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란

 


12대
정세진#s-2

'''13대
김경란
'''


14대
조수빈
'''이름'''
김경란 (金璟蘭)
'''출생'''
1977년 9월 28일 (46세)
서울특별시 송파구 오륜동
'''학력'''
서울세륜초등학교 (졸업)
오륜중학교 (졸업)
창덕여자고등학교 (졸업)
[image] 이화여자대학교 (철학, 경영학 / 학사)
'''데뷔'''
2001년 KBS 27기 공채 아나운서
'''종교'''
개신교 (침례회)
'''사이트'''
트위터 싸이월드 인스타그램
1. 개요
2. 아나운서 활동
3. 프리랜서 이후
4. 기타
5. 출연
6. 홍보대사
7.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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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KBS 아나운서 출신 프리랜서 방송인. 2001년 KBS 27기 공채 아나운서로 데뷔.
사실 이화여자대학교 철학과 4학년인 1999년부산MBC 시험을 봐 합격하여 아나운서로 입사해 1년 여간 근무했다.

2. 아나운서 활동


KBS 스펀지의 안방마님 이미지가 강해서 예능 담당 아나운서인가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본업이라고 할 수 있는 앵커 활동 경력도 무시 못 할 수준. 특히 모든 아나운서들의 최종 목표이자 방송국의 얼굴이라고 할 수 있는 KBS 뉴스 9의 주중 메인 앵커를 비롯하여 KBS 뉴스라인KBS 뉴스광장을 진행하기도 했고 심야 시사 프로그램 시사360을 진행했으며 생생 정보통의 진행도 맡았다.
2012년 9월 KBS에서 퇴사하고 프리랜서 선언을 하여 활동하고 있다.

3. 프리랜서 이후


하지만 비슷한 시기에 프리 선언을 한 남자 후배 때문에 프리인 줄도 몰랐던 사람들이 대부분. 프리 선언하고 4개월 만에 지상파 첫 출연이 라디오스타였다.[1] 심지어는 김국진의 소속사와 계약한 것도 라디오 스타에서 본인 입으로 밝혀서 알려졌다. 비슷한 케이스로는 선배인 김현욱이 있다.
2013년 4월부터 MBN인생고민 해결쇼 신세계의 진행자를 맡고 있다.
방송 외에 연극 무대에 올라 배우로도 활동하고 있다.

3.1. 더 지니어스 출연



tvN 더 지니어스:게임의 법칙에 플레이어로 출전해 결승까지 살아남는 등 활약했다. 호평을 들으며 게임에서 우수한 게임 능력과 정치력, 처세술을 보였다. 특유의 정색하는 표정과 은근히 자신의 쪽이 선, 대치하는 쪽이 악이라는 태도가 비호감을 사기도 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방송에서 활약하면서 없던 안티가 생겨버렸으며, '''혐젤갓'''이란 별명도 이때 얻었다. 결국 결승에서는 노련한 승부사이면서도 팀구성에 우위를 점한 홍진호에게 '''2''':0으로 패배하며 준우승했다.[2] 사실 시즌 내내 홍진호 팬들은 김경란을 극도로 혐오하여 혐경란이라는 멸칭까지 얻었었으나, 그래도 준우승 후 "'홍진호를 처음 1등 만들어준 2등이니 그거로도 만족한다'"는 소감을 밝혀 호감을 얻었다.
그리고 더 지니어스:룰 브레이커가 방영되면서 김경란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더러운 플레이를 보여주는 참가자들 때문인지 재평가를 받게 되었다. 시즌 1 때 보여준 모습으로 네티즌들에게 혐경란이라고 불리던 별명이 엔젤란, 갓경란과 같이 호감스러운 별명들로 바뀌게 되었다.[3] 단지 정색을 자주 했을 뿐 정치력과 게임 이해도는 훌륭했다는 것이 주류 반응이다. 시즌2의 친목질에 질린 시청자들은 김경란의 정색이 되려 친목질을 막는 제동장치였다며 돌아와요 엔젤란을 외쳤다. 시즌1 참가자들이 김경란에게 "게임 몰입도는 경란씨가 최고"라고 칭찬했는데, 이를 생각하면 시즌2 혐라인과 비교 자체가 미안할 정도. 그리고 결국 더 지니어스가 종영된 현재까지도 김경란만큼 게임을 쥐락펴락하는 여성 플레이어는 나오지 않았다. 제작진도 공식 인정한 더 지니어스 역대 최강의 여성 플레이어[4]
2015년 더 지니어스:그랜드 파이널에 출연하게 된다. 하지만 '충신과 역적'이라는 게임에서 패배하자 배신한 것을 사과하는 최정문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정색을 하는 그녀의 모습에 '혐경란'이라는 별명으로 다시 한 번 불리게 되었다.[5] 그리고 그 회차에 프로 프커 플레이어를 인디언 포커로 이기며 욕과 함께 칭찬을 받으며 또 다시 입체적인 평가를 받는다. 그 다음 화부터 최정문의 행적을 통해 다시 재평가받고, 언제나 그렇듯이 혐젤갓의 칭호로 복귀한다. 이번에도 마지막 6인까지 살아남으면서 여성 출연자 중에서는 마지막까지 살아남았다. 마지막 장동민과의 데스매치때 난시라서 게임이 잘 안보인다는 말을 하여 ‘김경난시’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4. 기타


