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특별자치도/역사

 


1. 조선시대 이전
3. 근현대
3.1. 근대
3.2. 현대


1. 조선시대 이전


독립소국 탐라국이 있었으며, 그 이전에는 주호 세력이 존재하였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따르면 원래 한반도 본토의 나라들과는 매우 문화가 이질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탐라국, 원나라 등을 제외하면 한반도 왕조에 속해있었는데 백제의 부용국 → 통일신라의 속국 → 고려의 속국 → 고려에 합병 → 삼별초원나라에 합병 → 고려 → 조선대한제국을 거쳤다.
그리고 탐라국은 938년 평화적으로 왕조를 닫게되었지만, 나라의 지위는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1105년 고려에 의하여 탐라군으로 격하되면서 나라의 지위가 없어졌다. 그러나 이후에도 자치권은 있었는데, 이것마저 금지된 게 1402년 조선초이다. 자세한 사항은 탐라국 문서 참조.

2. 조선시대


조선태종 때 탐라국 체제를 폐지하고 전라도 제주목, 정의현, 대정현의 세 행정구역이 설치되어 완전하게 중앙정부의 지휘를 받는 행정구역으로 되었다. 제주목은 현재의 제주시와 유사하며, 대정현과 정의현간 경계는 현재 서귀포 신시가지를 가르는 것으로 보이며 결국 옛 대정현의 강정동과 옛 정의현의 법환동-서호동을 가르는 경계로 추측된다. 제주목과 정의현, 대정현은 법적으로는 수평적인 위치와 권한을 가졌으나 실질적으로는 제주목의 수장인 제주목사가 제주도 전체를 관할하였다. 3개 고을 중 제주목이 가장 인구가 많고 본토와의 연결도 하는 등 제주도 전체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으며, 제주 목사가 제주도 전체의 방위를 책임지는 군사권도 가지고 있엇다. 제주목 관아는 제주시 삼도2동 지역에, 정의현 관아는 서귀포시 표선면 성읍민속마을 내 구역에, 대정현 관아는 서귀포시 대정읍 보성초등학교 터에 있었다. 이중 제주목과 정의현의 관아는 현대에 복원, 보존하고 있으나 대정현 관아는 여전히 터만 남아 있다.
섬 지역이라는 지리적 특성으로 인해 악명높은 유배지로 이름이 난 지역이 됐다.[1] 사실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원나라명나라가 황실 인사나 세력가들을 유배보내는데 이용했고 고려 조정의 경우에는 소수에 그쳤으며 그마저도 잠시 머물다 오는 식이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 건국에 반대한 고려 신하들을 유배보내기 시작하여 문헌상으로는 태종의 비 원경왕후의 두 동생인 민무구, 민무질 형제가 조선 최초의 제주유배자였다고 한다. 이후 제주도는 왕족들이나 유력 정치인의 유배 단골 코스로 활용되었고 대표적으로 광해군, 소현세자의 아들들, 송시열, 김정희, 최익현이 있고 조선시대에 제주로 유배된 사람은 대략 300명에 이르는 것으로 파악된다. 구한말에 이르러서는 유배인들이 유람차 온 것으로 여겨 제주성내에서 모임을 갖거나 주변 경승지를 찾아 유람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또한 과거 유배인들은 현지인들과 일시적인 관계만 유지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학맥을 찾아 계승하는 양상도 보였다.
또한 전통시대 공물을 많이 바치는 것으로도 악명이 높기도 하였다. 대표적으로 이 있었으며 해산물 또한 주요 공물품이 되었다. 귤 같은 작물의 경우 제주도에서 나는 최고의 산물로 평가되어 왕족들을 위한 진상품으로 엄청 보내려 했다고 한다. 귤나무에 맺힌 열매 하나하나마다 기록해서 그 물건들을 다 바치라 했다 하는데 태풍이라도 맞으면 내야될 공물은 그대로인데 수확물은 토막토막난 상태이니... 정작 그래놓고 '''가는 길에 썩어서''' 왕에게 전달되지 못한 경우도 많았다. 하여튼 그 때문에 그 괴로움을 견디지 못한 주민들이 뜨거운 물을 부어 귤나무를 없애려 시도도 했다.
