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미화

 


김미화의 주요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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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미디대상 대상
임하룡
(1989년)

김미화
(1990년)


임하룡
(1991년)

TV부문 코미디연기상
서세원
김정식
배연정
(1988년)

김미화
최병서
김한국
(1989년)

'동작 그만' 팀
(1990년)
TV부문 여자 코미디연기상
박경림
(2001년)

김미화
(2002년)


김지선
(2003년)


이름
김미화 (金美花)
출생
1964년 9월 22일 (59세)
경기도 용인군 기흥면 신갈리[1]
국적

신체
154cm, 42kg, A형
가족
어머니, 여동생
배우자
윤승호 #
자녀
아들 윤진희
윤유림, 윤예림
학력
서울우이초등학교 (졸업)
신경여자중학교(현 선덕중학교) (졸업)
신경여자상업고등학교(현 세그루패션디자인고등학교) (졸업)
[image] 성균관대학교 (사회복지학 / 학사)[2]
성균관대학교 언론정보대학원 (커뮤니케이션학 광고홍보전공 / 석사)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동양철학 예술철학전공 / 석사)
종교
개신교(예장합동)[3]천주교(세례명: 로사)
데뷔
1983년 KBS 공채 개그맨[4]
별명
순악질여사
취미
등산, 노래 부르기
특기
모창, 말 빨리 하기
포인트
큰 입
1. 개요
2. 유년 시절
3. 활동 내역
3.1. 1기: 데뷔에서 전성기 쓰리랑 부부까지
3.2. 2기: 90년대 코미디의 전환기
3.3. 3기: 소셜테이너
4. 출연 작품
4.1. 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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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코미디언 겸 방송인이다. 연예계 대표적 폴리테이너 중 1인.

2. 유년 시절


김미화의 존재를 세상에 각인시킨 프로인 쓰리랑 부부에서 걸죽한 전라도 사투리를 구사하던 것이 사람들의 뇌리에 깊히 박혀 있어서 전라도가 고향인 것으로 흔히 오인되지만, 실제 고향은 경기도/서울이다. 서울 수유리 빈민촌에서 자랐다. 기존에는 출생지가 서울특별시로 기재되어 있었지만, 실제 출생지는 경기도 용인시 신갈이다[5]. 신갈에서 태어난 후 다음해에 서울 수유리로 이사와서 수유리와 미아리 쪽에서 성인이 될 때까지 쭉 자랐다고 한다. 어릴 적 내내 수유리와 미아리 지역에 있는 하천 다리 근처에 당시 빈민들이 거주하던 무허가 촌에서 살았다고 한다.[6][7] 천지천이 자신이 어릴 때 주로 살던 곳이었다고 한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 자주 이사를 다녀야 했는데 너무 자주 이사를 해서 집이 헷갈릴 정도였다고 한다. 셋집을 살다가 이유도 모르게 쫓겨나서 마당에서 비닐 장판을 깔고 잤던 적이 있다고 한다. 어린 시절 지독하게 가난하여 단한번도 행복했던 기억이 없었다고 한다. 일곱 살 터울의 친 여동생이 있다. 그러나 나이차가 많이 나서 어릴 때 집안일은 김미화가 도맡아 도왔다고 한다. 어릴 적부터 사람들을 웃기는데 재능을 보여 동네사람들의 관심을 차지했다고 한다.
친아버지(박상복)의 성이 박씨다. 김미화의 친아버지는 이미 본처와 결혼을 한 상태였는데, 그녀의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속아 유부남인 줄 모르고 사실혼 관계를 유지한 채로 동거했다고 한다. 호적 등록을 할 때 김미화 자매를 호적상 정상적인 가정에 자녀들로 살게 하려고 아버지 박씨와 본처 사이에서 출생한 자녀로 호적 등재를 했다고 한다.[8] 때문에 아버지 박씨의 본처가 김미화의 법적인 어머니가 되었고, 김미화와 친모는 법적으로 남이 되었다. 김미화의 어린 시절 본명도 박미화였다. 아버지의 직업은 엿장수였는데, 폐질환으로 고생했다고 한다.
그러던 중 초등학교 2학년 때에 심한 폐질환을 앓던 친부와 친부의 처가 죽으며 김미화 자매는 법적으로 고아가 되었다. 김미화의 친어머니(김씨)는 법적 고아가 된 자신의 딸들과 한 호적을 가지려 했다. 그러나 김미화 자매와 모친은 법적으로 남남인 상태였다. 그 상황에서 김미화의 호적에 어머니가 오를 수는 없는 일이고 어머니 호적에 자매를 올릴 수밖에 없었다. 이 당시 자녀가 어머니의 호적에 오를 수 있는 방법은 아버지를 모르는 미혼모의 자녀이거나 외국인 아버지를 둔 케이스. 그래서 어머니는 미혼모가 아버지를 모르는 아이들을 낳아 뒤늦게 출생신고를 한 것처럼 하여 관청에다 출생신고 지연 과태료를 내고 미혼모의 자녀로 김미화 자매를 자신의 호적에 올렸고[9] 법에 따라 어머니의 성씨를 따르게 되었다고 한다.[10]
김미화는 어머니가 운영하는 해장국집을 거들면서 자랐다. 그러나 청소년기에 어머니와 갈등이 많았던 모양인데 어머니가 거의 패는 수준으로 때려서 많이 맞고 자랐다고 한다. 그러나 김미화도 지지 않는 성격이었는지 중학교 2학년 때 어머니가 재혼하려 하자 결사 반대를 했다고 한다. 그런데 재혼 시에도 새아버지 쪽 집안 문제가 복잡해서 김미화의 어머니는 결국 혼인신고를 하지 못했다고 한다.인터뷰 원문. 때문에 김미화는 새아버지와 법적으로 전혀 관계가 없고, 어머니의 호적에 올라있는 상태가 결혼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래도 새아버지는 가정을 위해 최선을 다해주었다고. 나중에 김미화는 결혼할 때 호적을 떼면 집안사가 다 드러나기 때문에 많이 걱정하고 있다가 결국 결혼 전에 남편될 사람에게 모두 다 털어 놓았다고 한다.

