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토기

 

[image]
대가야 양식 토기
1. 개요
2. 상세
2.1. 금관가야 양식 토기
2.1.1. 관련 문서
2.2. 대가야 양식 토기
2.2.1. 관련 문서
2.3. 아라가야 양식 토기
2.3.1. 관련 문서
2.4. 소가야 양식 토기
2.4.1. 관련 문서
2.5. 그 외의 양식 토기
2.5.1. 창녕양식 토기
2.5.1.1. 관련 문서
3. 가야토기 고미술품 목록
3.1. 국가 지정 문화재
3.2. 시도 지정 문화재
3.3. 일반 동산 문화재
4. 둘러보기

'''가야 토기'''
''伽倻土器, Gaya Pottery''

1. 개요


삼국시대의 크고 작은 가야 각국의 토기. 신라나 여러 가야 모두 '''굽다리 접시(고배)'''와 '''목 긴 항아리(장경호)''', '''목 짧은 항아리(단경호)'''를 주된 부장품으로 채용하였다. 특히 고배에 투창이라 부르는 장식 되어 있는 점은 신라토기와 유사하다.

2. 상세


삼국시대 이전, 원삼국시대에는 삼국사기의 기록처럼 소국의 형태로 존재하였다. 신라사로국, 금관국구야국, 대가야반파국반로국 등으로 소국의 시절이 있었다. 이처럼 소위 잡거하던 시절에는 각자 생활 및 제의에 사용되는 그릇들을 자체적으로 생산하였던 바 각 국가마다의 소비되는 토기의 형태적인 특징이 달랐다.
4세기 이후부터 역사적으로 신라가 주도권을 잡아나가면서 지리적으로 낙동강의 동쪽으로는 사로국 경주에서 생산되는 토기들이 점차 주변으로 확산되어 나갔으며, 반면에 가야 각 국들은 각 집단마다의 생산 체계를 유지하면서 분화되기 시작한다.
따라서 고고학적으로는 토기 양식과 그 형성과정, 확산과정에 따라서 볼 때, 4세기 이전 공통된 양식의 토기 양식을 공유하던 시절을 '''소위 양식 분립 이전기'''라고 말하며, 낙동강을 기준으로 양식이 점차 분화되기 시작하는 시점에서부터 각각 낙동강의 동, 서쪽의 양식의 토기라는 뜻에서 '''낙동강 이동양식''', '''낙동강 이서양식'''으로 구분되며 결국 양자는 신라토기와 가야토기라는 특정한 양식으로 완연히 자리잡게 된다.
가야토기는 신라토기와 유사하나 대비되는 특징으로 통일성이 약하다는 것이다. 이는 하나로 통합되었던 신라와 분열되었던 가야의 차이점에서 기인한다. 하지만 이는 한편으로 문헌에 기록되지 않은 각 가야들, 소국들의 역사상을 보는 데에 주요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기록 자체가 가야 부분에서는 상세하지 않은 탓도 있겠지만 아래에서 서술될 각 여러 가야 토기들의 양식들이 어떤 시기, 어떤 지역이냐에 따라서 점유하는 주체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뿐만아니라 가야토기의 여러 특징들 가운데서 주요한 하나는 집모양이나 배[船], 수레바퀴 등의 모양을 하고있는 이형토기들도 있어 당시의 시대상을 알려주는 귀중한 유물이 되기도 한다.
※ 이하 아래의 서술은 역사적 명칭보다는 현재 고고학계 및 일반 사회에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ㅇㅇ가야의 명칭으로 가능한 통일하였다.

2.1. 금관가야 양식 토기


금관가야는 김해, 부산 지역에서 성장, 발전한 최초의 가야국이다. 삼한 후기의 와질토기문화에 새로운 토기 제작기술이 도입되어 섭씨 1,100도 이상의 고온에서 구운 도질토기가 생산되기 시작한다. 3세기 후반 김해 일대에서는 물결무늬가 새겨진 화로형토기와 아가리가 바깥으로 꺾인 고배(굽다리접시) 그리고 이부호(두귀단지)가 등장한다. 4세기 전반에는 화로형토기의 크기가 커지고, 몸통 양 옆에 반원형의 손잡이가 부착된다. 또한 격자무늬가 새겨진 원저단경호(둥근밑단지)의 양이 많아진다.
4세기 후반에는 와질토기가 사라지고 도질토기만 생산된다. 아가리가 밖으로 꺾이는 굽다리접시(외절구연고배)가 처음 나타나며 기종이 풍부해진다. 화로형그릇받침, 바리형그릇받침, 원통형그릇반침, 손잡이단지, 짧은목단지, 두귀단지 같은 토기가 있다.
외절구연고배와 손잡이가 달린 화로형그릇받침은 금관가야 이외 지역에서 출토되지 않는 금관가야만의 특징적인 토기이다. 5세기 전반에는 금관가야의 특징적인 토기는 점차 사라지고 손라계 토기들이 많이 늘어난다. [출처]

