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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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김기종
출생
1959년 4월 3일
출생지
전라남도 강진군
가족
비혼[1]
소속
우리마당 (1982. 12.~ )
만석중놀이보존회 (1995. 3.~ )
경력
우리마당통일문화연구소 소장 (1988. 3.~ )
성공회대학교 교양학부 외래교수 (1997. 3.~2007)
학력
금호고등학교 (1975~1978)
성균관대학교 법률학과 학사 (1980~1984)
숭실대학교 통일정책대학원 교육문화정책 석사 (1992~1996)
링크

1. 개요
2. 이력
3. 활동
4. 반미주의
5. 횡설수설
6. 관련 사고
7. 사건사고
7.1. 주한일본대사 습격 사건
7.2. 박원순 시장 강연회 폭행 사건
7.3. EXO 공연 행사 폭행 사건
7.5. 구치소 교도관 폭행 사건
8. 평가
8.1. 주변 지인
8.2. 언론
8.3. 북한
9. 그 외


1. 개요


자칭 한반도 통일운동가이자 주한미국대사 마크 리퍼트 피습 사건의 범인.

2. 이력


김기종은 1959년 전라남도 강진군에서 태어나서 광주광역시에서 성장했다. 집안의 종손으로서 기대를 받으면서 자라났고, 1978년 광주 금호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서울대학교를 목표로 하여 입시에 여러 차례 실패하여 재수를 거듭하다가 1980년에 성균관대학교에 입학했다. 다음해에도 서울대학교 입시에 도전했으나 실패했다고 한다.관련 기사
대학생활 중인 1982년에 재수생활에서 만난 아우들과 함께 ‘바회’모임을 결성했다. 이 모임은 1984년에 설립하게 되는 ‘우리마당’의 전신격인 모임이라고 한다.
1984년 성균관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통일정책대학원에서 남한사회 통일문화운동의 과제로 석사논문을 썼다. 1982년 사법시험응시를 포기하고[2] 운동권에 가담했으며 주로 재야 문화 운동에 주력했다고 한다.
1980년대에 국악모임 ‘한가락’, 극회 ‘벽돌’ 등을 창립하며 문화계에서 활동했다. 1985년에는 도서출판 ‘우리마당’을 창간하기도 했다. 우리마당을 중심으로 연극 공연, 국악강좌, 탈춤·풍물교실, 문예심포지엄 등의 활동을 했다. 우리마당은 1984년 서울대, 고려대 등 5개 대학 총학생회 집행부와 함께 민정당사를 점거하였고, 1985년 8월에는 회원 내부 조직을 결성, 미국 대사관의 성조기를 태우기도 했다.
우리마당 홈페이지에서는 "1986∼1987년 군사정권의 호헌에 맞서 직선제 개헌운동의 중심역할을 수행하며 소위 '6월 항쟁'의 참호가 됐다","박종철 열사의 49제, 100일제 등을 주관집행했다"고 자신들을 소개하고 있다. 1987년에는 이한열 열사의 장례식을 집행하였다고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이 두 열사 장례식 집행은 과장일 가능성이 높은데, 이는 우리마당 블로그에 김기종이 올린 다음과 같은 글을 보면 알 수 있다.

1987년 장례 행렬에 봉사하였던 당사자들의 만족과 대단했다는 시민들에게, 아무런 의미를 부여 못하고 엉뚱한 유명 인사 참가한 추모제를 지내는 방식들은 안타깝고 처량하기만 하다. 열사 팔아먹는 행위이다. 이한열열사 기일, 왜 6월9일 추모제 지내는 것일까? 열사는 6월9일 최류탄 부상으로 7월5일 돌아가셨다. 일반 노환의 기일, 즉 병환 후 운명하실 때 기일은?

1987년 이한열 열사의 장례를 우리마당은 집행했다. 당시 장례 의전에 획기적 방식들이 많이 도입되었다. 풍물패, 썽풀이춤, 만장 앞세운 상여꾼들이 농경사회 전래의 ‘노제’를 집행하며 소중하게 장례식 치루었다. 민주의 다짐 피어날수 있도록 판그림 상여를 만들어 열사 가시는 길의 백여만 인파가 함께 공감하였었다.

