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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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1대

제12대

제13대
존 펜들턴 주니어
'''제임스 먼로'''
존 페이지


'''미합중국 제5대 대통령
제임스 먼로
James Monroe
'''
<colbgcolor=#0d164a><colcolor=#ffc224> '''출생'''
1758년 4월 28일
그레이트브리튼 왕국 버지니아 식민지 웨스트모어랜드
'''사망'''
1831년 7월 4일 (향년 73세)
미국 뉴욕 주 뉴욕
'''재임기간'''
제5대 대통령
1817년 3월 4일 ~ 1825년 3월 4일
'''서명'''
[im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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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d164a><colcolor=#ffc224> '''부모'''
아버지 스펜스 먼로
어머니 엘리자베스 먼로
'''배우자'''
엘리자베스 코트라이트 먼로
'''자녀'''
아들, 장녀 엘리자 먼로 해이, 차녀[6]
'''학력'''
윌리엄 앤 메리 대학교
'''종교'''
개신교 (성공회)
'''신장'''
183cm
'''정당'''
'''민주공화당''']]
'''최종 계급'''
중령

1. 개요
2. 독립전쟁의 용사에서 정계 입문까지
3. 본격적 정치 활동과 대통령 선거
4. 대통령으로서
5. 퇴임 후
6.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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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제5대 대통령.
흔히 '독립전쟁' 세대의 마지막 대통령으로 꼽히며, 유럽 국가의 아메리카 대륙 간섭을 거부하는 선언인 '먼로 독트린(먼로주의)'의 주인공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또한 생몰연도에 나와 있듯이 존 애덤스, 토머스 제퍼슨과 함께 독립기념일에 생을 마감한 대통령 중 한 명이다.[1]

2. 독립전쟁의 용사에서 정계 입문까지


1758년 버지니아 웨스트모어랜드 카운티에서 태어났다. 젊은 시절 윌리엄앤드메리 대학에 입학했지만 1776년 독립전쟁이 터지자 당장 학업을 중단하고 독립군에 입대하여 1780년까지 복무했다. 독립군 총사령관 조지 워싱턴을 따라 여러 전투에 참전했으며 중요한 전투인 트랜턴 전투에서는 중상을 입어 죽을 위기에 처하기도 했지만 간신히 살아났다. 또한 델라웨어에서 1778년까지의 혹독한 추위를 견뎠으며 육군 대령까지 지냈다. 워싱턴은 이 때의 먼로를 매우 용감하고 책임감 있는 젊은이였다고 칭찬했다. 그야말로 독립유공자이자 역전의 용사였던 인물.
독립전쟁이 끝난 후 토머스 제퍼슨에게 감화되어 제퍼슨과 정치 견해를 함께 했고 제퍼슨의 지도를 받아 법학을 공부하여 버지니아에서 변호사 사무소를 개업했고 그곳에서 연방상원의원이 되어 대륙의회의 대표 일을 수행했는데 제퍼슨의 영향인지 반연방주의자의 견해를 지지했다. 그 후 1794년 워싱턴 대통령에 의해 프랑스 대사로 임명되어 프랑스로 파견되었는데, 먼로는 프랑스에 대해 우호적인 움직임을 보였고 미국이 당시 영국과 맺은 통상조약인 제이 조약을 강력히 비난했다. 이 때문에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서 미국의 중립을 지키려는 생각이었던 워싱턴의 눈 밖에 나서 프랑스 대사에서 파면되고 본국으로 소환되고 만다. 돌아오자마자 먼로는 자신의 친프랑스행동에 대한 책을 펴내서 자신의 외교적 견해가 정당하다는 것을 밝히고 워싱턴을 신랄하게 비난했다.

