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색 작전
1. 소개
독일어: '''Fall Blau'''[3]
영어: Case Bl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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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전으로 우리가 그 익히 아는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벌어졌다. 최종적으로 독일 육군 1개 야전군(제6군)이 천왕성 작전 때 완전히 전멸했으며, 나치 독일은 이전에는 없었던 치욕적인 패배를 당하였다. 독일군이 다른 방면에서의 진격을 멈출 정도로 대량의 자원이 집중되었으며, 소련군이나 독일군이나 둘 모두 사활을 건 전투를 펼치게 된다.
청색 작전에서 시작된 연쇄적잇 상황의 종료는 1943년 3월경에 일어난다. 그 이전까지는 독일의 공세, 천왕성 작전, 독일군의 구출 작전(겨울 폭풍 작전), 하르코프 공방전으로 쭉 전투가 이어졌다.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 이후로는 한동안 소강상태에 접어든다.[5]
2. 발단
2.1. 1942년 여름까지의 전황
전쟁 초반에 대패로 인하여 소련의 상황은 상당히 좋지 않았다. 당장에 소련에게 가장 중요한 우크라이나 곡창지대를 잃어 농업 생산이 절반으로 줄었고, 돈바스 공업지대의 상실로 소련의 중공업 생산이 4분의 1로 줄었으며 알루미늄, 구리, 망간은 1/3 이하로 줄어들었다. 전반적으로 소련은 석유를 제외한 다른 모든 공업 부문에서 본토뿐 아니라 광대한 점령지의 자원과 공업 시설까지 가용할 수 있던 독일에 크게 뒤지고 있었다.
- 합성유 생산과 천연 원유 생산 및 수입[6]
1942년 1월의 전황.
1941년 12월 독일 중부집단군은 모스크바 점령을 목표로 공세를 폈으나, 도시 중심에서부터 약 30km를 남기고 게오르기 주코프 장군이 지휘한 소련군 수비대에게 패배한다. 12월 4일부터 시작된 소련군의 공세때문에 독일 중앙집단군은 커다란 손실을 내고 약 모든 전선에서 100~200km 후퇴하였다. 이때문에 중부집단군 사령관인 육군원수 페도르 폰 보크 장군, 제2기갑군 사령관 육군상급대장 하인츠 구데리안 장군은 격노한 히틀러에 의해 파면되었다. 12월부터 시작된 반격은 모스크바 공세에 대한 역공으로 무려 12개 이상의 야전군이 동원되었다. 주코프 장군은 모스크바를 둘러싼 두 개의 집게발에 타격을 가해 11월의 위치로 돌려놓아, 모스크바를 위험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목적이었으며, 독일군은 형편없는 동계 장비로 인해, 더 많은 전차와 항공기에도 불구하고 윤활유와 연료 부족에 발목 잡혔다. 독일군 내에서 133,000건의 동상이 발생했다. 이렇게 약화된 독일군은 소련군의 공세에 밀려났고, 모스크바는 적의 위협에서 벗어났다. 다만 제공권이 독일군에 있었기 때문에 루프트바페의 공격에 큰 피해를 입었고, 1월에 공세를 중지하고 정지하였다.
한편 남방에서도 독일군은 키예프를 점령한 후 전선이 소강상태에 머무르고 있었으나, 추위와 보급부진으로 고전했으며, 이때문에 남부집단군 사령관인 육군원수 게르트 폰 룬드슈테트 장군이 파면되고, 육군원수 발터 폰 라이헤나우 장군이 후임 사령관으로 부임했으나 심장마비로 사망하는 바람에, 중앙집단군에서 잘렸던 보크 원수가 다시 남부집단군 사령관에 부임하여 전선을 책임지게 되었다.
스탈린은 모스크바에서의 방어와 반격에서 얻은 자신감으로 적에게 더욱 강력한 타격을 가하고자 했고, 르제프 돌출부에 대한 공격을 지시한다. 주코프 장군이 이에 반대했지만, 공세는 개시되었고, 결국 444,000명의 전사자만을 얻고 전투는 성과없이 종료된다.
3월부터 해빙기가 시작되고, 도로가 진흙창이 되는 라스푸티차가 시작됨에 따라 전선은 소강상태에 접어들었고, 독일군과 소련군 모두 이 시기를 이용하여 춘계작전을 준비한다.
2.2. 히틀러의 야심
중부에서 소련군을 다시금 격퇴하고 여러 방면에서 몰려오는 소련군을 차단했다고 해서 독일군의 맘이 편했던 것도 아니다. A-A선까지 진격하여 한방에 소련을 무너뜨리겠다는 바르바로사 작전은 소련의 격렬한 저항으로 당초 독일의 계획보다 진격이 둔화되었고 그 결과 가을의 진창, 겨울의 빙판이라는 악재가 추가되었다. 이어지는 모스크바 전투에서도 별다른 성과없이 물러났으며, 되려 소련군의 반격에 후퇴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독일군 장성들도 그들이 얕보았던 소련의 전쟁수행능력을 재평가하기 시작했고, 점차 전황이 어려워질 것을 예측했다.
