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치키스 기관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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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Forgotten Weapons의 M1914 리뷰 영상
Forgotten Weapons의 M1914 사격 영상
프랑스의 호치키스사에서 만든 기관총들을 일람하는 문서. 각국으로 수출돼서 다양한 변종이 있으며, 최종적으로는 제2차 세계 대전은 물론 알제리 전쟁과 베트남 전쟁까지 사용되었다.
종류로는 일반적인 중기관총 버전(M1897, M1900, M1914), 경기관총 버전(M1922, M1926), 13.2mm 탄을 사용하는 소형대공포용 대형 기관총(M1930), 25mm 대공포[3] 등이 있다.
2. 역사
맥심 기관총의 성공적인 데뷔로 열강들은 식민지의 원활한 통치를 위해 기관총을 대거 사들이기 시작한다. 이에 자극을 받은 많은 발명가들은 기관총을 잘만 만들면 대성공할 수 있다는 생각에 많은 설계안을 쏟아낸다. 이 와중에 오스트리아의 A. 오드콜렉 폰 우예즈는 자동 소총의 개발을위해 도입된 가스압 작동방식의 구조와 새로운 급탄 장치로 경량 기관총을 설계했고, 마침 기관총 설계를 찾고 있던 호치키스 사가 이를 구입 하게 된다.[4]
오드콜렉의 디자인은 경량화가 최우선 사항이었다. 때문에 맥심 기관총과 많은 부분이 달랐다.
첫 번째는 가스압 작동 구조의 사용으로, 가스압 구조는 반동 이용식에 비하여 작동성을 보장하기 쉬웠고, 노리쇠를 가볍게 만들어도 충분히 사속을 컨트롤 할 수 있으므로 경량화를 위해 채택 되었다. 다만 이 구조는 가스 튜브가 설치되기 때문에 수랭 재킷을 달 수가 없었다. 가스 튜브가 냉각되면 내부 가스가 수축하므로 작동 불량이 생기기 때문이다. 미국의 존 브라우닝 또한 M1895 콜트-브라우닝 기관총을 제작할 때 가스압으로 작동하는 이 물건을 공랭식으로 만든 바 가 있다.
두 번째는 탄띠이다. 우리나라를 중심으로 잘못 알려진 사실이 '맥심 기관총의 특허를 피하기 위해 보탄판으로 설계되었다'인데, 실제로 초기 설계안은 탄띠였다. 1891년 설계안 특허 오드콜렉의 특허안에서 보이듯이 이 탄띠는 맥심의 물건과 완전히 다른 물건이었다. 맥심 기관총은 기존 소총수의 탄띠와 유사하여 포켓에 든 탄약을 뒤로 뽑아내어 밀어넣었지만, 오드콜렉의 디자인은 탄띠는 캠으로 당겨지고 탄약만 경사로에 걸려 캠이 당기는 힘을 이용하여 탄약을 고정시킨 실 혹은 철사로부터 '''뜯어내는''' 방식이었다. 잘 상상이 안되다시피 이 안은 그닥 잘 작동하지 않았다고 한다. 따라서 1892년 설계안을 변경하면서 가운데가 개방된 클립으로 탄을 물어 뒤에서 밀었을때 '''튕겨'''나오는 안으로 바뀌었고92년 설계안 특허, fig 21, 22, 23의 탄띠 디자인에 주목, 이 안을 바탕으로 로렌스 V. 베넷과 앙리 메르시에가 설계를 보완하여 마침내 호치키스 기관총을 만든다.1896년 베넷과 메르시에의 설계안 이 과정에서 기존 탄띠의 설계상의 난점 때문에 금속제 보탄판을 도입하게 된 것이다. 맥심의 설계안과는 처음부터 관련이 없었다.
호치키스 기관총은 이러한 명 설계 덕분에 작동성이 매우 우수했고, 당시 중기관총 중에는 가장 가벼웠다.[5] 그리고 맥심 기관총에 비해 저렴했다. 하지만 탄띠에 수랭식 총열을 사용하는 맥심 기관총에 비해 화력 면에서 열세였기 때문에(공랭식이라 사격간 냉각시간이 필요하여 지속사격능력이 떨어졌다.) 비교적 기관총의 필요가 적은 곳에 팔렸고, 열강 중에는 오직 프랑스만이 사용했다. 당시 프랑스 군부는 민간에서 개발한 이 기관총에 불만이 좀 많았기 때문에 자체적으로 기관총을 제작하려 했지만, 퓌토 APX 기관총과 그를 개량한 생테티엔 M1907의 신뢰도가 형편없어[6] 결국 1917년 최종 개량형인 Mle 1914를 정식으로 도입하게 된다.
