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훈 중위 사건
金勳 中尉 事件 (1998년)
'''내 머리에 총을 대서 실험해주길 바란다. 나는 내 몸을 자식에게 바친다!'''
1. 개요
1998년 2월 24일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JSA 241 GP 3번 벙커에서, 경비소대장 대한민국 육군 보병 중위 김훈(육사 52기)이 사망한 채 발견된 사건.
피해자의 아버지인 예비역 육군중장 김척(육사 21기. 제1군단 군단장, 제3야전군사령부 부사령관 역임) 덕분에 약 600회 내외인 군 의문사 사건 중에서도 가장 잘 알려졌다. 또한 육군이 수사 과정에서 저지른 각종 잘못과 조작, 의문점이 많아 현재까지도 언론 등에 의해 이슈가 되고 있다.
2. 내용
2.1. 사건 발생 개요
서술하기에 앞서 이하의 발생 개요는 '''군 공식 수사 결과'''에 따랐음을 밝힌다.
1998년 2월 24일 오전 9시 즈음, 당시 예정에 없던 부대 내 VIP(주한미군 장성 진급자 10명) 방문 일정이 잡혀 해당 부대는 한창 분주한 분위기였다. 그러나 1시간 뒤 일정이 취소되고 이때 김 중위는 식당에 들어가 물을 마신 후, 소대 사병 모임에서 돌아온 소대원들의 귀대 보고를 받았다. 오전 10시 30분경, 김 중위는 식당에 잠시 들러 라면을 먹고 있던 소대원들과 가벼운 대화를 나눈 후 라면을 몇 젓가락 먹고 식당을 떠났다.
그 후 근무 복장을 갖춰입고 정찰을 나간다며 소대장실을 떠난 것이 오전 11시 45분이었다.[1] 직후인 오전 11시 50분경 상황실에 들른 것이 마지막으로 목격된 그는 오후 12시 20분경, 식사 인사를 하러 돌아다니던 소대원에 의해 GP 지하 벙커에서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현장에는 김 중위의 오른발로부터 50cm정도 떨어진 곳에 베레타 M9 9mm 권총이 떨어져 있었고 그의 오른쪽 머리에 직접적 사망 원인이 된 총상이 있었다.
2.2. 군 수사 결과 발표
약 2개월 후인 1998년 4월 28일, 사건을 조사한 한미합동수사팀은 '이유를 알 수 없는 자살'이라는 1차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당시 소대원들의 알리바이가 모두 확인되었으며 그들 중 살해 동기를 가진 이를 찾을 수 없었고, 원인은 확인되지 않았으나 자살이 확실하다는 그들의 발표는 다시 말해 '타살의 증거가 없으므로 자살로 판정'이라는 요지의 결론이었다. 이는 수사과학적으로 평범한 판단으로 자살의 경우 자살했다는 직접적인 물증이 나오기 쉽지 않기 때문에[2] 타살의 증거가 없을 경우 자살로 추정하는 것이 관례이다. 하지만 이번 경우엔 사건이 타살로 의심될만한 정황과 증거가 후에 명백하게 드러남에도 불구하고 군 당국에선 성급하게 이 같은 결정을 내린 것이다.
그러나 수사팀이 발표한 자료에 따른 김 중위가 자살 시도를 할 당시 취했을 부자연스러운 격발 자세와, 총을 잡고 격발했을 오른손에서 화약흔이 나오지 않았다는 점은 납득하기가 힘들었고 유족은 이에 반발해 재수사를 촉구했다. 이 시점에서 유가족과 인권단체, 언론에서 제기한 의문점만 해도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 뒤 부실 수사를 문제 삼는 언론의 보도가 잇따르자 국방부는 1998년 12월 육군 중장 양인목 장군을 단장으로 하는 특별합동조사단을 조직해서 재수사를 결정했다. 조사단은 JSA 경비소대원 재소환, 거짓말 탐지기, 법의학자 공개 토론회를 거쳐서 1999년 4월 국방부는 다시 한번 자살로 발표했다. 법의학자 공개토론회에서 참석한 8명의 법의학자 가운데 재미 법의학자 노여수 박사를 제외한 전원이 자살일 가능성에 무게를 두었다.
