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인 참수 경쟁

 



1. 개요
2. 문제의 학살과 기사
3. 전쟁범죄가 된 이유
4. 처벌
5. 기타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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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노다 츠요시, 오른쪽: 무카이 토시아키[1]
'''100인 참수 경쟁'''(百人斬り競争)은 1937년, 난징 대학살 사건 당시 일본 육군의 두 장교가 '''전쟁포로와 민간인을 누가 더 많이 살해하는지'''를 겨룬 사건이다.[2]

2. 문제의 학살과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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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육군 무카이 토시아키(向井敏明) 소위와 노다 츠요시(野田毅) 소위[3]일본도(日本刀)로 누가 먼저 100인을 참수시키는지를 겨뤘다고 보도되었는데, 당시 신문에 게재된 100인 참수시합의 기사는 다음과 같았다. 몹시 잔인한 내용을 담고 있으니 읽기 전에 주의할 것.

<1937년 11월 30일자 도쿄 일일신문 조간 - 제 1보>

(제목) 100인 참수경쟁! 양 소위, 빨리도 80명.

창수(常熱), 우시(無錫)간의 40 km를 6일간에 답파한 ○○부대의 쾌속은 이것과 동일한 거리의 우시, 창저우(常州)구간을 3일만에 돌파했다. 이것은 신속, 쾌진격, 그 제일선에 선 카타키류(片桐)부대에 <백인참수경쟁>을 꾀한 2명의 청년장교가 있다. 우시 출발 후 재빠르게도 '''한 사람은 56명을 베었고, 한 사람은 50명을 베었다고 한다.''' 한 사람은 도야마 부대의 무카이 토시아키 소위(26세)- 야마구치 출신-

한 사람은 같은 부대의 노다 츠요시 소위(25세) - 가고시마 출신 -

총검도(銃劍道) 3단의 무카이 소위가 허리에 찬 보도 <세키노 마고로쿠>를 휘두른다면 노다 소위는 무명검이지만 조상 대대로 내려온 보도라 말한다. 우시 출발 후 무카이 소위는 철로를 따라 16, 7 km를 따라 대이동하며 전진, 노다 소위는 철도노선 앞에서 전진하면서 일단 둘은 헤어졌다. 출발 다음날 노다 소위는 우시에서 80 km 떨어진 무명부락에서 적 토치카에 돌입해 4명을 베면서 선진의 이름을 떨쳤다. 이를 들은 무카이 소위는 분연히 야간에 부하들과 함께 '''적진'''[4]

에 뛰어들어 55명을 베어넘겼다. 그 후 노다 소위는 횡림진에서 9명, 위관진에서 6명, 19일 창저우에서 6명, 합계 15명을 베었다. 무카이 소위는 그 후 창저우 역 부근에서 4명을 베고 기자가 역에 갔을 때 두 사람이 역전에 서 있는 광경과 마주쳤다. '''무카이 소위는 난징과 단양에서 백명을 넘게 베었다고 해서 노다의 패배였다.''' 무카이의 칼은 56명을 베었지만 날이 상한 곳이 한 군데도 없었다. 노다 소위는 두 놈이 달아나버려 베지 못했다고 하며 대신 고관을 처치했으니 내가 성적이 더 위가 아닌가 하고 단양까지 대기록을 세우겠다고 했다.

<1937년 12월 4일 도쿄 일일신문 조간[5]