3. 본격적 정치 활동과 대통령 선거


워싱턴과 비슷한 견해를 가졌던 존 애덤스가 대통령이 되었을 무렵에는 버지니아 주지사로 근무하며 의회 중직을 맡지 못하다가 정치적 동지이자 선배인 토마스 제퍼슨이 대통령이 되자 이 때부터 신세가 피기 시작, 1803년에 로버트 리빙스턴과 함께 프랑스에 파견되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를 만나 루이지애나 매입을 성사시켰다. 그 후 영국 대사를 역임했고 본국으로 돌아온 후 변호사업을 지속하다가 1808년 대선 후보 지명전에서 다른 정치적 동지인 제임스 매디슨과 대결했는데 여기서 패배해서 한때 매디슨과 관계가 냉랭해졌는데 제퍼슨이 매디슨과 먼로를 불러 둘을 화해시켜서 관계를 회복할 수 있었다고 한다. 제퍼슨 본인은 친구였던 애덤스와 관계가 서먹서먹했는데도 후배들이 자신들의 전철을 밟는 건 원치 않았던 모양이다.
어쨌든 매디슨 정권 하에서는 버지니아 주지사, 국무장관, 전쟁장관 등을 역임하는 등 매디슨에게 중용되었고 1816년 대선 후보로 출마해서 연방파에 대해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며 백악관에 입성했으며 이 때의 선거에서 패한 연방파는 결국 소멸된다. 1820년에는 '''231 대 1'''이라는 거의 만장일치의 승리를 거두는데 이 1표는 뉴햄프셔 출신의 선거인단 중 한 명이 연방파인 존 퀸시 애덤스에게 투표한 것이라고 한다. 모두가 'Yes'라 대답할 때 'No'라고 대답하는 소신 있는 사람이라 해야 할지, 대세를 따르지 않은 건지에 대한 평가는 각자가 알아서.

4. 대통령으로서


대통령으로서 그의 국내 정책은 거의 제퍼슨과 매디슨의 연방정부의 권한이 강화되기보다는 주의 자율이 더 중요하다는 입장을 그대로 견지해 나갔다. 그는 연방정부의 권한이 점차 헌법에 명시된 제한선을 넘어간다고 보고 연방정부의 권한이 강화되는 것을 억제하는 정책을 펼쳐 나갔다. 또한 상비군에 대한 개념에도 부정적 입장이었는데 상비군 제도를 의심과 악의를 낳는 끊임없는 자극이라고 믿었으며 국민군만으로 시민들이 자신들을 방어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1819년에는 미국 토지의 가격 폭락과 미국산 면화에 대한 수요가 급격히 떨어진 데다가 1812년의 미영전쟁 때 들어간 전비를 매우기 위해 과도하게 지폐를 발행한 것이 맞몰려 경제 위기를 겪기도 했는데 이는 1822년에야 겨우 진정되었다.
아메리카 원주민에 대해서는 미국인들이 싸우기보다는 '보호자'로서의 업무를 수행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으며 노예 제도에 있어서는 미국에 건너온 노예들을 아프리카에 재정착시키는 것만이 연방의 대립이나 전쟁 없이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이라고 생각해서 1822년 미국식민협회를 조직해서 노예들을 새로 건설된 라이베리아로 옮기기도 했다. 그래서 라이베리아의 국기는 성조기와 비슷하며 수도도 먼로의 이름을 딴 '몬로비아(Monrovia)'이다. 물론 이것은 미봉책에 불과했다는 한계가 있다.
1820년에는 미주리 주가 연방에 가입하게 되었는데 이 당시 미국 의회는 노예제 찬성주와 노예제 반대주의 세력 균형이 팽팽히 이루어져 있었지만 미주리주는 노예제 주였기 때문에 세력 균형이 깨질 염려가 있었다. 이 때문에 이른바 '미주리 협정'을 맺어 미주리 주는 노예제 주에 가입시키고, 반노예제주였던 매사추세츠주에서 따로 메인 주를 분리시켜 연방에 가입시켜 의회의 세력 균형을 유지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의 미봉책은 노예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했고 뒷날 터질 남북전쟁을 막지는 못했다.
어쨌든 경제위기가 닥치기도 했고 국내적으로는 노예 문제가 서서히 쟁점화되기는 했지만 전반적으로 먼로 행정부는 나라를 무난히 이끌었고, 노예 문제도 이 당시에는 크게 쟁점화되지는 않았다. 특히 먼로는 반대파와 타협하고 의견을 수용하는 부분에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으며, 연방주의자들의 전매 특허였던 국립은행과 보호관세 주장까지 크게 받아들였다. 이런 화합주의로 북부의 분리주의는 중단되었으며, 1817년 무렵에는 연방파가 정계에서 완전히 소멸되어 그의 임기 후반기에는 미국 역사상 유일하게 반대적 정당이나 정파가 없었던 상태였다. 그래서 흔히 1817년에서 먼로의 임기 말년인 1825년까지를 미국사에서는 '화합의 시대(Era of Good Feelings)'라고 부른다.
다른 것보다 먼로가 가장 뛰어난 능력을 발휘한 분야는 프랑스, 영국 대사를 모두 지낸 것과 루이지애나 매입[2] 미국에 한 프랑스 조차조등으로 축적된 국제경험이 쌓인 외교 분야이다. 1818년 영국을 상대로 미국과 캐나다 국경인 오대호에서의 해군활동을 제한하는 러쉬-베것협정을 체결하여 북방에서의 군사위협을 완화시켰고 이 해에 캐나다와의 국경을 북위 49도선으로 확정해서 두 나라가 함께 오리건 지역을 점유하게 했고 양국 간의 어업분쟁까지 종식시켰다. 그리고 스페인으로부터 동부 플로리다 입수에 힘을 기울여 존 퀸시 애덤스 국무장관에게 이 일을 일임하여 성사시켰다. 이 과정에서 나온 것이 먼로 최대의 업적이자 미국사에 한 획을 그은 사건인 '''먼로 독트린'''이다.

