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동전

 

1. 개요
2. 원시적 개념-속공
3. 영·미 군사학
3.1. 전략적 마비
3.2. 준비
3.3. 한계
4. 독일 군사학
4.1. 결정적 전투
5. 소련 군사학
5.2. 전략적 마비에 대한 비판
6. 기동방어
7. 기타
8. 관련 문서


1. 개요


機動戰, maneuver warfare / manoeuvre warfare
군대의 전술 개념. 기동(maneuver)이란 '목적과 의도를 갖고 실시하는 이동'으로, 기동전은 기동 그 자체를 통해 승리에 도달하는 전쟁 방식으로, 각 군의 군사학계마다 해석이 많이 다르다.
기본적으로 재빠른 기동으로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고, 상대에게 불필요한 소모를 강요하는 작전 개념이다.

2. 원시적 개념-속공


의외로 근현대에 출현한 개념으로 아는 경우가 있는데, 기동전 자체의 원시적인 개념은 굉장히 오래됐다. 일단 현재까지 '''확실시 되는''' 자료들을 기준으로 했을때, 동양 쪽은 춘추시대 말기, 즉 손자병법이 등장한 시기를 기점으로, 서양 쪽은 1차 포에니 전쟁을 기점으로 기동전이라는 개념의 원시적인 형태가 출현된 걸로 보인다.
기동전은 후술하겠지만 상당한 준비와 노력이 필요하며, 실행과정에서도 정확한 판단과 행동을 해야 하며, 결정적으로 운이 나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망할 수 있는 등 주변 환경의 변화에 취약하다. 쉽게 말해서 가볍고 얇은 검 하나로 적의 대검과 방패를 상대하는 상황이므로 한 번의 실수로도 순식간에 치명타를 입을수 있다. 이런 이유로 기동전을 수행하려면 사전에 철저한 계획과 플랜 B까지 수립해 둬야 한다. 그런 고려없이 우리가 강하니 그냥 싸우면 된다며 기동전을 수행했다가 처참하게 무너진 대표적인 사례가 임진왜란 당시 신립탄금대 전투.
이럼에도 불구하고 기동전을 역대 병서들이 속공이라는 이름으로 매우 중시한다. 그 이유는 소모전은 확실하게 승리를 가져올 수 있으나, 일단 시간이 많이 소모되고, 각종 인원, 장비, 물자가 블랙홀에 빠져들듯이 소모되며, 적이 나보다 더 많은 자원을 가지고 있으면 역관광당하고, 전쟁의 당사자가 모두 동등한 실력이면 전쟁이 지리멸렬하게 오래 끄는 등 한마디로 종합하자면 지면 패망이고 이겨도 피로스의 승리로 대표되는 상처뿐인 승리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소모전을 수행할 정도로 각종 자원을 축적하는 일도 쉽지 않기 때문에 적은 병력과 장비와 물자로 상대방을 빠르게 이겨보겠다면 기동전을 할 수 밖에 없다. 특히 현대전은 국가의 모든 것을 극한까지 쥐어짜서 수행하는 총력전이기 때문에 최대한 빠른 승리가 매우 중요하다.
굉장히 까다로운 작전임에도 대강 병력을 모아서 약간의 물자만 가지고 기동전만 수행하는 경우가 역사책을 펼치기만 해도 무수하게 등장한다. 이럴 경우 그야말로 운이 많이 작용한다. 한마디로 말해 적이 나보다 더 많이 실수하면 그런 엉성한 기동전을 가지고도 승리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그나마 엄선된 병력이 철벽을 들이받고 전멸당하는 것으로 끝나버린다.

