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세 페르난데스(1974)
1. 소개
前 몬트리올 엑스포스, 애너하임 에인절스, SK 와이번스, 지바 롯데 마린스, 세이부 라이온즈,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오릭스 버팔로스 소속의 도미니카 공화국 국적의 3루수.
2. 선수 경력
2.1. SK 와이번스 시절
MLB 몬트리올 엑스포스와 애너하임 에인절스 로스터에 들기도 했지만 별 다른 활약을 보이지 못하다가 2002년 시즌을 앞두고 KBO 리그 SK 와이번스와 계약, 이후 팀의 주전 3루수로 자리매김한다. 당시 팀내에 확실한 거포와 핫코너가 공석이었기에 그야말로 안성맞춤급 영입이었던 셈.
2002년 SK에 합류한 페르난데스는 시즌 개막 후 내내 무안타에 그치다가 무려 '''9경기 만에''' KBO 리그 데뷔 첫 안타를 쳐내는 등 시즌 초에만 해도 퇴출 후보 1순위였으나, 5월부터 타격감이 올라오기 시작하며 가까스로 퇴출 위기를 모면하였다. 7월에는 14경기에서 무려 9개의 홈런을 치는 등 시즌이 갈수록 괴물급 활약을 하였고, 9월 13일에는 무려 '''한 경기 8타점'''이라는 기록을 세웠으며, 어느덧 홈런 순위권에 오르며 이승엽, 심정수와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다. 또한 인천 연고팀 선수 중 최초로 한 시즌 40홈런을 넘겼다.[1] 시즌 후 그의 성적은 '''타율 0.281, 45홈런 107타점.'''
2002년 SK 와이번스에서 뛰었던 그의 기록은 실로 흠좀무한데 .281이라는 결코 낮지않은 타율을 유지하며 무려 '''45홈런'''을 쏘아올렸고[2] 107타점을 기록하며 팀의 해결사 역할을 톡톡히 수행하였다. 하지만 당시 최전성기를 달리던 이승엽(47홈런)과 심정수(46홈런)에게 밀리며 홈런 3위에 그쳤다.
여기까지만해도 정말 아쉬운데 설상가상으로 KBO 골든글러브 수상에도 실패한다. 경쟁자인 김한수에게 소위 한국인 버프+우승팀 프리미엄이란 존재로 인해 밀릴 수밖에 없었고 외국인 선수에게 짜게 굴었던 당시 골든글러브 수상 분위기가 결정적이었다.
2002년 시즌 종료 후 SK는 그해 최고의 활약을 펼친 페르난데스와 재계약을 원하며 협상을 하였으나, 페르난데스의 활약을 본 일본 구단들이 페르난데스를 영입하기 위해 머니 게임을 벌이자 결국 큰 금액으로 인해 재계약에 실패하였다.
2.2. 일본 프로야구 시절
SK 와이번스와의 연봉교섭에 실패한 페르난데스는 2003년 지바 롯데 마린스에 입단하면서 일본 프로야구에 진출하게 된다. 일본 진출 첫 해인 2003년 123경기에 출장해 타율 0.303, 32홈런, 100타점을 기록하였다. 하지만 2003년 플레이오프에 롯데에 돌아온 바비 발렌타인[3] 감독이 수비력 등을 문제삼아 재계약을 하지 않았고[6] 결국 롯데를 나와 세이부 라이온즈와 계약한다. 2004년에서는 이토 츠토무 감독의 지휘 아래 마쓰자카 다이스케, 나카지마 히로유키, 와다 카즈히로, 알렉스 카브레라 등과 함께 세이부 라이온즈의 주축 전력으로 활약하며 오치아이 히로미츠 감독이 이끄는 주니치 드래곤즈를 물리치고 일본시리즈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이후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오릭스 버펄로스에서 OPS 8할, 20홈런 전후를 꾸준히 기록하면서 오랜 기간동안 퍼시픽리그의 수준급 외국인 타자로 자리잡았다. 2006년 퍼시픽리그 3루수 베스트나인을 탄 것은 본인으로서도 첫 타이틀 상술했듯 텃세 때문에 KBO 골든글러브를 못 탔지만, 라쿠텐 창단 이후 팀에서 나온 첫 개인타이틀 수상 사례로도 의미가 있다. 라쿠텐을 나온 뒤로는 기량이 꽤 떨어진 모습을 보이고 수비력은 완전히 상실했지만[7] , 2010년대 초반까지도 여러 팀들에서 중심타선의 공백 한 자리를 메우다가[8][9] 2013년 오릭스를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했다.
2016~17년에는 한신 타이거즈의 외국인 스카우트로 활동했고, 2018년부터는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의 스카우트로 활동중이다.
