖에 없다는 것.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에하라 고이치의 베를린 자택을 방문했을 때 안익태를 만났고 "만주 환상곡"에 대해 조언을 받은 것이 이런 제자 드립을 치는 근거가 되었을 것이라고 보는 추측도 있다. 1943년 '베를린 필 오케스트라'를 지휘하게 된 것이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사정이 생겨 제자인 안익태를 대신 보냈던 게 아니라 안익태의 도쿄 고등음악학교 시절의 스승이었고 안익태보다 일찍 독일에서 활동하고 있었던 고노에 히데마로[5] 의 대타로 들어갔던 것일 가능성이 크다. 1943년부터 안익태의 연주회 팜플렛에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제자"라는 문구가 버젓이 등장하는데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본인이 이 사실을 모를리가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문구가 안익태의 팜플렛에 계속 등장한다는 점에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제자를 사칭했다는 주장이 오히려 억측일 가능성도 높다. 안익태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제자라는 것이 거짓이라 할 근거도 나타난 것은 없다. 안익태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제자인지 여부를 친일 행적과 연관지어 해석하려는 것도 견강부회인 측면이 있다. 음악계에서 사제 관계는 지극히 개인적인 관계이기 때문에 당사자들이 사망한 이상 이를 입증하는 것이 매우 어렵다. 이후에도 안익태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제자가 아니라고 입증해 줄 사람이나 자료도 없는 것이 사실이다. 때문에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제자라는 점은 계속 안익태의 권위를 상징하는 '꼬리표'처럼 따라 다녔다. 안익태가 훗날 해외에서 여러 이름있는 관현악단들을 지휘할 수 있었던 것도 '대작곡가의 제자'라는 것이 '셀링 포인트'로 적극 활용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도 계속 유럽에 남아 활동했지만, 1944년으로 접어들며 연합군이 이탈리아에 상륙하는 등 전황이 악화되자 4월에 파리에서 베토벤 연속 연주회를 마친 뒤 6월에 중립국이었던 스페인으로 거점을 옮겼다. 1944년 12월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한국환상곡의 자필 악보를 완성했고, 1946년에 스페인 여성인 롤리타 탈라베라[6] 와 결혼했다. 이후 마요르카 교향악단의 상임 지휘자가 되었고, 스위스, 멕시코, 과테말라 등지에서 객원 지휘자로 출연했다. 이때 스페인으로 귀화했다.
1955년 3월에는 해방 이후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해 한국환상곡의 한국 초연을 지휘했고, 조국을 위해서 뭔가를 해보겠다는 생각이었는지 1962~64년까지 매년 서울에서 국제음악제를 주관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음악제는 안익태에게 적대적이었던 일부 한국 음악인들의 반발과 재정 문제 등으로 1964년 이후로는 열리지 않았다. 1965년 7월 4일에 런던의 뉴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마지막 공연을 하였고, 이후 건강 악화로 투병하다가 1965년 9월 16일에 바르셀로나에서 생을 마감했다.
차후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는데, 논란은 후술.[7]
3. 애국가 논란
3.1. 도브루자의 땅이여 표절설
안익태가 애국가를 작곡하기 전까지 애국가는 작사 미상[8] 의 가사에 스코틀랜드 민요 '올드 랭 사인(Auld Lang Syne)'[9] 의 멜로디를 붙여서 부르기가 일반적이었다.[10] 안익태는 올드 랭 사인이 애국가의 가락으로 적절치 않다고 생각하여 새로이 작곡한 것이 오늘날의 애국가의 멜로디가 되었다고 알려졌는데...
문제는 애국가가 언제 어디서 작곡되었냐는 점인데, 일반적으로는 1936년 베를린에서 그간 구상해왔던 애국가를 작곡했다고 알려졌다. 그런데 1964년, 서울 국제음악제에 참석하고자 내한한 불가리아계 미국인 지휘자 페터르 니콜로프(Петър Николов)가 '''"애국가? 그거 불가리아 노래 표절인데?"'''[11] 라고 말하는 바람에 한바탕 뒤집어지는 사태가 벌어졌다.(...)
