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르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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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팔어: गोर्खा(Gorkhā)
영어 : Gurkha
1. 개요
네팔의 용병들. 현지에서는 '고르카'라고 불리며 고르카 지역에서 이름을 따왔다. 이는 고르카 지방에 사원이 있는 중세 힌두 성전사 구루 고라크나트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네팔의 산간지방 사람들로 이루어진 군대다. 이들의 활약을 간단히 말하면... '''걸어다니는 사망 플래그'''.
기본적으로 세계 최고 고산지대에서 살아가는 덕에 일반인이라면 정신도 못 차릴 고지대에서도 뛰어다닐 만큼 심폐량이 높으며, 그에 따라 신체능력도 당연히 뛰어나다. 스위스와 마찬가지로 매우 우수한 용병으로 유명한데 네팔의 3대 수입원으로 마약, 관광,[1] 구르카족 용병을 꼽을 정도다. 이들은 네팔 전통 칼이라고도 불리는 쿠크리를 사용한다.
구르카 용병의 대부분은 티베트와 유전적으로 가까운 동아시아인 계통 구릉족이다.[2]
대영제국이 싱할라족이나 시크교도, 라지푸트 다음으로 가는 전투민족으로 꼽았으며 이들과 달리 영국 육군의 용병에 긍정적이었던 구르카족들을 지금까지 용병으로 잘 고용하고 있다. 영국 육군의 2개 구르카 대대 중 1개 대대는 브루나이에 주둔 중이다.
인도 육군도 자체적으로 구르카병을 모병하여 10만 명 규모의 구르카 부대를 편성하고 있다. 당연히 네팔군에도 있다.
싱가포르 경찰도 영국 육군에 모병을 위탁하여 2,000명 규모의 구르카 부대를 편성하고 있다.
브루나이군에서도 자체적으로 구르카병을 모병하여 2,000명 규모의 구르카예비대(Gurkha Reserve Unit)가 술탄의 친위대 역할을 하고 있다.
2. 구르카 용병의 역사
네팔의 고르카 왕국과 동인도회사의 구르카 전쟁(1814-1816) 중 영국은 자신들이 구르카로 칭한 고르칼리 군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받는다. 평화 협정에 따라 고르칼리군은 동인도회사 군대와 계약하여 이들로 합류하게 된다.
전통적으로는 네팔 산간지방 사람들로 이루어져있는데 체트리(타쿠리), 머거르, 구릉의 사람들이 영국과 맞서 싸운 원조 구르카이다. 브라민(브라만 네팔에서는 브라민이라고 부름), 셰르파/따망 들은 입대가 허용되지 않았다. 오늘날 구르카는 모든 네팔의 부족들로 이루어져있는데 기존의 구릉, 머거르, 체트리(타쿠리) 외에도 라이, 림부, 셰르파, 따망, 네와리 등이 속해있다.
원래 영국은 각지의 식민지에 현지인으로 구성된 외인부대(세포이 같은 부대)[3] 를 창설해 유지해 왔으나, 인도 및 홍콩, 아프리카 등 자국 식민지를 독립시켜주는 과정에서 현지인 부대도 대부분 해체했다. 그러나 오직 구르카족 부대만은 해체하지 않은 채 지금도 2개 대대 규모로 존재하고 있다. 구르카 부대 창설 이래의 전사자도 만여 명에 달한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에도 영국 육군의 일부로 정글등지에서 일본군을 기습하여 큰 손실을 입혔으며, 유럽과 아프리카 일부에서도 활약했다. 영국을 상대로 전쟁을 벌인 나라들은 모두 이들을 두려워하게 된다.
1962년 당시 영국의 보호령이었던 브루나이에서 공산주의자들의 반란이 일어나자 싱가포르에 주둔한 구르카 부대가 투입되어 반란을 진압했다.
포클랜드 전쟁 때는 일부 아르헨티나 육군 병력들은 구르카 부대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그냥 항복하거나 도망쳐 버리기도 했다. 또한 영국 육군의 규모가 많이 축소된 최근에도 여전히 중요한 전투부대 중 하나이다.
1990년대 후반 파키스탄과 국경분쟁에서 인도 육군 소속 구르카병들이 파키스탄 육군과 대적하여 이름을 날렸다.
2.1. 전투종족, 영국 육군의 용병이 되다
1803년 이래 네팔의 구르카 정부는 인도의 국경지대를 노골적으로 침범하여, 영국을 도발했다. 특히 인도 북부의 영국령 촌락을 약 200개나 병합하고 갠지스 강 상류까지 침략할 기미를 보였다. 영국의 인도총독 민트 경(卿)은 이 지역은 영국에 귀속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 네팔은 계속 권리를 주장하여 양도하지 않았으므로, 새로 부임한 총독 모이라 경이 비상수단으로 현지에 경찰서를 설치하고 강경한 태도로 임하였다.
당연히 구르카 측이 가만있지 않고 1814년에 그 경찰서를 습격, 18명의 경찰관을 살해함으로써 전쟁이 시작되었다. 영국도 이에 대응하여 선전포고를 하고 군대를 4개 부대로 편성하여 네팔로 진격시켰다. 히말라야 산맥의 험난한 지세를 이용한 구르카족은 여러 성새(城塞)를 중심으로 완강히 저항함으로써 영국군은 초전에 고전하였으나, 서틀레지 방면으로 진격한 사령관 D.옥털로니의 분전으로 요새를 차례로 격파하고 구르카군의 최후거점인 마룬 등의 요새를 격파함으로써 전쟁에서 승리한다. 패배한 구르카 측은 항복하여 영국과 사가우리 강화조약을 체결하였다.
교원에서 출간한 랜드 앤 피플에 따르면 이 당시 영국군은 구르카 족의 용맹함에 치를 떨면서도 영국 측에게 점심 먹을 시간이니 전투를 중지할 것을 요청하고, 당신들의 티타임 동안에는 공격을 하지 않겠다는 구르카족의 매너에 감탄했다는 모양.
특히 구르카족이 머리가 날아간 상태에서도 영국군을 향해 계속 칼을 휘둘렀다든지, 총알이 빗발치는 가운데 쿠크리 하나를 들고 왔다든지 하는 이야기도 적혀있으며 전쟁 막바지에는 휴식시간에 영국이나 구르카 족이 서로 간의 부상자를 치료해주는 훈훈한 광경도 나왔다는 모양. 어쨌든 이러한 사례를 바탕으로 구르카족이 적이었으나 그 이미지가 나쁘지 않았고, 그 결과 영국군에서도 이들을 받아들이는 데 큰 거부감이 없었다고 서술하고 있다.
