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용

 



[image]
姜元龍
1917년 7월 3일 ~ 2006년 8월 17일 (향년 89세)
1. 개요
2. 생애
3. 성향
4. 여담


1. 개요


한국목사. 한국기독교장로회의 목회자이자 정치인, 철학자, 통일운동가, 교육자, 시민사회운동가이다.

2. 생애


1917년 함경남도 이원군 남송면 원평리에서 태어났으며 유교적 가풍이 강한 집안에서 태어나 보통학교 재학 시절이던 1931년 개신교인이 된다. 개신교인이 되자 집안의 반대는 당연히 심하였고, 그의 조모는 슬퍼하셨다고 한다. 학창 시절에는 농촌 계몽운동에 감화되어 '농민이 잘 사는 나라를 만들겠다'라는 신념을 안고 만주 용정으로 건너갔다. 당시 1935년에는 만주의 북간도 용정의 용정중학으로 진학, 윤동주, 문익환을 만나 인연을 맺었고, 브나로드 운동에도 참가하였다. 1944년에는 일제에 의해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았다.
8.15 광복 이후에는 서울로 돌아와 중도파 정치인들과 같은 노선을 걸어 좌우합작운동에 참여하기도 하였으며, 경동교회를 설립하였다. 진보당 사건으로 사형당한 조봉암과 생전에 친분이 두터웠으나, 기본적으로 반공보수 성향인 강원용은 조봉암의 지지 요구는 거절하였다.
정부수립 이후에는 재야 민주화운동에 참여, 반 독재운동에 헌신했다. 하지만 1980년대 5공 정부가 들어선 다음에는 당시 신군부에 호의적으로 돌아서면서 일명 5공 시대의 변절자 '''강''' 중 '''강'''으로 꼽혀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노태우 정부 땐 방송위원회(현 방송통신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다만 김영삼 정부 시절에도 사노맹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던 박노해 석방 탄원서에 제일 먼저 서명할 정도로 인권 문제에 있어선 나름 진보적인 태도를 보여주었다. 말년에는 참여정부의 일부 정책이나 녹록치 않은 친일 청산 작업 등을 비판해 친노 진영이나 한겨레신문 등과 충돌하기도 했다.
2006년 8월 17일, 노환으로 90세에 소천하였다.

3. 성향


강원용 목사는 친미 보수 성향의 기독교 목회자로, 반미 성향이나 사회주의 노선과는 처음부터 결이 달랐다. 조봉암을 포함한 혁신계 인사들과 친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같이 활동하자는 제안을 끝끝내 뿌리친 것도 이 때문이다. 박정희5.16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도 그의 남로당 경력에 주목해서, 미국 외교관들에게 "박정희는 사상이 의심스러운 자"라는 이야기를 했다는 증언이 남아있다. 그만큼 일관된 '친미반공주의자'였다는 것이다. 다만 그의 인터뷰를 보면 알겠지만 미국에 대해서도 무조건 믿어서는 안된다란 말도 하고 있다.
때문에 박정희 정권 시절 야권을 지원하며 민주화 운동을 했던 그가 1980년대 이후 민주화 운동의 일선에서 멀어진 것도, 고령으로 건강 때문에 활동이 줄어든 것도 있겠지만, 당시 민주화 운동을 주도하던 한 축이던 학생 운동권에 반미 성향[1]이나 사회주의 노선이 전면적으로 대두된 것 역시 꽤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실제 훗날 강 목사는 "386세대가 오만과 독선에 빠져 있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강 목사뿐만 아니라, 고령으로 인한 건강 악화와 반공 성향은 강 4인 모두에게 해당된다. 이들이 1980년대 공통적으로 민주화 운동 일선에서 멀어진 건 어떻게 보면 필연일지도. 물론 이들이 비판받는건 그냥 일선에서 물러난 정도가 아니라 군부정권에 협조한 것으로 비칠 수 있는 행위들 역시 있었기 때문이라, 마냥 이 사람도 사실은 좋은 사람이었어라고 하기도 애매한 측면이 있긴 하다만 말이다.
하지만 정치적 성향이 다소 우파쪽에 가까웠을지언정 평화주의를 지향했고, 타 종교에 대해서 열린 자세를 취했다. 적어도 “불교 믿는 사람은 모두 감옥에 보내고 무인도에 보내.. 기독교 국가를 만들자”처럼 대한민국 헌법과 인권 관련 법률에서 보장하는 세속국가, 종교의 자유 등과 같은 기본권을 위반하는 망언을 서슴치 않게 내뱉는 전광훈 따위와는 차원이 다르다. 말년에는 천주교김수환 추기경, 불교법정 스님과 같이 종교간 대화에 앞장서는 대표적인 종교인으로서, 일부 비 개신교인들에게도 이미지가 좋은 목사로, 긍정적 인식이 많은 편이다. [2]

4. 여담


저서로 <역사의 언덕에서>가 있다.
월간 신동아 2003년 12월호부터 5회에 걸쳐서 <강원용 목사의 체험 한국 현대사>라는 인터뷰가 연재되었다. , , , ,
사후 1년만에 그가 모은 책 5,173권이 국립중앙도서관에 기증되었다.
6차, 7차 교육과정의 중학교 국어 교과서에는 그의 수필 중 하나인 '30년 전의 그 날'이 수록된 적이 있다. 일제 경찰에게 붙잡혀서 고된 감옥 생활을 할 때 영혼의 순수함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수필 전문
[1] 광주학살12.12 쿠데타가 가능했던 것이 미국의 승인 혹은 묵시적 동조가 있었던 것으로 봤던 것이 가장 큰 배경. 실제 평시 군 통수권이 미군에 있었기 때문에, 최소한 미국의 묵인 없이는 함부로 군대를 움직이는게 힘들긴 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이 극단적으로 표출된 것이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서울 미국문화원 점거농성 사건이었다. 참고로 이렇게 광주학살엔 침묵한 미국은 이후 정신을 차렸는지(?) 6.10 항쟁 땐 시위대에 군 부대 투입을 검토하던 전두환에게 경고하며 나름 민주 세력에 도움을 준다.[2] 사실 그가 속한 한국기독교장로회 교단이 장로교회 교단들 중에서 가장 진보적(엄밀히 따지면 중도~진보)성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