니콜로프가 애국가의 표절이라고 주장한 것은 불가리아 시가 '도브루자의 땅이여(О, Добруджански край)'로, 니콜로프는 직접 기자회견장에서 노래까지 불러 가면서 "만약 불가리아 사람들이 한국에 와서 '도브루자의 땅이여'를 부른다면 한국인들은 벌떡 일어날 것입니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표절이 아니라고 말하는 측은 애초에 이 방면에서 가장 유명한 God Save the Queen을 일곱 나라에서 가사만 번안해서 사용했음은 차치해두고, '도브루자의 땅이여' 부분이 애국가의 "동해 물과~"하는 부분이 흡사하기는 하지만 "도브루자의 땅이여"가 약박으로 시작하는 것과는 달리 애국가는 강박으로 시작하기 때문에 차이가 있고, 멜로디도 전체적인 분위기가 다르기 때문에 표절이라 할 만큼의 유사도는 없다는 것이다.
니콜로프가 던진 말 때문에 애국가를 바꿔야 된다는 논란이 일었다. 거기다 음악학자 이유선이 저서 <한국양악백년사>에서 안익태의 애국가 표절논란을 소개하면서 '''"대한민국은 완전 민주독립국가 아닌가요? 빨리 새로운 국가를 제정해야 됩니다!"'''라고 역설하며 애국가 교체 논란에 기름을 부었다. 결국 논란 끝에 정부는 애국가를 교체할 이유가 전혀 없다고 선언하며 애국가 교체 논란을 종식시켰다. 하지만 이후에도 안익태가 불가리아 노래를 일부 표절한 건 아닐까 하는 의심이 있었다.
음악학자 허영한[12] 은 면밀한 연구를 통해 애국가가 그간 알려진 대로 1936년에 베를린에서 작곡된 게 아니라 그에 앞서 1935년 필라델피아에서 이미 작곡된 것이라는 연구를 발표했다.
1935년 11월,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작곡되었고(허영한, 「미주 <한인학생회보>를 통해 본 안익태의 미국 유학시절」, [낭만음악] 제40호, 낭만음악사, 1998, 18쪽.), 그해 12월 28일 안익태의 애국가가 초연되었다.(이해영, [안익태 케이스], 19쪽.) 불가리아 방문 전에 <애국가>가 작곡된 점은 사실이나, 공석준의 말처럼 독보(獨譜)에 의한 참고 여부는 알 수 없다. (공석준, 「愛國歌의 剽窃是非에 關한 小考」, [愛國歌와 安益泰](金景來 著, 서울: 성광문화사, 1978), 328-329쪽.) 꼭 불가리아를 직접 방문해야만 불가리아의 노래를 접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김경래는 이렇게 썼다. "필라델피아의 커어티스음악학원에서 작곡을 공부할 무렵, 그는 무려 四十여 개국의 국가를 수집하여 연구에 착수했다. 뿐만 아니라 세계각국의 민요, 가곡, 성가곡들도 모아 애국가 작곡을 위한 기초자료로 삼았었다."(金景來, [코리아 幼想曲: 安益泰의 榮光과 슬픔], 서울: 玄岩社, 1966, 132쪽.) 불가리아 방문과 무관하게 안익태는 <애국가>의 작곡을 위해 이미 ‘세계각국의 민요, 가곡, 성가곡들’과 같은 다양한 곡들을 기초자료로 삼았으며, 이러한 과정에서 <오! 도브루잔스키 크라이>를 접했을 개연성은 부정하기 어렵다. 두 곡의 유사성을 선율전개의 맥락과 출현음의 일치도로 살펴본 바에 의하면 전체 16마디 중 4마디(제9-12마디)를 제외한 나머지 부분에서 선율의 유사성이 매우 높으며, <애국가>의 출현음 총 57개 중 맥락과 음정이 일치하는 음은 33개, 변주된 음까지 포함하면 41개가 유사하므로, 두 곡의 유사도는 58~72%로 볼 수 있다.(김정희, 「안익태 <애국가>, 표절인가 아닌가?-<애국가> ‘표절론’을 재론함-」, 《한국예술연구》 제26권, 75-99쪽.) 그래서 이 정도의 유사성을 감안하면 결과적으로 표절임을 부정하기 어렵다고 주장하는 측도 있다.
3.2. 친일적 국가 논란
2006년, 독일에서 음악을 전공하고 있던 송병욱이 '''2000년에 발굴된 안익태의 베를린 필 지휘 영상이 만주국 축전 음악회의 실황이었다'''고 발표하면서 국내 음악계를 충공깽으로 몰고 가버렸다.