1942년 여름 히틀러는 한가지 작전안을 꺼내들었다. 장군들은 전선 중앙의 모스크바 점령을 마무리 짓고, 소련에게 막대한 정신적 충격을 가하고자 했다.[7] 독일군의 하계공세는 돈강까지 진격하는 소소한 수준에서 마무리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히틀러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캅카스 지역을 공격, 동부군과 중동을 흑해를 통해 연결하고, 캅카스의 막대한 천연자원을 획득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에르빈 롬멜 장군의 아프리카 군단이 수에즈 운하와 중동을 공격권에 넣자 얻은 자신감이었다. 물론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석유였다. 위의 표에서 볼 수 있듯이, 독일에게 가장 아쉬운 것은 석유였다. 독일이 캅카스의 유전지대를 손에 넣는 다면 소련군의 연료 상황을 악화시킬 뿐만 아니라, 독일군의 힘을 증강시킬 요소였다.
그러나 세계지도를 보면 알 수 있지만 아프리카에서 우크라이나 남부까지의 거리는 프랑스와 독일을 합친 것보다 길고 중간에 터키가 있으며 역시 터키와 러시아 사이의 험준한 산맥을 돌파해야 하는 지경이고 러시아 중부와 북부를 놔두고 남부로 대폭 들어가는 계획이었다. 여기서 롬멜의 역할이 있었다고 하는데 터키를 추축군 동맹에 끌여들여 아군으로 만드는 것이였다.[8] 그러면 지정학적으로나 무력으로나 큰 이득을 가진 터키군과 합심해서 캅카스 까지의 진격로 확 열리는건 기본이고 보급로가 대폭 줄어드는 것은 옵션이지만, 롬멜의 경우 거의 1년 넘게 영국군과 공방을 주고받으면서 이집트에서 제자리 싸움을 하고 있는데 수에즈도 점령 못 했는데 거기까지 어떻게 간다고...[9] 물론 롬멜한테 물자가 가면 되겠지만 그게 전부 지중해 바다 속과 러시아로 가고 있었잖아..[10]
3. 전개
3.1. 동부군의 상황
히틀러의 구상안은 암호명 청색(Blau) 작전으로 구체화되었다. 동쪽으로는 스탈린그라드까지 전진시키고 남쪽으로는 캅카스 지방을 좌우로 관통하는 캅카스 산맥의 고산 통과로까지 나아가 카스피 해의 아스트라한과 그로즈니까지 나아가 캅카스 지역을 완전히 장악, 소련내륙과의 연결을 끊어놓는 것이 핵심이었다. 공세에는 6군, 17군, 4기갑군 1기갑군이 참가할 예정이었으며, 헝가리군과 루마니아 군도 참가가 예정되었다. 공군은 6월 20일에는 5월에 비해 20% 증강된 2644기가 배치되었으며 4항공군이 배치되었다.
이 와중에 1942년 초에 남부집단군 사령관 발터 폰 라이헤나우가 심장마비로 사망하자 페도어 폰 보크에게 지휘권이 넘어갔다. 라이헤나우는 독일 육군 내에서 열렬한 친나치 성향을 가지고 있었고 히틀러도 정권 장악 초기부터 군부의 협조를 얻는데 라이헤나우의 도움을 많이 받아서 그의 의견을 무조건 거부만 할 수는 없었던 데다가 결정적으로 야전군 지휘관으로서도 재능이 뛰어난 장군이었다.
작전안은 3개의 공세로 구성되었다.
1. 헤르만 호트의 지휘를 받는 제4기갑군과 2군이 헝가리군의 지원과 함께 쿠르스크와 보로네시로 진격하고, 그대로 볼가강까지 다다른다.
2. 프리드리히 파울루스의 6군은 하르키프로 진격한 뒤 4기갑군과 보조를 맞춰 평행하게 진군하여 스탈린그라드로 진격한다.
3. 17군과 1기갑군은 돈강하류로 공격하며 루마니아 군이 합세한다.
히틀러는 원래 이 작전명을 게르만족의 전설적인 영웅의 이름을 따서 처음에 "지크프리트 작전"이라고 명명했으나, 회심의 한방으로 소련을 멸망시키겠다던 "바르바로사 작전"이 실패로 돌아갔음을 상기했음인지, 전통적으로 색깔을 이름으로 붙이던 과거로 돌아가서 (예를 들어 폴란드 침공은 "백색 상황 - Fall Weiß", 프랑스 침공은 "황색 상황 - Fall Gelb") "청색 상황 - Fall Blau"으로 명명하기로 했다. 하지만 이 작전은 지나치게 목표가 거대한 것이었으며, 안그래도 바르바로사 작전-모스크바 전투로 인한 엄청난 손실로 병력부족에 시달리는 독일군에게는 감당하기 벅찬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독일군은 이 공세에 엄청난 수의 추축동맹국 병력을 포함시켰다. 이들은 이탈리아 왕국, 루마니아 왕국, 헝가리 왕국, 그리고 크로아티아 독립국(의용병)군이었다. 하지만 이들의 무장수준이나 훈련도는 매우 불충분한 것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독일군은 이들을 2선에 배치하고, 후방에 있던 독일군을 일선에 세운다는 전략을 가지고 있었다. 문제는 독일군이 너무 대담한 작전을 세우는 바람에, 독일 동맹국 병력이 맡고 있는 수백 킬로미터에 달하는 측면이 소련군에 직접 노출된다는 것이었다. 결국 이런 문제점은 후에 독일군이 참패하는 원인이 된다.
1942년 6월, 독일군의 정보장교가 탄 비행기가 소련군 지역에 불시착했다 포로가 되었고, 독일군의 이와 같은 작전안은 소련군에게 모조리 넘어갔으나 히틀러는 이에 책임있는 지휘관인 슈툼메(Stumme) 중장만 군법회의에 회부하고[11] , 작전안은 그대로 실행했다.
