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무부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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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법무부 장관'''
'''大韓民國 法務部 長官'''
'''The Minister of Justice
of the Republic of Korea'''

'''현직'''
박범계 / 제68대
'''취임일'''
2021년 1월 28일
'''정당'''

1. 개요
2. 권한
3. 역대 장관
4. 둘러보기
5.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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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정부조직법 제32조(법무부)''' ① 법무부장관은 검찰·행형·인권옹호·출입국관리 그 밖에 법무에 관한 사무를 관장한다.
대한민국 법무부의 장관.
과거부터 대부분 검찰청의 검사 출신들이 장관에 임명되었다. 보통 부(部)에서는 고등고시 출신 공직자들이 주요 보직을 독식하다가 인사적체를 없애기 위해 외청장 등의 보직까지 장악하는 데 비해 법무부는 거꾸로 검찰청에서 성장한 검사들이 법무부 주요 보직을 맡다가 장관까지 올라가는 셈이다. 다른 부처들과 달리 법무부는 고시 출신 공무원을 거의 받지 않고 검사들을 행정공무원으로 활용해 왔기 때문에 그렇다.
문재인 정부에서는 검찰개혁을 명목으로 비검찰 출신 인사, 특히 법학자 출신이 법무부 장관 자리에 임명되었다. 첫 번째 법무부 장관 후보자였다가 논란으로 인해 사퇴했던 안경환은 서울대 로스쿨 교수였고, 첫 법무부 장관이었던 박상기 역시 연세대 로스쿨 교수였다. 두 번째 법무부 장관인 조국 역시 서울대 로스쿨 교수였다. 조국 사퇴 이후에도 학자 출신이 법무부 장관으로 많이 거론되었으며, 리얼미터 여론조사에서도 학자>검사>판사>현역 의원 순으로 선호도가 높았다. 그러나 실제 후보자로 유력했던 사람들은 학자가 아닌 법조인 출신 정치인들이었는데, 변호사 출신인 전해철 의원, 판사 출신인 박범계 의원이 거론되다가 판사 출신으로 여당 대표를 역임한 추미애 의원이 지명되었다. 그로 후부터 12월 30일에 추미애를 교체하고 박범계 의원이 법무부장관에 내정되었다.

2. 권한


'''검찰청법'''

'''제8조(법무부장관의 지휘ㆍ감독)''' 법무부장관은 검찰사무의 최고 감독자로서 일반적으로 검사를 지휘ㆍ감독하고, 구체적 사건에 대하여는 검찰총장만을 지휘ㆍ감독한다.

'''제19조(고등검찰청 검사)''' ② 법무부장관은 고등검찰청의 검사로 하여금 그 관할구역의 지방검찰청 소재지에서 사무를 처리하게 할 수 있다.

'''제34조(검사의 임명 및 보직 등)''' ① 검사의 임명과 보직은 법무부장관의 제청으로 대통령이 한다. 이 경우 법무부장관은 검찰총장의 의견을 들어 검사의 보직을 제청한다.

'''제50조(검찰청 직원의 보직)''' ① 검찰청 직원의 보직은 법무부장관이 행한다. 다만, 이 법 또는 다른 법률에 특별한 규정이 있는 경우에는 그러하지 아니하다.

② 법무부장관은 제1항에 따른 권한의 일부를 검찰총장이나 각급 검찰청의 검사장에게 위임할 수 있다.

'''형사소송법'''

'''제463조(사형의 집행)''' 사형은 법무부장관의 명령에 의하여 집행한다.