3. 영·미 군사학


일반적으로 기동전이라 하면 영미군사학계의 개념을 가리킨다. 여기선 적 전투력을 소모시켜 승리에 도달하는 소모전(消耗戰, attrition warfare)의 반대되는 개념으로 여긴다.
영미 군사학계는 오랫동안 소모전적 개념에 입각한 교리를 고수했다. 특히 미국이 심했는데, 물량전으로 이길 자신이 있으니 굳이 복잡하고 유능한 장교단이 다수 필요한 고급 전략을 좋아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기동전으로의 전환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전간기의 J.F.C. 풀러와 리델 하트가 대표적이며, 현대에는 미국의 존 워든 3세(John A. Warden Ⅲ)가 제창한 전략적 5개 동심원 모델과 병행타격 개념이 있다. 워든의 이론은 국가의 중력중심(Center of Gravity)을 타격하여 적 전투력을 마비시킨다는 점에서는 구 소련의 종심전투교리와 유사점이 있으나, '''공군력을 이용한 타격'''이라는 점이 특이하다 하겠다. 공군력의 운용과 종심타격이라는 점 때문에 가끔 공지전(Air-Land Battle) 교리와 혼동되기도 하지만, 공지전 교리는 전형적인 화력소모전 교리라는 점에서 전혀 다르다. 무엇보다 공지전은 공군과의 밀접한 협조가 요구되기는 해도 어디까지나 미 육군의 지상전 교리이지만, 워든의 이론은 순수한 항공전 교리다.

3.1. 전략적 마비


소련-러시아, 독일과 달리 "전략적 마비"를 중심으로 한다. 전략적 마비란 적의 사령부, 보급선, 통신망 등 군대 유지에 필수적인 중추를 파악하고, 이런 신경을 흔듬으로 적의 전투력을 감소시키고 더 나아가 적의 "전투의지"를 꺾는다. 이를 위해 빠른 기동력을 중요시 여기며, 적보다 중요한 위치를 선점하거나, 기습을 가하거나, 또는 일부 병력이 일반적인 소모전 양상으로 적의 시선을 끄는 사이에 이런 작업을 해서 교란시키는 망치와 모루 전술을 구사한다.
전장의 형세와 상관없이 '쓸데없이 싸우는 것'을 안 좋게 여긴다. 설령 이긴다 하더라도 전선에 영향을 끼칠 일이 없는 상황이라면 무의미한 것이고, 이겼다 하더라도 인명과 자원 피해는 발생할 것이기 때문. 일단 아무리 인명 피해 없이 이겨도 현대전 기준으로 어쨌거나 총알과 포탄은 쏘고, 병사들도 전투 때문에 지치기 때문이다.
요점은 '싸움을 최소한으로 줄이면서 목표 달성'을 노리는 것이지 '적 전멸'을 노리는 것이 아니다.괜히 불필요한 전투를 피하자는 것. 다만 목표 달성을 위해 싸워야 할 장소에서는 필요하다면 적의 섬멸도 할 수 있다. 이러한 발상은 적의 전투력의 '''마비'''를 중시하는 계열에서 파생되었는데, 대표적으로 J. F. C. 풀러의 "전략적 마비"(Strategic Paralysis)와 바실 리델하트의 "간접접근 전략"(Indirect Approach Strategy)가 있다. 풀러는 제1차 세계 대전 중에 대규모 전차 부대를 통하여 적의 사령부와 통신망을 비롯한 "신경망"을 마비시키는 게 최선이라는 요지의 작전계획인 PLAN 1919를 작성하였고[1] 이후에도 전차 부대의 적 종심 후방으로의 진출의 목적이 적 사령부와 통신망의 장악이라는 주장을 계속했고 리델하트 또한 이를 계승했다.

