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국 동맹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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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하루마다의 전황을 정리해놓은 영상.[3]
1864년~1870년까지 파라과이와 브라질 제국, 아르헨티나, 우루과이의 3국 동맹이 벌인 전쟁. 파라과이 전쟁(Paraguayan War)이라고도 한다. 남아메리카 역사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전쟁이자 라틴 아메리카 역사상 가장 참혹했던 전쟁으로 평가되는 전쟁으로, 종전 150여년이 된 지금까지도 전쟁 당사국 네티즌들의 온갖 키배 의 향연이 끊이지 않는 전쟁이다.
2. 배경과 원인
1811년 파라과이가 스페인으로 독립한 이후 1814년 파라과이의 정권을 잡은 집정관[4] 호세 가스파르 로드리게스 데프란시아는 장기간 독재 정치를 펼쳤는데, 국민을 억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특정 집단에 권력이 집중된 과두제를 해소하기 위해서였다. 프란시아는 농지개혁을 사행하여 대지주의 재산을 몰수, 농민들에게 재분배했다. 이는 19세기 세계에서 가장 진보된 농지개혁이었다. 또 국내 생산 기반을 약화시킬 수 있는 상품의 국제 유통을 감시하는 등, 여타 라틴아메리카 국가와 달리 엄격한 계획경제, 보호무역 정책을 수립했다. 1840년 프란시아가 죽고 뒤이어 집권한 후계자 카를로스 안토니오 로페스와 그 아들 프란시스코 솔라노 로페스[5] 도 그 정책을 그대로 따랐고 20년쯤 뒤에는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는데, 많은 외국인 여행객들이 "파라과이는 부의 재분배 덕분에 극빈층이 없고 기근도 분쟁도 없다"고 평할 정도였다.[출처] 현대의 파라과이가 토지배분과 빈부격차로 골머리를 앓는것과는 대조적인 모습이다. 그 당시에 자국 기술로 증기선을 만들어 띄울 수 있었던 유일한 남미 국가이기도 했다. 영국 배를 한 척 사고 학생들을 유럽에 파견해 기술을 베껴왔다고 한다.
야심만만한 로페즈 대통령 치하에서 국력이 상승세에 있던 파라과이는 자기네를 아니꼽게 보던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그리고 막 독립했던 신생국가 우루과이 이상 이웃 3국과 충돌하게 된다. 거기에 당시 국왕이나 다름없는 권력을 가진 로페스 대통령은 내륙국 파라과이의 한계를 넘기 위해서 우르과이와 브라질 쪽으로 해안선을 차지하려는 야심찬 계획을 짜고 있었고 조선 기술을 얻으려고 한 것도 항구를 차지한 다음에 쓰기 위함이 컸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이 이웃 나라의 심기를 건드리고 만다.[6]
- 전쟁 원인에 대해, 한국에서는 전 세계 모든 나라를 자기네 경제권으로 편입시켜서 경제적으로 종속시키려는 제국주의 열강에게 문호를 닫아건 파라과이는 눈엣가시였으며, 자기네 빚을 얻어쓰지 않는 괘씸한 파라과이에 열 받은 영국의 부추김을 받은 브라질 제국과 아르헨티나가 우루과이 내전에서 반파라과이파를 밀면서 전쟁이 일어났다고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영국이 3국 동맹 전쟁을 일으켰다는 이론은 사실 90년대에 폐기되었다. 60년대와 70년대에 한창 좌파운동의 바람이 불 때 이런 이론을 주창한 남미의 좌파 지식인들이 많았지만, 실제로는 이 이론을 뒷받침할만한 증거 자체가 없다! 그냥 대충 심증을 가지고 한 추측일 뿐이다.
당시 파라과이가 아무리 날고 기어도 유럽 열강을 열받게 할만한 영향력은 전혀 없었고, 영국이 전쟁의 흑막이었다는 주장의 다른 '근거', 즉 영국이 미국의 남북전쟁 이후로 초토화된 미국 남부 대신 파라과이를 수탈해서 목화를 얻고자 했다는 것 역시 말이 안 된다. 이미 이집트를 장악하여 이집트에서 목화를 값싸게 조달하던 상황[7] 에 전쟁까지 할 필요는 전혀 없었다. 이렇게 미약한 주장이 머나먼 한국까지 퍼지게 된 이유는 다른게 아니라 브라질과 아르헨티나가 이런 식의 물타기로 전쟁에 대한 책임을 영국에 돌릴 수 있었기에 교과서에까지 실어올리며 대대적으로 밀어줬기 때문이다. 계속 읽어보면 알겠지만 이 전쟁에 대한 결과는 파라과이 대학살이나 다름없었다.