3.2. 소련군의 상황
'''아무 준비도 되어있지 않았다.'''
이러한 작전계획은 영국에 의해 소련에게 전달되었지만, 스탈린은 이런 경고를 대수롭지 않게 무시한다. 심지어 세밀한 전투명령서가 실린 경비행기가 6월 19일 소련군 진지선 뒤에서 추락했을 때, 그것을 역정보로 치부했다.
그는 여전히 독일군의 주공은 모스크바라고 생각했지만, 전술했다시피 독일군의 공세는 남부로 쏠려 있었다. 이것이 비합리적인 결정인 것은 아니었다. 독일군의 중부 방면군은 여전히 강했고, 얼마없는 소련군의 예비전력은 모스크바로 집중될 수 밖에 없었다. 거기다가 아주 단순하게, 즉, 논제를 쓸데없이 꼬아서 생각하지 않는 한 청색 작전안은 나오기 힘든 안이다.
다시 말해 문제는 스탈린의 "판단력"이 아니라 "의심병"이었다. 작전 계획서까지 얻어낸 시점에서도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은 것은 영국에 대한 그의 불신에서 비롯된 것이었지만, 그것은 이번에는 좀 지나친 것이었다.
그즈음 춘계공세가 시작되었다. 이는 레닌그라드로부터 흑해까지 이르는 수천킬로미터 전선의 7개 방면에서 동시 다발적인 공세를 펴서 독일군을 소련에서 몰아내야한다는 것이었다. 소련군 총사령관 대리인 주코프 대장과 총참모장 바실렙스키 중장은 모스크바 전투 반격 당시부터 "독일군은 아직 막강하고, 우리는 아직 준비가 덜 되었다." 고 계속 이를 말렸으나, 강철의 대원수는 히틀러 못지않게 자신의 판단을 고집하는지라 붉은 군대 고위 지휘관들은 실패가 예상되는 공세를 뻔히 실행할 수밖에 없었다.
3월부터 시작된 소련군의 춘계공세는 몇몇지역에서 어느정도의 성과를 냈고, 이는 스탈린을 고무시켰다. 스탈린은 더욱 대담해져서 5월부터 공세를 펴서 1941년 10월 이래로 점령되어 있는 하르코프를 탈환한다는 극히 야심만만한 계획을 세웠다.[12] 이를 지휘할 병력은 약 60만의 스탈린그라드 전선군이었고, 겨울전쟁의 맹장 세묜 티모셴코 원수 (전국방장관)와 정치장교 니키타 흐루쇼프 중장이 이 공세를 지휘하기로 되어 있었다.
3.2.1. 제2차 하르코프 공방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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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개시
작전은 6월 28일 시작되었다. 소련군은 지난해 6월처럼 별다른 저항도 못해본채로 독일군에 드넓은 스텝 초원에서 포위되었다. 제 4기갑군은 보로네즈 맞은편 돈 강에 도달한 후 크림에서 오는 증원군과 합세하였다. 소련군은 후퇴를 거듭하였고, 7월 23일에는 돈 강 하구의 로스토프를 내팽개친 채로 도주했다. NKVD부대가 필사적으로 저항했으나, 작년과는 달리 소련군은 방어를 포기한 채로 뒤로 물러났다.
하늘에서의 싸움도 쉽게 흘러갔다. 4항공군은 성공적인 근접항공지원으로 독일군의 공세를 도왔고, 소련군 비행장을 공격하였다. 이 공격으로 소련군 전투기는 떠보지도 못한채 지상에서 쓰러져갔다. 최대 100기의 항공기가 소련군 1개사단에 대한 공격에 합세했다. 26일 동안 소련군은 약 800기의 항공기를 잃었지만, 독일 공군의 손실은 175기에 불과했다.
7월 6일 소련군의 5전차군이 공세를 시작하여 어느 정도 성과를 얻어냈으나, 뒤에서 밀려오는 독일군에 어쩔 수 없이 15일에 원래 지점으로 돌아왔다. 그 외에도 소련군의 소소한 저항이 계속되었지만 전세에 큰 영향을 끼치지는 못했다.이렇게 작전이 잘 흘러감에도 지휘부에서는 작전의 진행을 두고 히틀러와 일선 지휘관들의 싸움이 계속되었다. 히틀러는 결국 남부 집단군 사령관인 보크를 해임하고 빌헬름 리스트(Wilhelm List)로 교체했다. 청색 작전은 이제 2단계로 접어들었다.
얼마나 작전이 빨리 진행됐는지, 보급선이 전진하는 공격군을 따라잡지 못하는 문제가 생겼다. 6군은 연료부족으로 멈춰서야 했으며, 전진을 위해서 많은 차량이 버려졌다. 보급을 위해서 공군의 Ju 26까지 동원되었으나, 연료의 부족은 여전히 문제였다. 이런 힘든 상황에서도 히틀러는 진격 속도를 문제삼아 일선 지휘관들을 교체하는 일을 벌였다.
히틀러는 이런 공세에 자신감을 얻어 군을 두개로 분할했다. 1기갑군 17군 11군이 A집단군에 배속되었고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의 지휘 아래 캅카스 유전을 향해 진격했다. B집단군에는 4기갑군 2군 6군이 맡겨져 폰 바익스의 지휘 아래 스탈린그라드 점령 임무를 맡았다.
