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일본 전국고등학교야구선수권대회/결승전
만화보다 더욱 만화같은 스토리로 우승기를 거머쥔 이들의 이야기는 고교야구 팬들의 가슴을 울리기에 충분했다. '''코시엔 구장에 모인 사람들에게 2007년은 꿈이 이루어진 해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1. 개요
일본 고교야구에서 고시엔 우승을 노리는 명문 강팀들은 대부분 사립고등학교들이며 공립고등학교들 중에서는 고시엔 진출까지는 몰라도 우승을 노릴만한 강팀들은 매우 드물다. 고교야구 명문으로 유명한 PL학원고등학교[2] 등의 일부 사립학교들은 뛰어난 중학 유망주들을 장학생으로 스카웃하고 명장이라 불리는 감독들을 고용하며 전용 그라운드와 기숙사를 운영하는 등 전폭적인 지원으로 막강한 팀을 꾸린다. [3][4][5]
반면 상당수의 공립 고등학교들은 야구장학생은 '''당연히''' 없고 감독은 학교 교사가 겸직하며 운동장도 다른 체육부와 공유하며 연습시간도 수업 전과 방과후의 몇 시간으로 규제되는 등 말 그대로 야구 동호회 수준의 야구부를 보유한 곳이 대부분이다. [6] 사가키타의 기적은 바로 이런 야구 명문 사립고등학교들을 물리치고 '''그저 야구가 좋아서 야구를 하는 평범한 동네 고등학교 학생들이 만들어낸 기적과 같은 우승'''을 일컫는 말이다.
2. 야구 동아리, 고시엔 그라운드를 밟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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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여름, 사가현에 위치한 사가현립(佐賀県立) 키타고등학교(佐賀北高等学校)의 야구부가 돌연 돌풍을 일으키며 제 89회 고시엔 사가 현 예선을 돌파해 개교이래 두 번째로 고시엔 본선에 진출하는 파란을 일으켰다. 그런데 앞서 언급했다시피 어디에나 있을 보통 현립학교다보니 야구부에 대한 특별취급은 전무했고, 야구부 운영도 그저 서클 활동의 일환에 불과했다. 당시 사가키타 고교 야구부의 상황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 야구 장학생은 당연히 없음. 야구부원들은 그냥 학교 근처에 사는 보통 학생들.
- 주전들의 평균 신장 170cm 이하
- 감독은 야구를 좋아하는 국어 교사였던 모모자키 토시카츠(百崎敏克, 당시 51세)[7]
- 그라운드는 축구부와 공유
- 공부에 지장을 주지 않기 위해 야간 훈련 금지
- 시험 일주일 전에는 부활동 전면 금지
3. 본선에서의 파란
어디에나 있는 평범한 야구소년들만이 모인 이런 동네야구 수준의 팀이 고시엔에 올라와서 모두의 예상을 뒤집고 1회전[8] 에서 승리를 거두자, 주장이었던 포수 이치마루 다이스케는 너무 감격한 나머지 "이것만으로도 위대한 업적. '''2승은 기대 안 해.'''"라고 '''공개 포기 선언'''을 하기에 이르렀을 정도였다.
그러나 사가키타 고교는 이후에도 프로 지망생들로 점철된 명문 사립고교들을 연파하는 대파란을 일으켰다. 특히 8강전 테이쿄 고교[9] 와의 13회 연장 혈투는 고시엔 역사에서도 종종 언급되는 명승부. 여기서 사가키타의 투수 쿠보 타카히로는 연장전에서 테이쿄의 스퀴즈번트를 '''두 번이나''' 글러브 토스로 막아내는 묘기를 선보였다. 그리고 테이쿄 고교는 동도쿄 최고의 야구 명문이라는 명성에도 불구하고 2006년 대회에서 치벤 와카야마에게 역사적인 역전패를 당한 데 이어 이번엔 동아리 수준의 사가키타에게까지 끝내기 안타를 맞고 분패하며 체면을 구기고 말았다.
이하는 사가키타 고교의 결승까지의 전적이다.
고시엔에서 결승에 오를 정도의 강팀이라면 1,2회전 정도는 압승해버리는 것이 보통이지만, 사가키타 고교에게 쉬웠던 시합은 단 하나도 없었다. 자신들보다 훨씬 강했던 엘리트 고등학교들을 상대로 매번 접전에 연장전을 거듭하며 기적적으로 이겨나갔던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마침내 결승에 진출했다. 1996년 마츠야마 상고, 이른바 기적의 백홈 이후 11년 만의 공립고교의 결승 진출이었다.