3. 활동 내역



3.1. 1기: 데뷔에서 전성기 쓰리랑 부부까지


신경여상에 입학한 후 학교에 다니면서 아르바이트를 하였다고 한다. 일반적인 아르바이트도 있었으나, 개그맨 준비를 하면서 알게 된 지인을 통해 방송국 보조출연(엑스트라) 아르바이트도 하였다고 한다. 코미디에 대한 꿈을 결코 버릴 수 없었던 그녀는 상고 졸업을 앞둔 1983년 제2회 KBS 개그콘테스트에서 이정문[11]과 함께 '사부와 석순이'라는 개그로 은상을 수상하면서 공채 2기 개그우먼으로 데뷔했다.
당시 딸이 졸업 후 바로 취업하기를 원하시던 어머니는 저녁식사 중에 KBS '생방송 오늘'에서 그녀가 개그콘테스트 수상자로 나온 걸 보고 매우 놀랐고, 돌아온 그녀를 때리고 화를 내며 말렸다고 한다. 말린 이유에 경제적인 부분도 컸지만, 그녀의 모친이 사실 가장 중요하게 걱정한 것은 '연예계 성상납'이었다고 한다.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 여성이던 딸이 그런 것에 휘말릴까봐 용납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러자 김미화는 "6개월 안에 개그우먼으로써 확실한 위치에 가지 못하게 된다면 그때 그만두겠다고 약속하겠으니, 그동안만 지켜봐달라"고 하여 어머니를 설득했다고 한다. 그러나 막상 데뷔한 뒤 생각 외로 빠른 시일 내에 큰 인기를 얻고, 수입도 커지게 되자 어머니는 오히려 응원하는 입장이 되었다고 한다.
데뷔 직후 KBS '젊음의 행진'에서 활약하면서 '유머 일번지'까지 진출하며 점점 입지를 다져가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인기가 더 올라가자 다른 여러 프로그램에도 출연하게 된다. 본인 스스로 당시를 회고하면서 '나는 당시 신인 중에서 가장 욕심이 많은 신인이었다'는 표현을 할 정도로 수많은 아이디어를 연구하고, 어마어마한 연습을 하며 철저하게 노력했다고 한다. 이 욕심이라는 것은, 당시 여성들의 사회적 위치가 개그계에도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여성 코미디언들은 프로그램에서 주도하는 역할은 별로 하지 못하고 주로 받쳐주는 역할이었고, 그에 대한 불만이 있던 김미화가 그런 관습을 극복하여 '여성이 주도하는 코미디 연기도 충분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반드시 보여주고 싶다는 욕구에서 나온 것이었다고 한다.
1986년에는 7살 연상의 사업가와 결혼하게 된다.
1988년부터 김한국과 콤비를 이뤄 쓰리랑 부부에 출연했는데, 국악 판소리에서 모티브를 따와 국악인 신영희의 북소리에 맞춰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로 연기하면서 큰 인기를 끌었다. 이 프로가 큰 인기를 얻으며 전국적으로 유명한 코메디언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쓰리랑 부부에 대해서는 해당 항목 참조. 이 코너의 인기에 힘입어 1990년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KBS 코미디 대상을 수상하게 되었다. 이때가 코메디언으로서 김미화의 전성기였다.
[image]

