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궁
1. 개요
法宮. 궁궐 중 으뜸 되는 궁궐로, 왕이 임하는 제1궁궐을 뜻한다.[1] 법궁이 아닌 궁은 '이궁(離宮)'이라고 불렀다. 다만 왕은 정작 법궁보다 별궁에서 일하고 지내는 경우도 많다. '정궁(正宮)'이라고도 한다. 법궁의 중심되는 전각을 '법전(法殿)'이라 했다(예: 경복궁의 법전은 근정전).
법궁은 예법에 의해서 딱딱한 구조로 만들어지기 때문에, 실제로 생활하는 데 있어서 상당한 불편함을 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위에 언급했듯이 별궁이나 이궁에서 지내는 경우가 많았다. 공식적으로 튈르리 궁전과 루브르 궁전이 정궁의 역할을 하던 프랑스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파리에 멀쩡히 잘 있는 정궁을 냅두고 굳이 그 위성도시에 베르사유 궁전을 축조하여 살았던 건 이런 이유다. 덕분에 프랑스 대혁명 때 파리 시민들이 요구한 내용 중의 하나가 베르사유에 있는 왕실더러 튈르리 궁전으로 환궁하라는 것이었다.
러시아 역시 겨울궁전과 여름궁전을 두었으며, 중국 또한 마찬가지여서 명나라와 청나라 역대 황제들은 딱딱한 자금성에 지내기보다는 주변 황궁에서 지내거나 청나라의 경우 다중수도와 비슷하게 여러 지방에 별궁들을 짓고 북경 자금성에선 1년의 3분의 1만 지냈다.[2] 대표적인 별궁이 피서산장이다.
조선의 경우 원래 법궁인 경복궁보다는 실제 생활하는 데 편한 창덕궁을 왕들이 선호했으며 임진왜란으로 경복궁 소실 후 고종때에 경복궁 복원사업을 진행하기전까지[3] 그냥 방치되어 광해군때 복원이 완료된 창덕궁이 사실상의 법궁 역할을 했다. 위에 언급한 다른 나라 예시와 달리 창덕궁은 경복궁이 없어진 동안 공식적으로도 법궁으로 선포되었기 때문에 좀 다른 케이스기는 하다.
법궁이라는 용어와 개념 자체는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나왔지만, 유럽을 비롯한 타 문화권에도 군주가 거주하는 정식 궁전과 부수적인 별궁으로 구분하는 경우는 많이 존재한다.
청와대 등 공화국의 국가원수의 관저를 간혹 법궁에 비유하는 경우가 있다. 일부 관저는 건축 양식상 궁궐과 유사하고, 현대 사회에도 국가원수 관저가 가지는 정치적 위치가 과거 법궁의 위상에 견줄 만한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2. 목록
- 신라의 법궁은 오늘날의 경주 월성이다. 월성이 위치한 언덕이 초승달 혹은 반달 모양이기 때문. 신라 당시부터 월성(月城), 혹은 왕이 머무는 곳이라 해서 재성(在城), 왕성 등으로 불렸다.
- 고려의 법궁은 이름이 따로 없었으며 단지 본궐(本闕)로만 불렸다.[4] 후에 본궐이 황폐화되어 별궁 연경궁(延慶宮)과 동일시 된다. 그래서 15세기엔 연경궁으로도 불렸다. 고려 멸망 후 16세기부터 만월대로 불리게 된다. 관련정보. 몽고와 전쟁을 치루게 되면서 강화도로 천도, 강도(江都)에 개경의 본궐 및 별궁 등을 그대로 본따 짓는다. 그래서 2차 법궁은 강도 본궐이 된다. 고려궁지 문서 참조. 몽고와 전쟁을 멈춘 뒤, 개경에 돌아와 3차 법궁으로 다시 개경 본궐(연경궁)을 사용한다. 그러나 공민왕 때 홍건적의 난으로 또 붕괴, 수창궁이 4차 법궁이 된다. 위와 별개로 고려는 서경 장락궁에 황성#s-2을 두르고 영봉문과 영봉루를 세워[5] 개경 법궁과 같은 격식을 갖추게 했다.
- 일본국의 정궁은 고쿄이다. 이는 일본이 지금도 군주제가 유지되는 만큼 현재진행형. 다만 고쿄가 별궁이며 교토고쇼가 법궁이라는 말도 있다. 황실에서 딱히 공식적인 입장을 내지는 않고 있다.
[1] 출처 "조선시기 고려 法宮에 대한 지식의 변천", 장지연(서울시립대학교 교수)[2] 단적으로 중난하이의 전경과 자금성의 전경, 창덕궁과 경복궁의 전경을 비교해보면 드러나는데, 전자들은 녹음과 목조 건축물의 조화되어 편안한 느낌을 주는 반면에 후자들은 석재 바닥에 목조 건축물이 올라간 모습을 보여주어 삭막한 느낌을 준다.[3] 고종때지만 흥선대원군의 섭정기간으로 복원 사업 역시 대원군이 주도했다.[4] 본궐은 정궁(正宮)과 같은 말로 공식 궁궐이란 뜻이다.[5] 개경 본궐도 신봉문, 신봉루, 위봉문, 위봉루 봉 자 돌림 문과 누각이 있었다.[6] 흔히 알고 있는 베르사유 궁전은 베르사유에 어릴 적 추억이 많았던 루이 14세가 그 곳에 자신의 권위를 나타내기 위해 만들어낸 별궁이다. 베르사유 궁전은 프랑스 왕국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수도였던 파리에 있지도 않는다.[7] 실질적인 법궁역할을 하는 사도 궁전은 본래 별궁이다. 이탈리아 통일로 인해 교황령이 해체된 것과 라테라노 조약을 통하여 교황령의 후신인 바티칸 시국이 출범한 사건으로 인해 법궁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이렇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