즉 시청앞 마중나온 시민과 연대감 형성하며 민주화 역사 새롭게 일구던 기억들 정말로 대단했을 뿐이다.

(중략)

열사의 뜻을 함께 계승하여 민주화운동 기여하고자 만장과 함께 150여명 풍물패 상여 행렬의 형성들은 당시 상계동 개발의 봉사활동경험 배가된 결과이다.

이처럼 우리마당은, 80년대 문화운동 경험 바탕으로 이한열열사 뿐 아니라 수많은 열사들의 장례 의전을 맡아 새로운 의식 만들면서 모란공원 조성하게 된다. 즉 전태일 열사가 계신 곳을 민주성역으로 만들었다.

이같은 역사를 창출하며 열사들 뜻을 기리는 공감대 형성해주며 조직된 추모, 기념사업회가 출범 정신과 달리, 감투 이력을 다투는 상황에 기가 막힐 뿐이다. 결국 아쉽게도 민주 팔아먹는 집단들 태어난 후에는 계산서들을 맞추는 탓인지, 봉사로 활동한 우리마당 같은 단체는, 몇 열사 기일과 추모제 연락 못받는다.

특히 90년대에 민예총 활동 공식화 되면서부터이다. 더 이상 우리마당 등의 봉사, 필요없는 利權 탓이다. 아무튼 보고하는 이한열 열사 뿐 아니라, 다른 열사 님들은 누구에 의해, 어떤 의전으로 운구된 것일까? 군사정권 때는, 장례의 기록도 못하는 형편이었으니 당시 사진 간직하고 있는 가족들에게 확인하면 된다.해당 블로그.

김기종의 글에는 조사가 없어서 바로는 이해하기가 어려운데, 김기종의 글로 미루어보아서 "주관집행했다", "집행했다"고 말하는 활동의 실체는 장례식에서 풍물패 공연을 하는 "봉사활동"을 뜻하는 것일 가능성이 높다. 김기종의 주장을 최대한 수긍한다고 해도, 가서 조금 도와준 걸 가지고 자신의 활동을 과장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당시 기사에는 연세대학교 총학생회가 이한열 열사 장례식을 주관한 것으로 되어 있다.옛날 기사 실제로 장례식의 경우, 고인의 인연에 따라서 여러 단체(종교단체, 동문회나, 해병대 등)에서 봉사를 오기도 하는데 봉사하러 도와준 사람들이 모두 '주관해서 집행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과장이다. 즉, 봉사활동 해놓고 자기가 모든 걸 다 한 것 마냥 자신의 업적(?)을 과장하는 언론플레이일 가능성이 높으므로 김기종의 민주화 활동에 대한 공헌은 비판적으로 보아야 할 필요성이 높다.
1988년에는 올림픽 단독개최 반대운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하였다. 1988년 8월에는 괴한이 사무실에 들어와 폭행을 하고 도주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관련 기사
1997년부터 2007년까지 성공회대학교 교양학부의 외래교수를 지냈다. 김기종은 당시 ‘전통예술의 이해’라는 교양과목 1강좌를 강의했다.
1999년 1월 북한에 갔다가 돌아왔다.
김대중 정부에서 2001년 민주평화통일회의 자문위원으로 위촉했으며, 2002년 통일부 통일교육위원으로 활동했다. 또한 정부의 허가를 받고 2006년부터 2007년까지 북한을 6번 방북 했다. 특히 김기종이 2007년에는 종북성이 명확한 왕재산 사건 간첩 지역 총책이었던 임씨와 함께 방북을 했다.
2007년에 청와대 앞에서 우리마당 피습사건의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1인 시위를 벌이다 분신 자살을 시도했다. 이 때 전신 20%에 3도 화상을 입는 등 심하게 다쳤으며, 여러 차례 수술을 받으며 가까스로 소생했다고 알려졌다.
2007년 분신자살 시도 이후 여러 차례 돌출행동을 벌였다. 지인들에 따르면 이때부터 정신이 좀 불안정한 모습을 보여왔다고 한다. 김기종은 분신자살 기도가 계기가 되어 성공회 대학교에서 맡고 있던 강좌가 폐강되었다. 관련 기사
주변인의 증언에 따르면 이후 별다른 수익 없이 문화 활동을 지속하였지만 별다른 성과 없이 자산만 계속 소모하였고,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모습을 보이면서 다른 활동가들과도 단절이 심해졌다. 이러한 몰락 과정을 거쳐서 적어도 2014년 쯤에는 기초생활수급자로 전락하여 집세나 사무실 임대료도 내기 어려운 처지가 된 것으로 보이며, 자신이 운영하던 단체도 이름만 걸어놓고 혼자서 활동하는 유령 단체 수준으로 몰락했다.관련 기사.
2011년 12월 북한의 김정일이 죽었을 때 서울 도심에 김정일 분향소 설치를 시도하여 보수 단체와 충돌하기도 했다.