이 당시에 김미화의 얼굴이 가수 민해경과 똑같이 생겨서 민해경의 노래인 '그대는 인형처럼 웃고 있지만'을 공연하기도 했다.

3.2. 2기: 90년대 코미디의 전환기


SBS 개국과 함께 SBS에서도 활동하다가 KBS에서 프로그램 제안을 받고 1995년 말부터 코미디 세상만사에 출연하게 되었다. 거기서도 코미디 방송에서 쉽게 볼 수 없었던, 밤 10시에 '시작하는' 심야 코미디 영역에 맞는 새로운 형식을 개척한다. 당시에 지상파 코미디 방송은 대부분 7시에 시작해서 8시에 끝나는 게 정석이었고, 늦게 하더라도 10시 이후에 끝나는 경우는 거의 볼 수 없었다. 지금보다 수위가 강하지는 않았지만 '성인 대상 코미디'의 지상파 진입 역시 이 프로그램으로부터 시작되었는데, 김미화는 이 방송에서 '이 밤의 끝을 잡고'라는 코너를 통해 일반 유명 남자 연예인과 부부 설정으로 상황극을 하면서도 간간히 그 연예인의 실제 생활에 대한 토크를 섞어 새로운 형식을 추구해서 인기를 얻었다. 이재룡, 설운도, 현철, 이덕화, 최수종 등 코미디 방송에서 잘 나오지 않던 연예인들이 그녀의 남편 역할로 매주 출연해서 재미를 주었고 김미화에 대한 평가와 인기 역시 계속 유지될 수 있었다. 또한 '사미인곡' 코너에서는 목욕탕 사우나에서 4명의 아줌마들이 수다를 떠는 포맷으로 재미를 주었고, 평범한 조연배우에 불과했던 전원주가 인기를 끌기 시작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90년대 후반 기존의 꽁트 코미디가 완전히 사장되는 위기에 직면하자 백재현, 전유성과 함께 초대 개그 콘서트의 시작을 주도한 인물이기도 하다. 사실 개그콘서트 자체가 실험적 코미디를 무대에 올림과 동시에 신인에게 기회를 주기 위한 등용문의 기회이기도 했다. 위에 서술되어 있는 코미디 세상만사 또한 성인용 심야코미디의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한 시도였고, 개그콘서트가 중간급 신인들의 메인 무대가 되자 이번에는 완전 신인 발굴을 위한 심야프로인 개그사냥을 런칭하기도 했다. 초반 개그사냥에서는 최종 선발 과정으로 김미화 본인과 '삼순이 블루스'라는 단막코너 연기 무대를 선보여야 하는 미션이 있었다.
다만, 메인 MC로 참여한 프로그램들은 대거 1년을 넘기지 못한 적이 있는데 토요일이 온다, 웃는밤 좋은밤, 가족만세 등이 대표적이었다.[12]

