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체반정
1. 개요
조선 후기 정조가 당시 양반 사이에서 유행하던 문체였던 패관 별체를 배척하고 고문#s-2[1] 을 부흥시키려했던 문풍 개혁 정책.
사실 당대에는 문체반정이라는 말을 쓰지 않았으며, 기사순정(其辭醇正, 문장을 순수하고 바르게 함) 또는 비변귀정(丕變歸正, 크게 변하여 바름으로 돌아감)이라는 말을 썼다. 이 점에 착안하여 순정, 귀정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문체반정'이라는 표현은 후대의 연구자들이 그 정치적 목적성에 초점을 두고 붙인 명칭이다.
2. 내용
정조는 명말청초의 문집과 패관소설류, 잡서의 영향으로 당대 양반 사회에서 이러한 문체가 대유행하자,[2] 이것이 조선의 이데올로기인 유교를 더럽힌다고 우려하였다.[3][4] 정조의 입장에서 패관잡문 대신 사용해야 할 문체란 바로 고전 속 문체. 이러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정조는 일종의 왕립도서관이라고 부를 수 있는 규장각을 새로 건립하고, 패관소설과 잡서 등을 중국에서 수입하지 못하도록 금하였으며[5] , 중국의 고문[6] 들을 신간하였다. 이런 정책의 연장선상에서 대과에서 장원으로 평가받은 유생 이옥을 답안지 문체가 패관 문체라는 이유로 꼴찌로 강등해버리는가 하면, 김조순, 박제가, 박지원과 같은 당대 유명 문인들에게도 감히 패관 문체를 사용한 죄로 고문체로 쓴 반성문을 바치라고 명령했다.[7] 덧붙여 성균관 유생들도 패관 문체를 사용한 것이 적발되면 과거 응시 자격 박탈 크리... 패관 문체를 교정하면 다시 응시 자격을 줬다. 정조의 문체반청은 일시적으로는 성과가 있었지만, 워낙 조선 사대부들 사이에서 패관 문체가 유행했기에 결국 정조 사후에 예전처럼 되었다.동지 정사 박종악(朴宗岳)과 대사성 김방행(金方行)을 불러들여 접견하였다. 상이 종악에게 전교하기를,
"어제 책문의 제목 하나를 내어서 위서(僞書)의 폐단에 관해 설문을 해보았다. 근래 선비들의 추향이 점점 저하되어 문풍(文風)도 날로 비속해지고 있다. 과문(科文)을 놓고 보더라도 패관 소품(稗官小品)의 문체를 사람들이 모두 모방하여 경전 가운데 늘상 접하여 빠뜨릴 수 없는 의미들은 소용없는 것으로 전락하였다. 내용이 빈약하고 기교만 부려 전연 옛사람의 체취는 없고 조급하고 경박하여 평온한 세상의 문장 같지 않다. 세도와 유관한 것이어서 실로 작은 걱정이 아니다. 내가 그것을 바로잡아 보려고 고심 끝에 책문의 제목으로까지 내었던 것인데 만일 그 폐단만을 말하고 실효를 거두지 못하면 무슨 보탬이 되겠는가. 이러한 폐단의 근원을 아주 뽑아서 없애버리려면 애당초 잡서(雜書)들을 중국에서 사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 제일이다. 그리하여 앞서의 사행 때도 물론 누누이 당부해 왔었지만 이번 사행에는 더욱더 엄히 단속하여 패관 소기(稗官小記)는 말할 것도 없고 경서(經書)나 사기(史記)라도 당판(唐板)인 경우 절대로 가지고 오지 말도록 하고, 돌아오는 길에 압록강을 건널 때 하나하나 조사해서 군관이나 역관 무리라도 만일 가지고 오는 자가 있으면 바로 교서관에서 압수하여 널리 유포되는 폐단이 없게 하라.