제주도의 방어시설은 3성 9진 25봉수 38연대로 요약 가능. 봉수는 먼 거리를 감시하는 데에 연대는 가까이에서 확인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봉화대 같은 통신시설이었다.
당시 제주도는 바다가 인해 매우 험하여 제주목사로 발령받은 관리는 사임을 할 정도로 가기를 꺼려하는 오지이기도 하였다. 가다가 풍랑으로 죽는 경우도 있기도 했으니. 하지만 탐관오리들에게 인기인 지방이었는데 본토와 떨어져 있어[2] 중앙의 입김이 잘 미치지 않기 때문에 일단 백성들 쥐어짜서 부정축재하기에 좋고 경치가 좋으니 놀러다니기도 좋고 또 소 목장이 있어서 쇠고기 먹기도 좋았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조선은 농본국가라 소 금살령이 자주 내려져서 벼슬아치들도 쇠고기 먹기가 힘들었다고 한다. 물론 제주도 소는 정부 소유라 함부로 잡으면 안 되지만 자연사한 소라고 허위보고하고 몰래 잡아먹었다고 한다. 거기에 덧붙여 귀한 한약재였던 우황 역시 짭짤한 부수입 거리였다. 더군다나 주로 기르던 소는 제주 토종 흑우로 진상품이었다.
그래도 제주에 부임하여 선정을 베풀고 간 목사도 엄연히 있었다. 이약동 제주목사는 당시 한라산 정상에서 지내던 제사로 인해 물건을 지고 한라산을 올라야 하는 백성들의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었기 때문에 지금의 아라동 일대에 제단을 만들어 거기서 제를 지내도록 했는데 이것이 바로 산천단이다.
상당히 전투적인 곳이었다고 한다. 아무래도 중국이나 전라도로 가는 왜구들이 자주 들렀을 테니... 말도 많아서 기병의 비율이 한반도보다 더 높았다고 한다. 머릿수를 채우기 위해 여성도 예청(제주어다. 한자로는 女丁이라고 쓴다)이라 하여 군역을 졌다. 그런데 막상 임진왜란 때는 왜군이 제주도는 건드리지도 않아서 조선 영토 중 유일하게 평화로운 지역이었다. 그도 그럴것이 전쟁 명분이 중국으로 가는 육상 통행권이라서 일본이 제주도를 점령할 이유가 없었던 것으로, 나름 조선과 협상할 때 유리한 주장이라도 하려던 정치적인 계산을 한 걸로 보인다. 그래서 임진왜란 내내 제주도는 본토에 대한 식량 등 물자 지원에 집중하였다. 당시 제주 목사인 이경록이 제주도 병력을 본토에 지원하겠다는 제안을 조정에 보냈으나, 조정에서는 뜻은 좋지만 제주도의 방어도 중요하다며 이를 반려시켰다. 또한 김만일이라는 사람은 조정에 제주마 500여 필을 헌납하여 헌마공신이라는 칭호를 받기도 하였다.
또한 출륙금지령도 큰 고통이었다. 조선 초기에는 왜구가 소탕됨에 따라 제주도가 평화로워지면서 호적상 인구가 1만 명에서 6만 명으로 급속히 증가하는 시기를 겪었고, 이에 따라 인구가 과밀해지자 조정에서 실업자는 삼남지방, 범죄자는 평안도와 함경도로 이주를 보낼 정도였지만 16세기부터 17세기까지 공납이 늘어나게 되면서 사회문제로 떠올랐고 희귀한 특산품이 많은 제주도의 특성상 제주도가 그 피해를 직격으로 받았다. 늘어나는 공납부담에 제주도민들이 삼남지방으로 이주하는 경우가 늘어나는 바람에 인구가 감소하기 시작했고, 인구감소 문제가 심각해지자 결국 인조대에 제주도민은 아예 본토로 이주가 금지되었다. 처음에는 단순히 출륙을 금지하는 수준이었지만 그럼에도 본토로 이주가 이어지자 배를 만드는 것이 금지되었기 때문에 어선 대신 뗏목인 테우를 써야했고, 때문에 과부 숫자가 더더욱 늘어나게 되었고 조선 중후기의 제주도는 사실상 감옥이나 마찬가지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정조 때 최초로 김만덕이 흉년에 재산을 내어 제주도 사람들을 구휼한 공로로 국가에서 육지여행을 허락한 바 있다. 출륙금지령이 풀리게 된 것은 순조 시절에 이르러서였다.
자세한 사항은 조선시대 제주도의 진상품 고난 문서 참조.
따라서 제주도는 조선시대 내내 '''수탈과 유배의 역사로 현대사 못지 않은 고통의 역사를 겪은 슬픔과 눈물의 섬'''이었다.