4. 결승전
내로라 하는 야구 명문들을 모조리 격파하고 결승에 도달한 사가키타 고교를 기다리고 있던 팀은 센바츠(봄 고시엔) 2회 우승을 거둔 바 있는 히로시마의 초명문 코료(広陵) 고등학교로 한신 타이거즈의 간판이었던 가네모토 도모아키 등의 인기스타들과 수많은 프로야구 선수를 배출했던 고시엔 단골 출전 고교였다.
여기에, 이들의 결승전 '''선발 투수는 노무라 유스케[10] , 주전 포수는 고바야시 세이지[11] 였다.''' 이 둘에 대한 설명이 길어져서 각주로 분리하였으니 그것을 참조하시라. 어쨌든, 그저 야구가 좋아서 모였던 사가키타의 선수들과는 차원이 다른 초고교급 황금 배터리였다.
4.1. 1회부터 7회까지
1회전부터 4강까지 총 64이닝을 소화하며 지칠대로 지친 사가키타 고교는 경기가 시작하자 내내 노무라에게 7회까지 1안타로 압살당하며 0-4로 끌려가게 되었다.[12] 그리고 맞이한 8회말. 이 경기를 보고 있던 모든 이들을 기다린 것은 '''고시엔 89년 역사상 가장 드라마틱한 장면'''이었다.
4.2. 8회말, 사가키타를 구원해낸 소에지마.
1사, 8번 타자로 나온 에이스 투수 쿠보가 바깥으로 빠지는 변화구를 건드려 3-유간 안타를 만들어냈고, 9번 타자 때 벤치에서 낸 대타 니카와(新川)는 우전 안타를 때려냈으며, 1번 타자 츠지(辻)는 풀 카운트 승부 끝에 볼넷을 골라내 만루를 만들었다. 노무라는 흔들리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2번 타자 유격수 이데 카즈마가 들어섰다. 초구는 바운드 볼, 2구는 살짝 빠진 볼이었다. 3구는 복판 스트라이크. 4구 역시 볼인 가운데, 5구는 스트라이크 존 비슷하게 들어온 듯 보이기도 했으나, 주심은 볼로 판정했다.[13] '''볼넷, 그러니까 밀어내기였다.''' 노무라는 황당하다는 표정이었으나, 주심은 판정을 바꾸지 않았다.
사가키타 고교가 그렇게 1점을 득점한 후 1사 만루. 여전히 1:4로 뒤지던 상황에서 팀의 주포, 3번 타자 소에지마 히로시가 타석에 들어섰다. 초구는 파울, 2구는 몸쪽 볼. 1S-1B 상황에서 노무라가 선택한 3구는 직구. 그 직구가 스트라이크존을 통과하는 순간 소에지마의 방망이가 힘차게 돌아갔다. '''그리고...'''
'''소에지마가 받아친 타구는 그대로 고시엔의 레프트 스탠드에 꽂혔다. 이것은 고시엔 사상 최초의 결승전 역전 만루홈런이었다.''' 이후, 노무라는 다음 두 타자를 3루 땅볼과 헛스윙 삼진으로 잡아내며 8회 말을 마치기는 했으나, 분위기는 이미 사가키타 쪽으로 완전히 넘어가 있었다.
4.3. 9회초, 고교야구 팬들의 꿈이 이루어진 순간.
9회초, 코료 고교는 3-유간 빠지는 좌전 안타로 무사 1루 찬스를 만들었지만 보내기 번트 상황에서 1루 주자가 사가키타의 허술한 수비를 이용해 3루까지 내달리다 아웃당했고, 그대로 아웃 카운트는 2개나 늘어났다. 위기를 넘긴 사가키타 에이스 쿠보는 마지막 타석에 들어선 에이스 노무라에게 변화구로 삼진을 낚았고, 노무라의 방망이가 헛도는 순간 쿠보와 이치마루는 두 손을 번쩍 들었다. 야구 동아리 사가키타 고교는 그렇게 제 89회 전국고등학교야구선수권대회, 즉 제 89회 여름 고시엔의 우승팀에 등극했다. 일명 '''고시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우승'''이, 그리고 '''사가키타의 기적'''이 완성되는 순간, 당시 아사히 방송 캐스터는 이렇게 말했다.
상세 기록三振!! 佐賀北高校が、甲子園球場で、奇跡を起こしました!
삼진!! 사가키타 고교가 고시엔 구장에서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샤다라빠는 레진코믹스에 연재한 고시엔 만화에서 2007년 결승전을 '''"고시엔에 모인 모든 야구팬의 꿈을 이뤄준 기적"''' 이라고 찬양했다.