3.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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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종은 반미 민족주의 활동가로 통합진보당이 속해있던 '전쟁반대 평화실현 국민행동' 일원이라고 알려졌다. 그는 키 리졸브 등의 한미 연합훈련을 '전쟁도발연습'으로 규정했는데 이는 북한이 한미연합훈련을 비난할 때 쓰는 전형적인 멘트다. 독도지킴이 시위같은 합법 시위부터 전작권 회수 운동, 한미연합훈련 반대 시위등 불법시위활동에 참여한 경력이 있다.
김기종의 핵심 운동은 문화운동 단체인 '우리마당' 대표로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 행사와 한미전쟁연습 규탄 등의 시위 활동을 해왔다. 김기종은 한미 키 리졸브 연습에 반대하며 "평양 점령 상정한 쌍용 훈련을 중단하라"라는 피켓을 들고 시위하기도 했다.

4. 반미주의


흥미로운 점은 반미를 시작한 이유가 한총련계 세력이 반미로 몰린 것과 유사점이 있으나, 더욱 짜임새가 허술하고 연관도 불분명하다.
본인의 언급으로는 서울대를 목표로 했으나 3번이나 떨어지게 된 후 4수에서 성균관대[3]에 결국 진학했지만 서울대가 아니면 대접을 제대로 안 해주는 사회에 실망과 분노를 느끼고 반미활동에 투신했다고 한다.[4] 한마디로 결정적인 이유가 아닌 그저 열폭 그 자체였던 것. # 사실 서울대에 진학하지 않고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상적으로 살아가는데, 이런 테러활동을 입시 실패따위에 책임을 묻는 것 자체가 온당치 않다.
극도로 아웃사이더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는데, 보수정당만이 아니라 민주당 계열과도 그리 사이가 좋지 않다.
자신을 지원해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이해찬, 유시민을 배은망덕하다고 공격하는가 하면(13대 총선 이해찬, 유시민 배은망덕? - 우리마당 기념년력[11]), 노무현 정권 당시 386 정치인들을 "운동 팔아먹는 비리, 부조리 온상"이라고 공격하기도 했다.해당 블로그.

5. 횡설수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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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기종

‘Independent Film’은 지구촌 영화史에서 우리가 만들어낸 영화 용어입니다.

우리마당의 '영화마당우리'는 작은영화워크샾과 함께 '독립영화'를 제창하고, 영화운동을 실천했다!

독립영화라는 용어를 자신들이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즉 일본의 주일한국대사관에서는 일본 사람들의 임의적 항의와 함께

마음대로 드나들고 있는데, 우리는 오히려 우리 사법 당국의 경계를-

외교기관 100m 집회금지 위헌 청구 '헌법지킴이'로도, '우리마당 김기종' 역할합니다!

참고로 일본에서도 일본 경찰이 외교공관을 경비한다. 물론 한국 대사관, 영사관도 마찬가지.

통일국호 'corea'에서 'c'가 갖는 뜻, 국호 채택과정에서 '우리마당' 역할 자랑스런 실천과 성과들 / 우리마당

통일국호 'corea'에서 'c'가 갖는 뜻, 국호 채택과정에서 '우리마당' 역할

김기종의 온갖 횡설수설 가운데서도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이해하기가 매우 어려운 글 가운데 하나다. 대략 요약하자면 corea에서 c는 '고리'라는 뜻이 있으며 남북을 잇는다는 의미가 있고, 통일국호로서 써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참고로 영화산업이 가장 발달한 헐리우드는 아직 영화제가 없다.

‘부산국제영화제’ 개막과 '우리마당'- 1995년 '광주영화제' 준비와 함께 탄생!