3.3. 3기: 소셜테이너


90년대 후반 김미화는 개그콘서트의 시작을 주도하면서 현장에서의 역할에서 물러난다. 이 부분은 사실 논란거리가 될 수 있는데 타의로 인해 밀려난 부분이 크다는 점 때문이다. 실제로 김미화는 대학원 진학 후에도 개그콘서트에 참여했으나 새로온 연출자가, 김미화가 이전에 이미 모든 개그콘서트팀과 상의하에 동의를 다 받고 갔다 온 대학원 수업 이후 회의에 몇 분이라도 늦게 오면 그런 날마다 미리 다 기록을 해 둔 뒤에 어느 날 "선배님, 그동안 회의에 어느날 5분 어느 어느날 15분 지각하셨습니다. 이대로는 방송 준비에 계속 지장을 주실 수 있으니 이제 그만 나와주셔야겠습니다."라는 식으로 말하며 개그콘서트에서 하차를 종용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시간들은 실제 준비에 그리 치명적인 시간이었던 게 아니었고, 실제로 그녀가 그로 인해 방송공연 준비에서 큰 문제를 발생시킨 적이 없다는 부분에서 김미화는 억울함을 느낌과 동시에 그 순간 그 피디가 자신을 애초부터 하차시킬 목적을 가지고 상황을 계획했다는 듯한 생각이 확신에 가깝게 들었다고 한다. 그 전에 어느 상황에서 그 피디와 갈등이 있었거나 했는지는 그녀가 추후 뒷소문을 듣지도 못했고, 그 피디가 직접 말해준 부분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지금도 그녀는 모른다고 한다. 실제로 큰 갈등은 없었던 걸로 보이지만 개그계 대모이자 개그콘서트의 창립 구성원으로서 워낙 큰 권위를 가질 수 밖에 없었던 김미화의 의견과 피디의 의견이 갈렸을 때, 김미화와 의견이 다른 구성원들에 의해 채택되거나 하여 불만이 생겼을 수는 있을 것으로 보인다.
처음에는 따지고 항의도 해봤지만 일단 약점이 잡힌 이상 더 이상 대화가 안 되어 방법이 없었다고 한다. 그 이후로 그녀는 꽤 충격을 받고 개그콘서트를 떠나 방송 활동은 거의 하지 않으며 쉬다가 소셜테이너의 길을 걸었기 때문에 스스로 물러났다고 하기는 어렵다.
2000년에는 KBS, MBC, SBS 3사를 아우르는 코미디언협회를 만들어 초대 회장을 지냈다. "개그맨들의 위상뿐 아니라 출연료를 높이는 데도 조직의 힘은 컸어요."라고 회상했다. #
2001년에는 늦깎이로 성균관대학교 사회복지학과에 합격하여 뒤늦게 대학 생활을 시작했다. 김미화는 '자기 추천 전형'으로 대학에 합격했는데, 당시 김미화 외에도 배용준, 정재환, 차승원, 박주미 등 여러 연예인들이 자기 추천 전형으로 성균관대에 입학했다. 그런데 자기 추천 전형은 최저 학력 기준조차 없었기 때문에 연예인들에게만 특혜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었다. 김미화가 입학한 이듬해인 2002년 3월 성균관대 학내 신문은 연예인들이 자기 추천 전형을 이용해 최저 학력 기준조차 없이 손쉽게 입학하는 것에 대해 비판하는 기사를 실었고 이에 학교 측은 최저 학력 기준을 도입하여 연예인들의 무분별한 입학을 지양하겠다고 밝혔다. #
김미화는 성균관대에 들어간 이후부터 점점 개그계 바깥의 사회문제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2003년 MBC 라디오의 시사프로그램 <세계는 그리고 우리는>의 진행을 맡게 되었는데, 개그맨의 본능을 억제하지 못하고 시사 전문가들에게 질문을 하다보니 자신도 공부의 필요성을 느껴 시사문제 공부를 시작하면서 김미화는 본격적으로 소셜 엔터테이너에 발을 들이게 된다.