3. 근현대


외로운 대지의 깃발

흩날리는 이녁의 땅

어둠살 뚫고 피어난

피에 젖은 유채꽃이여

검붉은 저녁 햇살에

꽃잎 시들었어도

살 흐르는 세월에

그 향기 더욱 진하리

아아... 아아...

아 반역의 세월이여

아 통곡의 세월이여

아 잠들지 않는 남도

한라산이여

잠들지 않는 남도(안치환)

'''슬픔의 섬'''
학살, 강제노동 등 한국의 근, 현대사에서 손가락 안에드는 참변이란 참변은 모조리 겪었다.[3]

3.1. 근대


1885년 영국이 거문도를 점령하자 러시아 함대가 이에 대항하여 제주도를 점령하려고 시도한 제주성 위협사건이 일어났다.
1896년 23부제를 실시하면서 제주목, 정의현, 대정현을 제주부(府)로 통합하였다가, 1년 만에 복구하면서 전라남도 관할하에 두었다.
1901년 가톨릭 신자들의 횡포에 맞서 봉기한 신축민란이 일어났다.
일제강점기인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 때 제주목, 정의군, 대정군 및 완도군 일부(추자면)를 제주군으로 통합하였으며, 다음 해인 1915년 5월 군제(郡制)를 폐지하고 도제(島制)를 실시하면서 제주군을 제주'''도(島)'''로 개칭하고, 군수(郡守)를 도사(島司)로 개칭하였다. 여기서의 도(島)는 행정구역 단위 명칭으로 쓰인 것. 같은 시기 울도군(울릉군)도 울릉도(島)로 개칭되었다.
원래 제주도의 행정구역은 제주목[4]·대정현[5]·정의현[6] 세 고을로 이루어져 있었고, 이들 고을은 다시 방위에 따라 각자 좌면·중면·우면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이후 제주목의 좌면과 우면이 너무 넓어 신(新)과 구(舊) 자를 붙여 제주목을 구우면·신우면·중면·신좌면·구좌면으로 나눴고, 역시 지나치게 넓은 정의군 중면 역시 동중면·서중면의 두개 면으로 나뉘어졌다.
그리고 1914년 일제가 이들 행정구역을 제주군으로 통합하면서 원래 군의 중심지였던 제주목 중면과 정의군 좌면, 대정군 우면을 제주면·정의면·대정면으로 개칭하였다. 하지만 나머지 면 이름들은 그대로 두었고, 그 결과 제주도 안에 방위를 나타내는 이름의 면이 구좌·좌·신좌·동중·중·서중·구우·우·신우의 9개나 되는 헬게이트(...)가 열렸으며, 구좌면·신좌면은 동쪽에, 구우면·신우면은 서쪽에 있는데 좌면은 서쪽에, 우면은 동쪽에 있는 등 완전히 행정구역 방위와 이름이 뒤죽박죽된 상태였다. 결국 1935년 이들 면들은 구좌면을 제외하고는 (주로) 면소재지 이름을 따서 모두 개칭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제주도 사람들이 일본과 매우 긴밀히 연결된 편이었다. 제주 섬 인구의 1/4 정도 되는 인구가 일본 오사카 쪽으로 일하러 갔다 왔을 정도다. 광복 시점의 제주 인구가 30만 명 정도인데 이 가운데 10만 명 가까이가 오사카 등 공장지역에서 일하다가 광복과 함께 귀향한 인원이라 한다. 하지만 3년 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생각하면... 물론 당시의 일본 행정당국이나 일본인 지주에 대한 감정이 좋았다는 얘기는 결코 아니고, 제주도에서 소규모였지만 의병이 일어나고 3.1 운동이전의 법정사항일운동이나 3.1 운동의 일환인 조천만세운동, 일제의 경제수탈에 맞선 해녀항일운동 등 일본에 저항하는 일이 이어졌다.