발언 자체는 맞는 말이었다. Hollywood Film Festival이 1997년에 생겨났다. 그러나 할리우드의 바로 남서쪽에 위치한 로스앤젤레스 다운타운에는 그 유명한 아카데미 시상식이 존재한다. 두 지역은 구글맵상으로 겨우 10km 남짓 떨어져있는데 할리우드만의 영화제가 없다고해서 굳이 그게 할리우드가 광주보다 뒤떨어진 곳이라는걸 증명하는 것인가?

6. 관련 사고


1988년 8월 17일, 김기종이 설립한 문화운동단체 우리마당이 정체불명의 괴한에 의해 사무실에 있던 대학생 폭행, 강도 및 사무실에 있던 여회원을 성폭행하는 습격을 당했다. 당시에 1988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반정부 인사에 대한 불법 사찰이나 오홍근 테러사건과 연관되어서 논란이 있었다.(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출처)
당시 야당이었던 평민당은 이 사건이 군 정보사령부에 의해 저질러진 정치 테러라고 폭로했지만 경찰은 단순 강도 절도라고 발표했고, 범인은 체포되지 않고 흐지부지되었다. 2004년에는 북파공작원 출신이라는 사람이 정보사령부 사주의 백색테러 습격이었다고 시사저널에 인터뷰를 한다.관련 기사 이에 김기종은 2007년 진상규명을 촉구하며 분신자살을 기도했다. 88년 당시 우리마당 피습 사건의 변호사이자 국회의원은 2007년 당시의 대통령인 노무현 대통령이었다. 전직 변호사가 대통령이 되어도 진상규명이 안 되자 분신을 시도했다고 볼 수 있다. 어쩌면 이 당시까지는 군사 정권의 무분별한 탄압에 의한 희생자라고 생각해 줄 수 있겠으나 이후 모든 게 틀어진다.분신 당시 기사

7. 사건사고




7.1. 주한일본대사 습격 사건



(주한미국대사 피습 사건 이후 MBC에서 다시 보도했다.)
2010년 7월 7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시게이에 도시노리(重家俊範) 당시 주한 일본 대사 초청 강연회에서 시게이에 대사에게 콘크리트 덩어리 2개를 투척했다.
대사는 피해서 부상을 입지 않았지만 통역관에게 부상을 입혔고, "외국사절폭행죄"로 유죄 선고를 받아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받았다. 관련 기사 당시 재판은 인권변호사인 박찬종 변호사가 김씨는 항일민족운동가라며 무료 변호를 자청했고, 반성없이 자신의 주장만을 반복하는 태도를 보였음에도, 벌금형 1회 이외의 별다른 전과가 없어 죄질에 비하여 가벼운 형을 받았다.관련 기사
게다가 타국 대사를 공개적으로 습격한 사실상의 테러 행위에 대해 '참애국자다', '이 시대의 독립투사다', '훌륭한 일을 했다'는 미성숙한 반응[5][6]을 보이는 국민이 많았고, 여기에 항일민족운동가랍시고 무료 변호를 자청해주고 이에 더해 법원에서도 반성이 전혀 없는 김기종에게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이라는 가볍기 그지없는 형벌을 내렸다. 거기에다가 이후 2012년에는 의원들의 초대로 국회 정론관에서 정의로운 의인이라며 당당히 회견까지 가졌다. 결국 이 당시 무작정 일본만 욕하면 다 편들어주는 국민정서법에 국가가 나서서 동조하면서, 중대 범죄자를 교화하기는커녕 기고만장하게 만들어 후일 미국 대사 테러로 이어지는 데에도 영향을 주었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려워보인다.
일본 대사 테러와는 달리 후술할 미국 대사 테러 사건의 경우에는 본인의 구체적인 정보보다는 괴한 등으로 주로 노출되고 처벌 수준까지 확연히 다른 취급을 받았다.
오마이뉴스는 그의 과거 행적에 대한 관련 기사에 "1988년 '우리마당 피습사건' 이후 트라우마 앓았던 듯..."이라는 부제를 달았는데, 이는 되지도 않는 여론몰이 내지는 실드라는 비난을 샀다. 아무리 개인의 과거가 불행했더라도 그것이 계획적인 살인 미수라는 비인도적 범행에 대한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 그것도 그 대상이 동맹국의 주재대사라면 더욱.
김기종은 당시에는 "빨간약 바르면 되는데 엄살을 피운다", "김장훈이 독도 지킴이로서 내 영치금이라도 내줬으면 했는데 섭섭하다" 등 황당한 언행도 일삼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7.2. 박원순 시장 강연회 폭행 사건