3.2. 준비


적어도 아래와 같은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 적어도 전략적인 충격을 적에게 가할 정도의 정예 병력이 필요하다. 보통 아무리 최소로 잡아도 사단 수준은 확실히 넘어가며, 보통은 군단급 이상의 편제와 실병력을 가진 정예병력이 요구된다. 이는 아무리 기동전이라도 적어도 1회 이상은 적의 주력과 정면충돌하게 되는데, 이때 최소한 와해되지는 않아야 목적을 달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정예병력이 그 이하라면 특수부대를 사용하는 수밖에 없는데, 이럴 경우 국지적 전술우위는 가져오지만 전략적 승리를 부르기에는 숫자가 너무 적다.
  • 해당 정예병력 전원에게 충분히 지급할 만한 양질의 장비가 있어야 하며, 소모품 등을 즉시 지급할 수 있도록 보급체제도 개선해야 한다. 물론 충분한 훈련도 실시해야 한다. 이는 본질적으로 기동전을 하는 정예 병력은 숫자가 적을 수밖에 없고, 고속기동을 하기 때문에 장비가 충실하지 않으면 적을 돌파하기는커녕 기동을 한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지쳐서 나가떨어지기 때문이다. 게다가 장비가 있다고 해도 보급이 원활하지 않으면 말 그대로 전선돌파로 끝나기 때문에[2] 적이 즉시 정신을 차리고 재반격해서 이때까지의 성과를 날려버리기 쉬우므로 보급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
  • 해당 정예병력을 매우 유능한 지휘관이 지휘하며, 이들에게 상당한 수준의 전략, 전술적 자체판단권한을 주어야 한다. 기동전을 기본 교리로 채택한 구 독일군이 임무형 지휘체계를 발전시킨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이는 기동전의 특성상 유동적이고 정보도 잘 안 들어오는 상황에서 적보다 적은 병력을 가지고 적지에서 활동하기 때문에 당연히 적의 장교보다 아군의 장교가 더 훌륭한 능력을 보유해야 하며, 역시 유동적인 전황 때문에 일일이 상부에서 지시를 받고 움직이면 속된 말로 때를 놓치기 쉽기 때문이다.
  • 상대 병력의 배치, 보급선, 통신망을 파악하기 위한 정보력이 요구된다. 기동전의 핵심은 결국 상대의 헛점을 몰아치는 것이기 때문에, 이 헛점을 파악할 수 없다면 무의미하다.

3.3. 한계


전략적 마비를 중심으로 하는 기동전은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이런 준비를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일단 기동전이 가능한 규모의 정예병력을 모은다는 것부터 어려우며, 이들에게 양질의 장비를 지급하고 충분한 보급을 해주는 것도 엄청난 재정이 든다. 그리고 유능한 지휘관을 엄선해서 배치하는 것도 일이며, 이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걸 주변국에서 그냥 내버려둘 리도 없다. 모든 준비를 갖춘 정예부대가 적이 아니라 현 정권을 향해 총구를 돌리는 일이 충분히 일어날 수 있으므로 이에 대한 대책도 세워야 한다. 한마디로 말해 골아픈 문제 투성이라는 것이다.
피로스의 승리를 막기 위해 적은 비용이 들도록 빠르게 전쟁을 끝낸다는 기동전은 한가지 모순점을 가지고 있다. 바로 막대한 후방 지원병력과 제한적인 화력지원 때문이다. 하지만 미국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국가들, 심지어는 공업 강국 독일과 소련조차도 후방부대의 대부분은 보급을 차량이 아닌 말로 유지해야 했다. 그런 상황에서 적진에 구멍을 내고 그 사이로 침투해 적진을 뒤집어 엎는 소단위 부대에 대한 보급과 통신을 유지하는 것은 커다란 부담이 되었다. 기갑군의 선구자인 독일에서조차 기갑사단의 편성을 위해서 히틀러가 개입해야 할 정도로 군부는 내켜하지 않았다. 실제로 전장에서 이런 기동전 개념이 도입되기 시작한 제2차 세계 대전에 와서는 이런 문제가 극명하게 드러났다. 소련에서 독일군 전차들은 진격 도중에 보급 문제로 많은 수가 유기되어야 했으며, 나폴레옹과 마찬가지로 관성에 의존하려던 독일군은 이런 점에서 상당한 전력 손실을 겪어야 했다. 이는 소련군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여서 미국의 랜드리스를 통한 수십만 대에 달하는 차량이 없었다면 쿠르스크 전투 이후에 보여준 충격군을 이용한 종심전투교리는 실행될 수 없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소단위 부대를 통한 효과적 전투를 지향한 기동전이 오히려 유례없는 후방부대를 거느린 전문전투부대가 돼 버린 것이다. 당시 이런 기동전 교리를 무난하게 수행할 수 있었던 공군력과 보급역량을 지닌 미군의 후방부대 규모가 이를 증명한다.
기동전을 통해 상대를 마비시키는 개념조차도 성공이 불투명하다. 실제로 돌파된 정규군이 마비로 인해 와해를 겪는 경우가 드물었다. 독일군의 1941년 공세(바르바로사 작전)와 42년 하계 공세(청색 작전)의 와해 효과는 당시 소련군의 붕괴상태를 감안해야 했으며, 기동전 자체가 일으킨 직접적 효과는 아니었다. 오히려 잘 정비된 정규군은 이렇게 파고든 적을 무난하게 포위할 수 있었다.
따라서 응집력 강하고 준수한 군사력을 갖춘 국민국가에 대해서 기동전이 효과를 펼칠 수 있는가 하는 점에서 문제가 생긴 것이다. 기동전이 인명손실을 줄일 수는 있었어도 전비는 오히려 증가했다는 점에서도 전간기 기동전이 표방한 마비를 통한 효율적 전투수행은 불가능하다.
중동전쟁이나 걸프전, 이라크 전을 기동전의 성공사례로 나열하는 것도 무의미하다. 애초에 이들은 중심부의 장악력이 떨어지며, 미군이 이들을 쑥대밭으로 만든 이후, 테러리스트들의 성장을 위한 토양이 되어 다시금 미국을 위협하고 있기 때문이다.