- 제 2보>

제목) 급핀치로 활약, 100인 참수 경쟁의 경과

난징에 도착할 때까지 100인 참수 경쟁을 시작한 ○○부대의 급선봉 카타키류 부대와 도야마 부대의 두 청년 장교 무카이 토시아키, 노다 츠요시 소위는 창저우 출발한 뒤로 분전을 더하여 2일 오후 6시 단양에 입성하기까지 무카이 소위는 86명 참수하고, 노다 소위는 65명을 참수해 서로 호각인 대접전을 이루어냈다. 창저우에서 단양까지 10리 간에 전자는 30명, 후자는 40명 적을 참수했다는 것으로, 장렬하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분전했다. 이번에는 두 용사가 함께 철로를 따라 이동하면서 우진, 여성진, 능구진의 적진에 뛰어들어 적들을 베어넘겼다. 그 중에서 무카이 소위는 단양중 정문의 1차돌입을 결행했는데 노다 소위도 우측 손목에 경상을 입었지만 이 100인 참수 경쟁은 괄목할만한 성과를 이루어냈다. 기자 등이 단양 입성 후 숨을 돌릴 새도 없이 추격을 실행하는 도야마 부대를 쫓아갔지만 무카이 소위는 행군대열 속에서도 여유를 부리며 이야기하더라. 노다 녀석이 갑자기 따라와 놀랐다. 노다의 상처는 가벼워 염려하지 않았다. 능구진에서 벤 놈들의 뼈에도 나의 마고로쿠는 한 군데도 상한 곳이 없다, '''아직 1백 명, 2백 명을 더 벨 것이다. 기자가 심판관이 되어 주겠다 말하더라.'''

<1937년 12월 6일 도쿄 일일신문 조간 - 제 3보>

(제목) 89-78, 백인베기, 대접전/ 용장! 무카이, 노다 양 소위!

남경을 둘러싼 100인 참수 경쟁을 시작한 두 청년 장교 무카이 토시아키, 노다 츠요시 소위는 무사히 입성했지만 최전선에 서서 분전했다. 입성 직전까지 전적은 무카이 소위가 89명, 노다 소위가 78명이었다.

<1937년 12월 13일 도쿄 일일신문 조간 - 제 4보>

(제목) 백인 베기 '초기록' 무카이 106-105 노다 / 양 소위들은 연장전

난징에 도착할 때까지 100인 참수 경쟁이라는 특이한 경쟁을 시작한 이례적인 카타키류 부대의 용사 무카이 토시아키, 노다 츠요시. 두 소위는 10일간 자금산 공략전에서 106대 105라는 레코드를 작성한 뒤 10일 정오에 서로의 칼날을 지닌 일본도를 한 손에 쥐고 만났다. 노다 왈 '''"이봐, 난 105명인데 너는?" 무카이 왈 "난 106명이다!"''' 두 소위는 서로 웃더니 결국 어디까지 누가 먼저 100명을 베었는지 묻지 않기로 하고 '''"이건 비겼다. 하지만 150명은 어떤가?"''' 하여 일치단결해 10일 이내에 '''150명을 참수하기 시작했다.''' 11일 낮에 중산릉이 내려다보이는 자금산에서 패전병 사냥에 한창이던 무카이 소위가 100인 참수에서 무승부의 결말을 위해(중략)... 두 사람은 100명을 넘기면 원래 서로의 칼을 내기로 하였다더라...(사진 상 게재)

오사카 마이니치 신문(大阪毎日新聞)

(표제) 난징을 향한 상쾌한 목 베기 경쟁

세키노 마고로쿠(關의 孫六)은 56명을 베었고, 전래의 보도는 25명을 쓰러뜨리다. 카타기리 부대의 두 소위

100인 참수를 계획한 청년장교 두 명이 있다. 이 경쟁은 무석(無錫, 우시)에서 출발할 때 시작되었는데, 한 사람은 이미 56명을 베고, 또 한 사람은 25명을 베었다고 한다. 한 사람은 무카이 도시아키(向井敏明) 소위(26)이고, 다른 한 사람은 같은 부대 노다 다케시(野田毅) 소위(25)였다. 이 두 사람은 무석입성과 시작된 주력전에서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난징에 도착할 때까지 100인 참수 경쟁을 하자고 얘기했다. 두 사람에게 "이 이야기가 신문기사로 나가면 '''신부 후보들이 많이 오겠네요'''"라고 했더니 80여 명을 벤 두 사람이 얼굴을 붉히며 쑥스러워했다.