박원순 시장님의 12일 일정
작성자 김기종 작성일 2013/05/09
저는 한겨레신문 준비에 가장 말없이 참가했던 '우리마당 김기종'입니다. 그러나 오늘은 말해야겠습니다.
박시장님은 먼 발치에 계셔서 잘모르시겠지만, 한겨레신문 창간의 가장 큰 동인은 '이한열 열사'입니다. 당시에는 공간이 없엇기 때문에 '우리마당' 역할이 무척 소중했습니다. 장례식을 준비 진행하고, 따라서 옛 언론인들도 장례에 대한 보도와 행사 후 평가 과정에서 보다 긴밀해집니다. 못다한 얘기를 위한 방법이 모색되면서, 대치동사무실 이전까지 '조투' '동투'의 연합 모임이 '우리마당'에서 꾸려집니다. 결국 준비 소식지 배포 등의 홍보 활동에서 제호가 결정되는 설문조사 등의 역할, 심지어 양평동 사옥 열림고사도 맡았습니다.
그런데 당시 전혀 다른 일을 하시고 계셨던(심지어 군사정권 당시 검사) 박시장님께서 무슨 하실 말이 있을까요? '한겨레신문 25주년' 행사에 오시면(그건 유세입니다) 저에게 혼납니다.(시게이에도시노리 일본 대사보다 훨씬--) 따라서 12일의 일정은 취소하시기를 바랍니다.
저에게 지난 2012년부터, 특히 1월 초 사건 아직 사과못한 것 아시죠! 아직 아무런 사과도 없고, 그같은 분이 창간 축하한다면서 거짓말하는 것 도저히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궁금하신 분은 인터넷에서 '박원순 김기종' 검색해보면 2012년 6월부터의 글들이 있습니다.
박원순 시장에게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2013년에는 박원순 시장에게 테러하겠다고 협박했다. 협박글을 보면 알지만 그래도 대학교수까지 지냈던 지식인의 글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비논리의 극치다.
2014년 1월 서울시청 시민청 개청식 행사장에서 박원순 시장과의 면담을 요구하며 고성을 질렀으며, ‘독도 관련 토론회에 시민청 공간 미대여 비판’ 등의 내용이 담긴 유인물을 배포하려다 제지당한 뒤에도 여러 차례 청사 진입을 시도하다 강제퇴거당했다.관련 기사
결국 2014년에는 박원순서울특별시장의 강연 때 신촌의 교통이 엉망이 되었다는 이유로 난동을 부리며 시민을 폭행하였다. 관련 기사 관련 기사
잘 보면 알지만 매번 협박하고 난동을 부릴 때마다 이유가 마구마구 바뀐다. 특정한 이유가 있어서 하는 게 아니라 그냥 박원순 시장에게 집착하여 발광을 부리는 모습이다.

7.3. EXO 공연 행사 폭행 사건


2015년 1월 30일 아이돌 그룹 EXO공연 행사에서도 난동을 부려 공무원을 폭행하기도 했다. 난동의 이유는 아이돌 팬들이 붙여놓은 포스터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화를 내어 말리려고 달려온 공무원들을 상대로 폭력을 휘두른것.
공무원을 폭행한 뒤 갑자기 도로로 뛰어들어 시내버스를 막아섰다가 승객과도 싸움이 붙었다. 결국 공무집행방해와 업무방해 혐의로 기소되었다.관련 기사