4. 독일 군사학



4.1. 결정적 전투


다른 한편으로, 나폴레옹 이후 최고의 기동전 전문가들이었던 독일군은 결코 적 전투력의 물리적 섬멸[3]이라는 개념을 부정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독일군은 전 유럽에서 '''가장 적 전투력의 물리적 섬멸을 강조했다.''' 독일군에게 중요한 것은 '''기동을 통해''' 적 '전투력 섬멸이라는 목적'을 달성한다는 것이었다. 독일적 관점-곧 한스 델브뤽(Hans Delbrück)이 정리한 기동전과 소모전의 개념에서, 기동전이란 곧 "단기간의 '''결정적 전투'''로 전승을 달성하는 전쟁수행방식"이었다. 반대로 소모전은 "결정적 전투 없이 연속적이고 장기적으로 이어지는 전투력 소모에 의해 전승을 달성하는 전쟁수행"이다.
여기서 핵심적인 부분은, 독일군에게 "전쟁을 끝내는 유일한 방법"은 그것이 기동전이든 소모전이든 '''적 전투력을 물리적으로 파괴'''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독일군이 기동전(Bewegungskrieg)과 섬멸전(Vernichtungskrieg)을 결코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라 믿은 이유가 여기 있다. 물리적 파괴의 전제 아래서는 단 한 번의 전투에서 적 병력의 대다수를 '''섬멸'''하여 적이 차후 전투력을 회복할 기회를 원천봉쇄하는 것이 전쟁을 단기간에 끝내는, 곧 '''기동전을 수행'''하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애시당초부터 기동의 목표를[4] '''원하는 시점에서, 원하는 장소에서, 원하는 방법으로 전투하는 것'''으로 잡고 있었다.
실제 독일군은 1940년 프랑스 전역에서도, 1941년의 바르바로사 작전과 태풍 작전에서 있었던 대규모 포위섬멸전에서도 기동부대의 '''포위기동을 통해''' 승기를 잡고 적 전투력을 물리적으로 섬멸했다. 프랑스 전역이 성공한 기동전인 이유 역시 A집단군의 포위기동 단 하나에 전쟁이 결판났기 때문이다. 반대로 1941년에 '''단기간의 결정적 전투'''로 적을 패배시키지 못한 독소전쟁은 실패한 기동전이자 소모전이다.

4.2. 전격전


통설로 나온 전격전 이론도 기동전을 기반으로 한다고 보인다. 사실 전격전은 역사깊은 독일 특유의 기동전 + 공군과 전차의 발명이 만들어낸 하나의 사후적 결과로 보는 게 맞겠지만 말이다.

