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NN 슈퍼 타임

 


방영 기간
1984년 10월 1일 - 1997년 3월 28일'''(13년, 4497회)'''
방영 시간
월-금 18:00 ~ 19:00
토 18:00 ~ 18:30
일 17:30 ~ 18:00
역대 진행자
'''이츠미 마사타카, 코다 챠밍, 안도 유코, 노마 슈헤이''' 外
1. 개요
2. 연혁
2.1. 1984년 ~ 1988년: 마사타카-챠밍 체제
2.2. 1989년 ~ 1991년: 아키오/유지-유코 체제
2.3. 1992년 ~ 1994년: 시게루-유코 체제
2.4. 1994년 ~ 1997년: 시게루-카오리 체제
3. 상세
4. 진행자
5. 타이틀 및 그래픽
6. 기타
7. 종영, 그 이후


1. 개요


후지 테레비의 前 저녁뉴스 프로그램. '''일본 저녁뉴스 역사에서 빠뜨릴 수 없는 전설적인 프로그램'''으로서 일본의 뉴스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2. 연혁



  • 'FNN 뉴스 레포트 6:00'이 전신. 전국 저녁뉴스였던 6:00과 지역 저녁뉴스(간토의 경우 FNN 뉴스 레포트 6:30)를 통합해 1984년 10월 1일 첫 방송하였으며, 전국 뉴스와 로컬 뉴스가 통합되어 캐스터가 뉴스를 전하는 형식의 종합뉴스는 이 슈퍼 타임이 최초이다.
  • 1985년 4월 6일부터 토요판이 방송되기 시작했다.
  • 슈퍼 타임 시절에는 후속 프로그램인 슈퍼 뉴스 시절과는 달리 시간대의 변동은 없었으나, 간토 지방에서 예고편 격으로 지역 뉴스 프로그램 '슈퍼 타임 간토'를 1993년부터 1994년까지 방영한 적이 있었다.

2.1. 1984년 ~ 1988년: 마사타카-챠밍 체제


'''전설의 시작.''' 구성은 크게 오프닝 - 헤드라인 - 전국뉴스 - 로컬뉴스와 스포츠뉴스, 날씨예보로 구성되었으며, 1985년 4월 1일부터 주말판이 방송되기 시작했다. 1987년 4월 1일부터 9월 30일까지는 금요일 보조 진행자를 월~목 보조 진행자와 달리 했는데, 이 때 금요일 보조 진행자가 노마 슈헤이. 그러나 10월 1일부터 이듬해 3월 31일까지는 금요일 보조 진행자와 토, 일 보조 진행자가 안도 유코로 동일했다.

2.2. 1989년 ~ 1991년: 아키오/유지-유코 체제


1988년 4월 1일부로 코다 챠밍이 하차하고, 금토일 보조 진행자였던 안도 유코는 월~금 보조 진행자로 이동한다. 1989년 4월 2일부로 이츠미 마사타카가 하차하고 후임 앵커맨으로 '''럭비선수 출신'''의 우에다 아키오가 발탁되었다. 우에다는 메인 앵커로서는 2년만 진행했고, 이후 스포츠뉴스에 전념하게 되면서 구로이와 유지[1]에게 메인 앵커직을 넘긴다.

2.3. 1992년 ~ 1994년: 시게루-유코 체제


구로이와 유지가 1992년 3월 31일부로 하차하고, 츠유키 시게루가 그 뒤를 이어 종영할 때까지 진행했다.
1993년 가을, 시그널 음악이 어레인지됐다.
다만 이와 별개로 이 시기 '헤이세이 교육 테레비'가 25시간동안 방송되면서 매년 한 번씩은 방영되지 않았다.[2] 참고로 1992년과 1993년의 헤이세이 교육 테레비의 진행자가 이츠미 마사타카. 하지만 1994년 갑작스럽게 사망하여 그 해의 교육 테레비는 비트 타케시가 단독으로 진행했다.

