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성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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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조선 중기의 왕족. 성종의 7남이자 서4남으로, 어머니는 숙의 홍씨[2] 이다. 친남매로는 누나 혜숙옹주와 형 완원군과 회산군, 남동생 익양군, 경명군, 운천군, 양원군, 그리고 여동생 정순옹주와 정숙옹주가 있다. 전주 이씨 견성군파의 파시조이다.
1507년(중종 2년)에 정국원종공신 전산군 이과의 역모 사건 때 추대대상이 되었다하여# 강원도 간성으로 유배갔다가 그 해 11월 20일에[3] 사약을 받고 죽었다.# 향년 26세.[4]
2. 사후
묘는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동에 있으며 2014년 9월 30일 남양주시의 향토유적 제12호로 지정되었다.
죽은 후 1년 뒤에 역모에 가담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밝혀져 신원되었다.#
3. 여담
- 1505년(연산군 11년) 6월에, 궁궐과 가까운 회산군과 견성군의 집을 빼앗아 그곳에 가흥청을 두게 하고 대신 견성군과 회산군에게는 다른 집을 마련해주었다고 한다. 가흥청(假興淸)은 연산군이 전국에서 소집한 기생 중 아직 궁궐에 들어가지 않은 사람을 이르던 말이다.[5]
- 1506년(연산군 12년) 7월에, 유은종이란 사람의 집을 빼앗았다. 이에 화가 난 유은종은 술먹고 취할 때마다 견성군의 집 앞에서 “왜 남의 집을 빼앗냐!”며 분노어린 주정을 부렸고, 이에 견성군은 유은종에게 없는 죄를 뒤집어 씌워 사형당하게 만들었다.#
4. 가족과 후손
참봉 신우호의 딸인 영양군부인 평산 신씨와 혼인하여 슬하에 2남 1녀를 두었다. 딸의 이름은 이정묘이다.
장남은 완산군 이수함(完山君 李壽諴)이고 차남은 계산군 이수계(桂山君 李壽誡)이다. 계산군은 아들이 없던 큰아버지 회산군의 양자로 출계했다. 완산군은 3남을 낳았고 이들의 후손이 번성하여 오늘날의 전주 이씨 견성군파를 이루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