3. 의문점들
수사 결과 발표 당시 제기된 문제들과 그에 따라 밝혀진 새로운 사실들, 후에 다시 제기된 의문점 등 여러 가지가 많지만 대표적인 사항을 나열하자면 다음과 같다.
3.1. 동기
- 자살 동기는 무엇인가?
김 중위가 자살을 하였다면 분명한 동기가 있어야 할 것인데 수사팀은 이를 밝혀내지 못했다. 그는 육사 출신 군인인 아버지 밑에서 자랐으며, 육사 52기로 입학해 군인의 길을 걷기로 작정했었다. 이에 대해 국방부 특조단은 '김 중위가 부모(특히 아버지)에 의해 원치 않았던 적성을 강요받았고, 이는 자살의 한 원인이 되었다'고 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며, 오히려 그의 육사 진학을 반대한 것은 가족들이었고 그가 일반 대학에 진학해 국제변호사가 되길 바랐다고 한다. 그는 임관 후 사단장 표창을 받은 적이 있으며 사건 발생 1달 전에는 육군정보학교 군사영어 교육반을 우수한 성적으로 수료한 군인이었다. 게다가 당시 소대원들과의 인터뷰에 따르면 김 중위가 그렇게 자살할 인물은 아니었다고 증언하고 있으며, 그의 주변인들 의견도 마찬가지였다.
3.2. 총기 관련
- 총이 발사된 거리
보통 권총 자살을 하는 경우엔 격발 시 총이 흔들려 빗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몸에 꽉 대고 쏘는 '접사'의 형태가 대부분이다. 노여수씨의 주장에 따르면, 김 중위의 경우 사입구가 밀착사의 형태라고 보기엔 어렵고 또한 밀착사의 경우 화약이 사입구 안으로 말려 들어갔어야 하는데 밖에 많이 묻어 있었으므로 결과적으로 접사가 아니라 약간 떨어져서 쏘는 '근접사'로 볼 수 있다. 또 권총의 총열 안쪽 7cm 부근에서 핏자국이 발견되었는데 밀착사의 경우라면 후풍효과(blow back effect) 때문에 피의 흔적이 총열 밖에 묻어 있어야 하는 게 정상이다.
반면 자살설을 지지하는 국내 법의학자들은 별 모양의 파열(Muscle Implement)과 총구 자국이 있다는 점에서 접사로 보았고, 설령 근접사라 하더라도 충분한 자살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미국의 전체 총기 자살 중 접사가 아닌 근접사로 자살하는 경우는 약 3%이다. 총구 자국은 가스가 피부에 주입되면서, 순간적으로 피부가 튀어올라 권총에 부딪쳐서 나타난다.
반면 자살설을 지지하는 국내 법의학자들은 별 모양의 파열(Muscle Implement)과 총구 자국이 있다는 점에서 접사로 보았고, 설령 근접사라 하더라도 충분한 자살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미국의 전체 총기 자살 중 접사가 아닌 근접사로 자살하는 경우는 약 3%이다. 총구 자국은 가스가 피부에 주입되면서, 순간적으로 피부가 튀어올라 권총에 부딪쳐서 나타난다.
- 손에서 화약흔이 발견되지 않았다?
