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압사

 

1. 소개
2. 역사
3. 행정구역과 위치
4. 주요 시설
5. 여담


1. 소개


虎壓寺
서울특별시 금천구 시흥 2동 호암산(虎巖山) 아래에 위치한 대한불교 조계종 사찰로 조계사의 말사(末寺)이다. (일제시대까지만 해도 봉은사의 말사였다고 한다.)

2. 역사


사찰 이름 '호압'은 호랑이를 누른다는 뜻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전설이 전하는데 아래와 같다.
삼성산(三聖山) 현 동쪽 10리 지점에 있는데, 진산이다. 호암산(虎巖山) 현 동쪽 5리 지점에 있다. 범 모양과 같은 바위가 있으므로, 이름이 되었다. 윤자(尹慈)의 설(說)에, “금천 동쪽에 있는 산의 우뚝한 형세가 범이 가는 것 같다. 또 험하고 위태한 바위가 있는데, 호암(虎巖)이라 부른다. 술사(術士)가 보고 바위 북쪽 모퉁이에 절을 세워서 호갑(虎岬)이라 하였다. 거기에서 북쪽으로 7리 지점에 있는 다리를 궁교(弓橋)라 하고, 또 북쪽 10리 지점에 사자암(獅子菴)이 있다. 모두 범이 가는 듯한 산세를 누르려는 것이었다. (하략)"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0권 경기-금천현(衿川縣)조
산의 형세가 범이 걸어가는 듯하므로 산의 북쪽에 절을 세워 호갑(虎岬)이라 하고, 다리도 궁교(弓橋, 활 다리)라 하고, 암자도 사자암(獅子菴)이라 하여 산을 억누르려 했단 것이다. 궁교는 활로 호랑이를 쏘려는 것이고, 사자암은 사자의 기세로 호랑이가 설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흔한 비보풍수적인 전설이다.
이와 비슷하지만 좀 더 극적인 다른 전설도 있다.
조선 태조 3년(1394) 무렵, 경복궁을 짓고자 공사를 하는데 진척이 되지 않았다. 태조가 대목(大木)을 불러 꾸짖으니 대목이 머리를 조아리며 말하였다.
"낮에 공사를 진행하면 밤에 호랑이와 비슷하게 생긴 괴물이 나타나 세워놓은 것들을 전부 부숴버립니다."
태조가 무장을 갖추고 병사들과 함께 밤을 기다리니, 정말로 두 눈에 불빛이 형형하고 모습이 호랑이 비슷한 괴물이 나타났다. 군사들이 활을 쏘고 창칼을 휘둘렀으나 괴물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공사현장을 망가트린 뒤 유유히 사라졌다. 이성계가 숙소로 돌아와 이를 어떡하나 고민하는데 홀연히 노인이 나타나더니 말하였다.
"한양은 더없이 좋은 도읍지로다."
노인이 산자락을 가리켰다. 태조는 그제서야 그 산이 한양을 노려보는 범의 형상임을 깨달았다. 태조가 저 산의 기운을 누를 방도를 물으니, 노인은 범이란 꼬리를 밟으면 꼼짝하지 못하니, 꼬리에 해당하는 곳에 절을 지으라고 알려주고 사라졌다. 태조가 들은 대로 호랑이 꼬리에 해당하는 자리에 호압사를 세우니 비로소 궁궐을 무사히 지을 수 있었다.
위 이야기들은 물론 그저 전설일 뿐이다. 일제시대인 1943년, 승려 안진호(安震湖)[1]가 쓴 ≪봉은본말사지(奉恩本末寺誌)≫에 따르면, 조선 태종 7년(1407)에 창건되었으며, 태종이 호압사(虎壓寺)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 그러나 태종은 강력한 억불숭유(抑佛崇儒) 정책을 추진하였는데, 과연 왕명으로 절을 창건하고 절에 이름까지 내려주었을지 의문이 남는다.[2] 또한 ≪봉은본말사지≫도 20세기의 기록이므로 신빙성 있는 자료로 삼기에는 불만족스럽다. 16세기 중종 때 나온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왕실이 호압사를 창건했다는 이야기가 전혀 없으므로, 태조나 태종이 창건, 또는 창건에 관여했다는 전설은 그 후에 나왔을 가능성이 높다.
전설을 제외하면 창건역사는 이처럼 불확실하며 그 이후의 역사도 불명확하다. 옛 기록에 단지 호압사라는 절이 있다는 정도로만 언급될 뿐이다. 헌종 7년(1841)에 건물이 너무나 퇴락하여, 상궁 남씨(南氏)와 유씨(兪氏)의 도움을 받아 고쳐 지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1935년에 주지 만월(滿月)이 약사전 6칸을 지어 현대에 이른다.
그러나 이렇게 중창하고 일제시대에 약사전을 지었는데도 규모가 작다. 전설만 듣고 어느 정도 규모가 되는 절인 줄 알았다면, 실제로 보고 그 아담함에 놀랄 것이다. 호암산-삼성산 일대로 등산하는 사람들이 호압사를 들머리/날머리로 삼아 드나들기 때문에 이쪽 등산객들에게도 친근하다.