2.2. 영국군이 된 전투종족
이들이 맹활약한 전투로 알아주는 게 세포이 인도용병대들의 반란을 진압한 전투와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이다. 1차 전쟁(1839~1842)에서 호되게 털린 영국은 당시 영국군 및 인도계들로 이뤄진 영국군이 전멸(딱 1명만 살아 돌아옴)당한 것을 교훈삼아 산악전의 고수인 구르카병을 2차 전쟁이 벌어진 1878년에 대거 파병했다. 그리고 카불 점령에 크나큰 공을 세웠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는 20만이 넘는 구르카병이 참전하여 용맹을 떨쳤다. 이들은 목숨을 아끼지 않고 먼저 진격하며 전설을 만들어냈다고 한다. 물론 4만에 이르는 구르카병이 전사했을 정도로 이들의 피해도 컸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 벌어진 3차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도 구르카군이 대거 파병 나갔지만 영국은 1차대전의 피해도 엄청났던 터에 여기에 총력을 다할 수 없어서 지원도 흐지부지된 상태였고, 몇달 안 가 전쟁은 대충 끝났던 탓에 구르카군은 2차 전쟁과 달리 큰 활약을 하지 못했다.
2.3. 제2차 세계 대전에서의 구르카 무쌍
구르카병이 이름을 세계적으로 알린 건 제2차 세계 대전이다. 제1차 세계 대전이나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별다른 사진 자료나 취재 기록이 없었던 거랑 다르게 2차 대전에서는 상당한 자료와 취재가 이뤄졌기 때문. 북아프리카에서는 독일 국방군을 상대로, 동남아시아에서는 일본군을 상대로 전투를 했다. 독일 아프리카 군단 장병들의 증언에는 이들이 밤마다 독일군의 진지를 주기적으로 기습해 장병들의 목이나 귀를 베어가는 공포의 존재로 각인되어 있고, 실제로 이들의 전과를 의심하여 참호 구축이나 화장실 청소나 하라고 비아냥댄 영국 육군 장교 앞에 적군에게서 따온(?) 귀를 한바구니 보여주기도 했다.[4] 일본 육군은 정글전에 능해서 영국 육군 지휘관들이 정글에서 싸우기를 꺼려 했는데, 그러자 구르카족은 이 정글에서 일본 육군을 겁내지 않고 맞서 싸웠고, 엄청난 활약들을 하였다.
일본군 상대로 활약한 구르카들의 활약을 살펴보기에 앞서 이 문서의 2015년 무렵 문서도 그렇고 '구르카'를 쳐보면 나오는 많은 유튜브 자료, 블로그 글, 심지어 신문 기사에서까지 디마푸르라는 중사가 쿠크리로 24명의 일본군을 죽여서 빅토리아 훈장을 받았다고 하는, 출처가 불분명한 정보가 (유독 한국에서만) 돌아다니는데 '''사실이 아니다!'''
그 근거로 우선 당장 본 위키나 네이버 검색에서 디마푸르라고 쳐봐도 디마푸르는 (심지어 네팔도 아니고) 인도의 도시 이름이지 사람의 성씨나 이름으로 쓰지 않는다. 한국으로 치환하면 사람의 성씨가 우리나라도 아니고 중국 도시인 하얼빈씨, 베이징씨가 없는 것, 그리고 사람 이름을 우리나라도 아니고 중국 도시를 이름으로 김베이징, 박상하이로 안 짓는 것이랑 비슷하다. 구르카 용병들은 Thapa, Pun(둘 다 머거르(Magar) 족의 분파다), 라이(Rai), 구룽(Gurung) 같은 부족명을 성씨로 쓴다. 실제로 밑의 빅토리아 훈장 수훈자 명단을 살펴보면 수훈자들의 성씨는 거의 앞서 언급한 성씨를 쓰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로, 그리고 결정적으로 빅토리아 훈장 수훈자의 활약을 반드시 기재하는 영국 관보 The London Gazette를 인용한 영문 위키 기록 중 2차대전 구르카 여단 출신 빅토리아 훈장 수훈자 명단(네팔인 9명, 인도인 1명, 영국인 2명)을 대조해보면, 그리고 국적별로 빅토리아 훈장 수훈자를 대조해보면 네팔인이든 인도인이든 어디에도 디마푸르라는 이름도 없고, 위의 것과 같은 활약을 한 사람도 없다는 걸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The London Gazette 사이트에 들어가서 아카이브를 검색해 보아도 인도 도시 이름으로 디마푸르가 등장하는 경우는 더러 있어도(19건) 사람 이름으로 등장하는 사례는 단 한 건도 없음을 알 수 있다.
요약하자면 '디마푸르 중사'에 관한 루머는 (당사국으로서 제일 중요한 자료인) 영국측 자료와의 교차검증의 부재, 그리고 네팔에 대한 무지로 인해 빚어진 일일 것이다. 그래도 구르카 용병이 영국군이 싸웠던 전선에서 눈에 띄는 활약을 한 것은 사실이며, 그나마 비슷한 사례를 찾으면 바로 밑의 아간싱 라이 상병이 있을 것이다. 물론 그나마도 아간싱 라이 상병은 대부분의 적을 쿠크리가 아닌 톰슨으로 사살했다. 빅토리아 훈장이 구르카의 모든 활약을 대변해주지는 않지만, 영국 최고의 무공훈장이므로 빅토리아 훈장의 사례가 구르카의 활약을 가장 극명하게, 일부나마 보여줄 수 있기 때문에 12명 중 3개의 우수 사례(?)를 싣는다.
첫 번째로 Agansing Rai 아간싱 라이라는 제5왕실구르카소총연대 2대대 소속 상병(Naik는 영국군 계급으로 Corporal 상병이다.)의 활약을 들 수 있다. 임팔 전투 중인 1944년 6월경, 비셴푸르 근처 마을에서 일본군에게 'Water Piquet'라는 곳, 그리고 'Mortar Bluff'라는 2개 거점이 점령당했고 일본군은 여기에서 영국군 간의 소통을 방해하고 있었다. 상병이 속해 있던 중대는 2개 거점 탈환 임무를 받은 상태였지만, 영국군의 사전포격이 있었는데도 일본군은 Mortar Bluff에서 기관총 화망을, 그리고 정글에서 37mm포[5] 를 퍼부어 중대에 많은 사상자가 난 상태였다.[6]
이 때 상병은 돌격하지 않으면 더 많은 사상자가 날 것이라고 생각했고, Mortar Bluff의 기관총 진지로 돌진하여 분대원들의 엄호 하에 진지에 있던 4명의 일본군 중 3명을 죽였다. 상병의 분투에 사기가 올라간 분대원들은 같이 돌격하여 Mortar Bluff의 수비대를 궤멸시켰다. 이를 보고 Water Piquet의 일본군과 정글에 있던 일본군은 Mortar Bluff를 향해 기관총과 대전차포를 발사했으나 상병과 그의 분대는 우선 정글로 돌진하였고, 엄청난 화력 때문에 상병을 포함하여 3명이 대전차포 진지 부근에 도착할 수 있었다. 상병은 여기에 있던 5명 중 3명을 죽였고, 분대원 2명이 나머지 2명을 죽였다.