더욱더 기가 막힌 내용은 나중에 500명 베기 약속까지 했다는 것.
참고로 이 기사를 쓴 기자는 나중에 사실을 알고 허탈해 하면서 '''"나는 총 든 군인만 죽인 줄 알았다."'''라고 해명했다. 그냥 취재만 한 것이어서 전범재판에서도 증인으로만 출석했다. 연합국의 설명을 듣고 진심으로 허탈해했음을 보면 거짓이 아닐 공산이 크다. 당장 기사만 봐도 적진에 뛰어든다든지, 토치카에 돌입한다든지, 야습을 한다든지, 고관을 베었다든지, 심지어 전투 중 경미한 부상을 입었다던지 등 교전 중에 적군의 목을 베는 상황을 전제하고 쓴 글이다. 그리고 정말로 그렇게만 알고 있었다면 대단한 활약을 한 군인에 대한 찬양 정도로 생각할 수 있기 때문에 기사 자체를 문제 삼기에는 애매하다. 그게 '''정말로 적군과 벌인 전투에서 쌓은 진짜 전과였다면.''' 문제는 실상은 포로와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단순한 학살이었고 이걸로 경쟁까지 하는 희대의 미친 짓이었다는 것이다.[6]
다만 허탈해했다는 기자나 '충격적이었다'라는 반응은 당시대 일본인이 가지고 있던 통념과는 영 거리가 멀다. 당시 일본인을 포함한 동아시아인들은 지금처럼 근대적 인권이 자리잡지 않은 전근대적 문화에 지배되어있었고, 특히 전통적으로 인명경시풍조가 극심했던데다 파시즘 국가화된 일본의 경우 군인을 죽이든 민간인을 죽이든 그들은 그냥 '개돼지만도 못한 중국인'일 뿐이고, 중국인은 목을 베어 수급을 취하면 될 뿐이었다. 당장에 기사 내용에 '''신부 후보들이 많이 오겠네요'''라는 기자의 발언부터 당시 일본사회가 얼마나 전근대의 사무라이 무용담 시기의 사회 지적수준에서 벗어나질 못했는지 보여준다.
따라서 전쟁도중 포로의 목을 벤다는 행위도 그들의 전근대적 풍습에 비춰볼때 배짱과 남자다움을 증명하는 호기로운 행동에 불과했으며, 일본 사회 또한 목을 베이는게 포로로 잡은 중국인인지 전투중의 적 전투병력 중국인인지 구분하지도 못할 뿐더러 구분할 이유조차 못 느꼈을 가능성이 굉장히 크다.
다만 추한 부분은 그렇게 전근대적 세계관에 다리를 걸치고 참수경쟁을 신나게 벌일때는 언제고, 전쟁에 패하자 인권 타령하며 구질구질하게 발악을 한 부분이다. 전근대식으로 남자다움을 증명하고 싶었더라면 최소한 근대법에 매달려 본인들 목숨 연명하겠다고 추하게 발버둥치지는 말아야 한다. 사무라이답게 배를 가르고 죽어야지.
참고로 일본은 심지어 그 러일전쟁을 치를 때까지만 해도 서양인들이 하는 건 그냥 아무 생각없이 닥치고 따라하자는 마인드 때문에 포로에 대한 대우는 비교적 신사적이었다. 러시아군 포로에 대한 대우는 훗날 그 후배들이 한 것에 비하면 훨씬 나았고 러시아군에 사로잡힌 자군 포로들의 경우에도 군사기밀을 흘리거나 하는 등 특별한 잘못이 없으면 문제시하지 않았다. 그러던 것이 쇼와 이후에는 서구를 배격하고 전통을 중시하는 문화적 경향이 강화되면서 오늘날 흔히 알려진 악명높은 포로학대가 빈번하게 된 것이다. 아 물론 이 신사적인 포로 대우도 어디까지나 자국인이나 서양인이 대상인 경우에나 한 것이고 중국군에 대해서는 중일전쟁 수준으로 일을 벌이지 않았다 할 뿐이지 충분히 19세기~20세기 초 기준으로 잔인하게 굴었다.[7]