4.1. 먼로 독트린


간단히 말하자면 대서양 위에 금 찌익 긋고 '''여기 서쪽은 죄다 아메리카 영역. 유럽님들 '''이라고 선언한 것. 일종의 고립주의(Isolationism) 노선이다.
먼로 독트린의 내용은 다음의 세 원칙으로 요약될 수 있다.

1. 아메리카 대륙은 어떠한 유럽 열강에 의해서도 미래의 식민지가 될 수 없다.

2. 미국은 유럽 국가들의 기존 식민지나 종속국의 문제에 대해서 간섭하지 않는다.

3. 미국은 유럽 국가들의 내부 문제에 간섭하지 않는다.

이것은 스페인에 소속된 플로리다 영토 매입 과정에서 나타나게 된 것이다. 1819년 애덤스-어니스 조약으로 스페인에게 플로리다를 양도받았지만, 이 무렵 중남미의 스페인 식민지의 대부분은 이 무렵에 독립전쟁을 일으켜 독립국가를 세우고 있었다. 미국은 스페인이 독립하는 나라들을 스페인이 재점령하는 것을 원치 않았고, 다른 유럽 국가들 역시 이 나라들에 간섭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즉 유럽 국가들의 세력이 어수선한 아메리카 대륙를 틈타 세력을 뻗치는 것을 원치 않은 먼로는 존 퀸시 애덤스와 전직 대통령 제퍼슨 등과 상의한 끝에 1823년 겨울, 마침내 의회 신년 메시지로 먼로 독트린을 발표했다. 이 선언의 골자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유럽 열강의 아메리카 대륙 간섭을 거부하면서 이를 어길 시 어떤 대가를 치뤄서라도 미국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하겠다고 경고하는 것과 동시에 미국 또한 유럽의 분쟁이나 정치에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는 선언이었다. 먼로는 동쪽으로는 대서양을 한계로 정했고 서쪽으로는 하와이를 한계로 정했다.
이것은 당시에는 아메리카 대륙에서 유럽 열강의 손을 떼는 역할을 했지만[3],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미국의 팽창주의와 제국주의를 합리화하는 명분이 되었으며 뒷날 미국 팽창주의의 중심인물인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먼로 독트린에 추가 조항을 덧붙여 서반구의 모든 국가 분쟁에서 미국이 국제경찰론을 수행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자세한 것은 시어도어 루스벨트#s-2.1.1 항목 참조. 이 때 미국이 주창하는 '국제경찰론'이 나온 것인데, 이런 의미에서 넓게 보면 먼로 독트린은 오늘날에도 적용되고 있는 셈.

5. 퇴임 후


1825년 성공적으로 임기를 마친 먼로는 버지니아 리스버그의 오크 힐로 은퇴하여 선배인 제퍼슨, 친구 매디슨과 함께 지내며 시간을 보냈다. 버지니아 대학 평의원과 버지니아주 의회 의장을 역임했다.
그런데 제퍼슨, 메디슨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대통령직을 물러난 후 경제적 어려움에 쪼들리는 삶을 살게 되었다. 재임 기간 동안 워낙 빚을 많이 졌는데 그 빚이 7만 5천 달러에 이르렀다고 한다. 결국 먼로는 부채를 청산하기 위해 버지니아 부동산 전부를 다 매각 처분하고 뉴욕에 살던 딸 엘리자의 집으로 거처를 옮겨 그곳에서 살았다. 이 무렵 그는 정부에게 스페인, 프랑스에서 외교관으로 있으면서 입게 된 재산 손실을 정부에게 보상해 달라고 청원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비록 말년은 초라하고 가난에 시달렸지만[4] 대통령으로서 미국사에 한 획을 남긴 그는 1831년 7월 4일, 독립기념일에 7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6. 여담