2.4. 1994년 ~ 1997년: 시게루-카오리 체제


1994년 3월 31일부로 안도 유코는 동사의 마감뉴스인 뉴스 재팬으로 자리를 옮겨갔고, 후임 보조 진행자로 마츠야마 카오리가 발탁되었다. 동시에 10주년을 맞아 스튜디오를 새단장했고, 10년 동안 사용한 헤드라인의 배경음악도 교체됐다. 이 때 스포츠 뉴스 캐스터나 기상 캐스터는 많이 바뀌었지만 메인 진행자는 대체로 종영시까지 유지되었다.
후지 테레비 본사 이전에 맞추어 개편이 결정되면서 4497회째인 1997년 3월 30일을 끝으로 종영되었다. 일설에 의하면 보도한 기사 수는 총 6만 개라고 전한다. 카오리는 동사의 마감뉴스인 뉴스 JAPAN WEEKEND 캐스터로 이동하였다.

3. 상세


상술했듯 일본 최초로 예전에는 따로 놀았던 전국 뉴스와 지역 뉴스가 통합되었던 뉴스이다.[3] 이전에는 SBS 8 뉴스처럼 6시부터 30분 동안 전국에 같은 뉴스를 송출하고, 30분 동안은 각 지역 방송사마다 따로 뉴스를 편성했다. 하지만 슈퍼 타임 이후로는 각 지역 방송사도 1시간 동안 뉴스를 진행할 수 있게 되었다. 예컨대 6시에 간토를 가청권으로 하는 FNN의 키국인 CX에서는 FNN 슈퍼 타임이 송출되고, 홋카이도를 가청권으로 하는 FNN 가입국인 uhb에서는 이브닝 뉴스[4]로 송출되는 식. 즉 각 지방의 FNN 계열 방송사마다 저녁뉴스 타이틀이 다 달랐으며, 진행하는 앵커도 제각기 달랐다. 물론 포맷과 시간대를 공유하였고, 90년대에 들어서는 타이틀과 그래픽도 '방송사+슈퍼 타임'으로 거의 통일되었기에[5] 키국의 슈퍼 타임과 다른 것은 진행자와 보도 소식 뿐.
헤드라인은 첫 2-3개 소식은 키국의 앵커들이 전하다가, 지역국 앵커들이 각 지역의 주요뉴스 2-3개를 전한 것으로 보인다.(일본어 위키백과) 지역국의 앵커가 오프닝을 진행한 후 키국의 앵커들이 헤드라인을 소개하다가 곧바로 지역국의 앵커들이 각 지역의 주요뉴스를 소개하는 방식. 때문에 각 지역마다 헤드라인이 처음에는 일치하는 듯 보이지만 나중에 보면 엄연히 다른, 후지 테레비 계열 저녁뉴스만의 특징이었다. 이는 FNN 슈퍼 뉴스 때 2개의 소식을 키국에서 전하고 1개의 소식은 지역국이 전하는 방식으로 계승된다.[6]
또 희한하게도 뉴스 진행자가 '''서서''' 뉴스를 진행한 프로그램이기도 하다. 물론 스포츠 코너에서는 다른 아나운서가 진행하니 그 때는 진행자가 쉴 수 있었을지도(...). 서서 뉴스를 진행하는 뉴스 역시 슈퍼 타임이 최초이다. 이후 후지 테레비의 저녁뉴스는 앵커들이 서서 진행하는 유구한 전통이 한동안 계속 이어졌다. 후지 테레비 저녁뉴스의 앵커들이 앉아서 진행하게 된 것은 프라임 뉴스 이브닝이 편성된 이후부터이다.[7] 참고로 대한민국에서도 서서 진행하는 뉴스 프로그램이 90년대에 있었으니, 다름아닌 모닝와이드(...).[8]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이 뉴스가 성공을 거둔 이유는 '''뉴스 연성화'''에 있었다. 한국과 미국에서는 뉴스 연성화를 하면 망하는 데 비해 일본의 뉴스는 유독 연성화에 관대한데, 일본에서 뉴스는 '어떤 것을 전하느냐'보다 '어떻게 전하느냐'가 중요하게 여겨지기 때문에 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슈퍼 타임은 포맷이나 진행 등에 있어서 사람들에게 친숙한 형식으로 뉴스를 전하는 데 온 힘을 들였고 지금도 뉴스 연성화의 성공 사례로 꼽히고 있다. 헤드라인을 전할 때 한 글자 한 글자 씩 기사 제목이 나오는 것부터, 주요 뉴스 이후 직접 어촌에서 물고기를 잡아본다던지(...) 하는 것들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선거 및 올림픽 특집 방송도 탁월했다. '국민의 선택 특집 SBS 8 뉴스'나 '2018 우리의 선택 특집 정치부회의'처럼 간단하게 제목을 정하는 것이 아니고, 각 행사나 선거마다 임의로 캐치프레이즈를 정해 그것을 주제와 제목으로 하여 뉴스를 진행한다. 선거나 행사가 없더라도 자체적으로 특집 기획을 종종 방송하기도 했다.

