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세 다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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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
生 きべくんば民衆 とともに、死 すべくんば民衆 のために''''''살아야 한다면 민중과 함께, 죽어야 한다면 민중을 위해'''[1]
20세기 전반기에 활동했던 일본의 인권 변호사이자 사회운동가이다. 현재까지 가네코 후미코와 함께 '''두 명밖에 없는 일본인 대한민국 독립유공자'''이기도 하다.'''조선 문제는 결코 조선에만 한정된 문제가 아니다. 조선 문제는 동양의 발칸 문제이다. 조선은 세계 평화와 혼란을 좌우하는 열쇠이다. 전 세계의 문제이자 전 인류의 문제다.'''[2]
2. 생애
2.1. 출생
1880년 11월 13일 일본 미야기현 이시노마키시에서 태어났다.[3] 어릴 적부터 묵자의 '''겸애 사상'''을 접했으며 한때 정교회 신학교까지 들어갔으나 3개월 만에 자퇴하였다. 톨스토이 사상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메이지대학 법학과를 졸업하고 우쓰노미야 지검 검사로 부임했다. 하지만 검사로 활동하던 중 생활고로 동반 자살을 시도하다 아들만 죽고 어머니는 살아나는 사건이 일어났는데 그녀를 살인미수로 기소하는 법률의 미비점과 적용에 대한 문제점에 회의를 느끼고 검사직에서 물러나 변호사가 되었다.
2.2. 인권 변호사 활동
1911년에 그는 「조선의 독립 운동에 경의를 표함」이라는 글을 통해 '''일본의 한반도 병합이 침략임을 규정하고 한국의 독립 운동을 지지'''하였다. 그리고 이 글을 쓴 것 때문에 일본제국 경찰에게 조사 받는다.
이후 그는 주로 '''항일 독립 운동가들의 변호'''를 맡았다. 1919년에는 2.8 독립 선언의 주체였던 최팔용, 송계백 등을 변호하여 내란 죄 혐의에 대한 무죄를 주장하였으며 1923년에 밀정의 실존 인물 김시현과 황옥의 # 변호, 1924년에는 도쿄 궁성에 폭탄을 던진 의열 단원인 김지섭의 변호를 맡았다. 한편 1923년에 발생했던 관동 대지진의 여파로 발생한 조선인 학살 사건에 대해 '''해당 사건이 일본 정부와 일본제국 경찰, 군부에 의해 조작된 유언비어로 인한 사건임을 강력하게 비판'''하였고, 조선일보에 이를 사죄하는 문서를 보내기도 했다.
그의 변호 행적 중 가장 유명한 예는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에 대한 변호이다. 두 사람은 천황을 폭살할 계획을 세우다가 검거되어서 천황 폭살을 기획한 혐의로 법정에 섰다. 이 재판은 박열 대역 사건으로 불리며 일본 전역에서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때 후세 다쓰지는 두 사람의 무죄를 주장하며 변호하였을 뿐만 아니라 옥중 결혼 수속을 대신 해 주었다. 또한 후미코가 의문사하자[4] 그녀의 유골을 수습해 박열의 고향인 경상북도 문경에 매장을 해 줄 정도로 노력하였다.
자유법조단의 창립 멤버이며,[5] 1928년 제16회 중의원 총선거에서 노동농민당 후보로 출마했지만 낙선되었다. 1932년 일본 공산당 세력에 대한 탄압이 거세던 도중에 법정에서 공산당 탄압을 강력하게 비판했다가 법정 모독이라는 근거로 징계를 받아 변호사 자격을 박탈 당했고, 이후에도 두 번이나 더 회복과 박탈을 반복하였으며 신문지법과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형을 두 차례 선고 받아 복역하기도 하였다.
2.3. 광복 이후
1945년, 일본의 패전 이후 변호사 자격을 회복한 뒤엔, 한신 교육투쟁(한신 교육 사건)이나 도쿄 조선 고등학교 사건 등, 재일 한국인 사건 및 노동 운동에 대한 변호를 맡았다. 1946년에는 한국을 위한 '''조선 건국 헌법 초안'''을 작성하기도 하였다. 그후 6.25까지 목격한 그는 정전 협정이 체결된 직후인 1953년 9월 13일, 7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2.4. 사후
평생을 한국의 독립 운동의 변호에 힘써서 노력해왔던 것에 대한 공로로, 2004년 '''일본인 최초로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후세 다쓰지 본인이 이미 고인인 관계로 외손자인 오이시 스스무[6] 씨가 대신 전달받았다.
이전까진 독립 운동이라는 것 자체가 일본 제국에 항거하는 것인데 "아무리 조선을 도왔다고 해도 우리의 원수였던 일본의 국민을 독립 유공자로, 건국 기여자로 볼 수 있겠는가?"라는 편협한 반대와 우려가 많았으나, 그의 경우 일생 동안의 행적이 명백하고 일관되게 한국의 독립에 도움을 준 것이었고 자국에서도 온갖 탄압과 핍박을 받아가면서까지 헌신을 한 점을 매우 높게 인정받았다.
그의 업적 자체에는 누구도 의심을 품지 않았으나, 일본인이었다는 점과 사회주의 운동을 한 적 있다는 점 때문에 독립 유공자로 지정되는 데에 어려움을 주는 요인이 되었다. 2001년부터 서훈 논의가 이루어졌으며 2004년에 이르러 훈장이 추서되었다. 추서 당시 유일한 일본인 건국훈장 수훈자였고, 2018년 후세 다쓰지 본인이 직접 변호했던 가네코 후미코에게 애국장이 추서되면서 일본인 건국훈장 수훈자가 2명이 되었다.