대전차포 진지가 점령된 것을 보고 중대에서 Water Piquet에 대한 공격을 준비하고 있던 사이, 상병과 그의 분대원들은 Mortar Bluff로 돌아와서 한 벙커에 있던 일본군이 (엄폐해 있던) 다른 중대원들을 기관총과 수류탄으로 공격하는 것을 보고, 분대원들의 브렌 경기관총 엄호를 받으며 수류탄과 톰슨 기관단총을 들고 벙커로 돌진하였다. 상병은 벙커 안에 수류탄을 까넣은 다음 톰슨 기관단총을 난사하여 벙커 안의 일본군 4명을 전부 사살했다. 상병의 깡과 용기를 보고 Water Piquet에 있던 일본군은 모랄빵이 나서 전부 도주했고, 중대가 돌격하기 전에 Water Piquet이 접수되었다.
당연히 아예 불리한 전황 자체를 뒤집어버리는 용기를 보여준 라이 상병은 빅토리아 훈장을 수훈받았다.[7] 그런데 공식 기록이 이 정도면 실제로는 Mortar Bluff를 소탕하는 과정에서 더 많은 일본군을 사살했을 수도 있다.
두 번째 사례로 Lachhiman Gurung 랏치만 구룽이라는 제8구르카소총연대 4대대 소속 일병(밑에 적힌 대로 진급했지만, 당시 계급은 Rifleman, 즉 일병이다)이 있는데, 이 일병은 1945년 5월 12일, 버마에서 소대 최전방 전초기지에서 자신 포함 3명과 같이 주둔하다가 새벽 1시경에 200명, 즉 1개 중대 규모나 되는 일본군의 공격을 받았다. 구룽이 있는 전초기지는 그가 속한 중대 본부로 가는 유일한 길에 있었기 때문에 일본군은 이 전초기지를 반드시 점령해야 했다.
일본군은 처음에 포격 대신 많은 숫자의 수류탄을 투척했다. 구룽은 참호에 들어온 수류탄 3개 중 2개는 되던졌으나 마지막 한발이 그의 오른손 안에서 폭발해 동료 2명이 중상을 입어 전투 불능이 된 상태였다. 그런데 그도 오른손가락이 절단되고 오른팔이 작살나고, 안면과 오른 다리에 부상을 입은 상황에서 왼손으로 소총을 들고 '''31명을 사살하며''' 무려 4시간 동안이나 버텼다. 참고로 이때 소대 전체 일본군 사살 수는 87명이었다... 그의 참호가 점령되었으면 소대는 전멸했겠지만, 그가 버틴 덕분에 결국 소대는 방어에 성공했고, 그도 살아남았다.[8]
이게 정말 대단한 게, 당시 영국군 소총은 거의 대부분 볼트액션인 리-엔필드였을 것이고, 아무리 리-엔필드가 볼트액션 치고는 연사력이 빠른 편이라지만 한 손으로 발사 및 장전을 하면서 지속적인 사격을 했고 그걸 또 지정사수 수준으로 31명 사살을 해낸 것이다. 대신 후송되고 나서 부상 후유증으로 오른눈을 잃고 오른팔도 잃었다. 그래도 이 공적으로 1945년 12월 영국군은 하사(Havildar, 영국군 계급으로는 하사이다)) 진급 및 빅토리아 훈장을 수여했다. 그리고 그는 2년 가까이 군병원에서 치료받으면서 군인 신분을 유지했다. 1947년 그는 비로소 움직일 정도로 몸을 회복했지만 팔 하나와 눈 하나를 잃은 이상 더 이상은 군인으로 복무는 힘들었다.
그래도 영국군 측은 상사로 특별진급을 시켜 예편시켰고 구르카병이 아닌 영국군 상사 연금(이는 일반 구르카병보다 훨씬 더 많이 받는다.)을 수여하기로 했다. 영국군 상사 계급으로 연금을 받고 빅토리아 훈장도 받아 고향 네팔로 가서 농장을 운영하며 풍족히 살았다. 두 번 결혼으로 네 아들과 딸 하나를 얻었다. 그리고 셋째 아들도 구르카병 시험에 합격하여 바로 그가 복무했던 8구르카소총연대에서 장교로 복무했다가 제대했다.
잊혀지던 구룽은 1990년대 와서 영국군이라면 이 정도로 잊혀질 수 없다고 화제가 되면서 다시 재조명받는다. 초청을 받아 영국을 방문해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친히 쓴 치하장을 받았고 2000파운드 특별 추가 연금 및 당시 존 메이저 영국 총리를 만나기도 했고 영국 특별 시민권도 수여받았다. 오히려 구룽 본인이 사는 데 문제없었는데....? 갑자기 이런 환영이 어색하다고 할 정도였다고 한다. 구룽은 만 92세(만 93번째 생일을 겨우 18일 앞두고) 천수를 누리다가 폐렴으로 런던 차링 크로스 병원에서 사망했다.
마지막 사례로 아래 2.7 문단의 딥프라사드 푼 하사의 할아버지인 Tul Bahadur Pun 툴 바하두르 푼의 사례가 있다. 6구르카소총연대 소속이었던 푼 일병(당시 계급은 Rifleman, 즉 일병이다)은 1944년 6월 23일 새벽 버마 Mogaung 전투에서 큰 활약을 했다. 푼 일병의 활약을 보기 전에 그가 속했던 6구르카소총연대 3대대의 상황을 알아야 하는데, 3대대는 'Chindits'라고 불리던 특수임무부대 소속인 77인도보병여단 예하 부대였다.[9] Chindits는 당시 조지프 스틸웰의 지휘를 받고 있었는데, 스틸웰은 이전 지휘관(영국군 출신인 슬림, 윙게이트 등)에 비해 전차나 포병 지원을 제대로 해주지 않으면서 방어가 탄탄한 일본군 점령지에 대한 공격을 명령했고, 이로 인해 Chindits는 Mogaung에서 '''사상자가 총 투입 인원의 50%(800여명)나 되었다.''' 스틸웰 항목에도 나와있지만 영국은 스틸웰을 무타구치 렌야랑 동급이라고 마구 깠는데, 영국이 스틸웰을 싫어한 건 이런 삽질들 때문이었다.