이로 인해 김미화는 과거의 코미디 현장이 아닌 시사문제가 궁금한 평범한 아줌마인 MC, DJ라는 캐릭터가 확립되어 라디오 DJ및 MC로 활약했다. CBS에서 김미화의 여러분을 진행하기도 하고, 딴지일보 팟캐스트에서 나는 꼽사리다를 진행하는 등 시사 전문 MC로 활동하면서 아래 언급할 KBS 블랙리스트 파문 등을 겪기도 한다.
김미화는 사회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2002년 두 여중생이 미군 장갑차에 치여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하자 앞장서서 촛불시위를 이끌기도 했다. 여중생 압사사건 무죄 판결이 난 직후 이에 항의하는 방송 예술 연예인들이 항의 기자회견을 열었고, 김미화는 모두 발언을 통해 부시 미국 대통령의 사과, 소파 개정 등을 촉구했다. #
2003년 3월에는 양대 노총, 정의구현사제단과 함께 이라크 파병반대 시위에 참여하여 국회 앞에서 1인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김미화는 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자국의 이득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만약에 한다면 뭐가 민주사회입니까? 민주주의는 그게 아니잖아요."라고 말했다. # 당시 1인 시위에는 가수 윤도현, 배우 변정수, 가수 신해철, 배우 정진영 등이 참여했다.[13] #
그밖에도 호주제 폐지 등에 적극 참여하는 등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50여개에 이르는 시민단체에서 시민운동을 했다. #
녹색연합(2002), 시민단체(2002), 유니세프, 국가인권위원회(2007~2011) 등 각종 단체의 홍보대사 등을 맡기도 했다.
그러는 사이 이혼의 아픔을 겪기도 했다. 2004년 4월 김미화는 18년 동안 남편에게 일방적으로 맞고 살았다고 주장하며 이혼 소송을 제기하여 파문이 일었다. 그동안 김미화는 남편과 잉꼬부부로 알려져 있었기에 대중들에게 그 충격이 더 했다. 김미화의 남편은 명예훼손 혐의로 맞고소를 했다. 결국 2005년 1월에 법원의 조정으로 이르게 된다. 자녀의 친권과 양육권을 가져가면서 재산을 6대 4로 분할했다.[14]
2007년 1월 5일 5살 연상인 윤승호 성균관대 스포츠과학과 교수와 재혼하게 된다. 윤승호는 홍서범과 평소 친분이 있었는데[15], 김미화가 조갑경과 친했기 때문에 그 인연으로 2001년부터 알고 지내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마침내 재혼에까지 이르게 된 것.
2016년 현재 몇 라디오 방송을 맡고 있으며, 출생지인 용인시 근처에 친환경 카페 <호미>를 열고 찾아오는 사람들을 접대하며 살고 있다.
한편, 김미화는 2007년 후반기 때 엑스포츠에서 방영될 예정이었던 골프 드라마 <홀인원>에 캐스팅되어 정극 드라마 나들이를 할 예정이었으나 투자비 문제 때문에 편성이 불발되어 그녀의 첫 정극 드라마 출연이 무산되었다.
김미화는 이 작품에서 주인공 박선영의 고향 언니 역으로 나올 예정이었는데 박선영이 조연으로 나온 MBC 아들과 딸의 여주인공 이후남 역이었던 김희애는 김미화의 초등학교(우이)-중학교(신경여중)(현재 선덕) 후배이며 이 작품에서 이귀남 역으로 나온 최수종은 김미화가 신변상의 문제로 2001년 가을개편 때 하차한 KBS 2TV 쇼 파워비디오의 김미화 후임으로 발탁됐던 개그맨 김경식의 중학교(배재중) 선배다.
자녀들이 학생들의 돈을 뺏는 것을 보자 미국으로 유학을 보냈는데, 자식들이 미국 헐리우드 배우가 되어 돈 좀 땡겨오기를 바랬다고 한다.