최종 설계안에서 보탄판이 도입 되었으나, 사실 초기에 이 보탄판은 탄약 수 제한이 없었다. 가스압으로 작동하는 캠의 회전력이 충분히 강했기 때문에 얼마든지 긴 판을 달더라도 문제될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1896년 설계안의 두 번째 급탄 장치(Fig 67)가 바로 초기형 관절식 탄 벨트이다. 이것을 개랑하여 적용한 대표적인 물건이 1911년 도입되어 노르웨이에서 사용된 호치키스로 이 동네는 프랑스와는 달리 2~3발의 보탄판을 연결한 관절식 탄띠를 더 애용했다. 보탄판은 프랑스에서 애용했는데, 그 이유는 짧고 가벼워 기동성이 우수했기 때문으로, 식민지 관리를 위해 기동성이 중요했던 프랑스의 구미에 더 맞았기 때문이다. 보탄판에 대한 더 자세한 사항은 보탄판 문서 참조.
1차 대전이 발발하면서 상정했던 식민지와는 다른 전장이 펼쳐졌고, 호치키스는 공랭식이었으므로 장시간 사격시 추가적인 냉각이 필요하여 지속사격능력에 한계를 보였기 때문에 화력 부족으로 일선에서 불만을 사곤 했다. 또한 보탄판의 번거로움으로 인하여 지속적인 탄약 공급이 필요한 항공 기관총으로는 프랑스도 영국의 공랭식 빅커스 중기관총을 이용했다. 하지만, 그 가벼운 무게 덕에 오히려 기동전에서 강세를 보여 못쓸 물건이라는 악평을 듣는 정도는 아니었고 프랑스로부터 무기를 공여 받은 다른 국가에 의해 사용되면서도 딱히 불평이 심하진 않고 오히려 훌륭한 기관총이란 평을 들었다. 1차 대전이 끝나고서 프랑스가 신형 탄약을 제작/도입하게 되면서 BAR 기반의 탄창식 경기관총과 브라우닝 1919기관총을 들이게 되었고, 일선에서 물러나는 듯 했으나, 세대 교체가 완전히 끝나기도 전에 2차 대전이 터지며 비시 프랑스에 의해 계속 사용되었다.
1890년 신생의 일본 제국은 기관총이 필요했고, 유럽의 다양한 기관총을 둘러보는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여러 물건들을 사용하면서 그들이 택한 것이 바로 호치키스 M1897 기관총이었다. 그들이 이 기관총을 선택한 이유는 가볍고, 물이 필요 없어 보급 상에 난점이 없으며, 구조가 간단하여 정비가 쉽고 국산화 하기 쉽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 국산화 모델이 바로 38년식 기관총이다. 러일전쟁 당시 일본군은 많은 삽질을 하고 러시아군의 맥심에 벌집이 되기도 했지만, 호치키스의 기동성과 성능에 매료되어 이후 설계되는 대부분의 기관총이 호치키스를 바탕으로 하게 했다.
3. 여담
스테이플러를 뜻하는 상표명 호치키스와 직접적으로는 관련이 없다. E.H.Hotchkiss사에서 제조한 스테이플러가 일본으로 수입되면서 스테이플러를 호치키스라 부르게 되었고, 이 명칭이 한국으로 그대로 들어온 것은 맞긴 하지만, 이 회사의 설립자는 일라이 허벨 호치키스(Eli Hubbell Hotchkiss)라는 사람으로 이 기관총을 개발한 개발자 벤자민 호치키스와는 다른 시대의 다른 인물이다. 다만 인척 관계였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 이들의 출신지인 코네티컷, 그 중에서도 뉴 헤이븐 지역의 초기 성장에 주요한 역할을 담당한 유력가문이 호치키스 가문이기 때문이다. 다만 #참조링크 내용으로 보면, 당사자들도 '관계가 전혀 없다', '사촌뻘이다" 등 의견이 서로 엇갈리는 듯. 여담으로 역시 코네티컷에 위치한 교육기관, 호치키스 스쿨과도 관련이 '''있'''다.