2.1.1. 관련 문서



2.2. 대가야 양식 토기


경북 고령을 중심으로 존재하였던 반파국, 즉 대가야의 토기문화는 통상 4세기 후반부터 선명해지기 시작한다. 대가야도 마찬가지로 다른 양식들처럼 고배(굽다리 접시), 장경호(목긴 항아리), 대부장경호(다리가 부착된 목긴 항아리), 발형기대(바리형 그릇받침), 통형기대(통형 그릇받침), 단경호(목짧은 항아리), 뚜껑 등의 기종을 선호한다. 그 중에서도 대가야 양식이라고함은 고배보다는 장경호와 발형기대, 통형기대의 사용이 두드러진다.
[image]
다른 양식과 마찬가지로 대가야 양식 토기들의 형식(type)적인 특징은 고배부터 서술하면 넙적한 형태의 배신(고배의 물건 담는 부분), 비교적 굵은 나팔상의 대각(받침대 부분)을 띄는 것이다. 사진의 오른쪽 중앙에 있는 것이다. 뚜껑들 또한 사진 처럼 특징적인 보주(寶珠), 또는 UFO처럼 생긴 손잡이에 유충문이라고 하는 애벌래 모양같은 문양이 시문된다. 소성 당시에 끈으로 묶은 듯한 흔적이 X형, I자형태로 뚜껑 몸통에 종종 나타나는 것이 특징이다. 장경호는 대부분이 발형기대 또는 통형기대에 받쳐져서 출토되는 특징이 있다. 뚜껑을 받치는 턱이 선명하게 드러나있고 목 부분은 직립하며 파상문(파도무늬)으로 장식된다. 사진의 왼쪽 위처럼 생겼으며 시간이 지남에 따라 동체부가 매우 작아져서 목부분의 크기와 특징만 그대로일 뿐 몸통은 사람 주먹 서너 개 정도의 크기로 줄어든다. 발형기대는 5세기 말 경에는 완전히 발형기대가 아닌 단순히 동그란 받침대 정도의 짧은 기대로 간략화되는 것으로 변화한다.[1] 위의 사진에서 아래 왼쪽 두번째가 그것이다. 통형기대 역시 대가야만의 특징이 두드러지는데 소위 뱀모양의 장식으로 불리는 기다란 점토띠를 새로로 장식해둔 점이다. 아래의 사진을 보면 대가야 양식 통형기대, 분포 범위가 순천까지 해당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출처]
[image]
이러한 장황한 토기의 변화는 상술하였듯이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데, 대가야가 5세기 후반을 향해갈 수록 이 대가야 양식의 토기의 분포 범위가 점차 확장되어 간다는 것이다. 토기의 변화에 대해서는 연구자들마다의 차이가 다소 있는 편이지만 적어도 5세기 후반 경에는 고령의 대가야는 섬진강의하류역인 구례하동까지 확인이 되고 있다. 대가야 양식 토기의 분포 범위가 가장 넓었을 때는 고령의 바로 밑인 합천다라국을 포함하여 거창, 장수, 함양, 산청, 임실, 남원, 구례, 순천, 여수까지의 넓은 범위였다. 논자에 따라서는 이 시점에는 대가야, 반파국은 거의 준 고대국가의 수준에 올랐다고까지 보기도 한다.[2]
토기가 갖는 의미가 어떤 것이 되었든 최소한 5세기 후반에는 대가야의 영향력이 이곳까지 미쳤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반파국의 추이를 설명해주는 역사고고학적인 큰 의미를 갖는다. 한편 최근들어서 고령군 송림리에서 기존에 토기 가마 시설로 추정만되오던 지점을 발굴하여 실제로 토기 가마 및 전돌 생산 시설이 존재함을 확인하기도 하였다.