스타프카는 당황했다. 모스크바에서는 주민들 사이에 새로운 공황상태가 퍼졌다. 더군다나 별다른 저항없이 로스토프를 잃자 소련 주민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사기는 완전히 무너졌고, 군은 와해됐다. 정치위원과 장교의 명령은 더 이상 병사들에게 고려대상이 아니었다.
이 상황에서 스탈린은 이후로 계속 회자될 명령 227호를 내린다. Ni Shagu Nazad! 즉 한 걸음도 물러서지 말라는 이 명령은 상급 지휘관의 명령없는 후퇴에 대한 처벌을 약속했으며, 이 명령에 따라 형벌 부대가 창설되었으며, "공황 조장자"와 "겁쟁이"들은 즉결 처형당하거나 형벌 대대에 복무해야 했다. 점차 이 명령은 전 전선에 효과를 보이기 시작하며, 소련군은 조금씩 부대를 정비하고 방어선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명령 227호에 대해서는 갖가지 오해와 전설이 난무한다. 가장 흔한 것이, 후퇴하는 사병들에게 기관총 사격을 가하는 정치위원....에너미 엣 더 게이트에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오해는 사실과 꽤 다르다. 명령 227호는 기존의 소련군에게 없었던 규율 역할을 했다. 사실 명령 227호는 단순히 적전 도주나 무단 이탈을 금지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아무리 서구 군대라고 해도 적전 도주나 무단 이탈은 즉결 처형도 가능한 사항이었다. 물론 명령 227호 위반에 따른 후속 조치가 다른 군대들에 비하면 꽤 가혹했다. 그러나 이런 가혹한 조처는 러시아군의 전통에서 기인한 면도 크다. 러시아의 삶은 대체로 가혹하고, 거주민, 특히 병사들은 이런 가혹한 삶에 익숙했다. 그에 대한 기록은 나폴레옹 시절로 거슬러가 보아도 찾을 수 있다. 가혹하게 다뤄지며 절대 복종하는 병사들은 서구 군대의 반면교사이자, 선망의 대상이기도 했다. 물론 이것이 정당하다는 얘기는 아니지만, 이것이 도덕적이냐 아니냐를 떠나서, 이런 가혹한 조처가 공산주의 체재와 명령 227호의 산물이라고 말하는 것은 오류가 있다. 또한 명령 227호 자체는 정치위원과 장교들을 위한 것이었으며 일반 후퇴에는 적용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후퇴를 막기 위한 저지 부대도 존재하기는 했지만, 전선이 아닌 후방에 배치되어 허드렛일이나 경비 임무를 맡았다. 게다가 저지부대는 11월부터는 새로운 명령으로 폐지된다. 명령 227호의 수행은 NKVD가 맡았지만, 이들은 이전과 같은 헌병 임무를 수행할 뿐이었다.
3.3.1. A집단군의 공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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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집단군은 항공지원에 힘입어 캅카스의 관문인 로스토프에 도착했다. 그 후에 8월 1일까지 쿠반 강에 도착했다. 8월 9일 1기갑군이 마이코프에 도착했다. 이는 2주만에 480km를 주파한 정말 기록적인 속도였다. 이제 캅카스의 유전이 독일군의 차지가 될 차례였으나, 독일군 눈 앞에는 소련군에 의해 파괴된 유전만이 널브러져 있었다. 유전이 재가동되려면 1년 남짓한 시간이 필요했다.내 앞에는 적군이 없고 뒤에는 남은 것이 아무것도 없다. -A집단군 사령관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 장군
그 직후 독일군은 퍄티고르스크(Pyatigorsk)로 진격해 그곳을 점령했으며, 8월 12일에는 캅카스 산맥에 도달했다. 그러나 여전히 캅카스 지역의 점령은 완전하지 않았고, 카스피 해의 유전들은 살아남았다. 너무 길어진 보급선은 독일군의 진격을 방해했다. 흑해는 사용될 수 없었고, 보급은 로스토프에서부터 이어지는 철로에 의존해야 했다. 가장 심각한 것은 석유로, 보급 차량에 지급할 연료조차 없어서 낙타를 이용해야 할 지경이었다. 전진은 23일부터 점차 느려지기 시작한다.
남동부의 국방군은 이런 악재에도 계속 전진하여, 중요한 석유 생산기지인 바쿠와 그로즈니로 향한다. 다수의 상태 양호한 산업시설이 독일군의 손에 떨어졌고, 독일 국방군은 타만반도와 노보로시스크 군항을 공격한다. 이후 흑해 연안을 따라 옐라스타를 점령한다. 전진은 그로즈니 북쪽에서 멈췄다. 소련군은 그로즈니를 방어하기로 작정하고 9군과 44군이 배치되어 방어선을 구축했다. 독일 공군은 더 이상 국방군에 대한 지원이 불가능했고, 소련군 항공기는 별다른 저항없이 독일군이 차지한 교량과 보급선에 대한 공습을 수행한다. 국방군은 9월 2일 테렉 강을 건넜지만 전진 속도는 끔찍할 정도로 느렸다.
9월 초에 3만의 보충병과 6천대의 차량 15000마리의 말이 흑해를 건너왔다. 이는 흑해의 대부분의 항구가 독일의 손에 있었기에 가능했다. 하지만 노보로시스크에서의 전투는 아직 종료되지 않았다. 소련군 47군은 참호에 들어가 저항했으며, 격렬한 4일간의 전투끝에 9월 10일 노보로시스크는 함락된다.