게다가 이 연주회에서 안익태가 직접 지휘한 "만주환상곡"이 "한국환상곡"과 제목도 흡사한데 애국가의 멜로디가 연상된다는 얘기까지 나오면서 한 번 더 논란이 일었다. 송병욱은 좀 더 심도 깊은 연구가 필요하다고 지적했지만 친일적인 애국가를 계속 불러야 하냐는 논란은 꺼지지 않았다. 자세한 내용은 애국가 논란 문서 참조.
3.3. 저작권 논란
2000년대 와서 애국가의 저작권료가 스페인에 거주하는 후손들에게 지급돼왔단 사실이 알려지며 친일에 표절까지 거론당하면서 돈까지 뜯으려고 한다는 비난이 터졌다. 애국가를 새로 바꾸자는 이야기는 또다시 떠올랐고, 결국 2005년 후손들은 애국가의 저작권을 완전히 포기하고 대한민국 정부에 넘긴다.
이렇게 저작권 포기가 된 상태에서 KBS교향악단이 녹음본에 대한 음원 저작권 등록을 하였고, 마땅한 음원이 달리 없었으므로 공익의 목적으로 애국가를 틀 때를 제외하곤 KBS에 저작권료를 지불할 수 밖에 없는 구조였다.
그러나 2018년 12월, 정부는 애국가의 새 음원을 만들어 상업적으로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도록 조치하였다.
4. 친일 행적
안익태가 미국에 있을 동안에는 친일 행적과는 거의 무관했던 게 분명해 보이는데, 문제는 유럽으로 건너간 이후, 특별히 1938년부터 1944년까지의 행적이 논란이 되고 있다.
그간 안익태의 유럽에서의 행적은 안익태의 전기 작가 김경래와 부인 롤리타 탈라베라의 전기에 전적으로 의존해 왔었지만 연구자들이 이들 자료의 오류를 이것저것 지적하기 시작하면서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했다.
대체로 알려진 바로는 안익태는 일본의 추축동맹 관변단체인 "일본-독일협회"(이하 일독회)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고, 이들의 지원을 받아서 유럽 각국의 오케스트라들을 지휘할 수 있게 된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받고 있다.
2000년에 안익태가 베를린에서 지휘하는 모습을 담은 영상이 발굴되었는데, 거기에 일장기가 걸려있는 것 때문에 논란이 일었다. 하지만 당시 영상을 자세히 분석하지 못하고 의문만을 남긴 채 묻혔다. 그러나 2006년 송병욱이 '객석'지에 이 영상의 정체를 밝혀 다시 문제가 수면 위로 올라왔다. 바로 '만주국 축전 음악회'의 영상이었던 것이다. 실제 영상에 버젓이 "만주국 건국 10주년 축하 음악회"라는 자막과 나레이션이 붙어있고, 촬영된 장면은 "만주국"(혹은 만주환상곡)의 후반부 연주였다. 그리고 첫 발견 때 베를린 필 공연으로 알려진 것과는 달리, 베를린 대(大) 방송 관현악단과 라미 합창단이 출연한 것으로 밝혀졌다.
그리고 거기에 표기돼 있던 "에키타이 안(Ekitai Ahn)"이라는 이름이 큰 파문을 불러왔다. 안익태가 일본식 이름인 에키타이 안으로 활동했다는 것 또한 친일 행적을 꼬집는 사항이 되었다. 서재필의 비서였고 1960년대 UN 주재 한국 대사를 역임했던 임창영은 안익태가 미국에서도 에키타이 안이라는 일본식 이름을 써서 꾸중을 했다고 회고한 바 있다. 왜 서양에서 활동하는데 굳이 일본식 이름을 쓰냐는 것. 이에 대해 이탈리아에서 건축사로 근무하고 있고 안익태의 유족들과도 친분이 있으며 '유럽에서 클래식을 만나다'라는 책을 집필한 유명 건축사 정태남은 에키타이는 일본식 표기가 아니라 안익태 자신이 스페인에서 살면서 현지인들이 자신의 이름을 이해하기 쉽도록 바꾼 스페인어식 이름이라고 했다. 참고로 지급 스페인식 표기는 Iktai Ahn이다.