5. 여담
- 사가키타 고교는 결승까지 포함해 무려 7경기 73이닝을 소화, 역대 고시엔 최다 이닝 신기록까지 수립했다. 당시 사가키타 고교가 쿠보 타카히로-바바 마사후미의 두 투수를 현란하게 로테이션시키면서 최다 이닝 신기록까지 수립하며 우승한 것은 절대적인 에이스에 의존하는 것을 당연시하는 일본 고교야구의 풍조에도 경종을 울린 것으로 평가받는다.
- 우승 직후 모모자키 감독 에게 우승의 비결을 묻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시간을 잘 지킨다. 예의 바르게 행동한다. 공부도 열심히 한다.
- 한편 사가키타 선수들 중 이후 프로에 진출한 선수는 한 명도 없다.[16] 사실 프로팀의 눈길을 끌 만한 재능의 소유자가 있는 것은 아니었고, 선수들 스스로도 대부분 프로 야구선수가 아닌 다른 진로를 준비하고 있었다.[17] 주축 선수들의 진로는 다음과 같다.
- 쿠보 타카히로(久保貴大): 고시엔 우승으로 미일친선야구 고교 대표로도 뽑혔고[14] 수도대학연맹 소속 츠쿠바대학 진학 후 2학년 가을 리그 방어율 2위, 3학년 봄 리그에서도 스가노 도모유키(토카이대학, 현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이어 방어율 2위를 기록하는 등 에이스로 활약했다. 2012년 졸업 이후 나고야의 선술집 회사가 운영하는 제이프로젝트라는 사회인 팀에 들어가 밤에는 일을 하고 낮에는 훈련하며 야구를 계속했지만 2013년을 끝으로 은퇴. 2014년 사가대 대학원에 입학, 고교 교사를 준비함과 동시에 사가대 부속중학교 연식야구팀을 지도하며 지도자의 꿈도 키워가고 있다. 이후 교원면허 시험에 합격, 2016년부터 모교 사가키타 고교의 교사로 부임했다. 보건체육 담당교사 겸 야구부 부부장 자격으로 선수들을 지도하는 중. 그리고 2019년 사가키타 고교가 여름 고시엔 진출을 확정지으면서 지도자로써 다시 고시엔을 가게 되었다.
- 소에지마 히로시(副島浩史): 쿠보와 마찬가지로 당시 미일친선야구 고교 대표로도 뽑혔다. 이후 큐슈 6대학 연맹 소속 후쿠오카대학 진학 후 어깨 부상으로 고생하다 3학년 때 레귤러가 되고 그해 가을 리그 홈런, 타점왕을 차지했다. 지역 강호인 후쿠오카대에 진학한 덕분에 2009년을 제외하면 매년 전국대회에도 출장했다.[15] 대학 졸업 후에는 이데와 함께 사가은행에 입사했지만 2014년 여름 퇴직하고 사가현립나카바루특별지원학교(천식 등 특수 질환 아동을 위한 학교)에서 체육 수업 등을 담당하고 있다가 4수 끝에 교원채용시험에 합격, 2018년 가을에 사가현립 카라츠공업고등학교의 야구부 감독으로 취임한다. 카라츠공고 감독으로서의 목표는 물론 고시엔 진출. 이 학교는 1996년 여름 고시엔 진출 경험이 있는 곳이다.
- 바바 마사후미(馬場将史): 쿠보와 함께 팀을 이끈 두번째 투수. 츄오대학 진학 이후에는 준경식야구부(경식과 연식 사이의 공을 사용하는 야구부)에서 활동, 이후 도요타 통상에 취직했다.
- 이데 카즈마(井手和馬): 163cm의 작은 신장으로 타순으로는 2번에 섰고, 수비의 중추인 유격수를 맡았으며, 8강 테이쿄전에서는 끝내기 안타를 때려내기도 했던 이데는 동도야구연맹 소속 아세아대학 야구부에서 활동하고 이후 소에지마와 함께 사가은행에 입사했다.
- 이치마루 다이스케(市丸大介): 4번 포수이자 주장을 맡았던 이치마루는 역시 미일친선야구 대표에도 뽑혔고 도쿄 6대학 연맹 소속의 와세다대학에 진학, 이후 '손수건 왕자' 사이토 유키와 배터리를 이루었다. 2010년에는 메이지진구 야구대회에서 우승을 이뤄냈고 대학에서의 성적은 통산 44경기 출장 123타수 31안타 14타점. 졸업 이후 도시바 경식 야구부에 들어갔지만 2013년을 마지막으로 은퇴했다.