외청으로 갖고 있는 대표적 권력기관인 검찰청의 인사 등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데, 검찰청의 검사들이 행사하는 수사지휘권, 영장청구권 등으로 인해 대통령과 지연, 학연 등이 감안되기도 하는 등 결국 충성할 사람을 뽑게 된다. 최초의 평화적 정권교체라는 타이틀로 김대중 정권이 들어선 후에도 이러한 기조는 그대로였기 때문에 소위 '충성 메모'(1,2,3,4,5,6,7)라는 걸로 난타당하다가 43시간 만에 사퇴한 안동수 장관의 케이스도 발생했다.[1][2] 결국 독고다이 장관을 뽑아놨다가 대통령 측근이나 여권 주요인사 등에게 칼날을 들이밀면 야권과 언론에게 두드려 맞고 지지율 하락이나 선거 패배 등 수습하기 어려운 상황까지 번질 가능성이 있어 안전빵을 원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검찰청법1949년제정[3]될 때부터 지금[4]까지 법무부장관에 대한 지휘권이 명문화되어 있었다. 외청인 검찰청에서는 독립적이고 공정한 수사를 방해한다면서 꺼리는 조항이기 때문에 논란이 크며, 검찰청이 일단 법무부 외청으로 되어있기 때문에 법무부가 크거나 작거나 검찰청 업무에 개입할 여지는 항상 있다. 차장검사 출신 김종민 변호사는 "프랑스도 지난 2013년 구체적 사건에 대한 법무부 지휘권 자체를 검찰 독립을 침해할 수 있는 독소조항이라며 폐지했다"며 "이것이 세계적 형사 사법의 추세"라고 지적했다.
실제로 지금까지 법무부 장관이 명시적으로 수사지휘권을 발동한 사례는 헌정사상 3번 있었다.(2020년 기준)
  • 첫 번째는 2005년 10월 12일, 천정배 법무부장관이 6.25 전쟁을 통일전쟁으로 표현한 강정구 교수의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을 불구속수사하라는 지시를 내린 것인데, 조문에는 있지만 실제 발동된 것은 사상 처음이어서 김종빈 검찰총장은 검사장들을 소집해 회의한 끝에 받아들이되, 검찰권 침해라며 유감을 표하고는 이틀 후 사퇴하였다.#
  • 두 번째는 2020년 7월 2일, 추미애 법무부장관이 채널A 검언유착 의혹 사건과 관련해 윤석열 검찰총장에게 전문수사자문단 소집 절차를 중단하고 수사 결과만 보고받으라는 지시를 내린 것이다. 15년만의 발동에 윤석열 총장은 검사장들을 소집해 대책 회의에 돌입하였고 일주일 후인 7월 9일 절충안을 제시하는 형태로 이를 받아들였다.#
  • 세 번째는 2020년 10월 19일, 추미애 법무부장관이 윤석열 검찰총장에게 라임 사태#s-4윤석열 가족 주변 관련 수사에 관여하지 말고 수사 결과만 보고받으라는 지시를 내린 것이다. 윤석열 검찰총장은 대검찰청을 통해 다음 날 바로 수용하였다.# 그러나 사흘 후 열린 국정감사에 참석한 윤석열 검찰총장은 이번 수사지휘권 발동은 비상식적이라면서 부당하며 위법한 조치라고 반발했다. 또한 작정한듯 검찰총장은 법무부장관의 부하가 아니라는 말까지 했다.# 이에 다시 나흘 후 열린 국정감사에 참석한 추미애 법무부장관은 검찰총장과 관련하여 의심스러운 정황이 많아 필요하고 긴박했기 때문에 적법하게 수사지휘권을 발동한거라고 반박하고는 윤석열 검찰총장의 발언들이 선을 넘는 것이었으며 법무부장관은 검찰총장의 상급자라고 말했다.#
검찰총장에 대한 건은 아니지만 최초로 지휘권이 발동된 케이스는 이승만 대통령 시절 이인 법무부장관이 최대교 서울고등검찰청 검사장에게 임영신 상공부 장관을 불기소하라고 구두 지휘했으나, “기소·불기소는 검찰의 고유 권한”이라며 거부(1,2)했다. 이후 조국 사태 수사를 두고도 윤석열 검찰총장과 박상기 법무부장관이 충돌하기도 하였으며, 당사자인 조국 역시 장관이 되기 전에 공정한 수사를 위해 수사에 대해 보고받지 않겠다고 약속하기도 하였다.
형사소송법 제463조에 따라 사형 집행을 명령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 다만, 국내정치뿐 아니라 국제적 여론을 인식해야 하는 등 복잡한 사안이라, 국무회의 등에서 대통령의 동의를 얻지 않고 이를 독자적으로 장관이 집행하는 경우는 사실상 없는 상태. 그렇지만 형식적으로라도 사람의 생명을 끊을 수 있는 권한이 있다는 것[5]을 볼 때 요직임에는 틀림없다. 그리고 이명박 정부까지만 해도 관료적 직위라는 느낌이 강한 직책이었으나 통합진보당 해산에서 법무부가 적극적으로 나서면서부터 위상이 높아졌고, 특히 문재인 정부에서는 제일의 국정과제로 검찰개혁을 앞세우고 있기 때문에, 현 시점에서는 국무총리[6] 다음가는 요직으로 위상이 상승했다. 박근혜 정부, 문재인 정부의 법무장관들이 선후의 차이는 있지만 거대 양당의 당 대표를 수행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위에 쓰여진 사형집행권한 뿐만 아니라 외국인의 영주 및 귀화 허가권자이기도 하다.