경사(經史)는 잡서와는 다르므로 이렇게 엄금한다면 다소 지나친 것 같으나 우리 나라에 있는 것만도 빠진 것 없이 다 갖추어져 있어 그것만 외우고 읽어도 무슨 일인들 참고하지 못하겠으며 어떤 문장인들 짓지 못하겠는가. 더구나 우리 나라 서책은 종이가 질겨 오랫동안 두고 볼 수 있으며 글자가 커서 늘 보기에도 편리한데 하필 종이도 얇고 글씨도 자잘한 당판을 멀리서 구하려 하는 것인가. 그런데 이것을 꼭 찾는 이유는 누워서 보기에 편리해서인 것이다. 이른바 누워서 본다는 것이 어찌 성인의 말씀을 존숭하는 도리이겠는가."
하니, 종악이 아뢰기를,
"지금 성교를 받자오니 문교(文敎)를 숭상하고 바른 학문을 부양하여 만세를 두고 영원한 장래를 염려하시는 위대한 전하의 말씀임을 알고 이루 말할 수 없이 흠앙스럽습니다. 신도 당연히 엄히 금하여 만에 하나라도 그 뜻을 받들도록 하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대사성 김방행에게 이르기를,
"성균관 시험의 시험지 중에 만일 조금이라도 패관 잡기에 관련되는 답이 있으면 비록 전편이 주옥 같을지라도 하고(下考)로 처리하고 이어 그 사람의 이름을 확인하여 과거를 보지 못하도록 하여 조금도 용서가 없어야 할 것이다. 내일 승보시(陞補試)를 보일 때 여러 선비들을 모아두고 직접 이 뜻을 일러주어 실효가 있게 하라. 엊그제 유생 이옥(李鈺)의 응제(應製) 글귀들은 순전히 소설체를 사용하고 있었으니 선비들의 습성에 매우 놀랐다. 지금 현재 동지성균관사로 하여금 일과(日課)로 사륙문(四六文)만 50수를 짓게 하여 낡은 문체를 완전히 고친 뒤에야 과거에 응시하게 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그 사람은 일개 유생에 불과하여 관계되는 바가 크지 않지만 띠를 두르고 홀을 들고 문연(文淵)에 출입하는 사람들도 이런 문체를 모방하는 자들이 많으니 어찌 크게 안타까운 일이 아니겠는가.
일전에 남공철(南公轍)의 대책(對策) 중에도 소품(小品)을 인용한 몇 구절이 있었다. 그가 누구의 아들인가. 나도 문청(文淸)에게서 배웠지만 지성으로 가르치고 인도해 주었기에 비로소 글을 짓는 방법을 알았다. 그의 문체는 고상하고 전중(典重)하여 요사이의 문체에 비할 바 아니었으므로 나도 그 문체를 매우 좋아하고 있다. 그런데 그런 아버지의 아들로서 그러한 문체를 본받는다면 되겠는가. 오늘 이 하교가 있었음을 듣고서 마음을 고쳐먹고 다시 올바른 길로 가기 전에는 그가 비록 대궐에 들더라도 감히 경연에 오르지는 못할 것이며 집에 있으면서도 무슨 낯으로 가묘(家廟)를 배알하겠는가. 공철의 지제교 직함을 우선 떼도록 하라. 그 밖에 문신들 중에서도 너무 좋아하는 자들이 상당히 있으나 일부러 한 사람 한 사람 지명하고 싶지 않다. 정관(政官)으로 하여금 문신 중에서 그런 문체를 쓰는 자들을 자세히 살펴 다시는 교수(敎授)의 후보자로 추천하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정조실록 정조 16년(1792) 10월 19일 기사'''
...라고 알려져있기는 한데 문제는 정작 그 문제시된 패관문체가 뭐하는 문체인지를 설명하는 책이나 자료는 별로 없다(...). 그냥 ‘새로운 문체가 유행하자 정조가 금지했다’는 정도가 일반적으로 알려진 수준.
조선은 성리학을 올바르게 이해하려면 옛 성현이 쓴 내용을 토시 하나 바꾸지 말고 그대로 외워야한다고 봤기 때문에[8]
3. 목적
물론 정조가 단순히 문체 하나가 맘에 안들어서 이런 운동을 국가적 차원에서 펼쳤던 것은 아니다.당시 중국에서 수입된 패관 문체류 문학들이 담고 있는 내용은 다수가 반봉건적인 요소로 봉건 왕조 체제 유지에 위협적인 내용[9] 이었기에 문체반정은 단순히 문화 운동이 아니라 몰락해가는 구 질서를 재정립하려는 처절한 시도로도 볼 수 있다.