- 8회 말, 노무라 유스케의 공이 이전 까지 스트라이크로 판단된 지점으로 통과되었지만 모두 볼로 선언되며 심판 판정에 대해 불만을 제기하는 이도 있었다.
- 2007년에는 고교야구계에 선수 영입과 관련한 금품수수 스캔들이 적발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 대회의 극적인 우승으로 전국적인 열광을 일으키면서 어영부영 묻혔다고 한다(...).
- 2011년에 사가키타의 여름 - 고시엔 사상 최대의 역전극(佐賀北の夏―甲子園史上最大の逆転劇)이라는 책이 출판되기도 했다.
- 2015년에 이 내용을 다룬 프로그램이 나왔다.
- 이 우승 이후, 일반 동아리 수준이었던 사가키타 야구부는 동문 졸업생들과 지역민들의 열렬한 환호와 지원 속에 정식으로 제대로 된 야구부로 재탄생했고, 지역의 유망한 학생들도 다수 진학 - 사가키타의 기적 이후 고시엔에 3회 더 진출하는 준수한 기록을 세우며 사가 현 내에서 고시엔 출전 가능성이 높게 점쳐지는 강팀으로 꼽히게 된다. 참고로 가장 최근에 고시엔에 진출한 건 2019년으로, 아쉽게도 1회전에서 가고시마 현 대표인 가미무라 학원에게 패해서 탈락했다.
- 사가키타 고교 출신 프로야구 선수는 키시카와 카츠야라는 선수가 있다. 다만, 1965년생이라 사가키타의 기적 당시에는 이미 은퇴한 상태였다. 전성기 때는 3년 연속 20홈런을 치는 등 활약하긴 했으나, 전반적으로는 짧은 전성기를 제외하면 대타 요원이었던 선수. 소속팀은 다이에→요미우리→요코하마. 현재는 야구 해설가로 활동하고 있다.
6. 관련 문서
[1] '''엄청난 돌풍!'''이라는 의미. とても(매우)의 하카타벤인 がばい와 旋風(선풍, 돌풍)을 합친 단어로 일본에서는 사가키타의 기적이라고 부르지 않고 がばい旋風라는 말을 쓴다.[2] 2016년 고시엔 참가를 끝으로 해체. 야구부내 폭력 등의 사건이 연이어 터지며 고시엔 출전 정지 처분을 받았고, 이와 더불어 학원 자체적으로 야구신입부원을 받지 않았다.[3] 때문에 다른 지역의 유망주들을 대거 모집하는 명문고, 이른바 "외인부대"가 과연 지역을 대표하는 야구부라고 할 수 있는 것인가? 이것이 과연 교육의 연장선상이어야 할 고교야구의 정신에 부합하는 것인가? 등의 논쟁은 꾸준히 이어지고 있으며, 2006년 이후 고교야구 연맹은 특기생 모집, 장학생 지급, 일반 학생과와 분류된 체육과 운영 등에 대대적인 규제를 가하며 이러한 사립고의 엘리트중심 야구는 일반 학생들도 참여하는 개방 노선으로 전환되는 추세이다.[4] 고시엔 출전을 위해 상대적으로 수월한 타지역 강팀으로 떠나는 경우도 매우 많은데 2005년 연맹에서는 1996~2005년, 즉 10년 사이에 고시엔에 출전한 선수 중 다른 현에서 온 경우를 조사했다. 그 결과 다른 현에서 와서 고시엔에 출전한 선수는 10년 간 916명에 달했고 특히 오사카부 출신이 457명에 달했다. 이는 오사카부가 PL학원, 오사카토인 등 수많은 강팀이 몰려 있기 때문에 A급 선수라도 고시엔 출장을 장담할 수 없다는 점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가령 NPB 정상급 투수 중 하나였던 마에다 켄타는 2004년 1학년 때는 여름 예선 결승에서 츠지우치 타카노부와 히라타 료스케가 이끌던 오사카토인을 잡고 본선에 진출했으나 그 다음해에는 다시 준준결승에서 오사카토인에게 패배, 고3 때는 준준결승에서 히가시오사카대학카시와고교에게 패퇴하며 고1 이후 여름 고시엔에 진출하지 못했다. 이처럼 지나치게 경쟁이 치열한 지역을 떠나 상대적으로 경쟁이 약한 지역의 강팀에 가는 경우가 비일비재하여 2012년 여름 고시엔에 출전한 카가와니시고교의 경우 카가와현 출신은 커녕 시코쿠 4개현 출신조차 없었고 대신 오사카부 10명, 효고현 5명 등 벤치에 들어가는 18명 전원이 다른 현에서 온 선수였다. 특대생 문제와 더불어 고교야구계에서 고민하고 있는 문제이지만 현재로서는 이렇다할 해결책이 보이지 않는 상황. 이 글이 쓰여지고 있는 2015년 여름 고시엔에도 역시나 오사카 출신 선수가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했다.