군과 유족 사이에서 가장 격렬한 논쟁이 이루어졌으며 2018년 현재까지도 끝나지 않은 떡밥. 맨손으로 총을 쥐고 격발했다면 필시 화약 잔여물이 발견되어야 함이 정상인데, 분석 결과에 따르면 오른손잡이인 김 중위의 오른손에서 그런 물질은 발견되지 않았으며 반대쪽인 왼손에서 화상 및 잔여물이 발견되었다. 노여수 박사는 이를 가까운 곳에서 총을 발사하려는 것을 막으려다 생긴 방어흔으로 보았으나 토론회에 참여했던 이윤성 교수는 사입구가 머리 오른쪽이라는 점을 들어 방어흔이 아니라고 보았다. 사입구가 오른쪽이므로 김훈 중위를 기준으로 오른쪽에서 총을 쏜 것인데 방어흔이라면 오른손이나 적어도 양 손 모두에 남는 것이 자연스럽지 왼손에만 남는 것은 부자연스럽다는 것이다. 토론회에 참석한 법의학자들은 확실하게 자살하기 위해 왼손으로 총열을 감싸고 두 손으로 총을 쏘았을 가능성을 제시했으며 국방부도 이 견해를 채택하였다. 그러나 2011년 비슷한 자세로 사격 시험을 하였으나 오른손에서 화약이 검출되었으며 국방부는 이 실험의 결과에 대해 상황에 따라 다를 수도 있다고 하여 결정적인 증거로 보지 않았다. 거기다 1999년에도 실험이 실시되었는데, 이 당시에도 검출이 되었다, 이 둘 모두 국방부에서 직접 실시하고 만든 실험이다.
- 총에서 지문이 발견되지 않았다?
화약흔 이상으로 의문스러운 점으로 김 중위는 발견 당시 맨손이었고 그가 총을 잡고 쐈다면 당연히 지문이 검출됨이 마땅하나, 총에선 아무런 지문도 발견되지 않았다. 국방부는 처음에는 권총에는 늘 기름칠을 하기 때문에 지문이 잘 남지 않을 수 있다고 변명하였으나 재조사 단계에서 감식관에게 직접 확인한 결과 지문이 아예 나오지 않은 것이 아니라 부분적으로 지문이 나오기는 하였으나 누구의 것인지 확인이 불가능했던 것이라고 밝혔다.
- 뜻밖의 장소에서 발견된 제3자의 지문
당시 김훈 중위 사건에 사용된 권총에 장전된 탄환에서 발견된 지문을 유가족은 경찰청에 감식을 의뢰했다. 경찰의 감식 결과는 충격적이었는데 발견된 지문은 김훈 중위의 지문이 아닌 제3자의 지문이었다! 이러한 발견에도 불구하고 다른 소대원의 지문과 대조를 하는 일은 없었다.
- 김훈 중위의 권총이 바뀌었다?
김훈 중위의 주변에 떨어진 권총이 김훈 중위의 것이 아니라는 문서상의 기록이 발견되었으나 군은 김훈 중위의 권총이 문제가 있어서 병사의 권총과 바꾸었다고 해명하였다. 2014년 4월 5일자 그것이 알고싶다 방영분에 따르면, 이 사실은 김훈 중위의 유가족이 김훈 중위의 총기 소지증 상의 총번과 실제 현장에서 발견된 권총의 총번이 다르다는 사실을 발견해 의혹을 제기, 사건 6개월 후에야 알려진 것이라고 한다. 당시 김 중위의 권총 번호는 1140862번이었으나 현장에 발견된 총기의 번호는 김 상병의 것인 1160865번으로 국방부는 당시 김훈 중위의 총이 고장나 다른 사람의 총을 가져갔다고 했으나, 당시 미 육군이 관리하는 권총 수불증(受拂證)이 위조된 서류라는 증언이 나왔다.
3.3. 사건 현장
- 현장에 남겨진 격투의 흔적들
위 항목과 연계되는 사항으로, 사건 현장인 241 GP 3번 벙커는 북쪽과 가장 근접해 있는 곳이기 때문에 벙커에 설치된 크레모아 격발스위치를 관리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업무 중에 하나였다. 때문에 하루 두 번 실시되는 전원 투입 근무 때마다 소속 부대는 스위치를 감싸고 있는 나무박스의 상태를 점검하고 문제가 생길 경우 선임하사에게 보고한 뒤 곧장 고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런데 사건 후 3번 벙커 안의 크레모아 박스 뚜껑은 부서져 있었다. 아침에만 해도 부대 VIP 방문 소식으로 분주했을 부대에서 크레모아 박스가 부서진 것을 눈치채지 못한 채 수 시간 동안 방치해두었을까? 거기다 여러 개 중 한 개만 부서저 있는데, 이 경우 모두 폐기해야 하지만 방치되어 있다는 것도 의문이다. 또한 김 중위가 왼손에 차고 있던 손목시계 유리가 깨진 상태로 발견된 것은 평소 김 중위의 업무 성격으로 보아 시계 유리가 부서질 이유가 없다는 점으로 볼 때 강한 의혹을 심어주는 사실이다.