여튼 파라과이와 이웃 나라들 간의 갈등이 커지던 찰나, 우루과이에서 전쟁의 계기가 되는 사건이 터졌다. 당시 우루과이는 블랑코당(백색당)이 집권중이었는데, 브라질이 군대를 동원하여 반대파 콜로라도 당을 밀어준 것이었다. 파라과이는 이에 대해 경고했으나 브라질이 무시하자, 브라질에 선전포고하는 것으로 응수했다. 로페스는 이후 브라질 군을 우루과이에서 완전히 밀어내겠다며 아르헨티나 영토를 열어달라고 요구했으나, 아르헨티나는 이를 거부했다.. 그리고 우루과이 내전에 대한 아르헨티나의 중립성을 의심하던 파라과이가 아르헨티나에게도 선전포고하면서 아르헨티나 역시 전쟁에 참여하게 되었다. 우루과이의 경우, 내전의 결과 친 브라질파인 콜로라도당이 집권하면서 당연히 반 파라과이 파에 합류, 파라과이에 대항하는 브라질, 아르헨티나, 우루과이의 삼국동맹이 형성되었다.여기서 파라과이의 입장을 보면 브라질이 넘사벽 강대국이기에 아르헨티나가 길을 비켜주기만 한다면 굳이 브라질과 부딪힐 일 없이 건국된지 얼마 안되는 신생국 우루과이를 직접 공략할 수 있는 상황이라서 아르헨티나에게 길을 비켜달라고 요구했는데 문제는 이걸 아르헨티나가 파라과이에게 조까로 일축한 것이었다. 이에 대해 파라과이가 엄청나게 바보짓을 저질렀는데 '''지가 꼴받는다고 아무런 상황파악을 못하고 저 브라질 못지 않은 넘사벽인 아르헨티나에게도 선전포고를 하는 병크'''를 저지른 것이다. 결국 파라과이는 몰매를 맞게 생겼다.
3. 경과
파라과이는 이 전쟁 초기에 3국 동맹군을 우주관광 보냈다. 징병제 국가였던 파라과이의 병력은 10만가량으로 추정되나 이에 반해 3국은 기껏해야 2~3만에 불과했다. 이마저도 바로 얼마 전까지는 서로 으르렁거리던 관계라 3국 동맹군은 초기에 파라과이보다 아르헨티나-우루과이와 브라질간 갈등이 거셌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에도 브라질과 아르헨티나는 엄청 치고박고 사이가 나뻤으며 500일 전쟁 당시 우루과이를 아르헨티나가 대놓고 도왔기 때문이었다. 반면 파라과이는 징병제도 징병제지만 그 당시 장교부터 사병들까지 양질의 군사 교육과 훈련을 잘 받은 정예중의 정예였고 전쟁당시 남미 최강 경제, 군사 대국답게 무기들의 질과 보급도 우수했다.
그러나, 초반에 호되게 당하자 브라질과 아르헨티나가 군병력을 제대로 다시 파병하면서[8] 전쟁이 길어지자 파라과이는 불리해진다. 전쟁 직전에 유럽에다 주문해놓은 최신형 군함 6척만 들어올때까지 참았어도 전세는 파라과이에게 너무 유리할 판이었지만 그걸 못참아서..
체급으로 따지면 파라과이가 그 때도 삼국동맹보다 열세였다. 파라과이는 당시 인구가 60만 명 밖에 안되었지만, 아르헨티나만 해도 인구 150만이 넘었고 브라질은 그보다 훨씬 많은 1천만 명에 육박했다. 그나마 인구가 20만도 채 안되는 우루과이는 파라과이보다 인구가 더 적은 나라이긴 했지만 바로 옆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이 도와줄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전쟁 초반엔 갑툭튀한 파라과이에 당황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 당연했지만, 파라과이는 삼국동맹과의 근본적인 체급 차이에서 오는 물량 차이를 극복하기 어려웠다. 사실 개별 전투로만 보면 파라과이와 3국 동맹간의 대결은 승률은 박빙수준이다. 파라과이군의 수준이 높다는걸 의미하는거지만 문제는 이게 초반 러시 승률빨도 있었고 이거 이후에도 3국 동맹은 전투에서 지고 부대가 작살나면 바로 그자리에다 새로운 부대를 파견하는 식으로 로테이션 돌려가며 붙었기 때문에 파라과이는 '''3국 동맹의 물량공세를 도저히 당해낼 수가 없었다.'''
그 당시 브라질 해군은 파라나강의 리아추엘로를 봉쇄 중이었다. 파라나 강(Paraná 江)은 라플라타 강의 상류로 이 강을 통해 대서양으로 연결되는 파라과이의 젖줄이었고 리아추엘로는 입구에 해당하는 요충지였다. 1865년 6월 11일, 파라과이의 함대가 아침에 브라질 함대를 기습했지만 늦어져 실패하고 크게 패배해서 파라과이에게 숨구멍과도 같았던 라플라타 강 유역이 점령 당하면서 파라과이가 서서히 밀리기 시작했다. 이 리아추엘로 전투(Battle of the Riachuelo)가 실질적으로 이 전쟁의 승패를 결정지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파라과이인들은 만약 리아추엘로 전투에서 승리했다면 전쟁을 이기고 강국이 되어 파라과이의 현 국토가 2-3배는 넓어졌을 거라고 대체역사를 꿈꾸며 두고두고 이를 아쉬워한다.