미국에 대한 자부심이 넘치는 인물이었다고 하는데, 프랑스 외교사절 당시 같이 동행한 딸 엘리자가 파리의 번화한 거리를 보고 "미국은 이런 좋은 도로가 없어요"라고 말하자 딸에게, "미국은 새로 지어진 집과 같아서 부족한 게 많지. 하지만 '''우리에게는 무엇보다도 소중한 자유가 있지 않느냐'''"며 딸을 점잖게 훈계했다고 한다.
사실 교양이나 학식이란 측면에서는 애덤스나 제퍼슨, 매디슨에게 미치지 못하는 편이었다고 한다. 특히 제퍼슨 정권에서 부통령을 지낸 에런 버[5]에게는 "무식하고 어리석은 작자"라는 비난까지 들었다고. 그러나 이것은 아론 버의 성격이 조금 비뚤어진 것이었는지 제퍼슨과 메디슨은 물론 존 퀸시 애덤스나 심지어는 연방파의 인사들 역시 거의 '''먼로 까면 사살'''이란 식으로 평가했다. 이 정도로 예의바르고 적을 만들지 않는 등 대인관계가 원만했으며 친화력이 뛰어난 인물이었다. '화합의 시대'에 대통령이 된 것도 이렇게 적을 만들지 않는 성격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하루는 백악관에서 영국 대사와 프랑스 대사를 초청하여 만찬을 벌였는데 프랑스 대사는 영국 대사가 말을 할 때마다 괜히 엄지손가락 가지고 딴청을 피웠다고 한다. 이에 열받은 영국 대사가 "너님 지금 나 무시함?"이라고 따지자 프랑스 대사가 "뭐 병시나, 싸울래?"로 응수했다. 결국 이 둘이 결투 직전까지 가게 되자 이를 지켜본 먼로는 이 둘에게 '''"제가 마차를 드릴 테니 두 분께서 마차 경주로 승부를 가리시지요"'''라고 천연덕스럽게 제안했다고 한다. 이 제안에 김이 빠진 두 대사는 그냥 아무 말도 안 하고 자리에 앉아 조용히 식사를 계속했다고.
마지막 독립전쟁 세대 대통령인 그에게는 '마지막 삼각모(The Last Cocked hat)'라는 별칭이 붙었다. 이는 미국 독립전쟁을 배경으로 한 영화나 드라마에서 남성들이 쓰고 다니는 모자를 말한다. 영화 패트리어트에서 미국 독립군이 쓰고 있는 모자를 연상하면 쉽다.
학교대사전에 의하면 초등학교 시절 책상에 금을 긋고 짝이 그 영역을 넘지 못하게 막는 행위를 가리켜 '먼로 독트린'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1] 여담으로 후임자인 존 퀸시 애덤스 부터는 모두 사진이 남아있기 때문에, 사진 없이 초상화로만 존재하는 마지막 대통령이기도 하다. (사진은 먼로가 사망한지 10여년 뒤인 1840년대가 되어서야 널리 찍기 시작했다.) '건국의 아버지들' 세대가 일종의 국가 신화로 남아있는 미국의 정서를 고려하면, 이들이 모두 사진 아닌 초상화로 존재한다는 점은 묘하기까지 하다.[2] 당시에 나폴레옹이 유럽에서 여러 나라를 패고 다닐때라서 신경쓰지도 못하고, 지키지도 못할 땅을 미국에 팔아버린건데, 이 일로 해서 당시에 북미 대륙 동부 지방에만 한정되 있던 미국의 땅이 2배 이상으로 커졌고 현재의 워싱턴주 를 포함해서 태평양까지 이르렀다 .이 땅을 판 프랑스도, 산 미국도 "미시시피강과 그 강으로 흘러들어오는 모든 강과 그 근처의 땅" 이란거 외에 도데체 얼마나 넓은 땅인지, 정확히 어디서 어디까지인지, 이땅에 뭐가 있는지 전혀 몰랐다고 한다. 좌우간 미국 역사에 큰 란 획을 그은 사건이다.[3] 정확히 말하자면, 유럽 강대국들은 딱 '''"헐 아메리카 놈들이 대서양 너머에 있다고 깡이 비정상적으로 발달했네"''' 정도였지만, 영국이 이에 호응해 먼로 독트린을 준수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대륙 국가들은 타의에 의해 손을 떼야만 했던 것.[4] 후임 존 퀸시 애덤스는 '먼로는 미국이 태어난 이래 다른 대통령보다 더 많은 봉급을 받은 대통령이었음에도 그는 이제 72세의 나이로 초라하고 가난하게 죽음을 맞이하고 있다.' 라고 적었다.[5] 부통령 시절 전직 재무장관 해밀턴과 '''현피'''를 뜬 걸로 유명한 양반이다. 에런 버와 알렉산더 해밀턴의 결투 항목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