- 시신 옆의 의문의 방탄모
당시 현장 사진을 보면 총기 옆에 위장포가 씌워진 방탄모가 놓여 있는데 그 후 사라졌다. 사건 당시 현장에 출동했던 미 육군 군의관은 이것은 자신의 것으로 검안 당시 자신의 방탄모를 총기 옆에 벗어 두었다가 사진을 찍고 나온 후에 두고 온 것을 알고 운전병을 시켜 가지고 오게 했다고 진술했다. 다만 당시 사건 현장을 경비하던 한국 육군 병사들의 증언도, 사건 현장 촬영을 위해 미 육군 하사가 계속 들락날락 했지만 미군 군의관은 더 나중에 왔다고 하여 사진에 군의관의 방탄모가 찍힐 수 없다는 의문이 새롭게 제기되었다. '그것이 알고싶다'에서는 이 방탄모가 둔기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에 대해서도 제기하였다.
3.4. 시체
- 김 중위의 몸에서 발견된 부상 흔적들
김 중위의 오른쪽 손에서 2.5cm x 1.5cm 크기의 찰과상이 발견되었으며, 두정부의 상반부 가운데 피하조직에서 방사성 골절 및 4.8cm 크기의 혈종이 발견되었다. 타살 측에서는 이를 둔기 손상으로 보고 이런 종류의 상처는 뇌진탕으로 즉시 의식을 잃게 할 수 있으며, 이로 인해 그가 사건 당시 누군가와 격투를 벌였거나 일방적인 공격을 받았음을 추측하였으나 자살 측에서는 총격으로 생긴 부가적인 상해로 보고 있다. 즉 총을 발사할 때 발생된 가스가 상처 속으로 유입되어 안에서 터져서 생긴 상처라는 것이다. 무엇보다 둔기를 맞아 의식을 잃은 뒤 총에 맞았다면 앞서 왼손의 화약 흔적을 방어흔으로 본 것과 모순된다고 지적한다. 재조사 당시 개로 실험한 결과 총을 맞은 개의 두개골에 유사한 골절 및 혈종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실제 부검 결과는 총기로 인한 손상임을 뒷받침한다. 살아있을 때 충격을 받으면, 두피가 짓이겨지면서 두피내출혈이 나타난다. 하지만 김 중위의 부검사진을 보면, 두피절개선 턱부분에만 출혈이 나타났다. 외부 충격으로 머리가 깨질 정도면, 두개골의 골절을 따라 경막외출혈이 나타나야 하나 부검 결과 골절선이 깨끗했다. 이로 보아 두개골의 골절은 둔기보다는 총기로 인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노여수 박사는 여기에 대해서는 반론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둔기로 머리를 손상하지 않고 총만으로 타살이 가능하다는 점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실제 부검 결과는 총기로 인한 손상임을 뒷받침한다. 살아있을 때 충격을 받으면, 두피가 짓이겨지면서 두피내출혈이 나타난다. 하지만 김 중위의 부검사진을 보면, 두피절개선 턱부분에만 출혈이 나타났다. 외부 충격으로 머리가 깨질 정도면, 두개골의 골절을 따라 경막외출혈이 나타나야 하나 부검 결과 골절선이 깨끗했다. 이로 보아 두개골의 골절은 둔기보다는 총기로 인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노여수 박사는 여기에 대해서는 반론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둔기로 머리를 손상하지 않고 총만으로 타살이 가능하다는 점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 시체를 닦았다?