이상하게 국내에서 과소 평가당하는 기관총이다. 특히 많이 보이는 말이 맥심 기관총의 특허문제 때문에 설계가 변경되어 저런(?) 물건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구 일본군이 호치키스식 기관총을 선호했기 때문에 보이는 현상으로 추측된다. 앞서 이야기 했듯이 맥심 기관총의 설계와는 처음부터 그 관련성이 없었다. 세부적인 설계들이 모두 달랐기 때문에 겹치는 것 이라고는 초기 설계안의 탄띠밖에 없는데, 이 역시 형상이나 작동방식이 완전히 다르다. 특히 M1895 콜트-브라우닝은 탄띠 설계가 맥심과 매우 비슷하지만, 딱히 특허권 침해에대한 말도 없을 뿐더러, 미군에 채택되어 잘만 찍어냈다. 따라서 애초에 근거없는 이야기라는 소리다.
수랭식을 채택하지 않은것도 맥심 기관총의 영향이라는 말이 있으나 이도 사실무근으로, 애초에 가스식 기관총은 수랭식 냉각자켓을 달기 힘들다. 고온 고압의 가스가 피스톤을 밀어야 하는데 물 때문에 냉각, 응축되어 압력이 급격히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스 작동식은 반동 이용식이나 블로우백에 비하여 작동 간의 신뢰성이 더 높고, 의외로 설계하기도 쉬운데다[7][8] 무거운 노리쇠가 필요 없으므로 가볍다. 현대 소총이나 기관총[9] 이 죄다 가스 작동식인 이유가 여기 있다. 그리고 수랭식은 지속 사격 능력은 우수하나 기동성이 너무 떨어졌다. 그 이유가 물 때문인데, 전장에서 물이 매우 귀한 자원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수송조차 유류 만큼이나 힘들고, 병사들도 물을 소모하기 때문에 그 중요도가 너무 높다. 따라서 1차대전 종전 후 경량화 바람과 함께 수냉식 기관총이 급속도로 사라졌다. 호치키스 기관총이 어찌보면 선구자였던 셈.
의외로 최초의 대구경 중기관총이 될 뻔 한 물건이었다. 경장갑 차량 대응용으로 13.2 mm 탄약을 사용한 호치키스 M1929 모델이 만들어 졌기 때문이다. 이 물건은 대공용 및 경 장갑용으로 사용되었으며, 기병대 혹은 보병대에 의해 삼각대나 대공 거치대에 거치되어 사용되었다. 안타깝게도 미국에 밀려 최초 타이틀은 못 가졌고[10] 그리 대중적으로 사용되지도 못했다. 이후 프랑스 공군이 M1930의 제식명으로 도입하여 근거리 방공용으로 잘 써먹었다.
4. 종류
- 중기관총 M1897
- 중기관총 M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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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유신 당시 일본이 M1897을 자국의 6.5mm탄에 맞게 만들어서 보식 기관포(保 (ホ) 式機関砲)로 채용한 뒤 개량을 거치면서 38식 기관총, 3년식 기관총, 92식 중기관총 등을 만들어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써먹게 된다. M1897과 M1900은 외형적으로 큰 차이는 없다.
메이지 유신 당시 일본이 M1897을 자국의 6.5mm탄에 맞게 만들어서 보식 기관포(保 (ホ) 式機関砲)로 채용한 뒤 개량을 거치면서 38식 기관총, 3년식 기관총, 92식 중기관총 등을 만들어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써먹게 된다. M1897과 M1900은 외형적으로 큰 차이는 없다.
- 경기관총 호치키스 M1909
- 중기관총 M1914
- 경기관총 M1922, M1924, M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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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인 보병용 경 기관총으로 개발된 모델로 상부 급탄식 탄창과 보탄판을 사용할수 있는 모델이 각각 있었다. 프랑스보다도 다른 중화민국 혹은 그리스에서 구입하여 많이 활약하였다. 의외로 영국에서도 제작되어 사용했다.
본격적인 보병용 경 기관총으로 개발된 모델로 상부 급탄식 탄창과 보탄판을 사용할수 있는 모델이 각각 있었다. 프랑스보다도 다른 중화민국 혹은 그리스에서 구입하여 많이 활약하였다. 의외로 영국에서도 제작되어 사용했다.
- 대구경 중기관총 M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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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경기관총 버전과 마찬가지로 탄창 이외에도 측면에 보탄판으로도 장전할 수 있다. 동시에는 안되고 급탄기구 교체가 필요하다. 현대에 들어서서 .50 BMG를 사용할 수 있도록 개조된 것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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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경기관총 버전과 마찬가지로 탄창 이외에도 측면에 보탄판으로도 장전할 수 있다. 동시에는 안되고 급탄기구 교체가 필요하다. 현대에 들어서서 .50 BMG를 사용할 수 있도록 개조된 것이 있다.