7.4. 주한미국대사 피습 사건


2015년 3월 5일에는 주한 미국 대사 마크 리퍼트 대사를 공격했다. 자세한 건 해당 항목으로.
범행동기는 반미감정과 종북 사상에 입각한 테러라고 볼 수 있다.[7] 범행 직후 응급실에서 동기를 묻는 취재진의 질문에 "전쟁훈련 반대합니다. 이산가족이 못 만나는 이유가 전쟁훈련 때문이라 그랬습니다", "전쟁훈련 중단합시다, 키 리졸브" 등을 외친 점에서 알 수 있다. 김기종은 리퍼트 대사를 공격한 후 제압과정 입은 부상을 응급실에서 치료하면서 "작년 10월에 부임한 마흔 갓 넘은 또라이가 어떻게 우리나라 통일정책을 감당할지 안타까워서 그랬다"며 리퍼트 대사를 모독하고 "이번 키리졸브를 중단시키기 위해 내가 희생했다"고 주장했다.
이번 범행은 열흘 전부터 준비했다고 한다. 제압과정에서 입은 발 골절의 통증을 호소한 김기종은 병원으로 이송되었고 범행이 벌어진 3월 5일 시점에서 범행에 대한 진술을 거부하며 범행을 저지르게 된 동기만 주장하고 있다. 범인이 범행에 대한 진술을 거부 중이므로 흉기로 리퍼트 대사의 목을 찌르려했다고 자백한 것은 아니고 경찰 측의 추측이다. 그러나 리퍼트가 입은 자상을 보면 충분히 생명을 해하려는 살의가 담겨 있던 것은 분명하다. 대사를 넘어뜨린뒤 여러차례 흉기를 휘둘렀다는 증언으로도 충분히 살해 의지가 담겨있다고 볼수 있다. 이래 놓고 한다는 소리가 "그냥 겁만주려 했다"이다. 이는 형량을 의식한 전형적인 물타기 발언이다. 사건 초기에는 아주 당당하게 정의의 투사처럼 짖어대다가 막상 수사가 시작되고 변호인을 만난 이후부터는 겁만 주려 했다는 식으로 형량을 의식한 변명을 내놓은 것.
3월 6일 밤 10시가 조금 넘어 구속영장이 발부되었다. 김기종 본인은 살해 의도가 없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충동적으로 흉기를 휘둘렀다'라며 '리퍼트 대사에게 미안하다'고 말했다고 한다. 게다가 변호사에게 '상징적으로 그은 것'이며 '일종의 퍼포먼스'였다고 진술하기까지 했다. 그러고서는 최후진술에서는 '이번 일로 한·미 관계가 나빠지지 않았으면 한다'라는 말을 남겼다.
외국사절 폭행에 국가보안법 위반 등의 중죄를 지은 데다 이미 여러 차례 다른 건으로 처벌을 받은 전력이 있으므로 중형을 받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게다가 2006년에 이미 박근혜에게 중상을 입혔던 지충호가 살인미수죄가 인정이 안 된 데다 얼굴에만 심한 손상을 입힌 면도칼 테러 사건임에도 징역 11년이라는 중형을 선고받은 상황이라 단독범행이라는 점이 고려되더라도 정치적 목적이 어느 정도 명백한 테러 사건의 범인이자 피해자에게 식칼을 들고 달려들어 얼굴은 물론 손과 팔까지 다치게 하여 심각한 신체적 손상을 입힌 김기종은 정상참작이 되더라도 그 이상의 형량을 선고받을 것이 확실하다.
범행 3일뒤인 3월 8일, 경찰국가보안법을 적용하겠다는 사건송치 계획을 발표하였으며 2015년 9월 3일 징역 15년과 자격정지 5년이 구형되었다.
9월 11일 재판부는 김기종에게 살인미수를 인정하여 징역 12년의 중형을 선고하였다. 면도칼로 박근혜의 얼굴을 찌른 지충호와 달리 피해자인 리퍼트 대사의 목을 과도로 찌르려 들었고 실제로도 얼굴 등에 심한 부상을 당했으며, 목을 찔렸으면 리퍼트 대사가 과다출혈로 사망할 가능성이 높았으므로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미수가 성립한다는 것이 재판부의 판단. 다만 검찰이 적용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는 인정하지 않았다.[8]
재판 중 본인이 오른손 장애가 있어 칼끝이 아래로 향하게 쥘 수 없다고(...)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위의 중형이 확정되자 당사자는 크게 반발하며 끝까지 혐의를 인정하지 않고 법정에서 난동을 부리다가 결국 보안요원에 끌려나갔다.(...)#

7.5. 구치소 교도관 폭행 사건


2015년 5월 20일, 김기종은 "발목 치료를 위해 경찰병원에 보내달라"고 요구했으나 구치소 측에서 자체 치료가 가능하다며 받아주지 않자 욕설을 하며 의무관교정직 공무원을 잇따라 폭행했다. 심지어 새 환자복을 안 준다는 이유로 주먹으로 교도관의 얼굴을 폭행하기도 했다.
결국 이 같은 행패로 10월 8일 추가 기소되었고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물론 당사자는 "구치소에서 인권유린을 당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위의 교도관 폭행죄로 항소심에서 기존의 형량과 병합해 징역 12년을 선고받았고, 대법원에서도 항소심 형량이 그대로 확정되었다. 특별한 변수가 없는 한[9] 형기를 모두 채울 시 2027년 3월에 출소할 예정이다.