4. 진행자


  • 이츠미 마사타카: 슈퍼 타임의 전신이었던 뉴스 레포트 시절부터 1989년까지 앵커를 맡았다. 1988년 이츠미와 함께 진행하던 코다 챠밍이 유학으로 하차하자, 안도 유코를 보조 진행자로 추천하였고 약 1년간 그녀와 콤비를 이루기도 했다. 프리랜서 선언 후 하차하였으며, 후임은 우에다 아키오. 1993년 12월 25일 암으로 인해 아직 한창인 48세의 나이로 사망하였으며, 안도 유코가 그의 부고 소식을 다름아닌 슈퍼 타임에서 보도하는 도중에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진다.
  • 코다 챠밍: 역시 첫 방송부터 1987년까지 보조 진행자였다. 이츠미와 함께 진행하면서 인기를 얻었으며, 하버드 대학교 케네디 스쿨에 유학을 가게 되어 하차한다. 후임은 그 안도 유코. 이후 저널리스트로 전업. 19대 참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비례대표로 나왔으나 낙선한 바 있다.
  • 안도 유코: 8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후지 테레비의 저녁을 책임졌던 기자. 1987년부터 1994년까지 보조 진행하였으며, 1994년부터 2000년까지 후지 테레비의 마감뉴스 뉴스 재팬[9]의 진행을 맡다가 슈퍼 타임의 후신인 슈퍼 뉴스로 다시 돌아와 메인 앵커로서 2015년 최종회까지 진행하였다.[10] 슈퍼 타임 종영 이후에는 뉴스 프로그램보다는 대담 프로그램에 모습을 보이는 중이다. 가히 후지의 백지연이라고 할 수 있을 듯. 사실 1987년부터 1988년까지는 조치대학 학생이었다. 즉 학업과 뉴스 진행을 병행한 것.[11]
  • 우에다 아키오: 럭비선수 출신으로서는 이례적으로 메인뉴스 진행자가 되었다. 하지만 2년 후에는 다시 스포츠뉴스에 전념하는 모습을 보였으며, 2012년 정년퇴직 후 대학으로 돌아갔다.
  • 노마 슈헤이: 1987년 진행하였으나, 얼마 안 가 낮 뉴스 프로그램인 FNN 스피크[12]로 옮겨가 1992년까지 진행했다.

5. 타이틀 및 그래픽


  • 1984년 10월 ~ 1988년 3월
금색의 공간이 유리 조각처럼 흩어져 'FNN'이라는 글자를 남기고 축소되면서 빛과 함께 사라지고, 왼쪽에서 슈퍼, 오른쪽에서 타임이 날아와 제목이 완성된다. 제목 완성 후 어안 렌즈가 나타나면서, 주위에 냉기 같은 효과가 회전한다.
ED는 슈퍼 타임 로고가 위에서 나타나 오른쪽 하단에 축소한다. 제목의 로고는 슈퍼가 파랑색, 타임이 하늘색.
  • 1988년 4월 ~ 1989년 9월
초대 오프닝을 어레인지하였다. FNN이 어안 렌즈로 축소하고, 슈퍼와 타임이 좌우에서 나오는 것이다.
ED는 제목이 좌우에서 나타나 오른쪽 하단으로 축소한 뒤 END가 표시되었다.[13]
원래 에코가 적었지만, 후에 에코가 강한 것으로 바뀌었다.
  • 1989년 10월 ~ 1993년 3월
이 때부터 제목에 FNN이 붙었다. OP는 아래에서 나타나 약간 비스듬하게 되면 FNN이 나와 로켓 발사처럼 왼쪽 구석으로 향해 사라져 가는 애니메이션.[14]
ED는 날씨 카메라 혹은 뉴스 영상을 배경으로 슈퍼 타임이 축소 + FNN이 왼쪽에서 등장, 축소와 동시에 끝표시가 나오는 것이다.(주말로만 확인)[15]
제목의 색은 FNN이 빨간색, 슈퍼 타임이 오렌지 색.
  • 1993년 4월 ~ 1997년 3월
제목을 형상하고 확대한 뒤 제공 스폰서가 나오는 것.
1994년 10월에 주요뉴스 자막, BGM이 변경되었다.
1996년 10월에 주요뉴스를 폐지하고, 오프닝이 5초로 단축되었다.
1997년 3월 10일부터 30일까지는 CG의 출현 방법이 컷 인-컷 아웃으로 변경되고, 제목 주위에 있던 테두리도 없어졌다.