지금도 재일교포 중 상당수가 그 근원을 살펴보면 조상이 제주도 사람인 경우가 많다. 재일교포 100만명 중에서 제주도가 본적이거나 고향인 사람이 20만에 달한다고 한다. 제주도 인구가 대한민국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1% 정도라는 걸 생각한다면 굉장히 큰 비중을 차지한다. 다큐멘터리로도 소개된 모리오카 냉면 체인인 뿅뿅사의 창업자인 변용웅씨의 부모가 제주도 출신이었으며, 새끼돼지 김정은의 어머니 고영희 또한 제주도 출신 교포부부의 자녀로 총련 소속이었다가 북한에 들어간 후 김정일과 만났다고 한다. 일본 최대의 도시락 체인 혼께 가마도야사의 오너인 김홍주씨도 제주도가 고향. 혼께 가마도야사의 국내 협력사가 한솥도시락으로 일본에서의 운영방식을 한국에도 그대로 도입했다고 한다. 한국에서도 잘 알려진 재일 음악가 양방언 역시 아버지가 제주시 한림읍 협재리 출신이다.
다만 인구대비 재일교포가 많은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조선시대부터 이루어진 식자층의 유배였기 때문이다. 사실상 제주도에서의 유배는 다시는 육지(즉 한번도) 밟지 못하는 경우가 가장 많았고 이때문에 제주도에서 아에 살림 차리는 경우가 많았는데, 유배의 특성상 식자층들이 많이 찾아왔다. 거기다 유교문화로 인해 배움을 중시하는 특성상 그 좁은 제주도 곳곳에 사당이 세워지고 식자들이 사람들을 가르치면서 조선시대는 물론이고 해방이후 초, 중등교육이 의무화 되기 전까지 문맹률이 가장낮은 지역또한 제주도였다. 이때문에 신식문물에 대한 반감이 덜하고 같은 한자권이다 보니 말도 어느정도 통해서(히라가나어는 몰라도 가타카나 어는 한자로 통한다.) 많은 이들이 일본으로 넘어가게 된 것.
하지만 반대급부로 1910~1920년대 후반 일본 지식인들 사이에 퍼진 사회주의에 대한 낭만 혹은 과장된 면 또한 흡수하면서 해방이후 남로당 세력이 뿌리깊게 활동할 수 있었으며, 이것이 비극의 시발점이 되기도 하였다.
태평양 전쟁 말기 일본은 "결호작전"에 따라 미군의 상륙작전에 대비하고자 했고 전 일본영토에 요새화를 지시했는데, 제주도는 중국과 일본 사이에 있는 전략적 거점이었기 때문에 "결7호 작전"에 따라 요새화가 시작되었다. 섬 곳곳에 토치카와 지하땅굴이 파여졌으며 항공대가 주둔했다. 해안 절벽엔 가이텐이나 신요와같은 자살병기들이 배치되었고 이 과정에서 제주도민들이 강제 노역에 동원되었고 강제공출로 주민들의 생활은 피폐해져만 갔다. 일제의 흔적들은 아직도 남아있으며 '''땅굴'''은 제주도에 수학여행가는 학교들이 많이 거쳐가는 곳이기도 하다. 168cm 정도 키인 사람도 정신줄 놓고 똑바로 서서 다니다가는 머리를 부딪치는 적이 있는 땅굴인데, 하여튼 위에 써놨듯 '''미친 짓'''.
이 시기 제주도의 요새화에 관해서는 결7호 작전 문서를 참고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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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생겼다. 제주 해안을 둘러보다 보면 많이 볼 수 있는데, 자연동굴도 있겠지만 인공 동굴의 숫자도 무시못할 것이다.
소규모이기는 하지만 실제로 제주도가 미군의 공격을 받기도 했다.#
만약 몰락 작전 같은 작전이 현실로 이루어졌다면 제주도는...