1866년 5월 투유티 전투의 참패로 로페스는 패배를 직감하며 종전협정을 맺고자 온갖 외교적 수단을 써봤지만 3국의 분노를 잠재우는데는 역부족이었다. 로페스는 1866년 9월에 종전협상을 하고 파라과이의 패전을 인정하면서 종전후 자신도 대통령직에서 사퇴하는 형식의 종전평화협정에 사인하는거만 남았는데 협상직전 3국 동맹간의 비밀협상이 드러나면서 이걸 안 로페스는 바로 협상을 깨버리고[9] 아예 '''"조국과 같이 죽으리"'''라며 절대로 질 수 없다는 식의 대통령명을 내리기에 이르렀다.[10] 항복을 권하거나 전쟁을 피하려는 사람이 눈에 띄면 사형에 처하는 식이었다. 이러다보니 반발도 거세 내부에서 분열도 이뤄지고 만다. 아순시온 약탈 이후 세워진 임시정부는 아르헨티나로 망명했던 반 로페스 인사들이 돌아와서 세운 것이다. 이들도 전쟁 말기에 브라질 제국군 편에 가담했다.
어쨌든 거인같은 두 나라와 이들의 지원을 받는 신생 독립국. 3개 나라를 상대하기엔 여전히 작은 파라과이인지라 장기전이 불리할 수밖에 없는[11] 구도였다. 마지막에는 있는거 없는거 다 끌어 모아다가 혹독한 훈련을 시켜 무조건 전쟁터로 내모는 바람에 '''남성 인구의 90%'''가 사망하거나 노예로 끌려가는 대참사를 당한 바 있었다. 전후 남겨진 남성이 약 '''3만 명'''이었다고 한다. 전쟁 말기에는 10살 이하 소년병까지 훈련시키고, 설상가상으로 보급도 제대로 못한 채 전투복 바지만 입고 총만 쏘거나 그냥 칼만 가지고 우라돌격만 하던게 파라과이군의 참혹한 현실이었다.[12]
1868년 7월 25일에는 그동안 3국 동맹군을 가장 괴롭혀왔던 우마이타 요새가 함락되었다. 파라나 강에서 파라과이 강으로 들어가는 초입에 박힌 우마이타 요새는 함락당하면 바로 아순시온까지 뚫린다는 걸 의미하기 때문에 파라과이판 산해관이나 마찬가지였던 곳이었다. 우마이타 요새 안에 군수공장과 제철소를 박아놔서 무기 자체생산이 가능하도록 만들었고 병력도 1만이 넘어서 절대 함락이 불가능한 곳으로 여겨졌고, 그 명성이 대단하여 '남아메리카의 지브롤터'라는 별명까지 생길 정도였다. 그 명성답게 3국 동맹군이 파라과이 영토에 들어간 이후 3년 가까이 개고생을 하던 곳이었다. 브라질은 우마이타 요새 공성전에서 많은 피해를 입자 시간이 걸리더라도 우회하면서 아순시온과 우마이타간 연결고리를 끊으려 우마이타 근방 요충지를 하나하나 공격, 점령했으며 밤중을 틈타 요새 포위를 막기위해 파라과이군이 파라과이 강에 설치한 쇠사슬까지 돌파하여 마침내 우마이타를 포위하는데 성공했다.
요새가 함락 직전에 다달았을때 파울리노 알렌 장군이 로페스 대통령에게 퇴각을 요청했다가 옥쇄명령을 받고 좌절한 뒤 권총 자살을 시도했다가 실패했다. 유감스러운 건 그 권총자살시도 몇시간 후 퇴각명령이 떨어졌단 것이다.[13] 때마침 1868년에 내렸던 폭우는 파라과이 강의 수위를 높여서 브라질 제국 해군 군함들의 아순시온 진입에 엄청난 도움을 줬다.
결국 1869년 1월 1일 수도 아순시온이 점령[14] 당하고 만다. 로페스는 임시수도인 피리베부이로 달아나서 저항을 멈추지 않았지만 병력도 없고 무기나 지원도 물자도 없이 어려운 상황에 처했다.
한편 아순시온 점령 이후 3국 동맹의 주축인 브라질 제국군 내에서는 "어차피 로페스도 이제 별볼일 없어졌고 파라과이에는 우리말 잘듣는 임시정부도 세워졌으니 이쯤에서 끝내자. 전쟁의 처리는 파라과이 임시정부에게 맡기고 이들이 로페스를 막아내거나 몰아낼 수 있게 지원만 잘해주면 된다"는 의견을 보였지만 전쟁 초부터 로페스를 끝장내기로 결심했던 황제 페드루 2세는 오직 로페스의 파멸을 계속 내세우면서 총사령관을 갈아치웠고[15] 황제의 사위인 외 백작이 총사령관 자리에 오르며 다시 전쟁이 시작되었다.[16]
이 기간을 파라과이 역사학계에서는 언덕의 전투라고 부르고 있다. 이 언덕의 전투 기간중에 벌어진 1869년 8월 12일 피리베부이 전투와, 4일뒤인 8월 16일 아코스타 뉴 전투는 3국 동맹과 파라과이군 서로 정신상태가 맛이 갈대로 간 전투의 극치를 보여준다. 피리베부이 전투는 브라질 제국군의 엄청난 학살과 강간극이 벌어졌으며[17] , 아코스타 뉴 평원에서 파라과이군은 여기서 부상병과 노약자까지 동원하는것도 모자라서 '''9~15세 어린이, 청소년들에게 가짜 수염을 붙여가면서 6시간동안 전투를 벌였고,''' 항복을 하지만 브라질 제국군은 자비없이 전부 죽여버렸으며[18] , 이때 어린이 전사자만 '''2000명'''이 넘었다. 파라과이의 어린이날은 8월 16일 즉 이날 전투로 죽은 2000명의 어린이들을 기리자는 의미로 만들어진 것이다.