독일군은 기세를 몰아 흑해 부근의 소련군에 대한 포위섬멸을 목표로 계속 공세를 이어나갔으나 이 지역은 흑해 해안을 따라 험악하기 그지없는 캅카스 산맥이 자리잡은 곳이었다. 즉 독일군의 장기인 보전합동 같은 건 무리였고 소련군과 별 다를바 없이 보병들이 산악전을 벌여야만 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독일군의 전투력도 소련군보다 크게 나을 게 없었다. 결국 남쪽 해안 도로를 차지한 채로 농성을 벌이던 소련 47군에게 독일군의 공세는 모두 격퇴당하여 교착상태에 빠졌다. 그로즈니도 소련군의 저항에 점령되지 못했고, 10월에는 보급선의 붕괴로 인해 독일군 A집단군의 전진은 완전히 정지되었다.
이후 본국에서의 지원은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참가한 독일군에게 몰리고, 더 이상의 지원군 없이는 전진이 불가했던 독일군은 소련군의 반격까지 겹처 캅카스 지역에 그대로 머물게 된다. 기갑군까지 빠져나가, 더이상의 유의미한 공세는 불가능했다. 이는 후일 또다른 파국을 불러올 재료가 될 뻔했다.
이 때 독일군은 캅카스를 점령했다는 상징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1943년 1월 유럽 최고봉으로 꼽히는 옐브루스를 등정했다.
3.3.2. B집단군의 공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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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도 소련군에게는 암울하기 그지 없었다. 7월 23일 돈 강을 향해 전진하는 B집단군은 거침 없이 드넓은 초원을 지나 진격했다. 소련군은 이에 대항해 반격을 시도했다. 그러나 미숙한 부대들의 미숙한 공격은 독일군에 그다지 큰 피해를 입히지 못했고, 전진은 계속되었다. 7월 23일 고르도프 장군은 62군과 64군을 동원하여 공격했다. 1탱크군과 4탱크군은 6군에게 반격을 가했으나 효과를 보지 못했고, 51군의 저항도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했다.그것은 내 눈으로 본 동방 지역 중에 가장 적막하고 구슬픈 곳이었다. 덤불과 나무 한 그루 없고 몇 마일을 가도 마을 하나 없는 메마르고 생기 없는 불모의 초원이었다. -독일군 생존 병사의 증언[13]
호트의 4기갑군이 8월 2일 돈 강을 건넜다. 6군은 스스로 돈 강을 도하하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판단, 남쪽에서 올라오는 4기갑군을 기다리기로 한다.
A집단군의 4기갑군은 캅카스 점령이 마무리 되자, 히틀러의 명령에 따라 스탈린그라드 공격에 동원되었고, 파울루스는 8월 19일까지 스탈린그라드를 향한 공격을 준비한다. 그리고 드디어 파울루스의 6군은 8월 23일 돈 강을 건넌다. 이때부터 스탈린그라드에 대한 히틀러의 편집증적 집착이 시작된다. 스탈린그라드라는 도시의 상징성이 히틀러를 사로잡았고, 스탈린그라드 점령이 독일의 승리 '신화'에 보탬이 될거라고 여겼다. 문제는 스탈린도 똑같이 생각했다는 점이다. 스탈린도 도시를 수호하기 위해 모든 물자를 쏟아넣을 각오를 하고 있었다. 스탈린그라드의 공업생산력이나, 볼가강의 전략상 중요성도 한 몫 했다. 볼가강은 러시아를 관통하는 강으로 모스크바 뒤쪽으로 돌아흘러 들어갔으며, 볼가강의 수호는 우랄산맥 서안의 수운을 지키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볼가강의 수운이 차단되면 모스크바로 남부의 천연자원이 도달하지 못하고, 이는 소련전체 공업의 마비를 의미했다. 다른 생필품을 랜드리스에 거의 의존하고, 무기생산에 영혼까지 뽑아쓰던 소련의 공업의 마비는 유일하게 우세한 물량에서의 패배를 의미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스탈린그라드의 점령이 필수적인 것은 아니었다. 독일군이 원한 것은 볼가강의 경제적 가치이다. 이는 외곽에서의 전투와 항공 폭격만으로도 충분했고, 볼가강 차단은 다른 곳에서도 가능했다. 시가지에 독일군 병사들을 갈아넣기보다는 벌판에서 기갑군으로 결정적 승리를 이끌어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다시 말하자면, 스탈린그라드 점령의 원동력은 그것의 이름외에는 별로 없었다. A집단군의 클라이스트는 전후에 "스탈린그라드를 결정적 지점으로 보지 않았고, 독일군에게 지도에 있는 이름에 불과했다."고도 말했다.
'''스탈린그라드에 지옥이 펼쳐질 재료들은 이제 다 준비가 되었고, 두 군대가 충돌할 일만 남아있었다.'''