2.2.1. 관련 문서



2.3. 아라가야 양식 토기


경남 함안을 중심으로 분포하였던 아라가야, 안라국은 역사적으로도 항상 2등의 자리를 차지하였던 큰 가야였다. 아라가야는 "양식 분립 이전 시기"의 토기들을 양식 분립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소비하는데 이런 점에서 아마도 양식 분립 이전기의 토기들의 생산 및 유통을 주관하였던 집단이 아라가야가 아닌가하는 견해가 있다. 나아가 4세기 아라가야의 초창기는 비교적 강성한 집단이었다고 보기도 한다. 특히 승석문양이부호(繩席文兩耳附壺)[3], 순우리말로는 돗자리 문양으로 타날한 귀 두개 달린 항아리(...)는 아라가야를 중심으로 다량 분포하면서도 영남지역에 넓게 확인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생산과 유통의 중심지가 아라가야라고 추정되고 있다. 더군다나 토기 생산 시설이 확인된 유적이 함안 우거리 일대에서 넓게 확인이 되고 있어서 토기 생산과 유통의 담당, 즉 경제적 능력을 바탕으로 일약 성장한 것이 아닌가 추측하기도 한다. 여담으로 우거리 토기가마가 알려졌을 때는 가마가 2기 인 것이 확인되어서 토기 생산국의 클라스를 보여주는 부분이 아닌가 하는 견해도 있었다.[4]
[image]
여하간 이러한 아라가야 양식의 토기들은 승석문양이부호와 통형고배, 그리고 화염문투창고배로 정리된다.[5] 승석문양이부호는 이른 시기부터 아라가야의 대표적인 기종으로 자리하고 있다. 서술한 것처럼 외면에 토기의 기벽을 정리하기 위해서 타날한 흔적을 지우지 않고 손가락이나 도구를 사용하여 장식적으로 표현한 것이 특징이다. 특히 기벽이 매우 얇은데 대부분 두께가 채 1cm가 되지 않는다. 또한 동체의 어깨쯤되는 지점에 손잡이가 달리는 것이 특징이다. 그외의 특징으로는 도공[6]이 모종의 식별기호를 나타낸 도부호(陶符號)가 표시되어 있는 것이 많다. 또한 기벽이 얇다보니 찌그러진 경우가 있는데, 논자에 따라서는 대량생산을 위해서 가마에 쌓아서 넣다보니 그렇게 된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실제로 함안이나 의령 등지의 아라가야의 옛 지역에서는 지표상에서도 이런 토기 조각들을 쉽게 볼 수 있다.
통형고배는 낙동강 이동, 이서 양식의 분립 이전에 공통적으로 사용되던 토기의 형태인데, 아라가야는 이러한 형태의 토기를 비교적 오래도록 사용하다가 5세기가 되어서야 화염문투창고배라는 특징적인 형태의 고배가 나타난다.[7] 투창(透窓) 즉, 토기에 쉽게말해 빵꾸를 뚫어서 장식한 모양이 말그대로 불꽃모양처럼 생겼기 때문에 화염문투창고배라고 부르고 있다. 이러한 화염문투창고배는 대부분 아라가야와 관련된 유적에서 확인되고 있어 아라가야의 정체성, 대표 심볼로도 많이 활용되고 있고 실제로 함안의 함안박물관 건물의 디자인도 이 화염문으로 되어 있다.
[image]
하지만 의외로 함정인 것은 아라가야의 화염문 투창고배는 사실 수량이 그렇게까지 많지는 않다. 오히려 투창의 형태를 제외한 나머지 전체적인 형태가 화염문투창고배와 비슷할 뿐 오히려 투창의 형태는 삼각형이 훨씬 더 많다.[8] 원래는 삼각형 장식 아래에 원형의 장식이 되어 있던 것이 합쳐지면서 불꽃문양이 된 것이다.[9] 무엇보다 이런 화염형투창고배들이 일본에서도 확인된다. 일본에서 확인된 통형기대에서도 화염문이 있는게 있지만 엄밀히 화염문이 아닌 열쇠구멍형태로 아라가야 양식과 상관없이 다른 양식의 통형기대에 종종 시문되는 경우가 있어서 다소 의문을 자아내지만 그래도 화염문투창고배만큼은 확실해 보인다. 이 또한 아라가야의 활발한 교류상의 일면을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그 외에도 다양한 문양이 시문되는 발형기대가 있다. 워낙 많은 무늬가 들어가므로 가독성의 문제로 다 서술하기에 무리가 있지만(...) 그나마 솔잎문양의 장식이 들어간다는 점이 독창적인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밖에도 아라가야의 특유의 토기가 있다면 손잡이가 없고 기하학적인 무늬가 침선, 세선으로 표현된 뚜껑이 있다. 다소 이른시기를 중심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보이며 특히 아라가야의 우거리 토기가마나 함안 황사리 고분군 등의 빠른 시기 유적에서 출토되는 경향이 있다.
[image]
학술적으로는 아라가야 양식의 토기들과 소가야 양식의 토기들이 기형적(器形的)으로 유사한 부분이 있어서 소가야 양식의 토기가 아라가야의 토기에서 나온 하나의 지역양식이 아닌가하는 견해도 있다.