어찌 되었든 Chindits는 버마 Mogaung의 철교를 점령하는 것이 작전 목표였고, 푼 일병이 속한 B중대는 돌격했으나 "빨간 집"(Red House)이라는 지점에서, 그리고 그 좌측에 있는 일본군 벙커에서 기관총으로 교차사격을 퍼부어 푼의 분대가 그를 포함해서 단 3명만이 남은 상태였다. 3명 중 1명이었던 분대장은 중상을 입었지만 푼과 다른 1명에게 Red House를 점령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2명은 Red House를 향해 돌격하였다. 그러나 그의 동료도 중상을 입게 되었다. 푼은 브렌 경기관총을 집어들고 계속 돌격하였고(마침 여명이 밝아와서 표적이 되어 더욱 위험했다) 개활지와 포탄구덩이, 쓰러진 나무 등을 넘어서며 27미터를 달려 Red House 내부에 돌입하였고(근처의 다른 기관총 진지와 거점에서는 백병전을 포함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거기에 있던 일본군 3명을 사살했다. 나머지 5명의 일본군은 도주했고, 푼 일병은 2개의 경기관총과 많은 양의 탄약을 노획했다.
푼 일병은 이것을 가지고 근처 지점들에 정확한 지원사격을 했고, 이는 나머지 중대원들이 벙커를 점령하고, 나아가 철교 전체를 점령하여 작전을 성공시키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10] 다만 이는 공식적인 이야기고, 푼 일병은 다큐멘터리 인터뷰에서[11] Red House에 돌입했을 때 브렌 경기관총으로 4명을 사살하고, 이어서 3명을 쿠크리로 척살하고, 이후 소탕전을 벌일 때 화염방사기로 대피호에 있던 30여명의 일본군을 죽였다고 했다.
어느 쪽이 진실이든 푼 일병은 아간싱 라이 상병처럼 불리한 전황 자체를 뒤집어버렸고, 이러한 용기로 빅토리아 훈장을 수훈받았다. 푼 일병은 이후 10개의 훈장을 더 받았으며, 80대가 된 2000년대 이후 천식, 심장병, 당뇨로 고통을 받아서, 그리고 영국에 있던 다른 전우들을 보고 싶어서 2006년에 영국에 이민 신청을 했지만, 처음에는 거절당했다. 이에 구르카 참전용사들과 영국 언론 등에서 반발했고, 2007년이 되어서야 이민 허가가 났다. 영국에 도착하자 1000명 가까이 되는 영국인들과 위의 라치만 구룽을 포함한 구르카 참전용사들이 그를 맞이했고, 구르카 여단장이 직접 찾아와 그에게 경례를 하는 등 엄청난 환영을 받았다. 당연히 그도 구룽처럼 이런 환영은 생전 처음이라며 어색해했다. 여러 지병이 있었지만 그도 구룽처럼 88세 천수를 누리고 갔다.
그 외에도 제2차 세계대전의 구르카 여단 출신 빅토리아 훈장 수훈자는 위의 세 사람을 포함해서 총 12명이다. 이 중 2명은[12] 영국인인데 장교로 구르카 부대를 지휘했으므로 제외하고, 사병 중에서는 인도인이었던 Ganju Lama[13] 까지 제외하면 2차 대전의 순수 네팔 국적 구르카인 수훈자는 총 9명이다. 영문 위키에서 개별 항목들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전부 괴물 같은 활약을 했다. 9명 중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1명,이탈리아 전선에서 2명, 그리고 나머지는 전부 버마 전선에서 활약하여 훈장을 받았다. 빅토리아 십자무공훈장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받기가 까다로운 편이라서 1개 여단 규모 정도였던 구르카들은 잘 싸운 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군의 막나가는 전술 반자이 돌격에도 구르카들은 코웃음치면서 무쌍을 찍기도 했다. 사실 영국군의 화력에 반자이 돌격을 하던 일본군은 마구 털리던 와중에 가까스로 영국군 진지에 일본도나 총칼 들고 와봐야 쿠크리 들고 기다리던 구르카를 만나면 안 봐도 뻔했다. 그야말로 일본군 피바다 풍경... 월간 지오 한글판에서 1997년에 이들에 관하여 취재한 적이 있는데, 2차 대전 당시 이들은 쿠크리 하나로 일본 육군들을 대적한 기록이 나와있으며 일본도를 단숨에 동강내고 쿠크리 하나로 일본 육군 15명을 베어죽인 구르카병 이야기도 나온 바 있다.[14] 이 사람은 당시 취재에서도 나와 인터뷰했는데 수수한 옷차림에 훈장을 주렁주렁 매달고 다니고 있었다. 당사자는 매우 자랑했고 마을 사람들도 전설의 용병으로 알아준다고 인터뷰했다. 그리고 수수한 옷차림과 달리 영국에게 두둑한 연금을 받으며 매우 부유한 삶을 누리고 있었다.
여러모로 남쪽의 전투민족과 닮은 꼴이 많은 민족이다.
코만도스 2의 인도 차이나 전선 관련 임무에서 구르카 용병들이 등장한다.
2.4. 포클랜드 전쟁의 구르카
이후, 1982년 포클랜드. 포트 스탠리를 지키는 아르헨티나 수비대에서 벌어진 일이다. 실제로는 영국군이 계속 민사심리전을 펼쳤고 SAS 부대가 기습을 담당할 예정이었는데 아르헨티나군이 구르카들이 온다고 하자 서로들 달아나거나 손 들고 기어나와서 이들은 무혈입성했다. 심지어 몇몇은 이들에게 항복하면서 '''제발 구르카에게 우릴 넘기지 말아달라고 울며 사정까지 했었다'''고 한다.(...) 이걸 전해들은 구르카병들은 "우린 저항하지 않은 자, 포로는 일절 건드리지 않는다."라고 하며 불쾌해했다.
다만 위의 서술은 레퍼런스가 있는 것도 아니므로 걸러 들어야 한다. 만약 저 일이 실제로 벌어졌다면, 포트 스탠리가 아닌, 구스 그린 전투 때 벌어진 일일 가능성이 높다.
구스 그린 전투 뒤에 한 전초기지에서 추위와 배고픔을 못 이겨 아르헨티나군이 (코만도와 교대 후 주둔해 있던) 구르카에게 항복했고, 구르카들은 항복한 아르헨티나군에게 몸수색을 위해 엎드려 있으라고 했다. 그래서 거의 다 엎드렸는데, 한 공군 장교가 버티고 있자, 구르카들이 쿠크리로 위협해서 엎드리게 한 기록이 있다. 구스 그린 전투 후에 근방 아르헨티나군은 대체로 구르카에게 항복했다고 한다. 이건 본 위키의 포클랜드 전쟁 문서에도 나온다.