[5] 오사카, 효고 지역에서 타 지역으로 진학한 선수는 다르빗슈 유(미야기현, 도호쿠고교)와 다나카 마사히로(홋카이도, 코마다이도마코마이고교)가 있다. 선망하던 PL학원고의 입학에 실패한 니시오카 츠요시은 고치현의 야구명문교 메이도쿠기주쿠고교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지만 PL학원에 대한 적개심을 불태우던 니시오카는 오사카토인고를 택했다.[6] 물론 전국 우승도 거두는 초명문 공립고교들도 일부 있지만, 이 공립고들은 지원과 육성 측면에서는 명문 사립고들과도 막상막하인 어디까지나 일부의 케이스이다.[7] 이 사람도 사가키타 고교 야구부 출신이었다. 포지션은 외야수. 코시엔 예선에서 현 대회 4강까지 진출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주장까지 역임했으며 코쿠가쿠인 대학 야구부까지 진학했다. 코쿠가쿠인 대학은 당장 2018년 드래프트에서 야쿠르트 1라운더까지 배출할 정도로 나름의 저력을 가진 야구부였다. 그러나 대학교 입학 이후 자신의 실력이 프로에서 먹히지 않을 거라 생각하여 야구부를 퇴단하고 교원 자격증을 따서(전공이 문학부였다.) 모교 교사로 부임했다.[8] 심지어 개막전이기도 했다![9] 모리모토 히초리, 야마사키 야스아키 등 많은 프로선수를 배출했으며, 고시엔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핀스트라이프 유니폼'으로 유명한 학교. 도쿄에서는 서도쿄와 동도쿄에서 각각 1개팀씩 출전하는데 테이쿄 고교는 동도쿄다. 오 사다하루의 모교 와세다실업고는 동도쿄 소속이었다가 학교가 신축 이전하면서 서도쿄로 바뀌었다.[10] 메이지 대학교를 거쳐 2011년 신인드래프트에서 히로시마 도요 카프에 1지명으로 입단. 2012년 센트럴리그 신인왕, 2016년 센트럴리그 다승왕에 오른다.[11] 2013년 신인드래프트에서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1지명으로 입단한 뒤 2017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서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의 주전 포수를 맡게 된다.[12] 노무라는 7회 초에 쿠보를 상대로 좌중간을 꿰뚫는 2루타를 때려내며 2타점까지 기록했다.[13] 포수 미트에 들어온 위치는 확실히 스트라이크이지만 타자 몸쪽, 백도어성으로 들어온지라 존을 통과하지 못한 것으로 판정한듯싶다.[14] 나카무라 아키라(도쿄 테이쿄(帝京) 고등학교, 現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다나카 켄지로(토키와학원, 현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 사토 요시노리(센다이 이쿠에이(育英) 고등학교, 現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등이 포함되었고 운명의 상대인 노무라도 함께 뽑혔다.[15] 4학년이었던 2011년 전일본 대학야구 선수권 때 2회전에서 강호 토요대학을 만나 탈락하는데 당시 대학야구를 대표하는 좌완 에이스였던 후지오카(현 치바 롯데 마린스)를 상대로 마지막 타석에서 대형 파울 홈런을 날리기도 했지만 4삼진으로 침묵. 이 경기 이후 지금까지 해왔던 야구를 포기할 것을 결심했다고 한다. 당시 같은 대회에 출전했던 이치마루가 이 경기를 스탠드에서 지켜보고 있었다고.[16] 샤다라빠는 코시엔으로GO!에서 "누구도 프로나 대학에서 지명받지 못했지만..."이라고 표현했지만 프로 레벨에 진출한 선수가 없을 뿐이지 대학야구부에는 많이 갔다. 게다가 일본 대학야구도 그 수준이 매우 높은데다 숫자도 많아 대회도 많은 터라 굳이 프로에 가지 않더라도 좋아하는 야구를 실컷 할 수 있는 구조다.[17] 실제로 쿠보 타카히로의 경우 츠쿠바 대학 시절 인터뷰에서 자신은 프로에 갈 실력이 되지 않는다는 말과 함께 졸업 후에는 고교야구 지도자가 되는 것에 관심이 있다는 뜻을 밝힌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