8. 평가



8.1. 주변 지인


진보단체에서 만난 몇 없는 지인들조차도 대놓고 "정신병 환자에 가까운 사람이다"라고 학을 뗄 정도면 말 다했다. 증언으로 일본군 '위안부' 수요집회에서도 깽판을 친 듯하다. 민주동문회 등에서도 자신의 뜻이 관철되지 않자 고함을 지르고 땅바닥에 드러누워서 모두 김기종을 싫어했다고 하며 심지어 혈육인 가족들조차도 이해할 수 없다고 할 정도였다. 김기종의 지인들에 따르면 김기종은 모임이나 뒷풀이 등에서 늘 어깃장을 치거나 다른 진보단체 사람들 내에서도 평이 좋지 않은, 멀리 하는 사람으로 취급받았다고 한다. 그의 경력으로 나오는 우리마당이나 독도지킴이는 김기종 거의 혼자서 운영했다고.
어린 시절엔 머리가 좋아서 가족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지만 대학에 진학하여 상경한 이후부터는 명절에 일가 친척이 모인 자리에서도 정치 이야기밖에 하지 않고 스스로를 큰 뜻을 품은 사람이라고 칭하여 가족들과도 사이가 틀어졌다고 한다. 이웃들도 김기종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을 정도로 철저히 혼자서만 생활했으며 지인들에겐 자신을 "국가의 이익을 위해 투신하는 독립운동가"라고 칭하기도 했다고 한다. 오죽했으면 분신사건 이후로 이상해졌다고 말하는 지인들도 많았을까.
자신이 벌인 테러 활동에 대해서 인정받고 싶어하는 그릇된 욕구 도 매우 강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내 생활을 내려놓고 시민운동에 몸을 바쳤는데 아무도 몰라준다'며 '언론에는 정치나 명예를 좇는 사람만 나오고 나처럼 순수하게 활동하는 사람은 관심을 못 받는다'고 섭섭함을 토로한 적도 있다고 한다. 심각한 자아도취에 빠져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2010년 일본 대사를 공격했을 당시 사회적으로 큰 주목을 받은 것을 오히려 기분 좋아하면서 '처벌을 받았지만 안중근 의사처럼 독립운동을 하듯이 국가를 위해 일한 것인 만큼 떳떳하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다만 동정여론도 있기는 하다. 물론 김기종의 행위에 대해서는 선을 긋고, 그의 삶에 대해서만 동정하는 사람들인데 이태경 토지정의시민연대 사무총장은 김기종의 행위 자체는 엄벌이 필요한 범죄라고 못을 박았지만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 그리고 평화운동과 노동운동에서 육체적, 정신적으로 상처를 입고 경제적, 사회적으로 고립되어 곤궁에 처해 있는 사람들이 많으며 이들을 '민주상이용사'라고 규정하였다. 그리고 이들의 신체 및 정신적 치료를 사회 차원에서 적극 도와야 김기종과 같은 문제가 재발하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는 의견을 피력했다.관련 기사 민주인사들의 상당수가 빈곤한 삶을 살아가는 것과 PTSD 등으로 고통받는 것이 현실이라 김기종에 대한 비난과 별도로 무시할 수 없는 지적이라 하겠다.