반면 포트 스탠리의 경우 당장 본 위키의 포클랜드 전쟁 항목에서 4번 영국군의 승리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실제로 포트 스텐리 주둔 아르헨티나군은 주변 감제고지랑 방어선[15] 이 다 털려서 항복한 것이다. 이 때 구르카 대대는 주변 감제고지인 Mount William 점령에 투입되었다. 그리고 감제고지를 수비하는 아르헨티나군은 구르카를 보고 쫄기는커녕 박격포를 쏴서 8명이나 부상입혔다. 그리고 이후에는 아르헨티나군의 공격으로 13명이 추가로 부상을 입었다.
Mount William 점령작전은 스코츠 가드가 주도한, 그리고 또 다른 감제고지인 텀블다운 산 점령과 같은 작전 내에서 이루어졌다. 자세한 것은 이 문서를 참조하면 될 것이다. 포클랜드 전쟁에서 구르카 대대(7구르카소총연대 1대대)는 1명의 전사자를 냈다.
2.5. 카길 전쟁
1999년 파키스탄과 인도가 카슈미르에서 벌인 국지전인 카길 전쟁에서 인도군 소속 구르카병들도 참전했다. 당시 국내 언론 보도에 의하면 역시 백병전에서 이들은 무서운 활약을 했기에 파키스탄군들이 절대로 이들과 가까이서 싸우지 말라는 분부를 내렸다고 한다. 중앙일보 보도에 의하면 구르카병들과 백병전을 벌이던 파키스탄군이 호되게 털린 다음에 부랴부랴 물량전으로 반격했다고 할 정도였다. 이때 부상을 입고 포로가 된 구르카들이 종전 뒤 풀려나서 인도군 훈장을 받고 후한 보상을 받은 것도 나왔다. 파키스탄군도 용병인 그들을 꽤 우대해줬는데, 만일 박대했다가 나중에 호되게 당할까 두려워해서였다고 한다.
참고로 파키스탄에 거주하는 파슈툰족들도 만만치 않게 전투민족이고 파키스탄의 주 인종인 펀자브인들도 무서운 민족이다. 아프가니스탄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이들도 히말라야 못지않게 척박한 산지 힌두쿠시를 중심으로 온갖 외세 공격을 자기 힘으로 막아내던 전투민족이다. 그런 이들이 상당수인 파키스탄군도 구르카에게 무척 고전했다는 뜻. 하긴 위에 나온 대로 이미 120년 전 2차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도 구르카군들이 파슈툰족이 다수인 카불을 함락할 때 이름을 날렸던 걸 보면 이게 처음은 아니었다.
2.6. 건드리지 말았어야 했다
2.7. 구르카병과 30인의 탈레반들
네팔 비마 출신의 영국 육군 구르카 연대 1대대 소속, 딥프라사드 푼(Dipprasad Pun) 하사(31세)[16] 는 2010년 9월 17일, 아프간 헬만드 주[17] 라힘 칼라이 근처에 있는 기지에서 야간 경비 근무를 서다가, 전방의 어둠 속에서 뭔가 땅파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처음 짐승의 소리인 줄 알았으나 소리의 정체는 IED를 매설 중이던 2명의 탈레반들이었다.
그의 소대는 순찰을 나간 시점이었기에 그는 즉시 무전기로 지휘관에게 보고하고, 삼각대에 거치돼있던 GPMG 1문을 떼어들고, 개인화기인 SA80 한 정과 하부 레일에 부착된 유탄발사기 한 정, 수류탄 다수, 무전기 두 대를 가지고 지붕으로 올라간 후 사격을 개시했다. 탈레반들도 RPG를 발사하고 사격을 가해왔으나, 푼 하사는 15분 이상 그 위치를 사수하면서 400여 발의 탄환과 수십 정의 수류탄 등등 손에 잡히는 무기를 몽땅 사용해 최소 세 명 이상의 탈레반을 죽이고 다수를 부상 입혔다고 한다. 처음엔 겁이 났지만, 교전을 시작하자 그런 생각은 싹 사라진 채 전투에 임했다고 한다.
그때, 푼 하사는 덩치 큰 탈레반 전사 한 명이 벽까지 완전히 접근해왔고, 그가 사격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또 하사는 지붕 위에서 사격하고 있던지라 무거운 GPMG로는 사격 각도가 잘 나오지 않는 상황에서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또 다른 놈이 접근해서 벽을 타고 오르려는 것까지 발견했다. 이에 푼 하사는 L85A2를 들고 발사하려 했지만, 이미 단기간 안에 별다른 관리 조치 없이 400여 발을 연달아 쏜 직후라 기능고장이 발생한 상황이었다.[18] 그는 주위에 무기로 사용할 만한 마땅한 물건을 찾다가 삼각대를 발견하고 그것으로 대응하였다고 한다. 그는 "마추 탈라이(Marchu Talai)!" 라고 소리지르며 탈레반에게 달려들었다. 그 말은 네팔 말로 '''"지금 네놈을 죽이러 간다!"''' 는 뜻이라고 한다.
