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가야마 노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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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永山則夫
1949년 6월 27일 ~ 1997년 8월 1일
일본의 연쇄살인범 및 소설가.
1968년부터 1969년까지 연쇄 피스톨 사살 사건을 일으켰다가 체포되어 사형을 당했다.
2. 활동 내역
1949년 홋카이도 아바시리시[1] 에서 8남매 중 일곱째로 태어났다. 도박에 빠진 아버지 때문에 집안이 망한 데다 5살 때인 1954년에는 어머니가 가출해버리는 등 어렸을 때 매우 불우한 어린시절을 보냈다. 16살 때인 1965년 도쿄로 이주해 일을 시작하지만 어떤 일도 오래 지속하진 못했다.
1968년 주일미군 막사에서 몰래 훔친 권총[2] 으로 도쿄, 교토, 하코다테, 나고야에서 4명을 쏴 죽였다. 이 사건에 대해 1965년에 일어난 소년 소총마 사건의 영향을 받았다는 의견이 있다. 1969년 체포되었고[3] 1979년 도쿄 지방재판소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1981년 도쿄 고등재판소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받지만 1990년 최고재판소에서 사형이 확정되었다.
이때 일본 최고재판소가 그 유명한 '''나가야마 기준(永山基準)'''을 발표한다. 기준의 내용은 다음과 같으며 제정된 이후로 내용의 변경이나 수정은 없었다.
- 4명 이상 살해: 무조건 사형.
- 2명 이상 3명 이하 살해: 명백한 정상참작 사유가 없으면 사형.
- 1명 이하 살해: 사형을 반드시 선고한다.
- 이렇게 할 정도로 지나치게 명백한 가중사유가 없음: 무기 혹은 10년 이상의 징역
이 때까지의 모습은 단순한 연쇄 살인마에 불과했지만, 교도소에서 복역하면서 제2의 인생을 살게 되었는데, 독학으로 작가가 된 것이다. 1971년 수필집 '무지의 눈물'과 '인민을 잊은 카나리아'를 발표했다. 그리고 인세는 모두 피해자 유가족에게 전달했다. 1983년 소설 '나무다리'로 19회 신일본문학상을 수상했다. 1990년 작가 아키야마 슌, 가가 오토히코의 추천을 받아 일본 문예가 협회에 입회를 신청했지만 협회 측에선 연쇄살인마였던 사람을 받아들일 순 없는지라 거부했다. 이에 항의해서 나카가미 겐지[5] , 가라타니 고진, 츠츠이 야스타카 등이 협회를 탈퇴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1997년 사형이 집행되었다. 그의 사형을 놓고 '사카키바라 사건의 범인이 미성년자로 범죄에 비해 낮은 형량을 받게 되자 많은 비판이 일게 되었고, 이를 무마하기 위해 나가야마를 사형 집행했다'는 의혹이 일었다. 또한 최고재판소에서 제시한 '같은 환경에서 자란 다른 형제들은 잘 자라 적절한 성인이 되었으므로 그의 환경적 특수성을 감안할 필요가 없다.'는 이유도 많은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물론 살인을 저지르는 지경까지 간 사람은 나가야마 노리오 한 명뿐이지만, 그의 큰 형은 도박에 빠져 가산을 탕진하다 결국 사기죄로 구속되어 복역 중이었고, 둘째 형은 일용직을 전전하다 완전히 행방불명되어 사망 경위와 시기조차 알 수 없었으며, 막내 여동생은 정신질환자로서 생을 마감하는 등 실제 그의 형제들은 여러 모로 적절한 성인이라는 말과는 거리가 먼 상당히 불우하고 비참한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사형 집행 당일, 나가야마 노리오의 작품 팬들이 사형 집행을 막으려 했으나 결국 집행되었다. 사후 변호인들에 의해 나가야마 어린이 기금이 창설되었고, 그의 작품으로 거둔 인세는 일본이나 다른 나라의 가난한 어린이들을 위해 쓰이고 있다.
특이하게도 감옥에 있는 동안 서신을 주고받았던 여자와 옥중 결혼을 하였다.
1975년 아다치 마사오가 약칭 연속살인범이라는 제목으로 나가야마랑 인터뷰해 다큐멘터리를 만들어 공개했다. 촬영 자체는 1969년에 했으나 공개가 늦어졌다고.
[1] 오호츠크 해 근처인데, 얄궂게도 일본에서 악명 높은 아바시리 형무소가 여기 있다.[2] 룀(Röhm) 사의 RG10이라는 22구경 소형 리볼버로, 당시 미국에서 13달러 쯤, 현재 물가로도 100달러도 안 하는 조잡한 싸구려 권총이다. 미국 현지에서는 흔히 새러데이 나잇 스페셜로 지칭되는 종류인데, 아마 어느 군인이 사적으로 가지고 다녔던 모양.[3] 이때 나이 19세 10개월로 범행을 저질렀을 때는 미성년자였다.[4] 김전일 시리즈 등의 일본 추리 작품에서 4명 이상 죽인 범인은 대부분 비극적으로 자살하는 클리셰의 원인.[5] 부라쿠민 출신으로 알려진 소설가. 한국에도 1978년 방문해서 판소리나 가면극 등을 취재하기도 했고, 서울을 무대로 하는 소설 『이야기 서울』(物語ソウル)이나 에세이 『춤추는 서울』(輪舞する、ソウル)을 쓰기도 했다. 김지하나 윤흥길과도 교류했고, 1985년 신쇼샤에서 『한국현대단편소설』을 편찬하는 등 한국 문학을 일본에 소개한다. 1992년에 향년 46세로 사망. 한국에서 그의 소설은 1981년에 이야기 서울이 <서울 타령> 이라는 이름으로 한 번 번역된 적이 있고, 1993년에 봉선화가 한겨레출판사에서, 2001년에 고목탄(枯木灘)이 문학동네에서 번역 출판된 것이 전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