하지만 연구가 지속되며 위 주장은 착각이었음이 밝혀졌다. 음악학자 허영한이 낭만음악 2006년 겨울 호에 발표한 논문 '자필 기록에 의한 안익태의 유럽 활동 재구성'에 따르면 1941년 9월에 안익태가 자신이 직접 관현악 편곡한 바흐의 파이프오르간 작품 토카타와 푸가 C장조 총보에 EkiTay Ahn으로 자필 서명한 것이 익태 안이 아닌 에키타이 안으로 자신을 칭한 최초의 기록으로 남아 있다. 자필 서명보다 더 이전인 1940년 9월 3일에 부다페스트에서 개최된 공연에서도 프로그램에 EKITAI AHN (Tokio)이라고 인쇄된 것을 볼 수 있어서, 유럽 활동 초반기부터 안익태의 이러한 일본어식 이름 표기는 공적이든 사적이든 이미 일반화되어 있던 것으로 여겨진다는 것이다. 결국 스페인에서 에키타이란 이름으로 활동한 건 맞지만 이는 그 이전부터 써오던 걸 그대로 썼을 뿐인 것이란 것이다.
게다가 안익태는 이 시기에 일본의 궁중음악 "에텐라쿠"를 바탕으로 한 같은 이름의 관현악 환상곡(또는 교향시)을 작곡했는데, 이것을 적당히 손질해서 나중에 내놓은 게 한국의 아악을 바탕으로 만든 것이라고 주장하는 "강천성악"이 아니냐는 의심을 받고 있다. 심지어 이것은 독립기념관에 소장된 안익태 사료 중 1981년에 안익태기념사업회에서 발행한 강천성악 총보 해설에까지 그대로 실려 있다. 독립기념관 홈페이지에 소개된 해당 자료의 설명을 그대로 인용해 보면 다음과 같다. "안익태가 작곡한 「강천성악(降天聲樂)」오케스트라 총본이다. '''「강천성악」은 일본 아악(가가쿠라고 함. 상술한 에텐라쿠와도 연관성이 있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크게 3부분으로 나뉘며, 구조는 A-B-A이며, 작곡 연대는 1936년으로 추정된다." 만주국 동영상 공개 이후 송병욱이 헝가리 국립영상보관소에서 이 곡의 연주 장면 일부를 담은 기록영화 동영상을 찾아냈는데, 이 동영상에서도 강천성악과 대동소이하게 일본 에텐라쿠의 선율이 클라이맥스를 이루는 중간부가 생생히 촬영되어 있다.
거기다 1941년에 명치절(메이지 덴노 생일)을 기념하여 일본 국가인 기미가요를 연주한 전력이 발굴되었다. #
이런 행적들이 드러나면서 결국 안익태도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었다. 여담으로 안익태의 형인 안익조도 친일인명사전의 군 부문에 포함되어 있다. 그래서 한때 친일파가 작곡한 것을 국가로 쓰는게 말이 되냐면서 국가를 바꾸자고 논란이 되기도 했다. 애국가의 작사가로 유력한 윤치호도 친일파라서 말이 많을 수 밖에 없다.
2019년 1월에는 이해영 한신대 교수가 안익태가 친일 뿐 아니라 친나치 행적까지 있어 전쟁 후 프랑스에서 기피인물로 지정할 정도였다는 내용을 독일 정부 문서보관소에서 찾아냈으며, 더 이상 친일파의 작품인 애국가를 유지하는 것은 옳지 않다, '''국가 교체 운동'''을 국회에 건의하는 등 공론화하겠다고 주장했다.# 한신대 이해영 교수의 기사가 나온 후 안익태의 애국가, 음악, 친일 작곡가들의 행적에 관한 글이 블로그에도 소개 되었다. #
그러나 이해영의 이러한 지적이 과장이라는 반론도 많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친나치 행적으로 프랑스의 기피 인물이 되었다는 주장과 달리, 안익태는 전후에도 프랑스 음악계에 출연했다. 1961년 2월 2일 밤에 파리 샹젤리제 극장(Théâtre des Champs-Elysées)에서 열린 음악회에서 안익태는 파리 국립고등음악무용원(CNSMD de Paris)[13] 오케스트라를 객원 지휘한 바 있다. 그리고 이때도 '한국환상곡'을 지휘하여 호평을 받았다. 대전 직후 나치청산 광풍이 불 당시에야 잠시 배척되었을 수 있으나, 훨씬 노골적인 친 나치 활동을 벌였던 다른 유럽의 음악가들도 버젓이 다 사면받고 활동을 이어간 마당에 안익태의 행적은 큰 문제가 될게 없었다. 예컨대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은 나치당 당원이었고 훨씬 많은 친나치 행적이 있으나, 1948년까지만 활동 금지 처분을 받은 뒤에 현역으로 복귀하여 활발히 활동했다. 역시 프랑스의 명 지휘자로 꼽히는 앙드레 클뤼탕스(André Cluytens)도 비시 괴뢰정부와 독일 점령군을 위한 음악회를 조직, 참여했다는 이유로 한때 활동 금지되었으나, 역시 얼마 안 가서 파리 국립고등음악무용원 오케스트라 상임 지휘자로 임명되었다. 이처럼 대전 중 나치 치하에서 활동한 음악가들은 대부분 불가피한 '''생계형 부역'''이었다는 점을 인정받고 무난히 현역에 복귀했다. 이런 유럽의 쟁쟁한 음악가들과 비교했을 때 훨씬 그 정도가 덜한 안익태의 행적을 두고 엄청난 친일/친나치 인사인 양 비난하는 것은 균형을 잃은 평가이다.