4. 위기
4.1. 스탈린그라드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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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일 새벽부터 우리는 공습경보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저녁 6시 즈음에, 난 집에서 아주 커다란 폭발소리가 나는 것을 들었죠. 정말 끔찍했어요. 난 비명을 지르면서 밖으로 나갔습니다. 나는 독일군 폭격기가 떠있는 걸 볼 수 있었어요. 한 40에서 50기 정도가 우리 동네 위에 떠있었습니다. 그들은 폭탄을 떨어뜨렸죠. 난...난 사방에서 폭발을 볼 수 있었어요. 가장 최악인 것은 그들이 2시간마다 와서 폭탄을 떨어뜨렸다는 거에요. 매 2시간마다요. 우리는 폭탄이 떨어질 걸 예측까지 할 수 있었죠...(중략) 길거리에 시체들이 널려 있었죠. 거의 모든 집들이 폭탄을 맞았답니다. 건너편 거리의 모퉁이에 나를 가르치던 선생님이 살고 있었어요. 그녀는 그의 아들과 함께 숨어 있었지만, 폭탄이 그들을 정확하게 맞혔죠....그녀는 완전히 찢겨 있었어요. 우리는 한밤중에도 폭격을 당했답니다. 한밤중에요! 군에서도 아무말이 없었고, 독일군도 아무런 경고도 하지 않았어요. 이건 말도 안되는 일이었요. 그들은 우리를 죽이는게 목적인 듯 했어요. - 폭격 당시에 대한 증언
5. 절정
5.1. 천왕성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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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그라드 시내에서 처절한 전투가 계속되던 1942년 가을의 어느날, 주코프와 바실렙스키는 크레믈린에서 열린 스타프카 회의에서 이런 축차적인 병력 투입으로는 방어가 한계일 뿐 독일군을 격퇴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둘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스탈린은 두 눈을 반짝이며 "그럼 무슨 다른 좋은 수가 있단 말인가?"라고 되물었고, 두 장군들은 며칠안에 다른 방안을 찾아오겠다고 스탈린에게 대답했다.남서쪽 전선에서의 공격은 19일날 시작됐죠. 우리는 20일날 출발했습니다[14]
. 공격준비 포격이 끝났을때, 나는 참호 밖으로 뛰쳐 나갔어요. 뒤를 돌아보니, 오 이렇게 좋을 수가! 전차가 일직선으로 다가오고 있었죠. 나는 탱크를 보자 머리카락이 곤두섰어요. 나는 그때까지 떼거지로 몰려오는 탱크들을 본적이 없었거든요. 나는 생각했죠. '젠장!' 나는 우리가 전진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어째서인지 난 독일군 전차가 우리 뒤를 따라오는 것 같았죠.[15] 내 생각에 우리 소비에트가 그렇게 많은 탱크를 가져본 적은 없었어요.....[16]
루마니아군과 헝가리군이 우리 앞쪽에 있었습니다. 우리는 계속 전진했어요. 따라오던 전차들은 제 역할을 해주었어요. 아침에 우리는 Abganerovo에 도착했습니다. 우리 전차들이 쑥대밭을 만들어논 후였죠. - 천왕성 작전에 참가한 알렉세이 필리포비치 쿠즈네초프 (Aleksey Filippovich Kuznetsov)의 증언
며칠후 소련군의 총참모부에서 여러 참모들이 세부 논의 끝에 확정한 작전안은 그동안의 소극적인 수비를 떠나 따라서 대규모의 공세를 통해 B집단군에게 타격을 가하고 남부 러시아 전선의 전세를 뒤집는다는 계획이었다.[17] 총참모장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 원수는 독일 6군의 좌익과 우익이 장비도 변변찮고 싸울 의지도 별로 없는 루마니아군에 의해 방어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총군부사령 게오르기 주코프 원수와 작전을 의논했다. 주코프와 바실렙스키는 스탈린의 승인을 얻어 독일 6군을 스탈린그라드 시내에 붙잡아두고 양 측면으로 콘스탄틴 로코솝스키의 돈 전선군과 니콜라이 바투틴의 남서 전선군의 협격을 통하여 스탈린그라드의 독일군을 포위하는 골자의 천왕성 작전을 입안했다.
이에 따라 최악의 위기를 맞고 있던 볼가강 교두보에는 최소한의 방어만 가능한 수준의 병력 보충을 했고 스탈린그라드 북서쪽과 서남쪽에 대규모의 병력을 집결하기 시작했다. 독일군에 비밀을 지키기 위해 모든 명령은 구두로 전달되었으며, 무선이나 문서를 사용한 명령은 금지되었다.
그리고 11월 10일, 소련군은 5개 야전군 규모의 대병력의 집결을 완료했다. 이렇게 집결한 병력은 90만에 가까운 대병력이었다.
5.2. 겨울폭풍 작전
독일 중부집단군의 선전과는 정반대로 독일 남부집단군의 상황은 최악으로 치달아가고 있었다. 몽상스러웠던 보급 작전은 당연히 실패했고 6군 사령관 파울루스는 스탈린그라드를 사수하기 위해서는 충분한 보급이 필요하다며 여러 차례 보급을 요청했지만 애초에 불가능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또한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B집단군과 협의하여 스탈린그라드 남서쪽을 돌파하여 탈출할 수 있는 작전의 재량권을 요구했지만 거부당했다.
게다가 상황은 더욱 심각해져 6군이 겨울 동안 스탈린그라드를 사수할 가능성은 점점 사라지고 있었고 이대로 스탈린그라드의 6군과 남서 방면군의 맹공에 밀려나고 있던 B집단군의 잔여 병력마저 섬멸한다면 이미 코카서스에 진출한 A집단군도 고립될 위기에 직면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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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그라드 전투가 끝난 직후인 3월 만슈타인의 사령부를 방문한 히틀러, 방한복을 입은 만슈타인의 모습이 낯설다. 사진 오른편으로부터 제4항공군 사령관 리히트호펜 공군 원수, 총통 전용기 기장 한스 바우어 SS 중장, 만슈타인, 히틀러.