일본에서는 파리그 여러 구단을 오가면서 준수한 성적을 찍어줬고 특히 신생구단인 라쿠텐에선 눈물나는 전력 아래에서 중심타자이자 팀의 구심점이 될만한 몇 안되는 베테랑 선수로 활약했기에 좋은 기억을 가진 팬들이 많다. 독실한 기독교 신앙심과 야구, 팀워크에 대한 진지한 자세 등이 담긴 발언들이 알려지며 팬들 사이에서 '철학자'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을 정도.
다만 의외로 한 성깔 하시는 선수인 게 분명하다. 벤치 클리어링 때 몸소 외인 선수들끼리[10] 신경전도 벌였다.80년대~00대의 일본 프로야구 역대 외인들의 벤치 클리어링 장면.
치바 롯데 시절 응원가가 Battle Hymn of the Republic이었다. '''승리의 롯데'''로 잘 알려진 그 곡 맞다.
3. 연도별 주요 성적
4. 관련 문서
[1] 그 말인즉 페르난데스 이전까지 인천팀에는 40홈런 이상을 친 선수가 없었다는 얘기다. 전통적인 팀 컬러가 심각한 물방망이(…)였기에 이같은 현상이 발생한 것. 페르난데스의 등장 전까지 인천 연고팀 선수 중 가장 많은 홈런을 친 선수는 1996년과 1998년 30홈런을 쳤던 박재홍이었다. 이후 14년 뒤인 2016년 최정이 인천 연고팀 선수 중 2번째이자 인천 연고팀 소속 국내 선수로는 첫 번째로 한 시즌 40홈런을 기록했고 2017년에는 페르난데스가 세운 45홈런 기록마저도 깼다. 그리고 2018년 홈런공장 북미지점장님과 홈런공장 도미니카지점장님이 다시 기록을 달성했다.[2] 이 기록은 2017년 9월 13일까지 '''역대 KBO 리그 3루수 한 시즌 최고 홈런'''기록이자 '''역대 SK 와이번스 소속 야수 한 시즌 최고 홈런''' 기록이었다. 그러나 최정이 이 기록을 모두 깼다.[3] 2009년 까지 롯데의 감독을 하다 해임 된다. 이유는 반드시 교진에 갈 것이며 '''다른 팀'''이 지명을 하더라도 '''절대로 가지 않겠다고 선언''' 했었던 유망주 '''쵸노 히사요시''' 지명을 독단으로 강행했다가 지명거부를 당했기 때문.[4] 2004년~2005년 치바 롯데에서 있었다. 2019년 마린 스타디움에 홈런 라군이란 이름의 X-존이 설치되기 전까지의 치바 롯데 선수단 중 최후의 30홈런 기록 달성자였으며 '''2005년 일본시리즈 우승도''' 경험을 한다.[5] 이승엽 이전에 롯데에 먼저 있던 외인[6] 당시 발렌타인 감독의 구상은 3루 자리를 유망주 이마에 토시아키에게 넘기고 장타력 부족은 '''이승엽'''[4] 과 베니 아그바야니[5] 등의 새 외국인 타자들의 활약으로 채운다는 것이었다. 2004년에는 3할-30홈런을 기록한 베니 정도를 빼면 그다지 들어맞지 않은 구상이었지만 그래도 그 조합으로 2005년 일본시리즈를 우승했고, 롯데를 나온 페르난데스도 세이부 등에서 괜찮은 커리어를 보냈으니 결과적으로는 윈윈이 되었다.[7] 2012년에는 다시 주전 1루수로 복귀해서 풀시즌 1루수로 뛰었다. 다만 성적은 개박살나면서 OPS .626의 1루수라는 불명예스러운 기록을 남겼다.[8] 나이가 들어도 지명타자로 기용할수 있는 지바 롯데, 세이부, 라쿠텐, 오릭스 등 퍼시픽 리그 소속팀 스카우트들의 표적이였다.[9] 2011년 세이부에서 17홈런을 기록했는데 이 당시 리그가 극심한 투고타저였음을 감안한다면 그럭저럭 선방했다고 봐 줄수도 있지만 2012년에는 그나마 남아있던 장타력까지도 죽어버리는 바람에 발도 느리고 타율도 낮은 똑딱이가 되어버렸다. 그나마 2013년까지 일본에서 뛸 수 있었던 이유는 2011년을 끝으로 기한을 채워 용병쿼터와 상관없이 내국인 취급을 받았기 때문. 라쿠텐에서 뛴 2012년에는 '''규정타석을 채우고 3홈런'''이라는 처참한 기록을 냈다. OPS도 .626으로 최악. 아무리 투고타저가 심각했던 당시 리그 상황을 고려해봐도 주전 1루수가, 그것도 용병타자가 3홈런에 OPS .626을 찍는다는것은 용납하기 어려운 성적이다.[10] 일본 프로야구를 본 위키러들은 잘 알겠지만, 여기서 KBO 리그를 몸담던 SK감독을 맡던 '''트레이 힐만'''이나 삼성에서 뛰던 악마 '''발비노 갈베스''' 등등 여러 선수들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