3.2. 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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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해방 이후 1946년 8월 1일 도제(島制)가 폐지되고 도제(道制)를 실시하면서 제주도는 전라남도에서 분리되어 제주도(道)로 승격되었다. 그리고 제주도 설치와 함께 남북을 분할하여 북제주군, 남제주군의 2개 군을 설치하면서 1도-2군-1읍(제주읍)-12면 체제가 되었다.[7] 현재의 제주특별자치도와 비교하면 북제주군이 지금의 제주시이고 남제주군이 지금의 서귀포시인 셈이다.
1948년부터 1954년까지 '''현대사의 비극''' 중 하나이자 양민학살 사건인 '''제주 4.3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6.25 전쟁 중이던 1951년, 유엔군사령부미국 합동참모본부38선을 돌파한 중국 인민지원군이 남진을 계속하여 금강 부근까지 내려올 시, 대한민국 정부를 제주도로 후퇴시킬 극비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8] 그러니까 제2의 국부천대. 그 이전에 미국북한군낙동강 방어선을 위협할 때도, 한반도가 함락될 경우 남은 한국인들을 서사모아 등지로 보낼 계획을 세우기도 했었다.[9] 이 계획이 실행되지 않은 것은 물론 유엔군이 중국군을 막아내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지만, 제주도를 대만화하기에는 제주도의 면적이 너무 작았던 탓도 있다.[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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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 북제주군 제주읍이 제주시로 승격되었고[11] 1956년엔 한림면이 한림읍으로 승격되면서 남부지방은 한경면으로 분리되었다. 또한 서귀면이 서귀읍으로, 대정면이 대정읍으로 승격되었다.
1961년 5.16 군사정변으로 수립된 박정희 정부가 제주도를 관광지역으로 개발해보고자 여러가지 개발정책을 추진하였는데 그 중에 하나가 연동과 노형동 일대에 세워진 신제주 도심이다. 그리고 수도공급용으로 어승생악 수원지를 만들었고 어업활동도 장려하였다.
1980년 애월면이 애월읍으로, 구좌면이 구좌읍으로, 성산면이 성산읍으로, 남원면이 남원읍으로 승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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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남제주군 서귀읍과 중문면이 서귀포시로 승격되었다. 제주시와 서귀포시가 각각 북제주군과 남제주군의 정 중앙에 있었기 때문에 북제주군과 남제주군은 행정구역이 동서로 분리되는 모양을 취하게 되었다. 1985년 조천면이 조천읍으로 승격되었다.
1995년 지방자치제가 전면실시되면서 첫 민선 도지사로 신구범 후보가 당선되었고 이후 우근민김태환이 번갈아가면서 도지사를 맡아 제주판 3김으로 군림하였다. 이후 2014년 원희룡 후보의 당선으로 제주판 3김 체제는 깨지고 2018년 원희룡 도지사의 재선으로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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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는 현재 '''한국 최고의 관광지'''로 발전하였고 대규모 관광 개발을 해서 더욱 발전시켜보자는 당시 중앙정부(참여정부)의 주도로 2006년 7월 1일 고도의 자치권을 보장받는 특별자치도로 출범함과 동시에 제주시와 북제주군이 행정시인 제주시로, 서귀포시와 남제주군이 행정시 서귀포시로 통합되었다.[12] 위에서도 언급되었듯이 제주시와 서귀포시는 각각 북제주군과 남제주군에서 분리 승격된 시였기 때문에 일종의 역전인 셈이다. 그렇지만 4개 자치구역이 2개 행정구역으로 격하된 셈이고, 통합 10년 가량 지난 2020년에도 제주시내와 서귀포시내를 벗어나면 인가는커녕 창고나 목장조차 드문 땅이 펼쳐진다.[13] 그래서인지 주민들은 엄연히 같은 시내임에도 읍면지역을 시외라 부르고 시내동 지역만을 시내라 부르는 경우가 많다.