3. 전쟁범죄가 된 이유


현대전에서 칼 들고 전장에서 적군 목베기를 한 사례가 여럿 있었다. 잭 처칠, 구르카 등 여러 사례가 있었다. 대부분은 취급은 무모하다는 평을 받을지언정 전쟁범죄자 취급은커녕 영웅 대접을 받았고 전후에도 용감한 군인으로 인정받았다.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적진 한복판에서 적군을 베고 용맹하게 싸우며 전공을 세웠기 때문이다. 국제법상 전쟁범죄도 아니고, 단시간의 치열한 백병전에서 갈고 닦은 실력이 빛을 발한 경우다. 적이 자신을 죽이는데 살기 위해선 적을 죽여야한다는 정당방위일 뿐이다. 따라서 차라리 위관급 장교 둘이 있지도 않은 공적을 부풀리려고 단순히 거짓말을 한 수준이었다면 평생 놀림감이 되었을지언정 '''이 항목이 만들어질 일은 없었다.'''
문제는 실상이 전쟁수행 능력이없던 민간인이나 포로에 대한 '''학살'''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기사로 보도된 내용 중 거짓인 부분이 '''죽인 사람의 수가 아니라, 죽이게 된 상황과 희생자의 신분'''이었다는 것이다. '''민간인이나 포로'''를 상대로 참수경쟁을 벌였다. 100인 참수 운운은 무력한 포로나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경우가 아니라면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다만, 순수히 전투에서 적군을 상대로 100인 참수 '''경쟁'''을 했다 하더라도 국제법상 문제는 없으나 도의적으로 비난 받을 여지는 충분하다. 전투에서 칼을 사용한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적군이라 하더라도 사람을 죽이는 일을 가지고 경쟁을 하며 희열을 느꼈다는 점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상기한 잭 처칠과 같은 인물들도 단지 신념에 의해서 총이 아닌 검을 들고 나라를 위해 싸웠을 뿐이지, 참수 경쟁을 벌이지는 않았다, 현대의 많은 군대에서 참수 경쟁 같은 짓을 하는 군인들은 사이코패스 취급을 받으며 기피 대상이 대기 십상이다.[8] 물론, 그렇다 하더라도 포로와 민간인을 대상으로 참수 경쟁을 한 것과 적군을 대상으로 참수 경쟁을 한 것에는 도의적으로도 엄청난 차이가 있다.

4. 처벌


사실 참수 경쟁에 가담한 자들은 한둘이 아니었지만 상술한 이유로 대부분은 전쟁영웅 대접을 받았다. 그러나 민간인과 포로를 대상으로 참수경쟁을 벌인 이들은 소좌까지 진급하며 승승장구 하다가, 전쟁이 끝나면서 일본에 숨어살다가 GHQ의 지시를 받은 일본 경찰에 의해 체포되었다. 스가모 구치소를 거쳐 극동군사재판의 법정에 서게 된 무카이와 노다는 그렇게 사람 죽여대며 의기양양할 때는 언제고 그야말로 하얗게 질려서 100인 참수 경쟁은 신문기자들이 멋대로 지어낸 것이라고 주장[9]했지만, 증거는 차고 넘칠 정도로 많았고 용케 살아남은 증인들도 수천명에 달했다.
극동군사재판은 A형 전범만 다루기 때문에 이들은 B, C형 전범으로 분류되어 현지 재판을 받기로 하고 1947년 9월 2일에 난징의 국민당 정권으로 신병이 인도되었다. 그리고 무카이와 노다는 전쟁포로의 학살 및 민간인 살인이 인정되어 사형을 선고받고 1948년 1월 28일에 난징의 우화대(雨花臺)에서 노다와 함께 총살형으로 다나카 군키치[10]와 다니 히사오와 처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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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로부터) 무카이 소위, 노다 소위, 다나카 군기치 대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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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는 이렇게...(주의)
난징 대학살의 책임자인 다니 히사오는 1947년 4월 26일 난징 교외에서 총살형으로 사형이 집행되었다. 이 자가 죽기 직전까지 구타를 당했다고 알려진 건 사실이 아니며 2차 대전 전범 가운데 구타를 당했다고 기록된 인물은 일본은 치치지마섬 식인 사건 주동자인 다치바나 요시오가 유일하고[11], 독일은 한스 프랑크가 유일하며 그는 확실히 미군들에게 '''Running the gauntlet''' [12]이라는 폭행을 당했다는 기록이 있다.
두 명 모두 유서를 남겼는데 민간인을 학살한 적은 전혀 없으며 세계 평화에 이바지하기 위해서라도 처형을 면해 달라고 탄원하는 내용이었다. 양쪽 모두 '중국 만세'를 외치며 유서를 마무리짓고 있다.