홀로 30여 명의 탈레반들을 물리친 공훈으로, 푼 하사는 2011년 3월 25일, 용훈십자훈장(Conspicuous Gallantry Cross)을 받았다.[19][20]#
3. 선발 과정
구르카의 급여나 연금은 원칙적으로 영국군과 동등하다.# 2015년 기준으로 일병이 년간 18,000파운드, 우리 돈으로 약 '''3300만 원''' 정도인데, 이 정도면 영국에서도 고소득이라고 할 순 없지만 결코 적지 않으며, 한국 같은 나라에서조차 중견기업 사원이나 받는 고소득이다. 헌데 네팔에서는 이 정도면 '''상상도 할 수 없는 금액을 받는 것이다.''' 연간 국민소득이 같은 시기 한국(27000달러)의 70분의 1 수준인 400달러(50만 원 정도)가 좀 넘는 최빈국(2015년 기준)이므로 구르카로 복무하고 전역한 사람은 부유층으로 살 수 있다.[21] 그래서 매년 2 ~ 300명 선발에 경쟁률은 매년 2만 명 가까이 응시하므로 70 대 1을 넘는다. 신체검사와 체력 테스트뿐만 아니라 영어, 수학, 면접 등 다양한 전형을 요구하고 17세부터 21세 사이만 응시가능하므로 사회 엘리트인 대학생들이 몇 년씩 구르카 준비에만 매달려 사회 문제가 되고 있다. 카트만두에는 구르카 준비를 위한 사설 학원만도 20여 개가 성업 중이다. 또 아버지가 용병 출신이면 직접 아들을 훈련을 시키기도 한다. 용병 역사가 200년이나 되다보니 3대가 용병이거나 친척 중에 용병이 많은 집안도 있다. 구르카민족이 많이 모여살고, 도시 자체가 히말라야 산자락에 있어서 심신을 단련하기 최고인 포카라에는 한국의 학원가 마냥 용병 양성 학원 단지가 있다. 도시 곳곳에 고등학교처럼 보이는 운동장 딸린 건물의 80%는 용병 학교라고... 그야말로 네팔 버전 한국식 공무원 시험이라고 할 수 있다. 08년도 기준 경쟁률이 700 : 1을 넘는다. 2015년 2월 기준으로 영국군 가운데 구르카 출신은 장교가 110명, 사병이 2,610명 수준이었다.출처
특히 최근에는 사교육을 많이 하는 도시민의 합격률이 높아지고 있다. 한 해 40명 선의 합격자를 배출한다는 유명 사설학원의 수강료는 한화 월 3만 원으로 한국이라면 용돈 수준이나 네팔에서는 부유층이거나 구르카 출신의 아버지가 있지 않으면 감당하기 어려운 정도이다. 이런 학원은 전직 구르카 출신이 운영하며 영국군의 선발전형에 맞춘 커리큘럼으로 교육을 한다. 반면 지방민이나 저소득층은 밭일이나 평소 운동 등으로 체력을 단련할 수밖에 없고, 영어나 수학도 이들에게는 큰 장애물인데 네팔은 아직 학교조차 없는 지방이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1천 명가량인 1차 합격자도 한 번도 배출해보지 못한 시골 마을도 많다. 그러니 최종선발되면 가문의 영광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선발과정을 좀 더 살펴보자. 구르카 출신 모병관이 가을에 고향을 돌면서 지역 예선을 실시한다. 여기서는 키와 가슴둘레 등 신체조건과 기본적인 체력 테스트를 치르며 약 2~3배 수를 선발한다.[22] 예선통과자들은 포카라에 위치한 모병소에 입소하여 보름간 최종 경선을 진행한다. 이때 입소자는 가족의 응원을 받으며 모병소로 들어가는데 마치 한국 수능 등굣길 분위기이다. 다양한 선발 전형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것은 역시 체력 테스트로서 다양한 과목을 수행하는 중에 하나라도 미달되면 그 즉시 탈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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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중에서도 하이라이트는 '도코 레이스'인데, 25kg의 돌을 채운 전통바구니(도코)를 끈으로 머리에 매고 네팔의 가파른 산길 6km를 달리는 것. 30분대를 달성해야, 즉 10분 기준 2km를 달려야 합격을 바라볼 수 있다고 하며 중간에 쉬거나 48분을 넘기면 바로 탈락. 부대마다 다르겠지만 한국군이 급속 행군 시 완전군장으로 10km를 1시간 10분~1시간 30분 안에 달리는 것이 목표니 10분 기준 1km가 좀 넘는다.[23]
최종 선발된 인원은 영국 여왕에 대한 충성 서약을 하고 다음해 1월 영국 본토로 가서 8개월 동안 정규군 훈련을 받는다.
한편 영국군 외에 싱가포르 경찰 및 인도군도 구르카를 선발한다. 싱가포르 경찰은 영국군 선발에서 차순위자들을 데려가고[24] , 싱가포르의 구르카도 영국군보다는 급여가 좀 낮긴 하지만 네팔기준으로는 아주 높은 편이라 인기가 아주 많다. 2014년 기준으로 월 1,500~2,000유로(년간 2600만 원 정도)를 받는다. 네팔 초등학교 영어강사의 한달 월급이 한화로 50만 원 받으면 많이 받는 수준임을 생각하면... 1년에 300명쯤 뽑는데 2014년에는 14,000명이나 경쟁자가 몰렸다고 한다. ## 많을 때는 경쟁자가 2만 명이 넘는 해도 있다고 한다. 여기도 즉 영국군 못지 않는 경쟁률을 보이고 있는 셈이다.
인도군은 별도의 선발 시험을 실시한다. 이쪽은 급여가 덜해서 경쟁률도 영국군이나 싱가포르 경찰보단 낮다. 그렇긴 해도 인도군 소속 구르카들도 보통 네팔인 노동자보단 당연히 많이 받는다.[25] 영국군 출신처럼 부유층은 되기 어려워도 장기복무하면 중산층은 될 수 있다. 그래서 영국군 선발에 최종 불합격하면 다시 인도군 선발에 도전하는 경우도 많다고. 영국군 구르카보단 경쟁률이 낮다 뿐이지 여기도 경쟁 자체는 치열하다. 인도 열차 강도사건의 영웅 비슈누 쉬레스타도 여기 출신이었다는 점에서 보면 전투종족 레벨은 거기서 거기라고 보면 될 듯.
그 밖에도 공식부대는 아니지만 말레이시아 로얄 레인저 특수부대(Royal Ranger Regiment)에도 구르카병 일부가 보안군으로 복무하며 아프가니스탄주둔 미해군 부대 보안군으로서 구르카병이 일부 복무하고 있다.
2020년 전 세계를 강타한 코로나 19 여파로 네팔 국가산업이나 다름없는 관광업이 그야말로 박살나버려 실업자가 폭발했다. 관광 가이드나 숙박시설 관리직도 실직자가 되어버리는 판국에 젊은이들은 더더욱 구르카에 매달릴 일이 더 늘게 될 전망이다.
3.1. 급료와 연금 등 처우
1997년 전까지는 영국 정규군이 받는 돈의 3분의 1수준이었지만[26] 1997년 홍콩 반환으로 영국으로 구르카 연대의 본부가 옮겨짐에 따라 원칙적으로는 규정상 영국 정규군과 동등한 급료를 받는다. 하지만 실제로는 월급이나 복지 등에서 차이가 난다고 한다. 기사 이분은 영국군 최고 훈장인 빅토리아 십자 훈장을 받은 사람인데도 사후복지가 차이가 난다고 할정도니 무시할 수준은 아닌 듯하다. 특히 월급보다 사후복지에서 차이가 많이 난다고 하며 그보다 더 문제는 영국군의 고질적인 군축문제로 최소 복무기간만 복무하고 정리해고 되며 장기복무가 안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2014년에만 해도 350명의 구르카가 해고당했다고 한다.## 퇴역용병들의 연금도 2005년이 돼서야 95파운드(약 '''20만 원''')에서 450파운드(90만 원)로 인상되었다. 게다가 퇴역 용병들의 영국 정착이 무지하게 까다로웠다. 이런 차별 대우에 여러 인권단체가 항의한 결과[27] 2009년 5월 29일 영국 의회에서 네팔 구르카족 용병의 영국 정착을 조건 없이 허용하는 법안이 통과되었다. 늦게나마 그들의 노고가 보상받았으니 다행이다.