덧붙여 정조가 남인의 천주교 신자들에 대한 노론의 공격을 방지하기 위해 이 문체반정 운동을 펼쳤다는 주장도 있다. 즉 너나 잘하세요 정도의 의도를 가진 정치 공세였다는 것. 언뜻 생각하기에 자유로운 문체에 대해 매력을 느낀 사람들은 성리학의 규범을 따르고자 한 노론의 세력보다는 새로운 학문에 관심이 많은 남인의 세력일 것 같기도 하지만 박지원, 김조순같이 대표적으로 정조에게 딱 걸려서 혼난 인물들이 노론 계열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글쎄....
한편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는 뒤주에 갇히기 직전인 임오년에 궁중 화원을 시켜 중국역사회모본이라는 책을 펴냈는데, 다름아닌 <금병매>, <수호지>, <서유기>와 같은 중국의 소설들을 소개하는 화첩이었다. 사도세자는 본인의 신분을 숨기기 위해 펴낸이를 '완산 이씨'라고만 언급했지만 주변 사람들이 사도세자가 쓴 책이란 것을 모를 리 없었고, 정조는 아버지와 다른 길을 가야 살 수 있기에 그 반동으로 소설류의 퇴출에 집착한 것이라고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 조부 영조 또한 소설에 호의적이었는데 이에 대한 반동의 성격이었다는 시각도 존재.
한편으로는 진지하게 써야 할 공문서에 패관 같은 소설 문체로 적어서 야들이 공문서도 다 소설 문체로 쓴다고 소설 같은거 읽으면서 놀지마라는 실용적인(?) 목적에서 짜증나서 그랬다는 시각도 있다. 어쨌거나 정조 본인부터가 원론적인 성리학자였고 패관은 일찍이 보지도 않았다고 말할만큼 패관 문체를 싫어하여 종종 천명하기도 했으니 정조 개인의 기호 문제도 사실 어느 정도 들어갔다고 할 수 있다.
4. 반항
같은 시기 유럽의 왕권신수설과는 달리 조선의 양반들은 유교적 원리에 따라 왕이라도 잘못한 것은 개처럼 깠던 인물들인 만큼 당연히 이런 문체반정 운동에 반항했던 사람들도 등장한다.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위에 언급된 이옥과 박지원.[10] 박지원은 너무 죄가 커서 반성문을 쓸 수 없다고 거부했으며, 이옥도 패관 문체를 버리지 않고 결국 벼슬에도 오르지 않았다.
5. 여담
- 여담이지만 소설을 싫어했던 정조와 달리 정조의 두 여동생 청연공주, 청선공주와 후궁 의빈 성씨는 10책에 달하는 소설 《곽장양문록》을 필사할 정도로 소설 애호가였다. 물론 《곽장양문록》의 필사 시기는 1773년으로 문체반정보다 20년 정도 앞선다. 그런데 비단 이 두 공주만이 아니라, 현재 전하는 소설책들의 필사 연대를 보면 정조가 문체반정을 하거나 말거나 궁중 여인들은 소설을 즐겨 필사하고 읽었던 것 같다(...).
이상황의 경우 정조 생전에는 반성하고 소설을 배격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정조 사후 늙을 무렵에 그의 집을 찾아간 선비가 서가에 청나라의 소설책들이 빽빽이 꽂혀있는 것을 발견했다고...
김조순의 경우에는 이상황과 함께 숙직을 하다가 연애소설을 읽어 직접 정조에게 까이기도 했다. 이와는 별개로 능력 하나는 좋아 이후에 딸을 정조와 결혼시켜서 장인어른이 되었는데, 얼마나 소설이 좋았는지 직접 오대검협전이라는 소설을 써냈다고...
- 정조는 당판(唐板)을 반입하는 것도 금했는데, 당판본은 책이 얇고 작아서 누워서 읽기가 아주 편했기 때문에 선비들이 감히 누운 채로 책을 읽는다는 이유였다. 한편 정조 자신은 그렇게나 고문을 강조했음에도 불구하고 신하들에게 보낸 사적인 편지에서는 한글을 섞어가며 욕설을 아낌없이 갈겨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