1870년 3월 1일, 파라과이 북부 세로 코라(Cerro Corá) 밀림에서 벌어진 마지막 전투에서 중상을 입고 겨우 포위망을 탈출한 후 같이 포위망을 탈출한 병사들이 지원병을 구하러 자리를 브라질 제국군 총사령관 주제 안토니우 코헤이아 다카마라(José Antônio Correia da Câmara) 공작이[19] 병사 몇 명만 데리고 로페스 앞에 나타나 "신변을 보장해 줄테니 항복해라"는 마지막 제안을 했지만, 로페스 대통령은 이전에 했던 대통령령과 똑같이 '''"조국과 같이 죽으리라!(¡Muero con mi patria!)"'''라 외치면서 카마라 공작에게 덤벼들었고 결국 바로 사살당한다. 전사할 당시 로페스의 나이, 만 42살이었다.[20] 마지막 전투가 벌어진 세로 코라에서 로페스에게 남은 부하는 400여 명 정도 밖에 없었고 그를 잡기 위해 온 브라질군은 4천명에 달했으니 사실상 죽기 직전 마지막 발버둥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최후까지 로페스 대통령과 함께 총을 쏴가며 항전하던 영부인은[21] 죽지는 않았지만 브라질 제국군에게 포로로 잡히고 이후 파라과이 임시정부와 브라질 제국이 열었던 전범재판에서 국외 추방 판결을 받고 프랑스 파리에서 쓸쓸히 죽었다.[22] 파라과이군 장교로 복무중인 로페스의 장남 후안 프란시스코 "판치토" 로페스도 이 마지막 전투에서 싸우다가 몰려 항복권유를 받았는데 "파라과이군 장교에게 항복이란 없다"며 저항하다 죽었다.[23] 전쟁이 끝나고 로페스와 맏아들의 시신은 영부인과 작은아들들이 직접 땅을 파서 묻었다.
4. 결과
4.1. 파라과이
이렇게 전쟁은 끝을 맺을 수 있었다. 결과는 브라질 제국과 아르헨티나에게 영토를 왕창 빼앗기고 약 6년간 이 두 국가의 통치아래 임시정부 체제로 있었다. 인구는 53만명에서 22만명으로 엄청나게 감소하였으며, 이 여파로 경제도 붕괴되고 그와중에 일부 극소수가 경제를 휘어잡아 중남미에서 넘치는 빈부격차 문제가 여기에서도 생겨나 내부 분열 및 갈등이 커졌다. 이 상처는 150년이 지난 지금도 회복되지 못하고 있다.
특히 인구피해가 극심했다. 전후 파라과이의 성인 남성 인구는 앞에서 나온대로 3만명이고 거의 모두 오랜 전쟁으로 앙상한 뼈와 총상, 자상만 남은 해골이나 마찬가지였으며[24] 남녀 성비 '''1:9'''라는 극악의 비율이 완성되어[25] 그나마도 남은 남자는 생식력이 없는 아주 어린 아이나 아주 늙은 노인뿐이고 성인이나 청소년 '''남자는 찾아보이기 어려운 전설상의 아마존 여인국이나 마찬가지인 전세계사 최악의 성비 불균형'''으로 기록되어있다. 이 전쟁의 후유증으로 강간 등 성범죄나 사생아 문제가 컸지만 도저히 해결 방법이 없고 어떻게든 인구를 늘려야 해서 정부는 '''아예 손을 놓아버렸다.'''
이 극악 여초사회화로 비극적인 관습들이 탄생하고 만다. 전쟁 이후 주둔한 브라질 제국군, 아르헨티나군에게 강간을 당한뒤 임신한 여자들은 아이가 태어나서 그 아이가 검은 피부를 갖고 있으면[26] 바로 죽여버리는 관습을 만들었고[27] 성문화의 타락과 남자들의 성폭행, 성적 학대에 관대해지게 된다.[28] 전쟁 이전 체스를 두고 바이올린, 플룻 연주와 시 낭송, 문학 토론이 있었던 아순시온 거리는 전쟁 이후 끔찍한 강간이 벌어지는 지옥으로 변했고, 대낮 광장과 길거리에서 남자가 여자를 대놓고 강간해도 이게 성범죄냐, 매춘이냐, 그냥 서로 즐긴 화간인거냐 따질 수도 없으며 남자들은 이걸 파라과이 남자의 특권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여자들도 어쩔 수 없이 체념한 채 받아들였으며, 일부다처제는 전쟁 이후 무려 80년이 넘어가면서 1950년대까지 이어졌다가 폐지되었지만, 현재도 이런 남성 우월주의적 관념들은 전쟁 이후 파라과이에 뿌리 깊게 남아있다.
파라과이로서는 남자가 너무 없어서 다급해져 차별받던 인디오, 즉 원주민과 흑인노예들까지도[29] 다시 파라과이 국민으로 우대하고 끌어들여 혼혈이라도 이루게 했고, 스페인 식민지배에서 독립한 이후에 이들에게 행하던 차별 탄압 정책도 폐지했다. 심지어 파라과이 전후 복구작업에 돈벌러 들어온 외국인 노동자들에게까지도[30] 본국으로 돌아가지 말고 국적을 받고 남아서 제발 파라과이 국민으로 살아달라고 요청했을 정도로 전쟁으로 줄어든 인구 회복이 다급했다. 아무튼 이러나보니, 파라과이는 중남미에서 원주민, 흑인들에게 꽤 관대하게 대하고 혼혈도 잘 이뤄졌다.