2.3.1. 관련 문서



2.4. 소가야 양식 토기


소가야 양식 토기를 구성하는 기종은 위의 여타 가야 고분군과 비슷하다. 하지만 고배가 아에 종류 자체가 약 3종으로 구분된다. 무개식 삼각투창 고배[10], 유개식 삼각투창고배[11] 그리고 이단교호투창고배[12]로 크게 구분된다. 각 종류마다도 어느 정도 시기 차이가 있다. 참고로 소가야 양식토기에서의 이단투창고배와 신라토기에서 말하는 이단투창고배와는 형태적인 차이가 있는 것으로 엄연히 다른 토기이다. 아래의 사진들이 바로 소가야 양식 고배와 장경호로 둘다 구연부라던지 뚜껑받이 턱의 형태가 전반적으로 넓은 것이 특징이다.
[image]
무개식 삼각투창 고배와 유개식 삼각투창 고배는 사실상 뚜껑받이 턱의 유무에 따라 나뉠 뿐, 그 부분만 제외하면 전반적인 크기나 대각(접시 받침 다리)이나 대각단의 형태, 비율 등의 변화의 경과는 유사하다. 뚜껑받이 턱이 없는 무개식의 경우 약간의 굴절이 있는 배신의 형태를 띄는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삼각투창고배가 형성되는 와중에 5세기 중엽을 즈음하여 이단교호투창고배가 나타난다. 신라토기와 구분되는 특징이라면 뚜껑받이턱과 구연부의 간격이 신라토기에 비해 넓다는 특징이 있다. 6세기를 전후한 시점부터는 소가야식의 이단투창고배가 기존의 삼각투창고배를 대체하다가 6세기 중엽 이후부터는 신라토기로 점차 대체되면서 소가야 양식이 소멸한다.
[image]
소가야 양식은 고배 이외에도 '''수평구연'''이라는 표현으로 대표되는 수평구연장경호, 수평구연발형기대가 있다. 수평구연장경호의 경우 구연부와 동체부의 비율이 1:1이었다가 점차 동체부가 작아지면서 거의 나팔처럼 벌어진 구연부만이 강조된 느낌으로 변화한다. 수평구연발형기대의 변화 또한 비슷한데 구연부의 구연부의 수평적인 진행이 더 강해지지만 대각부분은 점차 날씬해지는 경향을 보인다. 고배류와 마찬가지로 6세기 중엽이 되면서 종언을 맞이한다.
다만 소가야 양식토기 같은 경우엔 약간의 쟁점이 있다. 다른 여타의 큰 범주의 토기양식들은 중심지가 선명한 편이지만 소가야 양식은 일단은 고성군송학동 고분군이라고는 하지만 의외로 송학동 고분군에서는 하도 외래계가 많아서 소가야 양식의 출토량이 되려 그리 많지 않다. 고성 내산리 고분군[13]을 제외하면 중점적 소비지는 시간과 공간에 따라 매우 유동적이다.[14] 분포 범위는 진주, 고성, 사천, 산청 남부, 합천 삼가면 일대, 통영, 거제, 마산, 창원, 의령 등지에 걸쳐 넓게 분포[15]하고 있다.
이처럼 매우 넓게 분포하고 있지만 고성이나 진주 정도의 지역을 제외하면 대부분 다른 집단들에 의해서 점유 관계가 변화한다는 특징이 있다. 소가야 양식 분포권의 북쪽과 동쪽은 대가야의 영역에 접해있어서 대가야 양식 토기들과의 혼용[16]이 특징적이다. 반면 서쪽의 창원이나 의령, 마산 등지에서는 혼용도 되지만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소가야 토기가 많아지기도 하고 대체되기도 한다.[17]그렇기 때문에 소가야 양식 토기가 출토된 고분군을 만들었던 각 집단들의 관계망이 느슨하다라는 해석이 전제되기도 한다.
일단은 다소 모호하지만 어쨌거나 중심지로 볼 만한 대형의 고분군은 송학동 고분군 뿐이며, 이는 소가야, 즉 고자국과 관련되어 생각될 수 밖에 없다. 해당 문서에서 고고학적인 향방에 대한 자세한 서술이 있으니 참고 바람.

