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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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亨根
1945년 음력 7월 26일 ~ (78세)
1. 개요
2. 생애
3. 사건 사고
4. 여담
5. 선거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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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전 법조인, 공무원, 정치인이다. 본관은 해주(海州)[1], 호는 송산(松山)이다. 임진왜란 때 의병장 정문부의 12대손이다.

2. 생애


1945년 경상남도 거창군 마리면 영승리#에서 6남 2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후 부산 동신초등학교, 경남중학교, 경남고등학교(17회),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동 대학원 법학과를 졸업하였다. 학부 시절 서울대학교 총학생회장을 역임하였다. 대학원 재학 중 사법시험에 합격하였고 대한민국 육군 군법무관(중위)으로 병역의무를 이수하였다.
이후 검사로 근무하였다. 1983년부터 국가안전기획부에 파견되어 근무를 하였다. 노신영 안기부장이 "'''똑똑하고 믿을 수 있는 사람 보내달라"'''고 검찰에 요청해 정형근이 파견된 것. 안기부에 파견 직후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 같은 주요 사건을 수사하였으며, 이후에는 공안통으로 방첩 분야에서 주로 일했다.
하지만 5~6공 내내 국가안전기획부에 소속돼 있을 때 고문을 지휘했고, 본인의 지인들을 돕고자 정보부 내 인맥을 활용해 약점을 잡는 등 무리한 일을 많이 벌여 '''주변에서는 찬사를, 정적들과는 불구대천의 척을''' 지게 되었다. 1986년에 '민족해방노동자당 사건' 관련자로 지목된 심진구(1960~2014)의 고문수사를 지휘했고, 서경원은 밀입북 사건으로 수사받을 당시 안기부 대공조사국장이었던 정형근이 자신을 직접 고문했다며 석방 이후 폭로했다. 이로 인해 정형근은 DJ집권시절 검찰조사를 받을뻔 했는데, 그답게 용케 체포를 면했다.(KBS, MBC, 동아일보)
정형근이 벌인 일 중 크게 원한을 샀던 일 중 하나가 바로 '''상대방의 자식문제를 가지고 협박'''한 것이었다고 한다.[2] 이런 연유로 1998년 김대중 정부가 출범한 후, 이후락, 전두환의 경우처럼 과거 DJ를 핍박하거나 죽이려 들었던 사람들이 세간의 예상과 다르게 정치보복 없이 비교적 평온하게 여생을 보낸 반면, '''유독 정형근만큼은''' 당사자가 하루에도 몇 차례씩 휴대전화를 바꿔쓴 적도 있을만큼 원한갚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1994년 말부터 1995년까지 국가안전기획부 제1차장을 역임하였으며,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한국당 후보로 부산광역시 북구-강서구 갑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99년 국가정보원의 언론대책 문건을 폭로하였다.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와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서 연속으로 당선되어 3선을 기록했으며 2006년 한나라당 전당대회에서 최고위원에 선출되었다. 참고로 2004년 선거 때는 열린우리당 이철 후보와 맞붙어서 '''공안검사 VS 사형수'''라는 재미있는 구도가 나오기도.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후배 법조인 박민식에 밀려 한나라당 공천에서 탈락했고, 이에 승복해 정계를 떠나 변호사로 활동 중 얼마 안 되어 국민건강보험공단 이사장으로 부임, 2011년까지 재임했다. 그리고 2011년부터 뉴라이트전국연합 상임의장을 역임하였다. 하지만 제일저축은행으로부터 뇌물을 받은 혐의로 벌금형을 선고받기도 했다.

3. 사건 사고


1999년 옷 로비 사건 때 얼떨결에 앙드레 김이 예명을 쓰게 된 경위를 파헤쳤다. 목요상 당시 청문위원장이 앙드레 김에게 증인선서를 할 때 본명을 요구하면서 '''김봉남'''이라는 이름이 밝혀졌는데, 정형근이 질문 도중에 '''"어떻게 해서 앙드레 김이라는 예명을 쓰게 되었나?"'''라는 질문을 하고 이에 앙드레 김이 상세히 설명한 것이다.
2005년 현직 국회의원일때 한 호텔방에서 40대 여자와 몇 시간 동안 같이 있다가 그녀의 남편과 실랑이를 벌이기도 했다. 정형근은 자신이 주문한 필리핀산 묵주를 받기 위해 같이 있었다, 묵주를 주고 받느라 같이 있었다며 궁색한 변명을 했다. 그래서 "얼마나 특별한 묵주이길래 수령하는 데 몇 시간이 걸리냐" "호텔방에서 둘이 손 잡고 기도만 하고 있었냐" 등의 조롱을 들었고, 끝내 '묵사마'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뿐만 아니라 애초에 가톨릭에서는 아내 외의 여자를 탐하지 말라고 가르친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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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해 국회에서는 북한 간첩의 통신목록이 들어있는 디스켓을 증거로 입수했다고 하다가 디스켓을 보여달라는 기자의 요구에 디스켓을 '''복사기로 복사후 인쇄한 A4용지를'''을 들고 나와버리는 바람에 본의 아니게 컴맹 인증을 한 적도 있다.[4]

4. 여담


  • 사위(서봉규)도 검사이며 과거에 대전지검 영동지청장, 대구지검 포항지청장을 지냈고 현재는 광주고검 전주지부에서 근무하고 있다.(연수원 26기).

5. 선거 이력


당 내부 선거가 아닌 대한민국 선출직 공직자 선거 결과만 기록한다.
연도
선거종류
소속정당
득표수(득표율)
당선여부
비고
1996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부산 북·강서 갑)
'''신한국당'''
'''56,876 (60.08%)'''
'''당선 (1위)'''

2000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부산 북·강서 갑)
'''한나라당'''
'''48,104 (76.56%)'''
'''당선 (1위)'''

2004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부산 북구·강서구 갑)
'''한나라당'''
'''41,547 (51.15%)'''
'''당선 (1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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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농포공파 22세 근(根) 항렬.[2] 측천무후 시절의 혹리(혹독한 관리) 내준신이 심지 굳은 중신들을 압박하는 최후의 수단으로 즐겨쓰는 등 역사가 오래된 수법이라고 한다. 앞서 언급한 내준신의 경우, 이 방법을 쓰면 결국 내준신 무리들이 원하는 대로 응하지 않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고.[3] 십계명의 (가톨릭 기준) 6번째, 9번째 명령 참조. 정형근은 거짓말을 하지 말고, 간음하지 말며, 남의 아내를 탐내지 말라는 계명을 3개나 어긴 셈이 된다.[4] 정 씨가 40년대 중반 출생인 걸 감안할 때, 부자연스러운 일은 아니다. 다만 어려운 사법고시에 합격해 3선 의원까지 지낸 실력자도, 시대 흐름을 따라가지 않으면, 이런 망신을 당할 수 있다는 걸, 세간에 깊이 인식시켜 준 해프닝 중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