문제는 이렇게 인권단체의 요청으로 구르카의 복지 수준이 대폭 향상된것이 꼭 좋은 일이냐면 그렇지도 않다는 점이다. 구르카의 장점은 싼 값에 뛰어난 병력 자원을 확보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가성비가 뛰어났다는 점인데 이제는 영국군과 동등한 급료와 연금을 받으니 딱히 영국군이 구르카를 쓸 메리트가 없다는 점이다. 오히려 영국군에게 지불된 급료는 영국내에서 선순환되는 반면에, 구르카에게 지불된 급료는 네팔로 빠져나가니 영국입장에서는 더욱 손해. 당장 대한민국에서 외국인 노동자 문제에 대해 비판이 많은 이유를 봐도 알 수 있다.
거기다가 때가 어느 때인데 아직도 제국주의 시절처럼 용병을 쓰느냐는 비판도 있다. 물론 구르카의 선발과정은 영국군보다 엄격하므로 선발 자원의 질은 좋을 수 있겠으나 영국군도 어디가서 약병(弱兵)소리 듣는 군대가 아니고, 병사 개개인의 전투능력으로 전쟁의 승패를 결정짓는 시대도 아니다. 19세기처럼 영국이 전 세계를 떠돌며 전쟁하는 것도 아니고 영국군이 병력 자원 확충에 어려움도 없어서 구태어 구르카를 쓸 이유가 없다는 말. 여기에 더해 네팔 정부도 구르카 퇴역 병사들의 영국 정착에 반대하고 나서서 상황은 더욱 복잡하다.# 이 때문에 영국내에서 구르카 그만 쓰자는 말이 계속 나오고 있는 상황.#1, #2 따라서 점차적으로 신규 병력 모집을 줄여나갈 것이 유력하다. 이런 이유로 2015년은 구르카 연대 창설 200주년이지만 영국의 군축 영향으로 구르카가 폐지될지도 모른다는 기사도 나온 적이 있다.##
그러나, 거꾸로 영국 육군에 영국인 지원자가 없어서 인력난에 시달리면서 거꾸로 구르카를 1000명 늘리고 있는다든지, 일단 현재 폐지거나 감축은 먼 이야기가 될 듯 하다. 군대 감축이 아니라 필요한 군대 인력도 부족하여 영연방 나라들에 지원자를 찾고 있는 상황이기에 필요한 수를 구르카를 써서라도 채워야하기 때문이다.
4. 그 외
- 이들을 상징하는 칼로 쿠크리를 꼽는다. 부대 문양도 쿠크리 두 개의 검날을 교차한 것.
- 1979년 루이 마운트배튼 백작[28] 장례식 당시 정복 차림의 구르카병 20명이 장례식에 참가했는데 용병이면서도 근위병들과 한자리에 있었기에 눈길을 끌었다.
- 싱가포르 경찰 소속 구르카들은 경찰임에도 쿠크리를 차고 다닌다.
- 구르카들은 일부가 독일군과의 전투에도 참전했다. 그런데, 당시 프랑스군도 북아프리카 산악에 거주하던 모로코 출신 유목민 구미에(goumier)를 용병으로 고용했는데, 이들도 근접전에선 엄청나게 강해서 나치군들은 이들과 근접전으로 싸우느니 하루 종일 포탄 세례를 받는게 낫다고 치를 떨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래서 구르카와 이들이 싸우면 누가 이길까? 라며 연합군들이 궁금해했지만 이들은 일절 싸울 일이 없었기에 이 농담에 대한 진실은 가려지지 않았다고 한다.
-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자유 프랑스 육군 장교가 야습을 준비하는 용병 곁을 지나가며 혹시 쓸만한 손목시계가 있거든 하나 구해 달라고 부탁했더니, 다음 날 아침에 그 장교 막사 입구에 손목시계가 원래 주인의 손목째로(!!!) 공손하게 놓여 있더라고 한다(구르카나 라지푸트 등에 가려져서 그렇지, 구미에들도 북아프리카와 이탈리아의 산악지대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그에 대한 일화들이 '타임 라이프 2차 세계대전사'에 일부 실려 있다.).
- 영국군의 구르카나 프랑스군의 구미에처럼 미군도 자체적으로 운영할 해외용병부대를 계획했는데 그 대상국이 바로 몽골이었다고 한다. 해외 주둔 미군 모습을 다룬 저서 <제국의 최전선>에 따르면 미군 장교들이 몽골에 파견된 이유가 몽골 군인들을 구르카처럼 미군에 복무할 외인부대로 양성하는 것이었다고 저술하고 있다.
- 90년대에 독일 출판사에서 제재한 인문지리백과인 랜드 앤 피플에서도 소개되었다. 여기서는 구르카 족의 돌격 구호로 아요 구르칼리(구르카 족이 나간다!)를 사용한다고 서술했다.
- 러시아의 전통적인 전투종족 코사크 와도 만난적 있다. 맥마흔 라인이 발표되기 이전, 영국과 러시아가 중앙 아시아에서 그레이트 게임을 벌이던 때, 히말라야에서 만난 영,러 양국의 조사단이 서로 각각 구르카와 코사크를 호위부대로 데리고 왔다. 이 두 부대 사이에는 미묘한 신경전이 계속 이어졌고[29] 나중에 헤어질때 구르카병들은 받들어 총을, 코사크들은 기병도로 받들어 칼을 하여 서로 예를 갖추었다고 한다. 자신들보다 키도 크고 덩치도 산만한 코사크들을 처음 본 구르카병들은 영국대표에게 가서 저들에게 우리 종족이 전부 이렇게 키가 작은건 아니라고 알려주시오라고 말했다고 한다.
- 2018년 북미정상회담이 열리는 싱가포르 센토사 섬 카펠라 호텔의 치안 유지를 위해 회담장 주변에 구르카 용병들이 배치되었다.
5. 대중매체에서
겐간 아슈라에서 구르카족 출신 캐릭터가 나온다.