여담으로 본토에서는 부산영도구가 제주도 출신들이 모여살기로 잘 알려진 지역이다. 공교롭게도 이곳도 섬이다. 전국의 자치구 중 유일하게 오직 섬으로만 구성된 곳. 물론 제주도와 달리 영도는 부산 본토와 영도대교, 부산대교, 남항대교로 이어져 있다. 영도에는 제주은행의 셋밖에 없는 육지 내 지점까지 있다. 부산광역시 전체에 1057명의 해녀가 등록되어 있는데 대부분 제주에서 이주해 간 60~70대의 할머니. 단발령이 시행되면서 제주 말총으로 을 만들던 많은 제주인들이 생활고를 견디지 못하고 부산으로 옮겨온 것이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1948년부터 현재까지 '''타국군에 점령당한 적 없이 온전히 대한민국의 영토로서 기능해 온 지역''' 중 하나이다.[14]
[1] 이 때문에 조선시대에 제주도는 원악도(遠悪島)라는 별칭으로 불렸다고 한다.[2] 행정구역상 전라관찰사의 관리를 받아야 하지만 섬이라는 특성으로 사실상 제주목사가 실세로 군림하였다.[3] 제주 4.3 사건은 천지지변이 아닌 참사에서 일어난 인명피해중 '''6.25 전쟁 다음으로 사망자가 많은 학살 사건이다.''' 또한 결7호 작전의 경우 아예 섬을 요새화 시키려고 했으며 만약 원자폭탄이 늦게 개발되었다면 '''오키나와나 이오지마 처럼 되었거나, 히로시마처럼 될 수도 있었다.'''[4] 현재의 제주시.[5] 현재의 대정읍과 안덕면, 서귀포시의 일부.[6] 현재의 남원읍과 표선면, 성산읍, 그리고 나머지 서귀포시의 일부.[7] 제주도 - 북제주군(제주읍, 구좌면, 추자면, 한림면, 조천면, 애월면), 남제주군(성산면, 남원면, 중문면, 대정면, 표선면, 서귀면, 안덕면).[8]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당시 북한군이 제주도에 진입하려면 남해를 건너야 하고 그러려면 보급선을 최대한 길게 유지해야 했기 때문에 북한군이 제주도를 우선시하지 않았던 것도 있었다. 결과적으로 '''제주도는 6.25 전쟁 당시 전쟁터가 되지 않았던 안전지대가 될 수 있었으며''' 이 때 제주도에 소재하고 있던 제1육군훈련소(일명 강병대)를 통하여 전쟁에 참전할 신병들이 다수 육성될 수 있었다.[9] 낙동강 전선 당시에는 이승만 대통령이 직접 측근으로부터 제주도로 피신을 해야 한다는 보고를 듣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 본인이 권총을 꺼내면서 정부를 사수하겠다는 의지를 보이는 등 동의하지 않아''' 결국 없는 일이 되어버렸고, 결정적으로 국군 및 UN군이 전선 자체를 사수해냈기 때문에 서사모아 망명안 역시 단순한 제안으로만 끝났다.[10] 대만의 면적 : 3만 6179㎢, 제주도의 면적 : 1825㎢. 제주도는 현무암질의 토양을 가지고 있는 지질학적 특성상 농토가 척박하고 식수조차도 해안가에 나오는 용천수에 의존해야 하는 등 많은 수의 인구를 부양할 수 없는 열악한 환경을 지니고 있다. 더구나 1950년 당시에 제주도는 이렇다할 인프라도 없는 깡촌의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이 당시 제주도로 천도했다면 대한민국은 광복 직후보다도 더 열악한 빈국으로 전락했을지도 모른다. 더구나 제주 4.3 사건의 영향으로 이승만 정권에 대한 반감이 쌓인 상태에서 대한민국 정부의 통치를 인정하지 않고 제주도민들이 제주 독립운동을 일으켰을 가능성도 있거나 자그마한 섬 지형의 특성상 한반도 전역을 장악한 통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군사적 위협과 독립국가 불인정에 안보/외교적으로도 남한 본토 지역을 통치하고 있는 현재의 대한민국보다 더 취약성을 드러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11] 당시에는 기초자치단체가 시-군 체제가 아니라 시-읍-면 체제였다. 나중에 1961년 5.16 군사정변으로 시-군 체제로 바뀌고 읍면은 하위지역으로 격하되었다.[12] 행정시란 지방자치권을 갖는 일반적인 (市)와는 달리, 제주특별자치도 산하의 단순 행정기구로서의 역할만을 수행한다. 때문에 시장 선거도 하지 않고 시의회도 존재하지 않으며, 제주특별자치도지사가 시장들을 임명한다. 일반 시 예하의 일반구와 같은 개념이라고 보면 된다.[13] 그래도 제주시내동에 인접한 하귀리나 신촌리, 함덕리 등은 사람들이 꽤 모여 살고 있다.[14] 6.25 전쟁 당시 낙동강 전선 이남에 위치해있었던 영남지방(대구광역시, 경상남도 일대), 울릉도독도, 그리고 전라남도의 신안과 진도 등을 제외한 전국이 최소 한 번 이상씩은 북한군에게 점령당한 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