이에 히틀러는 명장 에리히 폰 만슈타인 원수를 돈 집단군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스탈린그라드 남서쪽을 돌파하여 6군과 연결할 것을 명령했다. 허나 이 돈 집단군이라는 것이 새로 투입된 몇몇 부대와 포위망에서 탈출하는 데 성공한 4기갑군의 일부 병력을 제외하면 사실상 패잔병 집단과 다를 게 없는 수준이었기 때문에 편제는 거대했지만 실제 사용 가능한 병력은 얼마 되지도 않았다.
애초에 소련군의 포위망을 분쇄한다는 임무는 돈 집단군이 감당하기엔 불가능한 임무였다. 새로 편성한 호트 기갑집단과 홀리트 파견군, 루마니아 4군이 놀라운 투혼을 발휘한 끝에 호트 기갑집단의 선도부대인 6기갑사단이 스탈린그라드 50km까지 진출했으나 더 이상의 진격은 무리였다. 만슈타인은 파울루스에게 남서쪽으로 탈출하여 돈 집단군과 합류할 것을 명령했다. 허나 참모장교 출신의 파울루스[18] 는 히틀러의 현지 사수 명령에 불복하는 것을 매우 두려워하고 있었고 몇몇 장교들이 명령을 무시하고 남서쪽 포위망을 뚫어 탈출하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이라며 설득을 시도했지만 파울루스는 이를 거부했다. 사실 만슈타인 회고록을 주요 사료로 쓰는 일부 전사가나 만슈타인빠들이 파울루스에게 이 구출실패를 떠넘기면서 파울루스를 희대의 무능아로 묘사하곤 하나, 이 시점에서 6군의 능력으로는 탈출이 불가능했다고 봐야 한다. 일단 6군은 소련군에게 이중 삼중으로 포위되어 있었고, 그뿐만 아니라, 여름부터 싸워왔던 62군과 64군은 시내에서 건재했기 때문에 건물 하나하나마다 소련군 병력과 대치하고 있던 6군이 갑자기 철퇴한다는 것도 불가능했다. 게다가 제대로 된 동복도 걸치지 못하고 실탄마저 부족했던 6군 장병들이 도보로 수십km를 걸어서 소련군의 포위망을 돌파한다는 것도 무리였다. 즉, 만슈타인은 구출작전 실패의 책임을 파울루스에 떠넘긴 것이다. 물론 겨울폭풍작전 자체가 히틀러의 망상에 기반한 것이기 때문에 실제로 일차적인 책임은 이런 불가능한 작전을 명령한 히틀러에게 있다.
만슈타인은 구출작전이 실패하자 6군의 고난은 더 이상 무의미하다고 판단, 히틀러에게 6군의 항복을 허가해 줄 것을 탄원하지만 '''히틀러는 당연히 거부한다.'''
한편 소련의 주코프와 최고사령부는 스탈린그라드의 포위망을 굳힐 작전인 '토성 작전'을 계획하고 있었으나 돈 집단군이 겨울폭풍 작전으로 밀고 들어오자 돈 집단군에 대한 반격 계획인 '소(小) 토성 작전'으로 작전을 변경해 돈 집단군을 밀어붙였다.
결국 소련군 51군을 상대로 분전하던 루마니아 4군의 방어선이 무너지기 시작했고 소련군 2친위군과 5전차군의 공격에 돈 집단군마저 포위될 위기에 처하자 만슈타인은 돈 집단군 예하 부대에 작전을 중지하고 후퇴할 것을 명령했다. 이제 6군이 탈출할 가능성은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겨울폭풍 작전은 6군을 구출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그나마 다행히 캅카스에 진출한 A집단군이 탈출할 시간을 벌어줬기 때문에 러시아 남부전선 전체가 붕괴되는 사태는 막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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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군은 상황이 절망적이 되자 유능하다고 판단된 장교들을 비행기로 탈출시키기 시작했다.[19] 독일군 수중의 마지막 비행장인 굼락(Gumrak)에서는 안전한 곳으로 탈출하려는 광란의 쟁탈전이 벌어졌고, 장교들은 비행기에 올라타려고 뇌물을 주고 매수하려고 들기도 했다.[20] 물론 이것도 비행장이 수중에 있을 때 이야기였고, 비행장이 점령당하자 탈출할 길은 완전히 사라진다.
5.3. 독일의 항복
6. 결말 - 독일군의 퇴각과 쿠르스크 전투 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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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파국을 낳게 한 스탈린그라드에 대한 히틀러의 집착은 단순한 전략적 의미 이상의 것이었다. 히틀러는 스탈린그라드를 점령함으로써 정신적 승리를 이루고자 했고, 스탈린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히틀러의 집착은 천왕성 작전 도중 후퇴를 할 수 있는 결정적이고 유일한 기회를 놓치게 만들었으며, 한걸음도 물러서지 말라[21] 는 무리한 명령의 원천이 되었다. 이는 스탈린그라드를 포기하고 만슈타인의 부대와 합류하기 위한 마지막 기회를 놓치게 만들기도 했다.