2.4.1. 관련 문서



2.5. 그 외의 양식 토기



2.5.1. 창녕양식 토기


창녕 교동 고분군을 중심으로 하는 비지국, 비자벌 또는 비화가야의 토기문화는 말그대로 가야토기의 범주에 드는 것으로 보는 경우도 있으며 신라토기에 속하기도 한다. 물론 단순히 실존하지 않았을 수도 있는 비화가야라는 명칭으로 말미암은 것은 아니고 토기 양식군의 특징이나 교동 고분군을 비롯한 여러 고분군에서 출토되는 유물을 종합적으로 분석한 결과에 의해서 신라 또는 가야로 양분되어 있는 것이다. 또한 지리적으로도 낙동강 이서와 이동의 중간이다.
[image]
[image]
교동 89호분
계성 2호분
사실 외견상으로는 거의 신라토기에 가깝다. 위의 사진[18]에서 보이는 고배(굽다리 접시)처럼 고배의 비율이나 특히 고배의 위에 있는 뚜껑의 '대각도치형'[19]손잡이 모양, 그리고 뚜껑의 유충문[20] 장식이 저런 느낌된 것이 주로 창녕지역을 중심으로 분포하고 있다. 또한 특유의 살짝 갈색빛을 내는 소성분위기가 있다. 또 가야신라 권역 내에서도 조금씩 확인되어 교류의 흔적으로 추정되고 있다.
가야토기의 범주에도 들어가는 이유는 토기의 양식적인 문제는 아니고 개념적 용어 때문에 그렇다. 역사고고학 중에서도 삼국시대를 중심으로하는 연구에서는 보통 문헌에 명시적으로 등장하지 않지만 고고학적으로 다소 구분이 되는 집단에 대해서 소국(小國), 내지는 정치체(政治體)라는 표현을 주로 쓴다. 가야고고학에 있어서도 그러한 소국이나 정치체, 집단이 있기 때문에 가야고고학의 장르에서 다뤄지는 소국이라는 의미에서 가야 토기와 관련된 테마의 책이나 주제 속에서 창녕 토기가 다뤄지기도 하는 것이다. 다만 이 경우는 비지국, 비화가야, 비자벌 등의 이름 아래의 독자성을 강하게 띄는 집단이라는 견해를 내세우는 쪽에서 주로 거론되는 것이다. 반대로 신라의 여러 지방 정치체들 가운데 하나 또는 독자적 세력이었으나 신라에 포섭된 집단 정도로 보는 경우에는 사실상 신라토기의 범주 아래에서 논의된다.
참고로 낙동강을 끼고있는 중·하류 서쪽의 가야권 소국들 가운데서도 이런 친신라적 가야가 몇몇 있다. 바로 다라국으로 추정되는 합천군 쌍책면에 소재하는 옥전 고분군이다. 정치체를 상정할만큼의 성장을 이룬 시점에는 대가야의 영향력이 훨씬 더 두드러지지만 5세기말, 6세기 초반부터는 신라의 토기나 유물, 심지어는 금동관도 출토되기도 한다.