3. 역대 장관


'''1919년~'''
법무부
<rowcolor=#fff> '''정부'''
'''대수'''
'''이름'''
'''임기'''
이승만 정부
초대
이인 (李仁)
1948년 08월 02일 ~ 1949년 06월 05일
2대
권승렬 (權承烈)
1949년 06월 06일 ~ 1950년 05월 21일
3대
이우익 (李愚益)
1950년 05월 22일 ~ 1950년 11월 22일
4대
김준연 (金俊淵)
1950년 11월 23일 ~ 1951년 05월 06일
5대
조진만 (趙鎭滿)
1951년 05월 07일 ~ 1952년 03월 04일
6대
서상환 (徐相懽)
1952년 03월 05일 ~ 1954년 06월 29일
7대
조용순 (趙容淳)
1954년 06월 30일 ~ 1955년 09월 15일
8대
이호 (李澔)
1955년 09월 16일 ~ 1958년 02월 19일
9대
홍진기 (洪璡基)
1958년 02월 20일 ~ 1960년 03월 23일
허정 과도정부
10대
권승렬 (權承烈)
1960년 04월 25일 ~ 1960년 08월 19일
장면 내각
11대
조재천 (曺在千)
1960년 08월 23일 ~ 1961년 05월 02일
12대
이병하 (李炳夏)
1961년 05월 03일 ~ 1961년 05월 18일
국가재건최고회의
13대
고원증 (高元增)
1961년 05월 20일 ~ 1962년 01월 08일
14대
조병일 (趙炳日)
1962년 01월 09일 ~ 1963년 01월 31일
15대
장영순 (張榮淳)
1963년 02월 01일 ~ 1963년 04월 21일
16대
민복기 (閔復基)
1963년 04월 22일 ~ 1963년 12월 16일
박정희 정부
17대
민복기 (閔復基)
1963년 12월 17일 ~ 1964년 05월 10일
18대
민복기 (閔復基)
1964년 05월 11일 ~ 1966년 09월 25일
19대
권오병 (權五柄)
1966년 09월 26일 ~ 1968년 05월 20일
20대
이호 (李澔)
1968년 05월 21일 ~ 1970년 12월 20일
21대
배영호 (裵泳鎬)
1970년 12월 21일 ~ 1971년 06월 03일
22대
신직수 (申稙秀)
1971년 06월 04일 ~ 1973년 12월 03일
23대
이봉성 (李鳳成)
1973년 12월 04일 ~ 1974년 09월 17일
24대
황산덕 (黃山德)
1974년 09월 18일 ~ 1975년 12월 18일
25대
황산덕 (黃山德)
1975년 12월 19일 ~ 1976년 12월 03일
26대
이선중 (李善中)
1976년 12월 04일 ~ 1978년 12월 21일
27대
김치열 (金致烈)
1978년 12월 22일 ~ 1979년 12월 13일
위기관리정부
28대
백상기 (白翔起)
1979년 12월 14일 ~ 1980년 05월 21일
29대
오탁근 (吳鐸根)
1980년 05월 22일 ~ 1980년 09월 01일
전두환 정부
30대
오탁근 (吳鐸根)
1980년 09월 02일 ~ 1981년 04월 09일
31대
이종원 (李鐘元)
1981년 04월 10일 ~ 1982년 05월 20일
32대
정치근 (鄭致根)
1982년 05월 21일 ~ 1982년 06월 23일
33대
배명인 (裵命仁)
1982년 06월 24일 ~ 1985년 02월 18일[7]
34대
김석휘 (金錫輝)
1985년 02월 19일 ~ 1985년 07월 15일
35대
김성기 (金聖基)
1985년 07월 16일 ~ 1987년 05월 25일
36대
정해창 (丁海昌)
1987년 05월 26일 ~ 1988년 02월 24일
노태우 정부
37대
정해창 (丁海昌)
1988년 02월 25일 ~ 1988년 12월 04일
38대
허형구 (許亨九)
1988년 12월 05일 ~ 1990년 03월 18일
39대
이종남 (李種南)
1990년 03월 19일 ~ 1991년 05월 26일
40대
김기춘 (金淇春)
1991년 05월 27일 ~ 1992년 10월 08일
41대
이정우 (李正雨)
1992년 10월 09일 ~ 1993년 02월 25일
문민정부
42대
박희태 (朴熺太)
1993년 02월 26일 ~ 1993년 03월 07일[8]
43대
김두희 (金斗喜)
1993년 03월 08일 ~ 1994년 12월 23일
44대
안우만 (安又萬)
1994년 12월 24일 ~ 1997년 03월 05일
45대
최상엽 (崔相曄)
1997년 03월 06일 ~ 1997년 08월 04일
46대
김종구 (金鍾求)
1997년 08월 05일 ~ 1998년 03월 02일
국민의 정부
47대
박상천 (朴相千)
1998년 03월 03일 ~ 1999년 05월 23일
48대
김태정 (金泰政)
1999년 05월 24일 ~ 1999년 06월 07일
49대
김정길 (金正吉)
1999년 06월 08일 ~ 2001년 05월 20일
50대
안동수 (安東洙)
2001년 05월 21일 ~ 2001년 05월 23일[9]
51대
최경원 (崔慶元)
2001년 05월 24일 ~ 2002년 01월 28일
52대
송정호 (宋正鎬)
2002년 01월 29일 ~ 2002년 07월 10일
53대
김정길 (金正吉)
2002년 07월 11일 ~ 2002년 11월 05일
54대
심상명 (沈相明)
2002년 11월 09일 ~ 2003년 02월 26일
참여정부
55대
강금실 (康錦實)
2003년 02월 27일 ~ 2004년 07월 28일
56대
김승규 (金昇圭)
2004년 07월 29일 ~ 2005년 06월 29일
57대
천정배 (千正培)
2005년 06월 29일 ~ 2006년 07월 26일
58대
김성호 (金成浩)
2006년 08월 28일 ~ 2007년 09월 03일
59대
정성진 (鄭城鎭)
2007년 09월 04일 ~ 2008년 02월 28일
이명박 정부
60대
김경한 (金慶漢)
2008년 02월 29일 ~ 2009년 09월 29일
61대
이귀남 (李貴男)
2009년 09월 30일 ~ 2011년 08월 10일
62대
권재진 (權在珍)
2011년 08월 12일 ~ 2013년 03월 11일
박근혜정부
63대
황교안 (黃敎安)
2013년 03월 11일 ~ 2015년 06월 13일[10]
64대
김현웅 (金賢雄)
2015년 07월 09일 ~ 2016년 11월 28일
문재인 정부
65대
박상기 (朴相基)
2017년 07월 19일 ~ 2019년 09월 09일
66대
조국 (曺國)
2019년 09월 09일 ~ 2019년 10월 14일
67대
추미애 (秋美愛)
2020년 01월 02일 ~ 2021년 01월 27일
68대
박범계 (朴範界)
2021년 01월 28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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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관련 문서