5. 평가
친일 논란이 불거지기 전까지 안익태는 세계 무대에서 활동한 한국인 음악가였고, 애국가를 작곡한 위대한 음악가로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2000년대 이후, 안익태의 유럽에서의 행적들이 연구자들에 의해 폭로되면서 이런 평가에도 금이 가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1994년 탄생 88주기를 맞이하여 문을 열었던 안익태 음악제는 2000년대 와서 흐지부지되었다.
더군다나 "에텐라쿠", "만주환상곡"과 관련된 것으로 의심되는 "한국환상곡" 때문에 애국가부터도 논란이 되고 있다는 점은 앞으로도 계속 떡밥으로 남을 듯하다.
딱히 친일 문제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떡밥에 국한하지 않더라도, 초기 안익태 연구에 사료로 참고했던 김경래의 전기는 이후 전정임과 허영한, 송병욱, 이경분 등이 유럽과 미국에서 현지 사료 조사를 하면서 내용이 상당 부분 허위이거나 과장된 것으로 밝혀졌다. 게다가 김경래는 전기를 쓰면서 안익태가 남긴 자필 이력을 참고했다고 밝혔기 때문에, 안익태 자신이 전기 집필을 위해 언플을 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도 나오고 있다. 이 때문에 좀 더 제대로 된 사료 연구에 기반한 새로운 평전이 나와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해방 후 처음 한국을 방문해 공연한 것이 하필이면 이승만 대통령의 생일 기념 음악회였고, 이 때문에 4.19 혁명 이후 비판받기도 했다. 이 공연의 일부는 흑백 기록영화로 촬영되어 보존되고 있다.
6. 작품들
- 성악 모음곡 '한국의 생활'(1934-35)
- 애국가(1935? 1936?)
- 교향시 '강천성악'(1936?)
- 한국환상곡(1936-37?)
- 환상곡 '에텐라쿠': 1930년대로 추정, 1944년 이후 악보는 행방불명. 강천성악과 동일 작품으로도 간주됨.
- 교향 환상곡 제2번 '교쿠토(극동)': 1930년대로 추정, 1944년 이후 악보는 행방불명. 한국환상곡의 1차 개작판으로도 간주됨.
- 만주국 축전곡(혹은 만주국, 만주환상곡): 1940년대로 추정, 1944년 이후 악보는 행방불명. 한국환상곡의 2차 개작판으로도 간주됨.
- 교향시 '마요르카'(1948, 2006년에 자필악보 발견)
- 교향시 '포르멘토르의 소나무'(1951, 2006년에 자필악보 발견)
- 서강대학교 교가(1960?)
- 교향시 '논개'(1962)
- 애국지사 추모곡(1962)
- 한국무곡(1963)
7. 가족관계 및 여담
- 안익태의 둘째 형 안익조 또한 친일파였다. 특히 친일파+종북주의자라는 그랜드슬램까지 타버렸는데, 도쿄제국대학 의학부를 졸업하고 폐결핵 전문의로 활동하다가 만주국으로 건너가 만주군 군의관으로 복무하였다. 해방 후 국군 헌병장교로 임관했는데, 6.25 전쟁 때 서울에 있다가 피난을 가지 못했고 들이닥친 조선인민군에게 자신의 집과 무기를 내주는 등 부역했다가 서울 수복 후 국군에 의해 처형당했다(...).[14] 상술했듯이 친일인명사전에도 안익태와 나란히 등재되어 있다.