2.5.1.1. 관련 문서



3. 가야토기 고미술품 목록



3.1. 국가 지정 문화재



3.1.1. 국보



3.1.2. 보물


  • 보물 제555호 도기 배모양 명기(평저주형토기)
  • 보물 제556호 도기 신발모양 명기
  • 보물 제637호 도기 바퀴장식 뿔잔(차륜식토기)
  • 보물 제2059호 부산 복천동 11호분 출토 도기 거북장식 원통형 기대 및 단경호

3.2. 시도 지정 문화재


  •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99호 도기 집모양 명기
  • 부산광역시 문화재자료 제54호 쌍구장경호 (雙口長頸壺)

3.3. 일반 동산 문화재



3.4. 해외 소재 문화재



4. 둘러보기





[출처] A B 박천수, 2010, 「토기로 본 대가야」, 『퇴계학과 한국문화』 46, 경북대학교 퇴계학연구소. p.62 그림 7[1] 대가야는 대부장경호는 없는데, 대신에 소형화된 장경호에 소형화된 기대가 같이 출토되는 점이 사실상 대부장경호와 비슷하다.[2] 그런 맥락에서 사국시대라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한다.[3] 양이부, 즉 손잡이 부분은 없을 때도 있다.[4] 이런 견해는 가마 유적의 발굴이 현격하지 않았던 초창기의 견해이다.[5] 사실은 다른 토기 양식에 비해서 매우 복잡한 전개과정을 거친다. 통형고배로 분류되는 고배들이 말그대로 통자형 대각을 갖는다는 점 말고는 매우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기 때문이다.[6] 또는 생산지 표시, 즉 메이커(...) 표기일 수도 있다.[7] 다소 주목되는 것은 함안의 지금의 말이산 고분군이 있는 중심지에서는 통형고배를 공반하는 이른 시기의 무덤들이 다소 적은 반면, 통형고배가 나타나는 이른 시기의 무덤들은 함안군의 외곽인 황사리나 의령 예둔리에서 확인된다는 점이 있다. 다만 자료의 발굴/미발굴의 문제일 수 도 있다. 가령 함안 궁성지가 없는 유적으로 추정되었다가 최근에 발견된 것처럼.[8] 다만 그렇다고해서 삼각문투창고배라고 하지는 않는다.[9] 다만 약~간 아이러니한 건 가장 화염문의 시초격인 형태는 부산 복천동 고분군에서 확인되었다. 그렇게 중요한건 아니지만. 중요하게 본다면 복천동 조영 세력이 한때는 아라가야와도 물적 교류가 있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10] 뚜껑이 없는 삼각형 투창 장식이된 굽다리 접시[11] 뚜껑이 있는 삼각형 투창 장식이 된 굽다리 접시, [12] 다리가 2단으로 구분되어 교차되어 투창이 뚫린 굽다리 접시[13] 내산리 고분군도 대규모의 고분군이지만 개별 고분의 위계는 그렇게까지 높지 않다. 따라서 실질적 중심지를 상정하는 근거가되고는 있지만 양식의 진짜 중심지라고까진 보지 않는다. 대신 대외, 해외교류 활동이 활발했던 소가야의 양상을 대표하는 고분군이다.[14] 물론 고성 송학동 고분군에 인근한 기월리가 조사되고 있는데, 이 결과에 따라서 꾸준한 소비지, 고분군의 위계까지 갖춘 완연한 양식의 중심지로 볼 근거가 될 수 있다.[15] 진주 무촌, 가좌동 고분군, 산청 묵곡리, 중촌리, 평촌리, 옥산리, 명동 고분군, 합천 저포리 고분군, 의령 예둔리 고분군에 고성 내산리와 송학동, 남원 월산리, 사천 선진리, 마산 현동, 합성동 고분군, 거제 구영리, 장목 고분 등등~[16] 산청 쪽에서는 특히 대가야 뚜껑을 쓰는 유개배(有蓋盃, 다리없는 그릇), 대가야 장경호, 띠 모양의 짧은 대가야 기대의 조합에 소가야계 장경호나 고배, 발형기대가 섞여 나오기도 한다.[17] 보통 아라가야 양식과 일부 병존하다가 소가야 양식이 우위를 점하다가 신라 토기가 조금씩 유입되면서 대체되는 양상이다. 물론 세부적으로는 다 다르지만 전반적인 경향이 그렇다. 의령 예둔리 빼고.[18] 참고로 흑백사진은 유리건판이라고 하는 일제강점기 당시의 사진이다. 국립중앙박물관 홈페이지에 공개되어 있다.[19] 뚜껑만보면 마치 고배가 뒤집어진 듯한 느낌이다. 대각은 고배의 다리를 말하는 것으로 대각이 뒤집어진 듯한 형태라고 하여 대각(臺脚) 도치(倒置)형이라고 칭한다.[20] 그 애벌레 맞다. 애벌레 모양으로 장식해서 유충문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