3. 행정구역과 위치


이 사찰은 행정구역이 여러 번 변하였다. 본래 경기도 시흥군에 속했지만, 이 지역이 서울특별시에 편입됨에 따라 영등포구가 되었다가 1980년 구로구가 설정되자 구로구로 변경되었다. 1995년 3월, 금천구가 분리독립하자 금천구 사찰로 등록되었다.
서울특별시 남서부, 경기도 안양시와 인접한 호암산 북동쪽 산등성이에 위치한다. 주변에는 벽산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다.

4. 주요 시설


호압사에는 대웅전이 없고 약사전(藥師殿)이 본당이다.[3] 약사전의 주불인 약사여래상은 서울시 문화재자료 제8호 '석약사불좌상(石藥師佛坐像)'이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원래는 돌을 깎아 만든 불상이지만 개금(금칠)하여 온통 금빛이라 모르고 보면 석제인 줄 절대 알 수 없다. 대략 조선 전기에 만들었다고 추정한다.
그 외에 범종루ㆍ삼성각(三聖閣)ㆍ요사채ㆍ불교대학ㆍ관세음보살상ㆍ지장보살상ㆍ포대화상상ㆍ천진불 등이 있다. 약사전 앞에 있는 8각 9층 석탑(높이 15 m)은 2008년에 완공된 것인데, 진신사리를 안치하였다고 한다. 수령이 5백 년이나 되었다는 느티나무도 약사전 앞에 있는데, 워낙 오래되어 나무에 구멍이 뻥 뚤렸다. 경내에 있는 석탑이나 석비에 언제 만들었는지 명문이 있지만, 연도를 전부 불기로만 기록했기 때문에 언제 만들었다는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참고로 일주문과 사찰 본당간 거리가 상당하다. 주차시설도 있지만 워낙 경사도가 높고 커브도 심한 데다 등산객들도 많이 다니기 때문에, 초보운전자에게는 난코스. 일주문 앞에 주차하고 10여 분은 등산을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차라리 속 편하다.[4]
호압사 주차장에서 호암산 폭포까지 1 km 구간에 나무테크로 된 호암 늘솔길이 조성되어 있어 가볍게 산책할 수 있다.

5. 여담


"호암산"과 "호압사"의 철자가 하도 비슷하여 혼동이 많은 편이므로 주의를 요한다.
전철역과 호압사로 연계되는 마을버스로는 독산역/금천구청역에서는 금천01번(청색), 관악역에서는 안양 마을버스 6-3번이 존재하며,[5] 시내버스로는 관악역신대방역에서 안양 버스 20, 신림역에서 서울 버스 152, 서울대입구역에서 서울 버스 6515 등을 통해 이용 가능하다.
호압사 주지였던 원욱(元旭) 스님은 불교 금강영관의 창시자 양익 스님의 맏제자로 선관무를 전파한다.

[1] 생몰: 1880-1965. 안진호는 1925년에 일본불교 시찰단의 일원으로 일본에 가서 각지의 사찰들을 보며, 저마다 자기네 절의 역사를 기록한 사지(寺誌)가 있음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아, 이후로 조선 사찰의 사지를 기록하기로 원을 세웠다고 한다. 안진호는 그 외에도 ≪석문의범(釋門儀範)≫을 집필, 출판하여 조선 사찰의 의례를 표준화하고자 한 것으로도 한국불교사에 이름을 남겼다.[2] 태종 18년(1418)에 성녕대군이 죽자 대자암(大慈庵)이란 암자를 짓고 성녕대군의 묘를 관리하도록 한 사례가 있으나, 이것은 실록에 기록이 남았다. 만약 암자도 아니고 절을 지으며 이름까지 내려주었다면, 역시 기록에 남아야 하지 않을까?[3] 대웅전은 본존불이 석가모니, 약사전은 약사여래이다.[4] 시흥 5동 은행나무 ~ 벽산아파트/호압사 ~ 호암산 정상 전망대까지 공포의 오르막이 펼쳐진다.[5] 석수역에서 연계되는 금천11-1번은 운행적자로 2016년 9월 1일부터 운행을 중단하였다. 2017년 8월 31일 운행 중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