5. 소련 군사학




5.1. 종심돌파




5.2. 전략적 마비에 대한 비판


미하일 프룬제, 미하일 니콜라예비치 투하체프스키(Mikhail Nikolayevich Tukhachevsky), 블라디미르 트리안다필로프, 알렉산드르 예고로프 등을 사상적 아버지로 둔 소련/러시아는 독일과 마찬가지로 포위와 섬멸을 중시했다. 투하쳅스키는 기동부대가 적 종심 깊숙이 돌파한 뒤 적 지휘소와 물자집적소, 통신시설, 비행장 등의 '두뇌'와 '신경망'을 공격해 적 전투력이 멀쩡히 살아 있더라도 이를 제대로 운용할수 없도록 마비시키고 종국에는 심리적으로 붕괴시킬 수 있다는 이론을 이미 1923년부터 부정하고 있었다. 투하쳅스키는 기동전을 통한 적의 마비를 주장한 지휘관인 니콜라이 페틴을 다음과 같이 비판한 바 있다.

'''"적을 와해시켜 파괴한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불가능한 과업이다. 적군의 와해의 확산은 적국의 사회적 상태에 주로 의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심리적 와해의 확대가 적군의 남은 전력에 퍼진다면, 그 결과는 기본적으로 결정적인 부분인 섬멸의 결과다. 와해는 섬멸의 결과로 생각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섬멸이 가져오는 것이다. 적의 모든 종류의 섬멸은 가장 유익한 능력이다. 섬멸이 단지 전쟁의 목적과 직접 연결될 뿐만 아니라 전쟁의 수행에서 극도로 중요한 후방의 막대한 경제적 지원과도 연결되기 때문이다. (중략) 그렇다면 결과적으로 페틴 동지는 적의 섬멸을 포기한 경솔한 슬로건을 제기한 것이다!."'''[5]

그리고 이렇게 결론을 지었다.

'''"작전은 군대가 적의 인력과 물자를 파괴하기 위해 수행하는 조직적인 투쟁이다. 무슨 가상적이고 추상적인 적의 신경계통을 파괴하는 게 아니라, 실제 조직인 적의 부대와 실제 신경계인 적의 통신을 파괴하는 게 작전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6]

소련군이 기동전에서 마비를 중시했다는 주장은 상당부분 근거가 없다. 투하쳅스키를 비롯한 소련군 이론가들은 마비를 목표라고 말하지 않고 도리어 부정했으며 섬멸의 결과로 따라오는 '''부수적인 효과'''로만 봤지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이 적의 섬멸을 계속해서 주장했기 때문이다.[7]

6. 기동방어


기동전의 개념을 방어전에 도입한 것을 말한다. 한마디로 말해 기동전을 할 정예병력으로 아군 지역에 침입한 적 기동부대를 박살내는 것을 말한다.
일단 방어전의 경우 어쩔 수 없이 공격자보다 방어자의 병력, 물자, 장비가 부족할 수밖에 없다.[8] 공격자는 해당 지역 한 곳을 뚫기 위해 병력을 집중할 수 있는 데 반해 방어자가 그렇게 하면 당장 전선에 구멍이 뚫리면서 그 구멍을 노리고 적의 공격방향이 바뀌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격자의 공격이 집중되면 방어진은 붕괴될 확률이 높고, 일단 방어진이 붕괴되면 후방지역에 새로운 방어선이 형성될 때까지 대혼란이 발생하며, 방어선의 남은 부분은 그야말로 무용지물이 되기 쉽다.
하지만, 어느 정도 기동전을 수행 가능한 정예부대가 방어측에 있으면 상황이 달라진다. 일단 방어선이 붕괴되기 전에 증원군으로 투입되어 방어선을 강화, 아예 돌파를 못 하게 할 수도 있으며, 설령 전선이 뚫리더라도 방어선 양측의 병력은 당황하지 않고 돌파구를 서서히 줄이는 한편, 방어 측 기동부대는 전선을 돌파한 적의 기동부대의 옆구리를 강타한다든지 하는 전술을 사용해서 적이 전과를 늘리는 것을 막고, 전선에 뚫린 구멍을 메꾸게 된다. 일단 일이 이렇게 돌아가면 포위당한 적의 기동부대는 결국 소멸하며, 상황이 더 좋게 돌아가면 이젠 아군이 방어전에서 공격전으로 변환해서 기동부대를 잃은 적을 역습할 수도 있다. 르제프 공방전에서 독일군의 발터 모델 원수가 보여준 것이 가장 대표적이고 성공적인 케이스다.
의미는 조금 다르지만 2차 대전 당시 아르덴 대공세제101공수사단이 바스토뉴에서 시전한 적이 있다. 단지 우회해서 적의 측면을 친다든지 하는 건 아니었고 한곳에서 적을 격퇴하고 나면 적보다 먼저 이동해서 적의 공격이 시작될 곳에서 적을 기다리는 식이었다.
이런 기동방어를 제대로 수행한 경우는 독소전쟁시 독일군이 소련군을 대상으로 한 경우가 자주 손꼽힌다. 특히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르제프 공방전이 대표적인 사례다.