3. 한국에서의 평가
웬만한 독립 운동가들의 공헌도를 내려도 될 정도로 엄청난 업적들을 보면 역사 교과서에도 충분히 나올법하지만, 지학사 교과서[7] 를 제외하면 소개되어 있지 않다. 때문에 한국 독립에 대한 공헌에도 불구하고, 잘 알려지지 못한 편이다. 그러나 동아시아사에는 등장한다.
다행히 2014년 10월 30일, EBS의 《역사 채널 e》에서 방송된 〈조선 민중과 함께, 후세 다츠지〉편 덕분에, 국내에도 그의 업적이 조금이나마 알려질 수 있게 되었다.
2017년 영화 《박열》에 등장한다. 배우는 야마노우치 타스쿠.[8]
2019년 3.1운동,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다시 재조명되었다.
4. 기타
- 미야기현 이시노마키시에는 후세의 생가가 있으며, 이시노마키시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센다이역에서 센세키선이나 센세키토호쿠라인 열차를 타는 것을 추천. 현재 생가는 평범한 가정집이다. 생가의 맞은 편에는 후세 포목점이 있다. 이시노마키시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센다이역에서 열차를 탈 수도 있고 직통 버스편도 있다.
- 이시노마키의 あけぼの南公園(아케보노미나미코엔)에는 후세가 남긴 "살아있다면 민중과 함께, 죽어야 한다면 민중을 위해"라고 적힌 커다란 비석이 있다. 2012년 동일본 대지진 직후 아케보노미나미 공원이 지진 피해자들의 임시 대피소 역할을 하고 있어 가건물들과 어지럽게 섞여있기도 했다. 게다가 일본 내에서 그의 인지도가 그다지 높은 편이 아니라서 다소 쓸쓸한 모습을 하고 있는 실정이다. 구글 스트리트뷰# 2013년 5월 촬영 사진으로 가운데 빨래대가 있는 부분 옆의 비석.
- 일련정종 신도이다. 원래 일본 정교회에 심취해있었으나 결혼하면서 아내의 종교인 일련정종으로 개종. 사후에는 일련정종 사찰인 죠자이지(常在寺)에 안치되었다. 사찰이라고는 하나, 그냥 주택가 한 가운데 있다. JR이나 도쿄 메트로 이케부쿠로 역에서 도보 10분 이내에 도착 가능. 죠자이지에 방문하면 후세 가의 묘소를 참배할 수 있고, 일어가 통하지 않더라도 경내에 한국인 스님이 있어 도움을 받을 수 있다.[9]
- 배우자인 미츠코는 생계를 위해 하숙집을 했는데 후세가 조선을 위해 이모저모로 노력한 것에 대한 보답으로 당시 조선인 유학생들이 자발적으로 하숙생이 되었다고 한다 외손자인 스스무씨의 증언에 의하면 조선인 유학생들이 전쟁 때 방공 훈련 등 이모저모로 도움을 주었으며 심지어 조선인 우유 배달부가 자택에 우유를 무료로 배달해 준 적도 있었다고 한다.
- 천황제에 대해서는 국민들이 지지하고 있는 제도를 인위적으로 해체하기보다는 황실의 단절로 자연 소멸하는 것을 이상적으로 보았다. 히로히토의 포츠담 선언 수락에는 높이 평가했다.
5. 관련 문서
[1] 그의 신념을 응축한 문구라 할 만 하다. 평생을 일제의 잘못된 정책과 일제의 한국, 타이완 통치를 반대한 몇 안 되는 반전주의자이자, 평화주의자였다. 상재사에 있는 후세 다츠지를 기리는 '후세 타츠지의 비'에 이 문구가 적혀있다. 후세의 고향인 미야기현 이시노마키 시의 아케보노 미나미 공원에도 이 문구를 적은 대형 기념비가 있다. 별도의 후세 유언은 다음과 같다. "자기일생의 모든 일을 스스로 마무리 짓기란 힘든 일 입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이어갈 수 있도록 물려줄 수 있는 일을 하면 되는 것입니다."[2] 20세기에 발발했던 6.25 전쟁이 제3차 세계 대전으로 번질 뻔했으며, 21세기 현재에도 대륙 세력과 해양 세력의 이해가 충돌하는 한반도의 지정학적 중요성을 정확하게 지적한 말이다. 공교롭게도 그는 한국의 광복뿐만 아니라, 6.25 전쟁의 휴전까지 보고 사망했다. 이러한 그의 지적은 일본이 청일전쟁, 러일전쟁이라는 2번의 전쟁을 치르며 기어이 한반도를 장악하고, 이를 발판으로 시베리아 출병, 만주사변, 중일전쟁, 태평양 전쟁 등을 일으켜 아시아 전체를 전쟁으로 몰아넣은 것을 직접 목격했던 것도 반영한 결과다.[3] 가수 엔도 마사아키의 고향이기도 하다.[4] 1차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 받고 항소심에서 천황의 명으로 무기 징역을 선고 받으나 감형을 거부한 뒤 이듬해 죽었다. 천황이 내린 명(감형)을 거스르고자 스스로 자살하였다고도 하고 당국의 암살 설도 있으나 확증은 없다.[5] 옴진리교 반대 운동을 벌이다 사망한 사카모토 츠츠미가 여기 소속이다.[6] # 2021년 기준 86세. 외조부와 마찬가지로 일본 제국 시절에 출생했다.[7] 박열, 후미코와 함께 소개[8] 임진왜란 1592에서 카메이 코레노리 역을 맡은 배우.[9] 2016년 초 기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