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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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중기의 왕족. 성종의 4남이자 서3남으로, 어머니는 숙의 홍씨[2] 이다. 친남매로는 누나 혜숙옹주와 남동생 회산군, 견성군, 익양군, 경명군, 운천군, 양원군, 그리고 여동생 정순옹주와 정숙옹주가 있으며 전주이씨 완원군파의 파시조이다.
2. 생애
1489년(성종 20년)에 완원군으로 봉해졌다. 1494년(연산군 즉위년) 성종이 세상을 떠나자 아침 저녁으로 상식을 올리는 등 지극한 효성을 보였다고 한다.
2.1. 갑자사화에 연루되다
1504년(연산군 10년) 갑자사화 당시 연산군이 어머니 폐비 윤씨 사사 사건의 주모자라고 생각한 귀인 정씨와 귀인 엄씨를 때려죽일 때, 궁녀 나읍덕과 칠금 등이 완원군의 집으로 찾아가 궁궐에서 보았던 끔찍한 참상을 이야기했다. 그런데 그걸 전직 예조의 전의감정이었던 김괴가 알아채서 왕에게 고했다. 분노한 연산군은 선전관 2명에게 남경수소의 입직군사 30명을 거느리고 완원군의 집을 포위하라고 지시했으며 집을 드나드는 사람들을 전부 잡아들이라 명했다. 사건의 원인을 제공한 나읍덕과 칠금을 비롯한 완원군의 종 존이와 그의 어머니 존비 역시 체포되었다.
그러면서 연산군은 “완원군의 측실이 궁인과 결탁하여 ‘궁중의 임금에 관한 일’을 누설했는데 완원군이 집에 있으면서 그걸 몰랐겠느냐”며 이 사건을 의금부에서 추국하게 했다.# 결국 나읍덕과 함께 체포된 이들은 전부 사형당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완원군은 연산군에게 “궁중의 임금에 관한 일은 바로 형제위수족(兄弟爲手足)."[3] 이라며 바른 말을 하다가# 연산군의 진노를 사 충청도 부여현에 유배되었다. 얼마 뒤 인수대비가 승하하자 잠시 한성으로 돌아와 인수대비의 상을 치뤘다. 중종반정 이후 사면되었고 정국원종공신 1등에 책록되었다.
3. 사망
1509년(중종 4년) 12월 7일에[4] 사망했다. 향년 29세[5] 묘는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분수원리(마장2리)에 있다.
4. 여담
5. 가족과 후손
1492년(성종 23년)에 면천군부인 전주 최씨와 혼인하여 슬하에 1녀를 두었다. 최씨 부인은 1500년(연산군 6년)에 사망했고, 2년 뒤에 정선군부인 양천 허씨와 재혼하여 슬하에 2남 2녀를 두었다. 최씨 부인에게서 본 딸에 대한 정보는 알려져 있지 않고 허씨 부인이 낳은 두 딸은 각각 하양 허씨 허귀와 덕수 이씨 이원겸과 혼인했다.
장남은 이성군 이수강(伊城君 李壽剛)이고 차남은 이천군 이수례(伊川君 李壽禮)이다. 이천군은 서숙부 운천군의 양자로 출계했다. 이성군은 아들 둘을 낳았고 이들의 후손이 번성하여 오늘날의 전주 이씨 완원군파를 이루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