8.2. 언론


KBS에선 사건 다음날 시사진단에서 범인의 성향을 가지고 '타인과의 공감능력이 떨어지며 타인에 대한 이해보단 자신의 사상을 표출하고자 하는 성향'인 점을 들어 사이코패스일 것이란 의견을 내기도 했다.
사실 이번 사건은 충분히 예방이 가능했다는 점에서 안타까움을 자아내고 있다. 왜냐하면 이런 테러시도가 처음이 아니고 이미 일본대사 테러 전적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 유력인사들은 대상이 일본대사여서 더더욱 맹목적인 혐일민족주의적 관점에서 국민적 분노를 표현한 뜨거운 열정 표현이라거나 탄원서에 김씨를 처벌한다면 애국선열들의 숭고한 유훈에 어긋나는 일이라는 둥 실드치는데 급급했으니[10] 이것이 김기종에게 자신의 행위가 옳다는 신념을 더욱 공고히 하게 해줬을 가능성이 크다. 한겨레신문도 “독도사랑이 곧 민족통일운동”라는 기사를 2014년 실은 바 있다. 다만 주한일본대사를 공격한 사건을 비판하는 사설을 실어 과거 사건을 알면서 실었다는 점에서 앞뒤가 맞지 않다는 비판이 있다.
동아일보는 김기종은 맹목적으로 우리 것을 신봉하는 극단적인 민족주의자에 불과하며 배후세력이 존재한다고 정해놓고 수사해서는 안 된다는 내가 본 김기종이라는 제목의 논설위원 칼럼을 싣기도 했다.


8.3. 북한


북한의 관변단체인 조국평화통일위원회에서 김기종을 안중근에, 마크 리퍼트이토 히로부미에 비유하는 개드립을 치며 김기종을 옹호하였다. 이후 화가 홍성담도 비슷한 요지의 주장을 했다.

9. 그 외


양심수후원회라는 사이트에서 김기종의 최근 근황들을 알 수 있다. 그가 복역 중에 쓴 편지글들을 볼 수 있는데, 내용을 훑어보면 자신의 살인미수 행위를 단순 폭행이나 혼내준 것으로 비유하거나 정부가 공모해서 부당하게 수감되었다고 주장하는 등 아직도 일체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다.

[1] 노동운동에 심취해 결혼 할 틈도 없었다고 한다.[2] 3수를 거쳐 대학에 입학했으며, 이 때문에 학부 2학년부터 사법고시 준비를 시작했다고 한다. 더군다나 이 시기 대학입시는 예비고사를 친 뒤에 전기와 후기로 나뉘어 시험을 보는 체제였다. 전기 대학에는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서강대 등이 있었고, 후기 대학에는 성균관대, 한양대, 한국외대 등이 있었다. 전기 모집 대학군에서 한끝차로 떨어진 우수한 학생들이 대거 후기 대학으로 몰리는 경우가 많았는데, 서울대 법대에 아쉽게 낙방하고 성균관대나 한양대 법대에 입학하는 경우가 꽤 있었다. 이 당시 학번의 성균관대 법대와 한양대 법대출신 중에 잘 나가는 동문들이 많은 이유 중 하나다.[3] 링크에는 언급이 안 나왔지만 다른 뉴스에서는 그가 성균관 법대 진학자라고 한다. 최소한 실력은 있었던 셈. 3수나 한 이유가 사실은 충분히 괜찮은 대학에 입학 가능한데도 불구하고 서울대 하나에만 목을 매서란 소리도 있다.[4] 사실 바로 반미가 아니라 그 직후 대학입학 후에도 서울대 입학을 재차 시도하면서도 대학가에서 알게 된 지인들과 광주 민주화운동시 정부 잔혹진압의 진실 등을 얘기하다가 반미로 뛰어든 걸로 보이나, 역시 그것이 시발점이나 일종의 모티브가 되기에는 그의 갑작스럽고도 폭력적인 반미성향은 이해가 안 되는 행동이었다.[5] “독도사랑이 곧 민족통일운동".[6] 한겨레는 이전에는 주한일본대사를 공격한 사건을 비판하는 사설을 실었다.[7] 참고로 대사는 그냥 외교업무를 맡는 사람이지, 군사훈련에 관련될 이유가 없다.[8] 사실 북한과 연관성이 없고 개인의 망상으로 저지른 게 명백했기에 국가보안법 적용은 무리수라는 의견이 많았다.[9] 애초에 직접적인 살인미수 행위를 저질렀고 증거도 있는 강력범이기에, 사실상 가석방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10] 이 부분은 김씨 본인이 쓴 책에 그리 적어놓은 것으로, 저자의 정신상태가 의심스러우니만큼 재확인 바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