6. 기타


  • 오프닝 시그널이 평온한 저녁 분위기에 어울리는 곡인 데 반해, 90년대 초중반까지의 주요뉴스 시그널은 뭔가 음산하고, 특히 아이캐치 시그널이 상당히 뿜긴다. (쿵)라파미파(쿵)라파미파시!(...).[16] 훗날 후신인 슈퍼 뉴스에서는 아이캐치 시그널 대신 오프닝 시그널에 공을 들이게 된다.

7. 종영, 그 이후


1997년 종영 이후, 방영 시간을 5분 앞당긴 '''FNN 뉴스 555 더 휴먼(FNNニュース555 ザ・ヒューマン)[17]'''이 편성되었으나, 기존의 포맷을 모조리 바꾸어 시청자들에게 외면받았다. 슈퍼 타임과는 달리 더 휴먼은 뉴스 연성화 실패의 대표적인 예. 첫 방송 당시 앵커들이 다음 순서를 소개하려 했는데 갑자기 앵커들이 이야기한 것과는 다른 특집보도가 방송된다는 자막이 나오는 사고가 벌어지는 등 이미 그 망조를 드러냈다.[18]
사실 각 코너들만 보면 슈퍼 타임 시절과 별다를 바가 없어 보이나, 시청자들에게 뉴스를 '''체감'''[19]시킨답시고 '''뉴스의 예능화'''를 꾀한 것이 문제였던 것으로 보인다.
일례로 진행자들은 헤드폰 비스무리한 것을 쓰고 뉴스를 전달하기도 했는데, 진짜 헤드폰이 아니었다. 다만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마이크였다고도 한다. 또 남성 진행자 카사이 신스케는 슈퍼 타임 주말판의 스포츠뉴스 진행을 맡았었지만 기본적으로는 쇼 버라이어티에서 주로 활약하던 아나운서였으며, 여자 진행자 사사구리 미네는 보도국 기자로 더 휴먼이 생애 첫 진행이었다.[20] 게다가 코너 순서가 납득하기 힘들 정도로 뒤죽박죽이었는데, 뉴스와 제품 할인(?), 특집 보도 등이 번갈아 나오는 등 뉴스 병행 시절 생생정보통은 양반으로 보일 정도로 구성이 엉망진창이 되어버렸고,[21] 이 모든 문제점이 합쳐진 결과 체감은커녕 더 난해한 뉴스가 되어 그동안 쌓아온 명성을 날려버렸다.
더 휴먼 시절의 대표적인 기행으로 '''일기예보 코너랍시고 야외에 일본 전도 모형을 설치해 놓고 비닐을 씌워 구름을 표현하고 부채를 부쳐 바람을 만드는 짓을 하였다.''' 가히 충격과 공포. 이것 역시 뉴스 예능화의 결과물로서, 후지 테레비 딴에는 시청자들을 체감시킨다고 이런 짓을 벌인 것이었겠지만 반응은 참담했다. 일본 방덕후들은 '''전설의 일기예보'''가며 가열차게 까댔고, 일본 방송사상 최악의 일기예보 코너로 불리게 된다.
1997년 3월 11일 발생한 동연[22] 동해사업소 화재 폭발 사고[23]를 더 휴먼이 연일 보도하게 되었는데, 어느 날 여느 때처럼 이 사건을 보도하던 앵커 카사이 신스케는 "이제 더 이상 동연에게 할 말은 없습니다."라고 코멘트를 남겼다. 그러나 하필 이 때 ''' 뉴스 구성상의 차질이 발생'''하는 바람에 이를 무마한답시고 이 코멘트를 두번 세번 반복하게 되었다. '오토코오바상'이라는 프로그램에서는 카루베 신이치[24]가 "할 말이 없다면서 왜 계속 그 말을 반복했느냐"고 물었고, 카사이는 "더 휴먼이 1년밖에 못 간 이유는 이렇게 대응한 게 컸다"고 말했다고 한다.(일본어 위키백과)
결국 괴이한 진행으로 시청자들의 신뢰를 잃은 더 휴먼은 1년 만에 종영되었고 완벽한 흑역사가 되었으며, 해당 시간대에는 슈퍼 타임의 형식을 일부 부활시킨 '''FNN 슈퍼 뉴스'''가 편성되었다. 사실상 슈퍼 타임의 진정한 후신으로 자세한 것은 문서 참조.