4. 출연 작품



4.1. 방송


  • 유머 1번지(KBS2)
  • 한바탕 웃음으로(KBS2)
  • 젊음의 행진(KBS2)
  • 코미디 세상만사(KBS2)
  • 행복채널(KBS2): 본인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진행한 평일 아침 토크쇼였는데 98년 10월 12일 첫 회부터 공동 MC를 맡았으나 본업인 개그 프로그램 전념[16]을 위해 99년 가을개편 때 그만뒀다.
  • 개그 콘서트(KBS2)
  • 순풍 산부인과(SBS): 극 후반부 종영 직전에 순풍산부인과 간호사 역할로 출연. 잠깐 나왔던 터라, 모르는 사람들도 많다.
  • 쇼 파워비디오(KBS2)[17]
  • 재미있는 TV 천국(SBS): 2002년 4월 20일 첫 회부터 토요일 낮 1시 10분에 방영되어 오다가 2005년 4월 30일부터 오후 5시로 이동했으나[18] MBC 행복주식회사와의 경쟁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여[19] 같은 해 11월 5일부터 처음 시작할 시간대로 되돌아왔으며 이 때문에 2003년 11월 8일부터 토요일 오후 5시에 방영된 KBS 2TV 쇼 파워비디오는 2005년 5월 7일부터 오후 6시로 옮겼지만 고전을 면치 못하여 그 해 11월 5일부터 2006년 11월 18일까지 토요일 오후 4시 55분에 방송되었는데, 김미화는 이 프로그램의 원년멤버였다.
  • 김미화의 U(SBS)
  • 김미화의 시사카페(KBS창원)
  • 체험 삶의 현장(KBS1): 2000년 5월 7일부터 채널(2TV → 1TV)과 시간대(월 오후 8:55 → 일 오전 9:00)를 변경하면서 왕종근 아나운서와 공동 MC를 맡았으나 두 사람의 겹치기 출연으로 물의를 빚었다. 왕종근 - 2000년 5월 1일 시작한 평일 아침 정보 프로그램 KBS 2TV <생방송 오늘> 진행, 김미화 - 99년 9월 4일 첫 회가 나간 KBS 2TV 개그 콘서트 출연, 2000년 4월 23일 시작한 SBS 뷰티풀라이프 공동 MC.
급기야 2000년 4월 23일 시작된 SBS 일요 예능 프로그램 뷰티풀라이프에서 백지연 아나운서, 탤런트 김원희와 함께 경비행기를 타고 세계 일주에 나서게 되자 같은 해 가을개편 때 <체험 삶의 현장>과 <개그 콘서트>에서 동반 하차하여 2001년 봄 개편 전까지[20] 한동안 KBS에서의 TV 고정 출연이 뜸해졌다. '체험 삶의 현장'은 김미화의 하차와 함께 남자 MC 왕종근 아나운서도 평일 아침 정보 프로그램 KBS 2TV <생방송 오늘> 진행 스케줄과 맞물려 2000년 가을개편 때 빠졌다.[21]
  • TV는 사랑을 싣고(KBS2)
  • 달빛 소화제(대구MBC, 광주MBC)
  • 미스터리 음악쇼 복면가왕(MBC)[22]