2014년 4월 5일자 그것이 알고싶다 방영분에 따르면, 사건 당시 시체를 최초로 검안한 미 육군 군의관이 총상 부위를 포함한 시체의 전신을 닦아 냈다고 한다. 이에 관해 군의관과 동행한 한국 육군 의무병의 증언 내용도 방송되었다. 부검 전의 시체를 닦아내는 것은 증거의 심각한 훼손 행위로 간주되어 일반적으로는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것을 오른손 화약흔이 발견되지 않는 이유로 제시하는 경우가 있는데 물론 상식적인 수준에서 손을 씻었다고 감식에서 화약흔을 발견하지 못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만약 화약흔이 사라질 정도의 세정이 이루어졌다면 이는 작정하고 증거 인멸을 획책한 것이지 단순한 착오로 보기에는 어렵다. 2010년 방영된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인터뷰한 로스앤젤레스 경찰청(LAPD) 총기 감식 전문가 마뉴엘 머노즈는 오른손에 화약흔이 없는 것에 대해 타살의 가능성 외에 장갑을 꼈거나 손을 씻었을 경우를 제시한 바 있다.
4. 사건의 여파
김중위의 사망 원인이 자살로 판명나자 김척 장군을 비롯한 유가족들만 충격 받은 것이 아니었다. '''그 못지않게 충격을 먹은 사람들이 바로 김훈 중위의 동기생들인 육사 52기 장교들'''이다. 그들은 동기의 사망이 그런 식으로 처리되는 것을 보고[3] '''무려 33명'''이 5년차 전역을 선택하고 군대를 나와버렸다. 게다가 그나마 남아서 영관급 장교가 된 한 동기는 '''"군 생활 내내 친구 김훈에게 안겨진 불명예를 애써 외면한 채 앞만 보고 달려야 한다는 불쾌한 기억에 시달렸다"'''라고 말했다. 연간 평균 200명 안팎으로 임관하는 육군사관학교 출신 장교들 중에서 평균 10명 내외 정도만 5년차 전역을 선택하는 다른 기수들에 비해 이 기수는 정말 파격적일 정도로 많이 5년차 전역을 했다. 육사 52기생들은 왜 집단 전역을 선택했나 엘리트 장교 출신의 죽음이, 여러 의문점이 많이 보이는데도 자살로 덮으려는 국방부의 모습에 염증을 느꼈으리라 짐작된다. 특히나 같은 육사 52기라면 가장 쉽게 설명하자면 친구인데, 친구가 저렇게 되는 것을 보고 아무 감정이 없을 리는 만무하다. 당연히 반발할 수밖에 없다.
5. 사건 뒤에 떠도는 이야기
2009년 군 의문사 진상규명 위원회, 2012년 국민권익위원회에서 재차 조사를 하였으나 자살 타살 어느 쪽으로도 단정 지을 수 없다는 이유로 진상규명 불능 결정이 나왔다.
일각에서는 김 중위의 죽음에 JSA라는 독특한 배경이 도사리고 있을것이라는 추정을 하고 있다. 김 중위가 부소대장인 김영훈 육군 보병중사가 조선인민군 육군 병력과 불법적으로 접촉하는 것을 알고서 이 때문에 자신의 행동을 김훈 중위가 상부에 보고할까봐 김영훈 중사가 김 중위를 살해한 하극상 사건이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기사 김영훈 중사는 본인 주장에 따르면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호기심으로 야간을 이용해 최소 20에서 최대 30차례 군사분계선을 넘어 인민군 초소를 찾아갔다. 후에 군당국은 이 사실을 적발한 뒤에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처벌하였다.[4] 인민군과의 무단 접촉 사실이 알려지자 그때까지는 비현실적이라는 평을 듣던, 2000년 개봉한 영화의 공동경비구역 JSA의 원작소설 DMZ의 내용이 현실에서 일어났다고 다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소설 DMZ는 1997년작으로 발표 당시 각종 문학상 후보에 올랐으나 남북한 군인들이 서로 만난다는 설정이 비현실적이라는 이유로 최종심에서 탈락했다.