로페스 대통령은 파라과이 민족주의, 침략자의 압제에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싸운 저항정신, 애국심의 상징으로 현재도 파라과이에서 국부로 추앙받고있다.[31] 한편으로는 자신의 욕심으로 나라를 파멸까지 끌고간 미치광이 독재자라는 부정적 평가도 있지만, 이건 시대와 시국의 변화와 평가하는 국가가 어디냐에 따라 크게 변해서.. 영부인 엘리사 린치 여사도 파라과이에서는 파라과이의 여왕, 여걸, 국모로 추앙받는다.
그나마 파라과이는 이 전쟁이 끝나고 60여년이 지나서 볼리비아와 벌인 차코 전쟁에서 이겨 3국 동맹 전쟁에서 잃은 땅만큼은 아니라도 땅을 다시 넓히는데 성공한다.
파라과이는 이 전쟁의 한이 남아서 아직도 해군과 해병대, 해군 항공대를 운용하고 있다.
4.2. 브라질 제국
승자인 3국 동맹도 인적 피해는 적지 않았다. 가장 많은 병력을 파병한 브라질은 15만에 달하는 대군을 파병해 1/3을 잃었다.아르헨티나도 2만이 넘는 전사자 및 사상자는 적지 않았다. 우루과이는 전사자가 6천명 수준이지만 이들도 당시 인구 40만도 안되었던 걸 생각하면 피해가 적지 않았다. 그래도, 이들은 승자로서 파라과이로부터 땅을 얻어내고 보상금이라면 파라과이로부터 이거저거 개발권이나 여러 모로 뜯어갔다.
브라질 제국 황실은 수도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종전선언과 승전기념파티를 열었고 궁전에서 피아노 18대와 650명의 악기연주자를 동원하며 초호화 파티로 만들었다.
문제는 이 전쟁이 브라질한테도 하나의 비극을 만들었으니 군부의 부상이다. 전쟁 직전 1500명에 불과하던 브라질 제국군 장교가 전쟁이 끝날때 만 명을 넘겼고, 전쟁 기간동안 숱한 전투 무용담과 전쟁 영웅들을 탄생시켰으며 이들이 대중들에게 인기를 얻고 하나의 정치세력이 되고 말았다.[32] 이후 이 군부는 "파라과이와 로페즈 대통령을 지나치게 몰아붙였다"는 식의 비판을 페드루 2세 황제에게[33] 대놓고 해낼 정도가 되었고. 때마침 전쟁에 참여하고 출세한 참전용사 출신 흑인들이 주도한 1888년 노예 해방과[34] 1889년 쿠데타로 페드루 2세를 축출하고 브라질 연방 공화국으로 변한다. 그리고 이후에도 쿠데타와 막후 정치 조정 등으로 브라질 정치계에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며 "국가 안의 또다른 국가"라는 별명을 얻었다.
4.3. 아르헨티나
원래 아르헨티나는 파라과이를 자국의 반란자들이 들어가서 세운 미수복된 영토라는 생각이 박혀있어 이 기회에 파라과이를 아예 멸망시켜서 땅을 브라질과 나눠 가지려고 했다가 실패했다.[35] 브라질이 파라과이를 아예 멸망시킬 바에는 차라리 영토만 강제할양하고 완충국으로 남기는 선에서 처벌하자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쟁 이전 파라과이 영토를 일부 뜯어내서 갖는데는 성공. 그 이후 아르헨티나는 브라질에 이어 남미 제2의 경제대국으로 올라설 기반을 마련했다. 또한 아르헨티나가 백인국가라고자처할 근거도 마련(?)되었는데 이는 3국 동맹전쟁 이전까지 아르헨티나에서도 흑인 인구가 상당한 비율을 차지했지만 흑인남성들이 3국 동맹 전쟁 과정에서 병사로 많이 끌려나가 죽었기 때문에 흑인집단내에서 엄청난 여초현상을 초래했고, 동 시기에 많은 백인들이 아르헨티나로 쏟아져오면서 결국 흑인 여성들은 백인남자랑 결혼해야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세대를 거듭하며 백인과의 혼혈로 흑백혼혈인들의 외형이 더더욱 백인에 가까워지면서 20세기 들어서는 아르헨티나에서 흑인들을 보기 쉽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2007년 아르헨티나 대통령 영부인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가 프란시스코 솔라노 로페스를 칭송하고 삼국 동맹을 남미 제국주의, 라틴 아메리카에 대한 배신이라고 폄하하며 삼국 동맹이 아닌 삼국 배신이라 불러야 한다는 연설을 했었다. 또한 이때 아르헨티나 육군 한 포병부대 이름을 "프란시스코 솔라노 로페스 부대"로 바꿔서 논란이 되었다. 이에 아르헨티나 언론 라 나시온의 사주가 격분해서 아예 자기가 사설로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를 비판하고 프란시스코 솔라노 로페스를 남미의 히틀러라고 맹비난을 퍼부었다.[36] 반면 파라과이 역사학계, 지식인들과 삼국 동맹국의 좌파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용기있는 발언으로 칭송을 듣기도.