[1] 메모는 A4용지 2장 분량으로 앞장은 `정권 재창출 노력' 등 대통령에 대한 `충성서약'을 담고 있고, 뒷장은 `인권옹호의 철저' `국민의 신뢰회복' 등 검찰의 나아갈 방향을 요점 정리한 평이한 내용이다.[2] 이 메모가 충성 메모라는 타이틀로 기사화된 후, 동료 변호사인 이경택 변호사는 자신이 메모를 썼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처음에는 기자들에게 A4용지 2장 분량 모두 자신이 썼다고 했다가 이후 앞장은 자신이 썼고, 뒷장은 장관이 썼다고 정정했다. 언론에 팩스로 메모를 보낸 윤 모 여직원은 2001년 5월 21일에는 장관이 직접 컴퓨터로 메모를 쳤다고 했다가 22일 오전 10시쯤에는 이 변호사가 맡긴 초고를 미리 타이핑 해놨다가 장관의 책상 위에 있던 별도의 메모와 함께 팩스로 보내줬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1시간 뒤인 오전 11시께는 “이 변호사가 넘겨 준 초고와 안 장관의 책상 위에 있던 메모를 한 개의 파일 안에 같이 타이핑한 뒤 팩스로 보내줬다”고 말했다.[3] 제14조 법무부장관은 검찰사무의 최고감독자로서 일반적으로 검사를 지휘감독한다. 구체적 사건에 대하여는 검찰총장만을 지휘감독한다.[4] 제8조(법무부장관의 지휘ㆍ감독) 법무부장관은 검찰사무의 최고 감독자로서 일반적으로 검사를 지휘ㆍ감독하고, 구체적 사건에 대하여는 검찰총장만을 지휘ㆍ감독한다.[5] 사람들이 잘 모르는 사실이지만 (정당방위 등 특수상황 제외) 군인과 법무부장관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대통령, 총리를 제외하면 '''합법적으로 살인을 명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다.''' 물론 사법부에서 사형 판결을 받은 인물에 한해서이긴 하지만.[6] 원래 국무총리도 과거 대부분의 경우(일부 제외)가 방탄총리라는 별명이 있었을 정도로 의전과 명예는 높되 실권이 얕고 정치력이 소모되는 자리라 권력이 높은 요직으로 보기는 어려웠으나 문재인정부에서는 책임총리로서 권한과 활동반경을 넓혀주었다. 자세한건 문서 참고.[7] 역대 최장기 재임[8] 역대 차단기(9일) 재임[9] 역대 최단기(2일) 재임[10] 민주화 이후 최장기 재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