- 아내 로리타 안(1915~2009, 마리아 돌로레스 탈라베라, 애칭 로리타)은 바르셀로나 백작 가문의 딸로 태어나 안익태의 팬이 되었고, 안익태의 매니저로 활동 하다가 1946년 결혼에 골인했다. 한국 국적을 버린 남편과 달리 안익태와의 혼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취득한 한국 시민권을 평생 유지하며 2005년에는 문화관광부를 방문해 "애국가는 한국인들의 것이니 마땅히 한국에 돌려 주어야 한다"는 말과 함께 애국가의 저작권을 영구 기증함으로써 길고긴 저작권 논란의 고리를 끊었다. 자신을 한국인으로 주장하며 2002년 한일월드컵 스페인 전에도 한국을 응원했다고 하니, 이방자, 프란체스카 도너와 같이 한국인으로 태어났으나 한국사에 오점을 남겼던 배우자들과 달리 진심으로 남편의 나라를 사랑했던 사람이라 할수 있겠다. 한국 정부도 그 사실을 기려 2009년 그녀가 사망하자 국립서울현충원에 예우를 갖춰 안장했다.
- 약간 의외일 수도 있겠지만, 학창시절 야구선수로 활동한 이력이 있다. 기사에 따르면 안익태가 일본으로 유학한 시기가 1921년으로 알려져 있어 연도가 맞지 않는데, 1922년의 동아일보 기사에 안익태가 숭실중학에서 바이올린 연주를 한 기록이 있는 점, 안익태 주변인물들의 증언 등을 종합했을 때 당시의 야구선수가 안익태 본인이 맞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 스펀지에 의하면 그 악명높은 교도소인 알카트라즈에 잠깐 수감된 적이 있다고 하였다. 안익태가 미국으로 향할 때 탑승한 배에서 뜻밖에 제의로 매주 일요일 선상예배에서 첼로 독주회를 열었는데,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후 세관의 첼로 소독을 이유로 실랑이를 벌여 당시 이민국이 공무집행방해죄, 관세법, 이민법을 적용해 그를 알카트라즈에 수감하였다. 그는 교도소에 근무하던 교도관의 도움으로 첼로를 건네받아 감방에서도 첼로 독주회를 열었고, 이에 첼로 연주에 감동받은 한 교도관의 도움으로 하루만에 풀려났다고 한다.
[1] 스페인과 한국의 시차를 반영하여 일부 자료에서는 9월 17일로 나온다.[2] 그래서 '한국의 스기야마 코이치' 혹은 '한국의 리하르트 바그너'로 악명이 자자하기도 하였다.[3] 구니타치는 한자로 쓰면 國立기 때문에 일본의 국립학교로 잘못 생각하는 사람들이 가끔 있으나, 소재지인 도쿄도 구니타치시의 이름을 땄을 뿐인 사립학교이다. 지금은 도쿄도 다치가와시로 이전했지만 명칭은 그대로 쓰고 있다. 개교 당시에는 23구 내에 있었다.[4] 군사 동맹 관계였던 일본 제국과 나치 독일의 우호 협력을 다지기 위한 단체.[5] 일본 수상 고노에 후미마로의 동생.[6] 2009년 작고[7] 정확히 말하자면 국가유공자 제2묘역인데,아내도 사망 후 합장되었다고 한다.[8] 작사가가 누구인가가 역사학의 단골 떡밥이다. 윤치호가 가장 유력하지만, 확실치는 않다. 애국가 문서 참조.[9] 한국에는 '작별' 내지는 '석별의 정'이란 제목으로 알려졌다.[10] 영화 실미도에서 극중 684부대원들이 애국가 가사에 올드 랭 사인의 가락을 붙여 부르는 모습이 나온다.[11] 당시 불가리아는 공산주의 국가였기 때문에 한국과 외교 관계가 없었다.[12] 안익태의 미국과 유럽에서의 활동을 면밀히 연구하는 사람이다.[13] 1795년 설립된 세계 최초의 음악무용원(Conservatoire)으로, 예술계 최고 명문학교 중의 하나이다. 흔히 '파리 음악원'으로 줄여 부른다.[14] 국군 헌병장교로 임관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빼도 박도 못하는 사형감이긴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