7. 기타


마오쩌둥의 인민전쟁론이나 안토니오 그람시의 저작 등에서 언급되곤 하는 정치적 의미에서의 기동전은 한자로는 같지만 영어로는 Mobile Warfare라고 번역되니 주의. 게다가 이 기동전의 반의어는 소모전이 아니라 진지전(陣地戰, War of Position)이다. 혼동을 막기 위해서 일부 서적에서는 Mobile Warfare를 운동전으로 번역하기도 한다.
2010년대의 전쟁에서 기동전을 구사하는 지휘관으로 타이거 대령 등이 있다.

8. 관련 문서



[1] 1918년에 전쟁이 끝나서 실현되지 못했다.[2] 대표적인 사례는 아르덴 대공세 참고.[3] 다만 여기서 물리적 섬멸이란 적를 몰살시킨다는 뜻이 아니라 적의 실질적인 전투력의 상실. 즉, 전투블능으로 만든다는 뜻으로 적을 몰살시킨다는 것은 국가사회주의가 결합됐던 제2차 세계대전 시기의 동부전선에 한한다.[4] 기동(maneuver) : 목적과 의도를 갖고 실시하는 이동[5] Тухачевский, "Война клопов",Избранные произведения, Том I (Москва, Воениздат: 1964), p. 107. 투하쳅스키는 이 글을 1923년에 썼고, 풀러의 책 중 최초로 소련에 번역되어 들여온 책인 『대전쟁에서의 전차』(Tanks in the Great War 1914-1918)가 1924년에 번역되었다는 걸 감안하면 투하쳅스키는 풀러의 책을 보지 않은 상태에서 풀러의 이론을 반박한 셈이 된다.[6] Ibid., p. 108.[7] 옛날의 연구자들은 투하쳅스키가 풀러의 저서인 풀러의 책 『전쟁의 개혁』(Reformatoion of War)의 러시아어판 서문을 쓴 것에서 풀러를 긍정적으로 평가한 것을 근거로 투하쳅스키가 풀러의 영향을 받았음을 주장한다. 그러나 이 저자들이 주장하는 것과 달리 실제 그 부분은 원문의 한 단락에 불과하고, 원문의 전체 맥락은 풀러를 제국주의자이자 파시스트인 동시에 시대에 맞지 않는 소수 정예 군대를 추구하는 인물이라고 비난을 퍼붓고 있다. Тухачевский, Михаил Николаевич, "Предисловие к книге Дж. Фуллера ≪Реформация войны≫", Тухачевский М.Н. Избранные произведения, Том II (Москва, Воениздат: 1964)을 보라.[8] 일반적으로 말할 때 방어가 공격보다 유리하다고 하는 것은 공격자가 방어자가 열심히 다진 방어용 진지에 병력을 박아줄 때의 일이다. 당연하지만 기동전을 하는 상대방이 미치지 않은 이상 기다려주거나 그런 곳에 병력을 퍼부을 리 만무하고. 공격병력은 한곳에 모여있지만 방어병력은 거점을 지키기 위해 분산되어있다. 물론 방어지역으로 통하는 루트의 수가 적을수록 이 격차는 좁혀진다. 이 루트를 줄여서 방어전을 유리하게 만들어주는 것이 공격루트로 쓰기 힘든 산이나 강 등의 지형 장애물, 또는 잘 구축된 인공 장애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