그리고 역사는 반복된다고, FNN 슈퍼 뉴스의 후속 프로그램인 모두의 뉴스 역시 더 휴먼 시절처럼 뉴스의 예능화의 조짐이 보인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적어도 구성이 나쁜 편은 아니었으며, 3시간 방송이라는 특징이 있기도 했고 무엇보다 더 휴먼과는 달리 3년 동안이나 방송되었다. 프라임 뉴스 이브닝 방영 당시 모두의 뉴스 때처럼 3시간 방송을 바라는 일본 시청자들이 있었을 정도였음을 생각하면 둘을 비교하는 것은 실례라고 보아야 할 듯하다.
[1]가나가와현지사[2] 단, 1994년 7월에 헤이세이 여름방학 버라이어티가 방송되었을 때에는 이미 안도 유코가 하차한 뒤였다.[3] 당시 후지산케이그룹 의장이었던 시카나이 하루오가 전국 뉴스와 지역 뉴스의 통합을 원했기 때문이다. 이후 그는 1985년 후지산케이그룹 회장에 취임했다.[4] 1984년에서 1988년까지 방송된 uhb의 저녁뉴스. 오프닝 타이틀에서는 'uhb 이브닝 뉴스'라고 표기하기에 이쪽으로 더 많이 불리었다. 1988년 3월 이후 'uhb 슈퍼 타임'으로 타이틀을 변경.[5] 예외적으로 FNN 계열 지방 방송사 중 KTV, TOS는 '슈퍼 타임'이라는 단어가 들어가지 않은 독자 타이틀로 방송했고, FTV는 오히려 슈퍼 타임이었다가 후에 독자 타이틀을 달기도 했다. 슈퍼 타임의 후속 저녁뉴스 프로그램인 FNN 뉴스 555 더 휴먼에 와서야 완전히 통일된다.[6] 슈퍼 타임의 후신이자 슈퍼 뉴스의 전신인 FNN 뉴스 555 더 휴먼은 지역국 방송자료가 거의 남아있지 않아 확인하기 어렵다.[7] 단, 예외적으로 평일에는 2000년 앵커 교체(안도 유코가 슈퍼 뉴스로 돌아온 시기) 때 잠깐 앉아서 진행한 적이 있었으나, 곧 서서 진행하는 것으로 환원되었던 바 있고, 슈퍼 뉴스가 2013년 리뉴얼된 후 주말판인 슈퍼 뉴스 위크엔드의 앵커들은 앉아서 진행했다.[8] 모닝와이드 오프닝 영상을 보면, '출발 서울의 아침' 시절이었던 1993년경부터 '출발 새 아침'을 거쳐 '출발 모닝와이드'로 개편된 후인 90년대 말까지는 앉아서 진행할 수 있는 곳이 스튜디오 내 왼쪽에, 서서 진행하는 곳이 오른쪽에 마련되어 있었다. 슈퍼 타임처럼 방송 내내 서 있거나 한 것은 아니었고, 어떤 날은 앉아서 진행하거나, 때에 따라 서서 진행하다가 앉아서 하다를 반복하는 경우도 있었던 모양. 90년대 말 이후 스튜디오가 개편되면서 서서 진행하는 공간은 사라졌다.[9] 1994년부터 2015년까지 21년 동안 방송되었다. 여담으로 그 전신인 FNN DATE LINE을 이츠미의 후임이었던 우에다가 진행한 바 있다.[10] 슈퍼 뉴스 최종회에는 안도 유코의 27년 역사를 정리하는 특집을 꾸리기도 했는데, 이 때 2000년 안도 유코가 슈퍼 뉴스로 돌아온 후 안도와 함께 진행했던 앵커들을 같이 모셔왔다! 진행 장면뿐 아니라 사형수부터 욘사마까지 여러 사람들과의 인터뷰라던지, 현장에서 직접 뛰었던 영상들까지 나왔다.[11] 백지연도 커리어 초기에는 안도와 마찬가지로 학업과 뉴스 진행을 병행했다. 게다가 뉴스를 그만둔 후 피플 인사이드 등의 대담 프로그램의 진행자가 되었던 것도 같다. [12] 1987년부터 2018년까지 31년동안 방영된 낮 뉴스 프로그램.