5.1.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3: 아시아 왕조
항목 참조
[1] 주로 히말라야 등반에 관련된 관광 사업이다.[2] 몽골로이드는 황인과 마찬가지로 과학적인 분류가 아니었고, 비하의 의미가 있던 용어였기 때문에 현대 학계에서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현재는 동아시아인(East Asian) 혹은 동북아시아인(Northeast Asian)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지역적인 개념을 사용해도 좋을 만큼 동아시아는 단일민족 경향이 매우 강한 곳이기 때문이다.[3] 1857년 세포이들이 인도인임을 고려하지 않은 영국의 뻘짓 탓에 세포이 항쟁이 일어나자 구르카들은 가차없이 세포이들과 싸웠다. 덕분에 이들의 용맹성과 충성심을 영국에서 알아주게 된다. 자세한 것은 세포이 참조.[4] 다른 말로는 적 수급들을 영국장교 침대 앞에 일렬로 세워놓았다고 한다. 아침에 일어난 영국장교는 기겁한 것은 덤.[5] The London Gazette에서는 그냥 37mm포로 기록돼 있지만 아마도 94식 37mm 속사포거나 1식 37mm 속사포일 것이다[6] 즉, 일본군은 십자포화를 퍼부을 수 있었다.[7] 출처: The London Gazette[8] 출처: The London Gazette[9] 참고로 영국은 승전 이후 SAS를 증설할 때 이 Chindits 복무자들도 일부 선발했다.[10] 출처: The London Gazette[11] 14분 48초부터 푼 일병의 인터뷰가 나온다[12] Michael Allmand 대위, Frank Blaker 소령. 둘 다 버마에서 활약했으며, 전사 후 추서받았다. 특히 Allmand 대위는 옥스퍼드 대학교 출신 엘리트 학생이었는데도 특수부대 복무를 자원해서 Chindits 6구르카소총연대에 배속되었다. 참고로 Allmand 대위는 바로 위의 툴 바하두르 푼과 같은 부대였으며, 같은 Mogaung 전투에서 Red House 근처의 기관총 진지를 소탕하다가 전사했다.[13] 본명은 Gyamtso Shangderpa인데 모병관이 실수해서 Ganju Lama로 등록되었다. 그는 7구르카소총연대 1대대 소속으로,임팔 작전 때 일본군이 대규모 포격을 하고 중형전차 5대로 기습했을 때 혼자 PIAT를 들고 포복전진 하다가 포격으로 손목이 부러지는 등 부상을 입었는데도 전차 3대를 격파하고, 이어서 탈출하는 전차 승무원들을 수류탄으로 전멸시켰다. 인도인인데도 구르카 여단에 들어갔던 이유는, 당시 전황이 급박하게 돌아가서 구르카랑 비슷하게 생겼거나 접경지대에 살던 인도인까지 그냥 받아줬기 때문이다. 이 사람은 인도-네팔 접경지에 살던 시킴족이었기 때문에 구르카로 복무가 가능했다.[14] 위의 아간싱 라이 상병은 10명을 죽였는데 빅토리아 훈장을 받고, 이 사람은 받지 못한 데에는 아마도 주어진 상황의 차이가 있을 것이다. 아간싱 라이는 '''기관총이랑 대전차포로 무장하고 십자포화를 퍼붓는''', 그러니깐 방어가 매우 잘된 일본군 진지에 돌격하여 무쌍을 벌였고, 이 사람이 상대한 일본군은 그 정도까지 방어가 준비되어 있지는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15] 특히 마지막 방어선인 롱돈 방어선은 아르헨티나군이 제법 선방했다.[16] 참고로 위의 2차 세계대전 구르카 여단 빅토리아 훈장 수훈자 12명 중 하나인 툴 바하두르 푼(Tul Bahadur Pun)의 손자이다. 할아버지랑 손자가 같은 구르카병으로 복무했고 둘 다 엄청난 활약을 한 것이다.[17] 탈레반 세력이 강력하게 자리잡은 위험지역[18] 이 때문에 한국웹에서는 L85A2가 A1 같은 결함품이라고 까이기도 했는데, 실제로는 400발은 경기관총의 총열 교체 주기도 뛰어넘는 숫자라 그 정도를 쉬지 않고 사격하면 웬만한 기관총도 크고작은 기능고장이 발생하기 쉽다. 미군의 M4나 M16 등의 검증된 AR-15 계열 총기들도 아프간과 이라크에서 관리 조치 없이 수백 발을 쏘고 고장나 문제를 일으킨 경우가 꽤 있었다.[19] 이 훈장은 93년 제정된 이래 50명도 받지 못한 훈장이다.[20] 원래 DSO(Distinguished Service Order)라는 두드러진 용맹을 보이는 경우에 수여하는 훈장이 있었으나, 사실상 장교에게만 부여하던 것이라서 이를 대체해 계급 구분 없이 수여하도록 용훈십자훈장이 제정되었다.[21] 네팔의 GDP를 50만 원으로 잡았을 때 구르카의 연 급여가 3,300만 원이라면 일반인 연 수입의 66배라는 건데, 네팔의 GDP가 한국의 70분의 1 정도이므로 한국에서 구르카들과 같은 비율로 연봉을 받는다 치면 50만 원 * 70 * 66 = 23.1억 원. 즉 연봉으로 23억 가량을 버는 셈이다(...). 거기에 제대 후 현역 당시 급여에는 못 미치겠지만 그래도 네팔 평균 연 수입보다는 아득히 높은 연금도 꼬박꼬박 들어오니 목숨 걸고 매달릴 만한 수준인 것이다.[22] 이때 마을 아가씨들이 구경 나와 최종 합격할 것 같은 장정을 마음 속으로 점찍는 모습을 볼 수 있다.[23] 참고로 이 사진에서 보이는 뒤의 두 산은 안나푸르나와 마차푸차레라고 한다.[24] 2차 전형은 전적으로 영국군이 관리한다. 따라서 싱가포르는 위탁선발인 셈이다.[25] 월급이 25-30만 원이 되니 대졸이 20만 원 정도 월급을 받으니 그래도 큰 돈이다. 거기에 위에 나오듯이 카길전쟁 같은 실전 나가서 활약하면 당연히 추가 수당을 준다.[26] 하지만 네팔 쪽에서 보면 그래도 큰 돈이긴 하다. 2차대전 당시 받은 돈으로 네팔로 돌아와서 제법 풍요롭게 사는 이들이 많았다고 한다. 참고로 2차대전 당시 구르카들이 받는 월급은 네팔 직장인 평균 70배나 되었다고 하니 경쟁률이 몇백대 일이 될 수 밖에. 지금은 네팔 물가도 많이 올라서 격차가 많이 줄어들었으나 여전히 무시하지 못할 돈이다.[27] 구르카 부대 지휘관 출신 아버지를 둔 영국의 여배우 Joanna Lumley의 활동이 특히 유명했다.[28] 영국 왕족이던 그는 IRA 저항군의 폭탄 테러 공격에 죽었다.[29] 정작 양측 대표들의 분위기는 화기애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