5. 기타


남경을 점령했을 당시 일군의 포악성은 극에 달한 느낌이었다. 기가 막힌 일은 사람 많이 죽이기 대회까지 개최했다. 그때 사람 죽이기 내기에서 어느 일병은 일본도로 단숨에 40여명의 무고한 중국인의 목을 베었다 하여 1등을 차지했다.

당시 상해의 일본 신문과 라디오 방송에선 그 1등한 병사를 대대적으로 찬양하고 선전하느라 북새를 떨었으니 생각하면 그들의 정신은 도저히 성한 것이 아니라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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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홍일 중장의 회고. 난징 함락 당시 그는 국민혁명군 군사위원회 소속 군수설계위원이었다. 자서전 《대륙의 분노》316~317p에서 발췌.

일본 극우들이 일본도-일본군도는 3명만 베도 날이 무디어지므로 이런 만행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일단 일본의 부사관과 병에게 지급되는 칼날의 경우 똥철을 대충 두드려 만든 저질 군도가 제법 많았다고 하기는 한다. 그러나 가해자들은 일반적인 일본군도가 아니라 조상에서 전해 내려오는 명검을 사용했다. 명검 마고로쿠 카네모토에도시대야마다 아사에몬이 직접 시체를 여러 번 베어가면서 최고등급 도검인 사이죠오오와자모노(最上大業物)로 분류한 물건이다. 그 외에도 장교용 군도는 장인들이 정성들여서 만들었기에 저질 군도일 가능성이 없다.
훗날 무카이의 딸과 노다의 아내, 손녀는 아주 뻔뻔하게도 아사히 신문과 마이니치 신문을 상대로 명예훼손 소송을 제기해 우익단체들의 재정지원을 받으며 대법원에까지 상고했지만 '''당연히''' 패소했다. 당시 원고 측 변론을 맡았던 변호인은 2016년 8월, 아베 정권에서 방위상 자리에 오른 이나다 도모미였으며, 당시 한국 언론에서도 극우파가 방위상이 됐다고 촉각을 세웠다. 그리고 동년 12월에 야스쿠니 신사를 찾아갔는데 일본 방위상으로서는 최초의 참배였다.
강제규 감독의 영화 마이웨이의 구 일본군 조연들 중 일부의 극중 성이 무카이와 노다이다. 아무래도 전술된 두 명에서 따온 이름으로 보인다. 무카이는 일부러 살인을 자행하지는 않으며 집에 돌아가고 싶어하는 청년으로 나온다. 하지만 노다는 조선인들을 일부러 괴롭히는 악역으로 나온다.
두 사람은 당시 제16사단 제9연대 제3대대 소속이었다. 무카이는 당시 제3보병포소대 소대장 (소위)이었다. 노다는 당시 대대장 부관이었으며, 2차대전 중에는 특무기관[13]요원으로서 친일 버마군을 지원하는 군사고문을 맡았다. 둘 다 패전시에 소좌까지 진급했다.
현대전에서 칼로 적을 공격한다는 것은 가능성이 매우 낮은 일이다. 중일전쟁 당시 중국군은 전쟁 초기에는 나치 독일로부터 무기를 공급받고, 중후기에는 미국으로부터 군수지원을 받은 적어도 장비가 근대화된 부대들도 있었다. 그러나 독일식으로 구성된 중국 최강 부대인 87사단에도 포병 대대가 없었을 정도로 막장이었다. 약 300개의 사단에서 포병 대대를 10% 미만으로 보유하고 있었으며 중국군 전체를 통틀어 제20군단만이 1개의 야전 중포병 연대를 갖추고 있었다. 나머지는 자급자족[14]으로 무장한 부대에 불과하였다. 당시 일본군들의 수기만 보아도 중국군의 독일식 장비가 더 우수하다는 평가가 적잖게 나온다. 중국군이 독일제나 미국제 화기로 무장하고 있는데 정상적인 교전 중에 이들의 머리를 100명이나 벤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이는 중세 시대[15]에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래도 중일전쟁중에 일본군이 백병전으로 높은 효과를 거두었던 것은 사실이다. 먼저 고성능 무기로 무장한 중국군이 대다수인 것도 아니었으며 약간의 개인화기 이점을 가진 것은 일본군이 압도적인 항공전력, 함포사격, 독가스, 중기관총을 동원할 수 있음을 고려할 때 화력 우위를 만들기에 턱없이 부족하다. 무엇보다 훈련도와 실전경험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기면에서 차이가 심하기 때문에 백병전에서 쉽게 무너지고 패잔병을 학살하는 모습이 자주 벌어지게 되었다.