4.4. 우루과이
전쟁이전에는 양쪽 국가의 속국 취급을 받아 이리치이고 저리치이고 내부에서도 친 아르헨티나파와 친 브라질파 세력들의 싸움으로 시끄러웠는데 전쟁 이후 3국 동맹의 일원으로 인정받아 아르헨티나, 브라질의 내정간섭이 사라졌다.
[1] 전쟁의 당사국인 파라과이에서는 '대전쟁(Guerra Grande)'이라고도 한다.[2] 로페스 정부의 전복과 신정부 수립을 위해 로페스에 반대하여 외국으로 망명한 파라과이인들을 모아 편성한 부대로 아르헨티나군 소속으로 활동했다. 전쟁 후반에는 생포한 파라과이군 포로들을 강제로 부대에 집어넣기도 했다.[3] 영상 도중 투유티 전투를 3국동맹의 승리가 아닌 파라과이의 승리로 기술해놓은 오류가 있다.[4] 건국 당시 파라과이는 집정관제였다. 대통령제로 바뀐건 카를로스 안토니오 로페스부터.[5] 대통령 취임 당시 파라과이 독립선언서에 적혀있는 세습금지 위반논란이 있었다. 이걸 임기를 10년만 한다는걸로 반대를 무마했다.[출처] MANUEL D'HISTOIRE CRITIQUE, Le Monde diplomatique[6] 카를로스 안토니오 로페스 초대 대통령은 죽기 직전 아들에게 "파라과이 공화국은 아직도 해결못한 문제가 많다. 그러니 칼보다는 펜으로 문제를 해결해라. 특히 브라질 관련으로는..." 이란 유언을 남겼다.[7] 이집트산 목화는 고대부터 당시까지 최상등품으로 평가받았으며, 현재도 서구 브랜드 업계에서는 이집트산 면(Egyptian Cotton)을 최고로 친다.[8] 흑인 노예와 원주민들을 대규모로 징집했다. 제대하면 노예 신분 해방과 차별금지, 출세를 보장한다는 약속도 함께.[9] 3국 동맹 비밀 협상내용이 기가막히다. 1)3국 동맹 구성원중 혼자 파라과이와 단독 강화로 배신때리기 금지, 2)로페스 대통령, 파라과이 정부, 군부 핵심 인사는 무조건 사형 3)파라과이 독립은 보증 4)막대한 전쟁 배상금과 영토 분할로 파라과이 뜯어먹자(....). 파라과이 자체를 박살내려고 서로 짜둔건데 파라과이에서 빡치지 않는 게 이상하다. 이거는 브라질 제국과 페드루 2세의 강짜나 마찬가지다.[10] 이후 바로 벌어진 쿠루파이티 전투에서 파라과이 군은 3국 동맹군의 멱을 따고 족을 쳐놨다. 평화협상 당시 파라과이 군이 재빨리 재정비를 해놔서 가능했던 승리.(또한 이 당시 바톨로메 미트레 아르헨티나 대통령이 짠 작전은 쿠루파이티 포대의 화력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막무가내 어택땅이었다.)[11] 원래 약소국들이 전쟁을 벌일 경우 속전속결로 끝을 내려 하는 경향이 크다. 북한의 전쟁교리도 마찬가지로, '''무조건 초반에 끝내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잡고 있다. 장기전으로 갔다간 아무리 중국 인민해방군이나 러시아 군대의 도움을 받더라도 미군에 상대가 안 되기 때문이다. 조금 경우는 다르지만 스타크래프트에서도 왜 초반 러시가 주요 전술 중 하나인지 생각해 보면 답이 나온다.[12] 남미에서 유일하게 시행하던 국민 징병제와 전쟁당시 남미 최고의 경제력으로 끌어올린 정예병사 수준과 양질의 무기, 보급으로 3국 동맹을 밀어붙이던것도 어디까지나 초반 얘기다. 중반부터 파라과이군은 상당수 병사들이 전투화를 못신고 맨발로 다녔으며, 무장도 머스킷 위주였다. 전투복도 다 헤져서 이리 찢기고 기워서 누더기가 된걸 입거나 막판에는 아예 바지만 입거나 다 찢긴걸 허리에 두른 참담한 전투복장이 나온다. 또한 하도 남자란 남자는 다 징병하는 통에 일손도 부족해져 식량 생산, 무기 생산에도 차질이 생겼다. 남은 여자들이 농사를 짓고 공장에서 탄갈고 옷만들면 되겠지만 후반에는 여자들도 죄다 징집하면서 보급이 엉망이 된다.[13] 그리고 1868년 말 반역스캔들에 휘말려 사형당한다. 이때 3년 개고생 트라우마로 3국 동맹군은 전후 평화 조약에다 우마이타 요새 완전 철거와(이미 1865년 3국 동맹 비밀 조약에 우마이타 요새 철거 조항이 들어가 있었다) 그 자리에 요새 등 군사시설 재건립 영구금지 조항을 넣어 파라과이 정부에게 사인할 걸 요구했고 파라과이 정부는 어쩔 수 없이 들어줘야 했다. 