- 25mm 대공포 (M1938/3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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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부터 개발되어 왔으나 정작 프랑스군에서는 느린 사속으로 인한 화력 부족 및 탄창용량 문제로 채택하지는 않았다.[11] 루마니아와 일본 등에 수출되었으며, 일본군이 이를 수입해서 96식 25mm 고각기총으로 운용했다.
1930년대부터 개발되어 왔으나 정작 프랑스군에서는 느린 사속으로 인한 화력 부족 및 탄창용량 문제로 채택하지는 않았다.[11] 루마니아와 일본 등에 수출되었으며, 일본군이 이를 수입해서 96식 25mm 고각기총으로 운용했다.
5. 대중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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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활한 급탄을 위해 24발들이 보탄판에 기름칠을 하고, 탄을 다 쏘면 바로 보탄판을 끼는 장면이 나온다.
6. 둘러보기
[1] 프랑스군의 사용기간으로 실제 양산은 1897년 이후에 시작됨.[2] 구식 탄약이나, 이러한 구식 탄약 특유의 대구경 때문에 소이탄으로 사용하기 적합하여 이 탄을 소이탄으로 만들어 기구 격추용으로 사용했다.[3]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군의 주력 대공포인 96식 대공포의 원형이다.[4] 호치키스 자신이 디자인에 관여한 물건은 아니다. 당시 이미 고인이었기 때문이다.[5] 물 무게를 제외하면 이보다 가벼운 기관총도 있었지만, 이놈은 애초에 물이 안들어가니까 물이 들어간 무게와 비교하는 것이 타당하다. 당시 수랭식 기관총은 탄약을 제외한 모든 장비를 갖춘 무게만 70 kg를 넘겼다. 하지만 이놈은 탄약까지 갖춰야 그 정도 되었으니 이 정도면 매우 가벼운 것이다.[6] 이 생테티엔 M1907 기관총은 특허 회피를 위해 일반적인 '후퇴하는' 피스톤 대신 '전진하는' 피스톤을 사용하고 이 피스톤에 연결된 활대의 톱니가 톱니바퀴를 회전시켜 노리쇠를 후퇴시키는 아주 기괴한 설계를 도입했으나... 이런 특유의 구조 때문에 부품 수가 호치키스 M1914의 두 배인 64개에 달했고(M1914는 32개) 이 같은 많은 부품과 특유의 작동구조 탓에 생산성도 그닥, 신뢰선도 그닥이라는 평가만 받으며 2선급으로 돌려졌다.[7] 실제 현대 개발되는 대부분의 총기는 가스 작동식으로, 작동 구조에 있어선 노리쇠를 직접 밀어주는 것이 총열에서 뽑아낸 가스 그 자체(가스 직동식)냐, 가스가 밀어낸 피스톤이냐(가스 피스톤식), 가스 피스톤식이라면 피스톤의 왕복 거리가 노리쇠 왕복 거리와 같느냐(롱 스트로크) 짧느냐(쇼트 스트로크) 정도의 차이밖에 없다고 보면 된다.[8] 의외로 블로우백이 가장 설계하기 어렵다. 탄약의 압력과 노리쇠가 밀리는 정도의 황금 비율을 찾아야 하는데 그게 실제로 매우 힘들기 때문이다. 따라서 탄약을 무지하게 가리는데다, 탄약이 강할수록 필요한 무게와 장력이 천정부지로 높아지므로 대구경에는 적용할 수조차 없다. 이를 극복하고자 여러 지연 블로우백 방식이나 API 블로우백이 개발되었지만, 기계적 지연 요소를 제작하는데 복잡한 기계 가공이 필요하거나(지연 블로우백) 오픈 볼트 총기에서만 활용할 수 있고 그나마 노리쇠 폐쇄 전 딱 맞는 격발 타이밍을 조절하는 것도 말처럼 쉽지는 않다(API 블로우백).[9] 현대에 개발된 물건 한정.[10] 브라우닝이 프로토타입을 만든 시기가 1918년으로 가장 빠르다. 그 밖에 독일 제국도 13.2mm TuF 탄을 쓰는 MG18TuF 기관총을 개발한 바 있으나, 1차대전의 종전으로 인해 시제품만 생산되었고 실전 투입에 이르지는 못했다.[11] 그런데 웃긴 게, 정작 신예 전함인 리슐리외급 전함에는 이 대공포보다도 성능이 나쁜 37mm 단발 대공포(발사속도 분당 42발)와 13.2mm 기관총을 대공무장으로 달아놓았다... 차라리 이 대공포를 다는 쪽이 그나마 더 나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