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승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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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전 법조인.
2. 생애
1895년 5월 14일 경상도 안동대도호부(현 경상북도 안동시)에서 태어났다. 1908년 관립한성외국어학교 일어부에 입학하여 1911년 졸업하였으며, 1922년 일본 주오대학 전문부 법과에 입학하여 1926년 수석 졸업하였다.
1915년 조선총독부 판임관견습시험에 합격하였으며, 1916년 황해도 연백군청에서 판임관견습으로 관직생활을 시작하였고 1918년부터 1920년까지 연백군청 서기로 근무했다.#
그러다가 1920년 돌연 관리생활을 그만두고 1922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의 주오대학 전문부 법과에 입학했으며, 주오대학 재학 중이던 1925년 조선변호사시험에 합격했다. 이후 남은 학업을 마치기 위해 학교로 돌아가 1926년 주오대학 법과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귀국하여 그 직후부터 변호사로 활동하였다. 1926년에는 경성부, 1928년에는 황해도 해주에 사무소를 개업했으며, 1930년부터는 다시 경성부로 돌아와 1946년까지 변호사로 활동했다.
변호사 개업 직후에 김병로·허헌·이인 등과 함께 일본인변호사회와의 통합을 끝까지 반대하였다. 또한 독립운동 관련 사건에 대해서는 무료로 변론했는데, 특히 조선공산당 사건 당시 검거된 조선공산당원의 담임변호사로 변론을 맡아 공판과정에서 사법권 침해, 고문경찰관 고소, 재판장 기피 문제 등으로 연일 재판소 당국과 설전을 벌였다. 또한 피고인들의 건강문제 및 자유로운 공판을 위한 보석문제를 끈질기게 요구하여 재판소 당국자들을 당혹스럽게 했다. 후일 '간도공산당사건'의 핵심인물들에 대해서도 무료변론에 나섰다.
1927년 신간회 본부 및 경성지회 간부로 활동하고, 광주학생항일운동으로 구속된 학생들의 변론을 담당했다. 1928년 1월 『조선일보』에 조선총독부의 한국인에 대한 인권침해를 지적했다가 구속된 조선일보사 주필 안재홍과 편집인 백관수에 대해 김병로·허헌·이인 등과 함께 변론을 맡았고, 1929년 6월에는 중국 상하이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된 여운형을, 1932년에는 마찬가지로 상하이에서 체포된 안창호의 변론을 맡았다.
이외에도 '해주고등보통학교 비밀결사 사건', '동방무정부주의자동맹 사건', '조선일보지국장 폭행사건' 등 192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의 독립운동 및 사상문제에 관한 변호를 도맡았다.
1945년 8.15 광복 직후에는 한국민주당 발기인, 사법요원양성소 부소장, 과도정부의 사법부 법제처장을 역임하였다. 1948년 사법부차장을 맡았으며, 제헌 헌법 제정 당시 참고안으로 소위 권승렬안을 제출하였다. 이 안이 제헌 헌법에 미친 영향은 크지 않으나, 국호를 '조선'이라고 하고 '인민'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던 유진오의 초안과는 달리, 제헌 헌법이 국호를 '대한민국'이라고 하고 '국민'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게 된 데에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승만 정부가 출범하자 검찰총장, 초대 법무부 차관을 지냈다.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구성되었을 때는 특별검찰부장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여담으로 법무부 장관 재직 시절 경찰들한테 수모를 겪은 적이 있는데, 여순반란사건 때 경찰이 정치적 뒷배를 믿고 항명을 한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꽤 복잡한데, 기술하면 다음과 같이 전개되었다.
해방 이후, 미군정청은 친일 경찰들을 대거 고용하였고, 이들은 자신들이 살기 위해 적극적인 반공주의를 채택하여 좌익 인사는 물론 자신들에게 거슬리는 사람, 심지어는 민간인까지 마구잡이로 잡아다 검찰에 넘겼다. 이 당시 일하던 검사 중에 박찬길이라는 검사가 있었는데, 이 박찬길 검사는 억울하게 잡혀온 사람들을 무혐의로 풀어주고, 지나치게 민간인을 괴롭히는 경찰공무원을 처벌하였다. 그중의 대표적인 사건이 산에서 벌목하던 인물이 경찰을 보고 놀라서 도망가자 총을 쏜 후, 다시 쫓아가 확인사살까지 해버린 사건이었다. 경찰은 이 사람을 빨갱이로 몰았지만 박찬길 검사는 해당 경찰공무원을 처벌했고, 이 행위에 대해 친일 경찰들은 박찬길 검사에 대한 증오심을 품었고, 박찬길 검사를 적구, 즉 빨갱이로 지칭하여 죽일 기회를 호시탐탐 노렸다.
그렇게 여순반란사건이 터지자, 경찰은 대피하였다가 검사국 명에 의해 출근하는 박찬길 검사를 잡아다가 반란 혐의를 뒤집어 씌운 뒤, 재판 절차도 생략하고 총살해버렸다. 이 사건은 당연히 권승렬 장관의 귀에도 들어갔는데[2] , 권승렬 장관이 당시 내무부 장관 윤치영에게 해당 경찰 처벌을 요구하자, 당시 해당 지역에 근무하던 일개 '''총경'''이 항명한 것이다. 독재 정권 시절 경찰이 정치 권력과 결탁해 권력의 주구가 되어 폭주한 대표적인 사례이며 박찬길 검사 처벌은 그렇게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이후 1949년부터 1950년까지, 그리고 1960년 등 두 차례 법무부 장관을 역임했으며, 1957년부터 1960년까지 한국법학원 원장을 지냈다.
1980년 9월 30일 서울 여의도동 자택에서 노환으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