현재 우마이타 요새 자리에는 마을이 들어서 있고 그 마을 곳곳에는 우마이타 요새 시절 지어진 교회 잔해와 무기고, 제철소 잔해나 건물이 남아 있어 관광지로 쓰이고 있다. 파라과이 국민들에게 우마이타 요새는 불굴의 의지를 상징하는 곳이다.[14] 이걸 스페인어 : Saqueo de Asunción, 영어 : Sacking of Asuncion(아순시온 약탈)이라고 한다. 이 당시 아순시온 시가지 전체가 방화로 불타오르고 대통령궁이 다 털리고 파라과이 국립 문서 기록 보관소도 털려서 파라과이 역사 자료들과 유물들을 전부 브라질 제국군이 가져가버려 브라질 리우 데 자네이루 국립 도서관 지하에 150년 넘게 박혀있다. 전쟁 100년후 몇몇 유물들은 돌려주기는 했지만 중요 문서들은 안돌려줘서 파라과이 역사학계에서는 이 약탈 때문에 스페인 식민지 이전, 스페인 식민지 시절, 예수회, 파라과이 건국사, 전쟁 이전 파라과이 대통령들과 파라과이 최대 전성기 시절, 그리고 파라과이 전쟁 관련 연구에 상당한 차질을 빚고 있다. 다행히도 일부 기록물들은 빼내 오는데 성공했지만 이거마저도 피리베부이 전투에서 불타 없어졌다.[15] 엄밀히 말하자면 경질은 아니고 황제와의 의견충돌과 계속되는 전쟁에 지친 총사령관 카시아스 후작이 스스로 사임했다. 황제는 카시아스 후작의 사임에 실망했지만 어찌됐든 전쟁 수행에 있어서 카시아스 후작의 역할이 지대했으니 그 공로를 치하하여 공작 작위를 내렸다.[16] 프랑스 출신 외 백작은 모로코, 알제리 원정 참전 경험을 갖고있었다. 단 그 경험과는 상관없이 브라질 제국군 내에서는 낙하산, 황제빽으로 폄하받았고 위에서는 장인인 황제의 압박, 아래서는 제국군 병사와 휘하 장교의 저평가와 디스를 당하며 항상 스트레스에 쌓이다 공적에 대한 욕심으로 온갖 무리수를 저지른다.[17] 여기에 질린 아르헨티나 군 총사령관은 이후 전투 참여를 포기했다.[18] 전투가 끝나고 파라과이군 소년병들의 어머니들이 아들의 시신을 수습하거나 혹은 생존자들을 찾고 있을 때 브라질 제국군이 '''평원에 불을 질러 그 어머니들까지 죽고말았다.''' 이때 방화 명령을 내린 자는 브라질 페드루 2세의 사위 오를레앙공 가스통 백작. 4일전 피리베부이 전투에서 마누엘 메나 바레토 장군이 전사하자 이에 대한 복수로 피리베부이 병원과 마을의 방화, 아코스타 뉴 전투의 일방적 학살과 방화를 명령한 것이었다. 이후 이 때의 야만적 학살 명령들은 브라질에서도 죽을때까지 비난 받았다. 현재 브라질에서는 이걸 "파라과이군이 연기를 피우면서 불이 일어난걸로 위장시켜 생존자를 구출하려다 불이 번져서 피해가 커졌으니 가스통 백작은 잘못이 없고 파라과이군의 자업자득이다"라는 식으로 가르치고 있다.[19] 1869년까지 카시아스 공작이었다가 카시아스 공작이 지쳤다는 이유로 그만뒀고, 바로 그 자리를 외 백작이 이어받았다가 피리베부이, 아코스타 뉴 전투에서의 학살 명령으로 인한 제국군 내부, 본국에서의 여론 악화에 따른 비난에 병까지 겹쳐 1년도 못 채우고 1870년 초 총사령관직에서 물러났다.[20] 로페스야 3국 동맹 조약의 내용을 알고있는 데다 이미 파라과이에는 3국 동맹 말을 듣는 괴뢰정부(파라과이 임시정부라고 하지만 로페스 기준으로는 괴뢰)도 만들어져서 자기를 죽이려는데 당연히 제국군 총사령관 말을 믿을 리가 없으니 그냥 죽으려고 달려드는 것 밖에 선택지가 없었다. 총사령관 카마라 공작은 로페스를 죽일 생각은 없고 그냥 생포할 생각으로 부하 몇 명만 데리고 간건데 로페스가 항복을 거부하자 무장해제 명령을 내렸는데 로페스가 칼을 들고 달려드니까 부하들이 총을 쏴서 로페스가 죽은 것이었다. 근데 저때 총사령관이 살리긴 했어도 로페스 반대파가 세운 임시 정부 혹은 로페스를 끝장내고 싶어했던 페드루 2세가 사형에 처할 확률은 100%다. 어찌 카마라 공작 말처럼 살아남은 후 기적적으로 대통령직, 행정부 유지는 가능하다 쳐도 대전쟁에서 패하고 권력도 잃어버린 독재자의 신세는 어차피 파멸 뿐이었으니 로페스 입장에서는 그저 명예로운 죽음을 택한 사실상의 자살.[21] 엘리사 린치(Eliza Lynch, 1835~1886). 