과거 사진이 현재와 달라 성형수술 의혹이 있었으나 부인했다. 성형외과 문턱도 밟아보지 못했다면서. 지금 미모는 다이어트 + 화장빨이라고 봐야 할 듯 하다.[6] 방송에서 타인의 언급으로 화장 전후 눈의 크기가 두 배라고 한다(?)
2013년 4월부터 송재희와 연인 관계였으나, 2014년 초 결별했다. 기사
2015년 1월 6일 김상민 당시 새누리당 국회의원(현재 무소속)과 '''3개월이라는 빠른 연애''' 끝에 결혼했다. # 축의금 1억여 원을 모두 기부하는 등 화제를 모았으나, 그 후 3년여 만에 이혼했다.
김경란이 처음으로 TV 진행을 맡았던 KBS 2TV 쇼 파워비디오는 김경란뿐 아니라 원년 멤버 김원희가 MBC 라디오 DJ 활동, 영화 촬영 등의 스케줄 문제 탓인지 13회 만에 그만둔 뒤 후임으로 들어온 안연홍, 또 다른 원년 멤버 김미화가 가정사로 낙마해야 했는데 후자는 이것을 "김원희의 저주"라 했다.[7]
2020년 현재 경상남도지사김경수가 그녀의 친척 오빠다.

5. 출연


해당 프로그램과 비슷한 형식이었던 KBS 2TV TV 탐험 멋진 친구들, 세대공감 토요일은 <쇼 파워비디오>(김경란, 김현욱)가 그랬던 것처럼 역대 아나운서 진행자들(TV 탐험 멋진 친구들-전현무 / 세대공감 토요일-이지애, 오정연)의 프리랜서 선언 집합소이기도 했다.
2003년 11월 9일부터 채널을 2TV로 옮겨 2006년 11월 19일까지 일요일 오후 4시 55분에 편성됐는데 공교롭게도 김경란은 <좋은나라 운동본부> 이전 프로그램이자 2003년 11월 8일부터 토요일 오후로 이동한 <쇼 파워비디오> 공동 MC였다.
일반 게스트로 출연했으며 막내로 나왔다.
어디로 가야하죠 아저씨~ 뉴욕택시로 나와 저 이번에 내려요... 런던버스와 같이 이소라의 '믿음'을 불렀으며 정체를 밝힐 때 부른 곡은 장혜진의 '1994년 어느 늦은 밤'이었다.

6. 홍보대사


  • 2010년 초록우산 어린이재단
  • 2011년 국제장애인기능올림픽 홍보대사
  • 2011년 대한지적공사 홍보대사
  • 2013년 제1대 육군 홍보위원

7. 수상


  • 2004년 제3회 KBS 연예대상 쇼·오락 MC 부문 신인상
  • 2011년 제10회 KBS 연예대상 쇼·오락 MC 부문 우수상

[1] 유세윤조차도 녹화 전에 라디오스타 게스트 대기실에 있던 김경란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고 했다.[2] 첫 경기인 인디언포커는 프로 포커 플레이어인 홍진호에게 완벽하게 말렸지만 2경기인 결합은 사실상 개인 능력은 판정승이었다. 다만 지지 게스트의 도움이 미비한 김경란이 결국 패하여 준우승[3] 그래도 앙금이 조금 남은 몇몇 네티즌들은 '''갓혐란, 혐젤갓'''(하도 섞다보니 이 별명에는 김경란 이름이 한 글자도 들어가 있지 않다... '"혐"'경란+엔'"젤'"란+'"갓'"경란)과 같이 까는 건지 빠는 건지 헷갈리는 묘한 방식으로 부르기도 한다. 그래도 보통 찬양의 의미. 더 지니어스 4개 전 시즌 통틀어서 모든 플레이어 중 가장 입체적인 플레이를 펼쳐서 한가지 단어로만은 평가가 불가능해서다. 그래서 오히려 혐젤갓이 지니어스에서의 김경란 캐릭터를 가장 잘 나타내는 별명이라는 시각도 많다.[4] 공식적으로 플레이어 종합 순위를 제공하고 있지 않지만 그래도 여성 플레이어중 김경란이 최고라는거에 이견이 있는 사람은 사실상 없고, 역대 우승자들을 빼고 오현민과 함께 4~5위권 실력자로 인정받는다. 다만 김경란의 활약을 볼 수 있는 시즌1 자료가 많이 날라간 데다 오현민이 좀 더 천재적인 능력을 많이 보여준 탓에 오현민을 더 높게 보는 시각이 많다.[5] 문서를 읽어보면 알겠지만 이는 최정문의 배신 때문이다. 배신자를 좋게 볼 사람이 어디있는가?[6] 과거 사진을 잘 보면 눈 위에 선이 보이는데, 나중에 쌍꺼풀이 생긴 것일 수도 있다.[7] 김경란은 안연홍 하차 후 2001년 가을부터 투입된 미스코리아 출신 배우 김연주가 SBS 드라마에 캐스팅되면서 빠지자 2002년 봄 후임으로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