5. 논란




[1] 現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신갈동[2] 자기추천전형을 통해 01학번으로 입학했다.[3] 개종 전에는 사랑의교회 집사였다.[4] 개그콘테스트[5] 김미화 본인도 자신이 수유리 출신이라는 이야기를 과거에 몇 번 이야기했기 때문에 거기서 태어나기도 한 걸로 알려져 있었다.[6] 그러니 사실상의 고향을 따지자면 갓난 아기 때만 잠시 지냈던 출생지가 아니라, 이후 그녀가 성인이 될 때까지의 삶을 다 보낸 서울을 고향으로 보는 게 맞긴 하다.[7] 이와 비슷한 케이스로 사당동 빈민촌 출신인 배우 정우성이 있다.[8] 혼외자녀는 서출로서 생모를 따로 기재할 수 있지만 본처를 생모로 기재하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9] 이때문에 호적이 2개라고 한다. 주민등록체계가 전산화 되기 전에는 이런 일이 비일비재했다. 심지어 성별이 다르게 올라간 사람도 있었을 지경.[10] 기존 문서에 '어머니가 재혼한 후에는http://m.ohmynews.com/NWS_Web/Mobile/at_pg.aspx?CNTN_CD=A0000126583.'가 서술되어 있었는데, 이는 음성학적 성이 아니라 호적상의 성, 즉 '새아버지와 호적상 남남'이라는 뜻으로 이야기한 것으로 보인다.[11] 잠시 개그맨 활동을 하다가 작가가 되었다고 한다. 만화가 이정문과는 다른 사람으로 동명이인이다.[12] 이들 중 <유쾌한 가족만세>는 제목만 바뀌었지, 실상은 <가족만세>와 다를 게 없다는 지적이 있었고(MC가 김미화,표인봉,정지영 아나운서) 결국 2003년 3월 3일부터 신정환이 새 남자 보조 MC로 투입되었지만 동시간대 KBS 2TV 주주클럽 때문에 고전을 면치 못하여 그 해 봄 개편으로 막을 내렸으며 당시 이 프로그램 메인 사회자 박수홍, 보조 MC 윤정수가 <가족만세>와 경쟁한 MBC 일요일 일요일 밤에 공동 사회자였던 탓인지 김미화는 아픔이 두 배였는데 박수홍은 2001년 가을개편 때 KBS 2TV 쇼 파워비디오에서 김미화 후임(김경식) MC 물망에 한때 거론됐다[13] 이라크 파병반대 시위는 2008년 자이툰 부대가 최종 철수할 때까지 이어졌다.[14] 이 이혼 건은 10여 년 후에 다시 송사로 비화되는데, 전 남편이 김미화가 면접교섭권 행사를 방해하고 방송에서 자신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위자료를 청구하자, 김미화 역시 전 남편이 언론 인터뷰에서 자신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위약금을 청구한 것. 그러나 제1심법원은 두 사건 모두 청구를 기각했다.# [15] 홍서범의 초등학교 동창이었던 임백천은 KBS 2TV 쇼 파워비디오에서 김미화와 공동 MC를 맡기도 했다.[16] 99년 9월 초부터 포맷을 정통 코미디로 바꾸면서 코너를 대폭 물갈이한 KBS 2TV 코미디 세상만사에 출연진 형식으로 복귀했으며 같은 시기에 신설된 KBS 2TV 개그 콘서트에도 나옴[17] 2001년 5월 6일부터 진행을 맡아오다가 방송활동과 학업까지 병행하느라 스케줄 조절에 어려움을 겪어 그 해 11월 11일 방영분을 끝으로 하차.[18] 2003년 2월 14일부터 2004년 2월 27일까지는 금요일 오후 5시 45분에 방송됐다[19] 당시 이 프로그램 메인 사회자였던 송은이는 당초 토요일 오후 9시 45분에 방송되었으나 2001년 11월 10일 시작한 MBC 느낌표 때문에 시청률이 갈수록 떨어진 데 이어 김미화가 메인 MC로 활동한 SBS <웃는밤 좋은밤>이 인기 개그맨 캐스팅 실패 뿐 아니라 동시간대 3사 수요일 심야 시간대 최하위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4회 만에 조기종영되자 이 프로그램 후속으로 2002년 3월 6일부터 이동 편성했으나 당시 메인 MC였던 남희석이 '웃는밤 좋은밤' 고정 게스트였던 사실이 알려진 점, 첫째 딸 출산 준비 등의 이유 탓인지 2001년 가을개편부터 공동 MC로 활동한 허수경과 함께 2002년 3월 13일 방송분을 끝으로 빠진 SBS <장미의 이름>에서 같은 달 20일부터 안선영과 공동 사회자로 투입되었지만 3사 수요일 심야 시간대 시청률 꼴찌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시간대를 변경한 지 4회 만에 2002년 봄 개편으로 프로그램이 막을 내려 '김혜수 플러스유' 이후 이어진 SBS의 수요일 심야 시간대 징크스에서 벗어나지 못했다[20] 김미화가 2001년 봄 개편 때 KBS 복귀를 하면서 메인 MC로 활동한 프로그램에 속했던 <대발견 세상에 이런 법이>는 2000년 봄 개편부터 가을개편 전까지 진행한 <체험 삶의 현장> 등과 맞붙었는데 ‘출발! 마법전사’ 코너에서 개그맨 백재현과 제작진이 몰래카메라로 촬영을 하다가 공항 경찰들에게 적발당한 것을 첫 회(2001년 5월 6일) 방영분에 그대로 내보낸 것 뿐 아니라 SBS 순간포착 세상에 이런 일이 MBC TV특종 놀라운 세상과 흡사하다는 비난을 사 시청률 부진을 면치 못했고 2001년 7월 17일부터 <퀴즈 정글>과 시간대를 맞바꿔 화요일 오후 6시 30분에 방송되었으나 김미화의 신변상 문제(학업(성균관대 사회복지학부 2001학번)까지 병행해온 것 외에도 2001년 10월부터 KBS 라디오 DJ로 발탁) 탓인지 그 해 가을개편으로 프로그램이 막을 내려야 했으며 김미화는 <퀴즈 정글>이 본인의 신변상 문제로 공중분해된 것 외에도 2001년 5월 6일 첫 회부터 공동 MC로 활동한 KBS 2TV 쇼 파워비디오에서도 같은 시기에 빠져 2002년 1월 이전까지 한동안 TV 진행자 활동이 뜸해졌다[21] 결국 왕종근 김미화 후임으로는 원년멤버 조영남이경실이 복귀했는데 김미화는 이경실이 출산 준비로 자리를 비우게 되어 1999년 1월 4일부터 그 해 봄 개편 전까지 대체 MC를 맡았다.[22] 68차 경연 참여.(가명: 소원을 말해봐 일출소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