[13] ED에 대해서는 BBT(93년 12월까지의 약칭은 T34), TKU 등에서도 사용되었으며, 도카이 TV에서도 제목 부분을 제외하고, 그대로 사용되었다.[14] 그러나 평일에는 마스터 업데이트로 인해 왼쪽으로 사라지기 전에 중단되는 일이 많았다.[15] 도카이 TV는 오프닝 애니메이션으로 사용되었다.[16] 사실 농담이 아니라 시그널은 뉴스 시청자들의 이목을 끄는 데 매우 중요한 요소이기에, 사람들의 기억에 오래 남을수록 그 프로그램의 평가도 높아진다. 멀리 갈 것 없이 MBC 뉴스데스크ABC 월드 뉴스 투나잇의 구 오프닝 시그널이 두 프로그램의 평가에 얼마나 가산점이 되었는지를 생각해 보자.[17] 여기서 '555'는 방송이 시작되는 오후 5시 55분을 의미한다. 더 휴먼 주말판의 경우 방송 시간이 슈퍼 타임 주말판과 다르지 않았기에(토 6:00 ~ 6:30, 일 5:30 ~ 6:00) 주말판의 타이틀은 '555'가 빠진 '''FNN 뉴스 더 휴먼(FNNニュース ザ・ヒューマン)'''이다. 주말판 오프닝 영상에서는 타이틀 옆에 작은 글씨로 'WEEKEND'가 붙는다.[18] 니코니코 동화의 FNN 계열 저녁 뉴스 모음 영상에서 확인함. 사실 앵커들의 미숙한 진행도 문제지만 후술할 난잡한 진행 순서가 된 것도 원인인 듯 하다.[19] 더 휴먼은 사람이 사람에게 뉴스를 전하기 때문에 시청자들을 체감시키는 뉴스를 전해야 한다며 이른바 체감뉴스를 내세웠다. 하지만 현실은 시궁창. 제대로 된 뉴스가 아니라는 사실만을 시청자들에게 체감시켰다.[20] 더 휴먼 종영 이후 다시 기자 일에 전념하며 2001년 미국 워싱턴 D.C. 특파원으로 활동하다가 데이비드 볼링 검사와 결혼하게 되면서 퇴사했다. 퇴사 후 워싱턴 D.C.에서 저널리스트 겸 번역가로 활동 중이다.[21] 일본어 위키백과에 있는 웬만한 뉴스 프로그램 문서들은 코너 진행을 간략하게라도 서술하는데 더 휴먼 문서에는 구성에 관한 내용이 단 한 글자도 없다. 오히려 지역 뉴스의 명칭 완전 통일을 설명하는 표가 해당 문서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 구글신의 가호를 빌려도 자료를 찾을 수 없는 것으로 보아서는, 일본 내에서도 더 휴먼의 구성을 제대로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보아야 할 듯싶다.[22] 동력로·핵연료개발사업단(現 일본원자력연구개발기구)의 약칭으로, '도렌'이라고 읽는다.[23] 동연 동해사업소에 있는 건물 중 하나가 사용을 완료한 핵연료에서 우라늄플루토늄을 추출하고 남은 저레벨 방사성 폐액을 처리해 아스팔트 고화체로 감용 고화시키는 시설이었는데, 이날 10시경 아스팔트 고화체가 들어있던 일부 드럼통의 온도가 정상 수준보다 높아졌고, 이로 인해 화재가 발생하면서 인근 건물로 방사성 물질이 퍼졌다. 이후 인부들은 대피하였지만 결국 오후 8시에 해당 시설에서 폭발이 발생하였고, 폭발에 휘말린 건물들의 문과 창문이 파손되었다. 국제원자력기구 기준 원자력 사고 3등급.[24] 슈퍼 타임 평일판 리포터 중 한 명이었으며, 오토코오바상에서 카사이 신스케와 콤비를 이루었다. 현재는 후지를 퇴사하여 프리랜서 신분이지만, 메자마시TV에는 1994년부터 2020년 현재까지 계속 출연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