이 사건을 다룬 어떤 방송에서는 김 중사를 은근히 의심하는 듯한 뉘앙스를 풍겼고, 김중사는 나중에 군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에 소환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김 중사가 인민군에 포섭되어 김훈 중위를 살해한 것이라는 의혹도 제기된 바 있었다. 그러나 조사 결과 인민군과의 접촉이 단순한 호기심 차원이었고 별다른 이적성을 찾을 수 없으며 김 중사가 연루되었다는 명백한 근거가 없었고 자살로 결론이 나면서 무혐의가 되었다.기사 김 중위의 사망 원인이 자살로 결론이 난 뒤에, 김영훈 중사와 가족이 김영훈 중사의 범행 의혹을 제시한 3개 언론사에 대하여 일부 승소로 명예훼손에 대한 손해배상을 받았다.기사
2012년 오마이뉴스의 보도에 의하면 김 중위의 사인을 자살로 판단한 전직 미 국방부 시체감식단의 스펜서 박사가 검시관으로서 '''비윤리적 행위''' 행위를 한 것으로 드러나 파면된 걸로 알려졌다. 결정적으로 이 박사는 이전에도 '''타살인 피해자를 자살로 잘못 판단한''' 사례가 있는 걸로 드러나 논란이 되는 상황이다. 다만 국방부가 자살설을 채택하는 데 스펜서 박사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오마이뉴스의 주장은 사실이 아니며 그 외에도 국내 법의학자 여럿이 자살에 무게를 두고 있었다. 해당 사건 부검에 참여한 모 법의학 교수는 이후에 쏟아지는 의혹이 오죽 억울했는지 수십년이 흐른 뒤에도 법의학 강의 때면 의대생들에게 "내 법의학자로서의 모든 양심을 걸고 이 사건은 자살로 결론내렸다"고 역설한다. 학계의 결론에는 학문적 이유가 있다.
2012년 7월 공무로 정신질환 치료를 받았거나 구타·폭언 등으로 자살한 군인도 순직으로 인정하기로 국방부 훈령이 개정되었으나, 김훈 중위는 자살이든 타살이든 순직 사유에 해당함에도 사망 원인이 확실하지 않아 순직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었다. 2012년 국민권익위원회는 사망 원인이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은 경우에도 순직으로 인정할 것을 권고했으며 2013년 3월 군의 '전공사상자 처리 훈령' 개정으로 김훈 중위는 순직 처리와 국가유공자 자격을 인정 받게 될 것으로 보인다. 기사
그것이 알고싶다는 1998년 사건의 최초 발생 시점에 이 문제를 방송하였다. 당시 군 의문사 사건을 언론에서 공개적으로 검증한 것은 처음이라 많은 관심을 모았고, 결국 재수사 결정까지 이끌어 내게 된다. 이후 2010년 6월 5일 잊혀져 가던 사건을 재조명하였다.759회 아버지의 끝나지 않은 전쟁-JSA 김훈 중위 죽음의 미스터리 그리고 2014년 4월 5일에 다시 이 사건을 다뤘다. 사실상 방송에서 나오는 모든 정황이 자살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934회 JSA 김훈 중위, 오른손의 미스터리
6. 2017년 09월 01일. 19년 만에 순직 인정
한겨레 보도에 의하면 김훈 중위의 사망을 19년 만에 순직으로 인정하였다. 다만 사망 원인은 '규명 불능'이라는 판단을 내려, 결국 사건의 내막은 영구 미제로 남고 말았다.
[단독] 김훈 중위, 사망 19년 만에 순직 인정
'순직 인정' 김훈 중위 부친 "잘못 인정하는 게 국민의 군대"
[1] 이는 당시 소대장실에서 컴퓨터 작업을 하고 있었다던 부소대장의 증언이다.[2] 그러므로 액사(=縊死 : 목 매 죽음.)나 추락사 등 평범한 자살자도 수사를 하는 것이다.[3] 그것도 '''별 3개 짜리 중장 아버지'''를 뒀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되었으니 충격을 안 받을 리가...[4] 당시 군당국의 조사 내용에 따르면 김 중사가 북한군에 포섭되지는 않았으며, 단순접촉이었다고 한다. 자세하게는 김 중사가 돼지고기를 들고 가서 북한군과 회식을 한 뒤 복귀하는 방식이었다. 그런데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처벌한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비판이 여야를 막론하고 나왔다. 자신의 근무지를 이탈해서 무단으로 적대 세력 구성원과 접촉했으므로 당연히 처벌 대상이지만, 국가보안법이 아니라 군형법으로 처벌해야 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