아일랜드인으로 아일랜드 대기근 당시 프랑스로 이민해서 프랑스 파리에서 살다가 프랑스 군의관과 결혼하고 한번 이혼한뒤 이 당시 프랑스 주재 파라과이 대사로 부임한 프란시스코 솔라노 로페스와 만나 재혼하고 파라과이로 들어왔으며, 이후 파라과이에 프랑스식 요리, 패션, 놀이, 문학, 음악, 미술 등을 들여와서 수도 아순시온의 문화를 크게 활성화시키고(이 시기 아순시온 거리에서는 나이든 중년 이상은 체스를 두고, 젊은이들은 유럽에서 들여온 시와 소설을 읽으면서 토론하는 풍경이 흔했다) 여성 학교도 세워 파라과이 여성의 교육에도 큰 공헌을 한걸로 역사에 기록되어있다. 이후 3국 동맹 전쟁 당시에는 여자들로 이뤄진 "Las Residentas" 라는 집단을 만들어 후방에서 군대를 지원했으며 때때로 아예 최전방에서 파라과이군을 직접 지휘하고 여러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현대 파라과이 역사에서는 그녀를 파라과이의 여걸, 국모로 기리고 있지만 다른 남미 역사에서는 좋게 봐야 파라과이의 에바 페론 정도고, 나쁘게 보는 경우는 '''파라과이의 대마녀, 탐욕의 창녀'''라는 평가를 내리고 있다. 남미 역사토론에서 파라과이 전쟁을 주제로 할 경우 100% 키배와 병림픽의 헬게이트가 열리는 인물. [22] 페드루 2세, 브라질 제국군, 파라과이 임시정부는 린치 여사도 사형에 처하려고 했지만 린치 여사는 영국 시민권자라는걸 내세웠기 때문에 국외추방으로 그쳤다. 이후에 린치 여사는 국외 추방명령 항소, 재산 반환청구 소송, 회고록 출판 때문에 잠깐동안 파라과이에 들른 적은 있다.[23] 영부인 린치는 아들이 총에 맞아 죽는걸 바로 앞에서 봤고 아들의 시신을 껴안고 통곡하다가 제국군들에게 '''"이것이 당신들이 말한 문명인가?"'''라고 항의했었다. 3국 동맹은 전쟁의 명분으로 "폭군의 압제로부터 파라과이를 해방시키고, 자유와 문명을 이곳에 전파한다"라고 선전했었다.[24] 정글에서는 야생 재규어의 좋은 먹이감이 되었다. 지못미.[25] 지역에 따라 '''1:25'''로 비율이 더 심한 곳도 있었다고 한다.[26] 브라질 제국군은 전쟁에서 이겨먹으려고 흑인 노예들을 전쟁이 끝나면 노예 해방에 출세도 시켜주겠다는 약속을 하며 대거 입대시킨다. 완전한 해방은 약 20년 뒤에야 이루어졌지만 적어도 이 당시 참여한 흑인 병사들은 해방이 되었고 아주 약간이지만 출세도 했으니 어쨌든 약속은 지켰다. 아르헨티나도 흑인 병사가 있었지만 여기는 아르헨티나 문서를 보듯이 전쟁에서 가장 생존률이 희박한데만 보내서 살아나오기가 너무 힘들었다.[27] 물론 인구 증가에 눈 돌아간 파라과이 정부가 허용할 리가 없고 걸리면 처벌이다.[28] 반대로 젊은 여자나 혼기 지난 여자들이 어린 소년을 납치하고 역강간을 벌이는 경우도 가끔 나왔다.[29] 차별을 증오했던 집정관 프란시아 박사가 통곡할 내용인데 로페스 대통령 체제시절에는 차별정책이 꽤 있었다. 이 차별정책에 이를갈던 인디오와 흑인 노예들은 3국 동맹군에게 아주 협조를 잘해줬다.[30] 주로 유럽인, 아랍인, 인도인.[31] 파라과이 과라니 지폐에 아버지 로페스의 초상과 로페스 자신의 초상화가 그려져있고. 아순시온 전쟁 박물관 입구에는 "국가와 함께 죽으리라" 는 말이 크게 새겨져있다. 박물관 안에는 로페스 대통령과 린치 여사의 시신이 안치된 관이 박물관 한복판에 위치해있다. 또한 로페스가 전사한 3월 1일은 파라과이 독립 기념일 다음으로 중요한 국경일로 '''"국가 영웅절"''' 이라는 이름이 붙어있다. 이 전쟁 박물관에는 아코스타 뉴 전투에서 전사한 "무명 소년 영웅의 묘"도 있다.[32] 1872년 이들을 중심으로한 공화당이 창당.[33] 로페스가 빡친 3국 동맹의 비밀 협상내용 상당수가 황제의 의도가 들어가있었다. 황제는 로페스가 자기 명예를 건드렸다고 생각해서 심기가 너무 불편해 로페스를 죽여버리고 싶어했다.[34] 물론 기득권 통제를 위한 페드루 2세의 의도가 있었다.[35] 3국 동맹 협정 조약에는 파라과이의 독립을 보증한다고 써있었지만, 일단 전쟁에서 이기고 보자는 식으로 그 당시에만 동의하듯이 서명한거고, 전쟁 이후에 태도를 바꿔 파라과이를 흡수할 생각이었다.[36] 라 나시온의 사주는 삼국 동맹 전쟁 당시 아르헨티나 대통령인 바톨로메 미트레의 후손이고 바톨로메 미트레는 라 나시온의 창립자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