이렇게, 이 사건은 몇십년 후, 아프간에서 재현된다
[1] 출처 [2] 사건의 명칭은 100인 참수 경쟁이긴 하지만, 두 장교 다 100인 참살을 달성하고도 살인을 멈추지 않았고, 이후엔 150인 베기, 300인 베기 등의 정신 나간 짓거리를 계속 했다.[3] 게다가 더 어처구니없는 사실은 무카이 소위는 '''포병 소대장'''이었고 노다 소위는 '''대대의 부관'''이었다. 그러니까, '''최전선에서 백병전을 치루며 적군을 참수한 게 아니라 100% 포로나 민간인을 베었다는 것.''' 당연하지만 실전에는 나간 적도 없다.[4] 이 포인트가 중요한데, 기자도 차마 '''민간인과 전쟁포로'''를 100명 먼저 죽이겠다는 경쟁이라고는 생각 못하고 적진에서 '''적군'''을 칼로 100명 죽이는 경쟁으로 알았던 것이다.[5] 도쿄일일신문은 동명으로 조간지와 석간지 2종류가 있다. 조간이라 기재한 것은 동명의 석간지와 구분하기 위한 것. 참고로 이 신문은 현 일본의 3대 일간지가 되는 마이니치 신문의 전신이다[6] 더군다나 이 당시 기자들은 전쟁터에서 실제로 같이 뛰어다니며 기사를 쓰기보다는 전투가 끝나고 일일이 병사들과 취재를 하면서 기사를 쓰는 방식이었기에 이 기사를 쓴 기자는 사건의 진상을 몰랐을 가능성도 있다. 실제로 위 말같이 총 든 군인만 죽인 줄 알았다고 말한 것을 보면 자신이 직접 가서 본 것이 아닌 그냥 취재하러 왔을 뿐이고, 직접 봤다면 이들이 토치카에서 뛰어가는 모습 같은 거나 이런 걸 세세하게 적었을텐데 그냥 몇 명이요, 베는 이야기만 서술한 것을 보면 진심으로 진상을 몰랐을 가능성이 높다. 특히 당시 일본 제국은 언론통제와 탄압이 심각한 국가였다.[7] 당장 도고 헤이하치로만 해도 청일전쟁 당시 고승호를 격침시키고 국제법 조문을 유리하게 해석해 영국인 선원만 구출하고 청군은 방치했다. 이것은 그나마 국제법에 근거했고 중국이 꼼수를 쓴 것이라고 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청일전쟁 과정에서 뤼순 요새를 점령한 후에는 중국인을 1000~60000명 가량 학살한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8] 대부분의 군인들은 나라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전쟁에서 적을 죽이는 것이지, 좋아서 적을 죽이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9] 재판 자료에 무카이는 자신이 포병대장이라 후방에 머물려야 하고, 전쟁중에 다리에 부상을 입어 기사에 나오는 현장 중 몇 곳은 가지도 않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게 포로 참수를 못 할 이유는 못 됐고, 부상도 위증일 확률이 높다.[10] 민간인과 포로를 300명 이상 학살한 전범.[11] 일본어 위키백과에 보면 미군들의 증오의 대상이 되어 심각한 학대를 당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심지어 같이 수감된 일본군 장성들에게도 저 놈은 신사에 자리가 없을 뿐더러 사람이 아니라서 때려도 된다는 이유로 흠씬 두들겨 맞았다.[12] 피해자가 두 줄로 나뉘어 선 가해자들 가운데를 달려가면 가해자들이 피해자를 몽둥이로 구타하는 방식이다.[13] 일본군 군사정보기관[14] 이러한 부대도 의외로 역설계를 통해 근대적 무기를 가지고 있기도 했다. [15] 고려 말에도 왜장 아기발도가 창으로 고려군을 고전시키자, 이지란이 멀리서 투구를 저격하고 이성계가 머리를 맞혀 죽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