결국 제 6군의 항복과 함께 남부 집단군은 사실상 붕괴하였다. 아직 빠져나가지 못한 A집단군은 그대로 캅카스에 포위될 위기에 처했다. 소련군은 토성 작전을 계획하여 로스토프까지 진격하여, 이러한 우려를 실현시키고자 했다. 맹렬히 진격하여 1942년 12월 초에는 로스토프에서 100km떨어진 곳까지 진격했다. 로스토프가 점령당한다면 A집단군은 캅카스에 그대로 갇혀 6군 꼴이 날 것이 분명했다. 히틀러는 이때만큼은 다행히도 A집단군 전체에 후퇴명령을 내렸고 후퇴명령과 함께 A집단군은 노련한 방어전을 펼치며 닫히려는 소련군의 포위망을 강제로 열어젖히고 빠져나갔다. 이는 아이러니하게도 파울루스의 버티기의 도움을 받았다. 6군이 조금 더 일찍 항복했다면, 소련군의 가용전력이 로스토프 돌파에 모두 투입되었을 것이다. 주코프는 1월 12일 총공세를 명령했으며 800km에 달하는 전선에서 공세가 시작되었다. 만슈타인의 노련한 지휘아래 철수작전이 진행되었지만, 독일군은 하르코프까지 물러나는 뼈 아픈 경험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만슈타인은 하르코프에서 득의양양한 소련군의 공세를 적절히 막아냈으며, 이 방어전은 소련군의 1943년 동계공세를 종료시키는 성과를 내었다.(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 소련군은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승리에 고무되어, 무리한 공세를 펼쳤고 만슈타인은 이를 막아냈지만, 전쟁은 이미 소련군에게 기울어져있었다. 철수 작전으로 인해서 독일군은 수 많은 장비와 물자를 잃었으며 성공적인 방어전에도 불구하고, 병력이 점차 줄어들어 심각한 수준에 이르고 있었다.
이렇게 남부전선에서 밀려나자, 르제프 돌출부에서 우주방어를 펼치고 있던 9군의 발터 모델도 르제프 돌출부에서 철수하게 되면서 모스크바 점령은 이제는 꿈도 못 꾸게 되었다. (들소 작전)
7. 결과와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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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전으로 인해 독일군은 100만에 달하는 전력을 상실했으며 그 중 30만이 스탈린그라드에서 죽었다. 독일은 이로 인해 2차대전 종결까지 이전의 전력을 회복하지 못하게 된다. 물론 여전히 독일군에는 많은 명장들과 노련한 베테랑들이 남아 있었지만, 소련군도 이제는 그에 못지 않게 성장했다. 소련군의 천왕성 작전은 그들의 성장한 작전 수행 능력을 여실히 증명했으며 이후엔 이전보다 훨씬 효율적으로 전투를 벌였다. 탱크와 보병은 마치 한몸처럼 서로를 능숙하게 보조했고, 새로이 탄생한 탱크군단과 기계화군단은 이전에는 부족했던 돌파력과 기동력을 제공했다. 적 탱크를 철거해버리기 위한 구축전차와 자주포도 대량 배치되었고, 1943년에 이르러서는 이전의 단점들을 개선한 개량형 무기들이 양산되기 시작했다. 공군에서는 이전같이 띄엄띄엄 배치된 형태는 사라지고 거대한 항공대가 만들어졌다. 일류신 il-2는 떼로 몰려다니며 독일군을 떼로 쓸어버리기 시작했다. 1941년의 문제점들의 다수가 개선되었으며, 이제 소련 공군은 독일 공군과 대등한 전투가 가능해졌고 이전같은 기적적인 교환비는 나오기 힘들어졌다. 여전히 소련군의 사상자가 독일군보다 더 많았지만 그것이 승리를 뜻하는 것은 아니었다. 청색작전에서의 소련군의 사상자는 200만에 달했지만 소련의 초월적인 동원능력과 공업생산력, 그리고 본격적으로 시작된 랜드리스로 순식간에 회복이 가능한것이었다.
결국 전쟁의 주도권은 소련에게 넘어갔으며 이어지는 쿠르스크 전투는 그에 쐐기를 박는 작업이 될 터였다. 독일이 아직 완전히 패배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제 더 이상의 공세는 불가능한 것이 되어버렸고, 1941년의 위용은 이제는 빛바랜 추억이 되어 버렸다.
무엇보다 가장 큰 충격은 무적의 독일군이 그들이 가한 방식과 똑같은 방식으로 포위되어 처참히 패배했다는 것이다. 6군의 저항을 신화로 만들고자 했던 히틀러와 괴벨스는 파울루스의 항복을 거세게 비난하여 그 충격을 무마하려 했지만, 독일 국민들이 겪는 패배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런 위기감은 사실 모스크바 전투 때부터 퍼져나갔다. 언론들은 독일군의 동계장비 부족을 해소하기 위한 독일 국민들의 지원을 호소하기도 했다.
물론 소련군이라고 마냥 웃을 일은 아니었다. 이 작전으로 바르바로사 작전에 필적하는 수준은 아니지만, 그래도 굉장한 (200만명) 수의 병력을 손실했으며, 이중 상당수가 보병이었다. 이런 보병 전력 부족은 전쟁 말기 바그라티온 작전 시기에 달하면, 꽤나 심각해져, 한 개 사단에 2000명 밖에 남지 않는 수준에 이른다. 그럼에도 소련군은 전쟁을 계속 자신의 손안에서 이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