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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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최초의 사진엽서 알레베크 사진엽서에 등장한 김홍륙[1]
1. 개요
2. 생애
2.1. 생애 초반
2.2. 김홍륙 독차 사건
2.3. 연좌제와 관련된 후폭풍
3. 기타
4. 같이 보기


1. 개요


김홍륙(金鴻陸, ? ~ 1898년)은 구한말 조선-대한제국의 권신으로 본관은 수안(遂安)[2]이며, 제정러시아와 친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천민출신의 미천한 신분으로 고종황제를 지근거리에서 보좌하는 자리까지 입지전적의 신분 상승을 이루었으나, 실각하고 앙심을 품어 고종황제와 순종을 암살하려 하였으나 실패한 뒤 교수형에 처해졌다.

2. 생애



2.1. 생애 초반


함경도 경흥 출신이다.[3] 러시아와 인접한 함경도 출신이라는 점을 살려 블라디보스토크를 왕래하며 러시아어를 배워 익혔다. 1886년 5월 10일, 북청군 신포진에 러시아 군함이 정박해서 북청군 부사 이준수가 러시아인 함장과 간단하게 대담한 기록이 남아 있는데, 이때 러시아군과 함께 일행으로 들어와서 통역을 섰던 것으로 처음 사료에 등장한다.[4] 이를 볼 때 러시아어 회화 실력은 제법 괜찮았던 모양이지만, 한문에도 국문에도 키릴 문자에도 모두 까막눈이었다고 하며, 일상회화는 문제가 없었지만 학식이 부족하다 보니 깊은 수준까지는 되지 못했던 듯하다.[5] 이 일로 조선 조정의 눈에 들었는지[6],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김홍륙은 1888년 부장, 1889년 수문장으로 임명되는 등 무관 쪽으로 벼슬을 시작한 것이 확인된다.
이후 조선과 러시아와의 관계가 중요해지면서, 러시아어를 할 줄 알았던 김홍륙은 역관으로서 활약한다. 1894년에는 이범진과 주조선 러시아 공사 카를 이바노비치 베베르간의 조약 체결 시 통역을 맡았다. 춘생문 사건 당시에 가담했던 인원들 중 하나였으며, 1896년 1월에는 시종원 시종으로 임명된 후, 아관파천을 계기로 베베르와 고종 간의 통역을 맡으면서 고종의 신임을 얻게 된다. 시종원 시종에서 특별히 정3품 비서원승으로 승진하는 것으로 모자라, 정2품 판서에 준하는 자리를 거쳐, 아관파천이 끝난 이후로는 귀족원 경 자리까지 오를 정도로 위세가 대단해졌다. 누가 봐도 낙하산이었기에 신하들은 달가워하지 않았으나, 고종은 막무가내였다.

조병세가 아뢰기를,

"궁금(宮禁)을 맑고 엄숙하게 하는 것이 가장 급선무입니다. 김홍륙을 재신(宰臣)의 반열에 올려 주고, 이용익이 오래도록 자기 직책에 돌아오지 않는 것은 또 무엇 때문입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들은 통역을 잘 하기 때문에 배려하는 뜻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였다.

승정원일기 고종 34년 정유(1897) 2월 14일(계유, 양력 3월 16일)

윗사람들을 상대로 이미지 관리를 잘 했는지, 베베르 공사와 그의 아내는 김홍륙이 청빈하고 정직한 사람이라는 발언을 여러 차례 한 기록이 남아 있고, 고종이 김홍륙을 가까이해 사적으로 이런저런 일을 맡길 때에도 베베르는 김홍륙의 상관으로서 이를 전혀 제지하지 않았다. 물론 공사 부부의 바람과는 달리, 김홍륙은 상당히 부정축재와 매관매직에 능한 사람이었으며, 얼마 안 가 조선(훗날 대한제국)에서도 손 꼽히는 부자가 되었다.[7] 김홍륙의 가족 및 친인척도 그의 덕을 보아 권세를 휘두르며 학정을 일삼았다.[8] 그 위세만큼 자연히 김홍륙은 적을 많이 만들었으며, 여러 차례 상소를 통해 탄핵을 받기도 했지만 고종과 베베르의 비호로 큰 영향은 받지 않았다.
1898년 2월 흥선대원군이 세상을 떠난 당일인 양력 2월 22일, 김홍륙은 경무청에서 딸려준 순검 2명의 호위를 받으며 퇴궐하여 러시아 공사관으로 향하는 길에 암살자 4명의 습격을 받았다. 암살자들은 순검들을 제압하고 김홍륙의 목을 찔렀지만, 당시 김홍륙은 털로 된 방한용 머리쓰개인 휘양(揮揚)을 쓰고 있던 덕분에 가벼운 부상만 입고 살아남았다. 이 테러 사건은 같은 친러파였지만 김홍륙과는 경쟁 관계에 있던 이재순이 사주한 것이었다고 한다. 이쯤 되니 김홍륙 본인도 세간의 시선이 신경쓰였는지, 사직을 요청했으나 고종이 허락하지 않아 그냥 넘어갔다.

귀족원 경(貴族院卿) 김홍륙(金鴻陸)이 상소하기를,

“삼가 아룁니다. 신은 본래 보잘것없는 인물입니다만, 외람되이 세상에서 보기 드문 은혜를 입다 보니 전후로 분에 넘치는 관직을 두루 거쳤는데, 기량이 부족하고 성품이 우매하여 가는 데마다 죄만 지었습니다. 그러나 견마(犬馬)와 같은 마음에 성상을 향한 간절한 충심(衷心)을 금할 길이 없어 오직 몸이 부서져 가루가 되더라도 충성을 다하리라 다짐하였습니다.

그런데 근일에 신이 당한 일은 조정에 있어서는 벼슬아치들의 크나큰 수치이고 신에게 있어서는 죽어도 씻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는 모두 용렬하고 어리석은 신이 한갓 의분(義分)이 소중한 줄만 알고 일찍이 자중(自重)하지 않아서 함정에 빠질 계기를 자초한 것입니다. 말이 여기에 이르고 보니 차라리 홀연히 죽고 싶을 따름입니다. 어찌 감히 남을 탓하겠습니까. 첫째도 신의 죄이고 둘째도 신의 죄입니다. 신하된 자가 이런 죄를 지고서 어찌 하루라도 얼굴을 들고 다시 반열에 나와 거듭 조정을 욕되게 할 수 있겠습니까. 또 신은 그런 일이 있은 뒤로 오장(五臟)이 제 기능을 못하고 사지가 벌벌 떨리는 등, 숨이 끊어질 듯하여 몸을 보전하기를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니, 사적인 분수로 보나 공적인 격식으로 보나 반드시 사직해야 할 입장입니다. 그러므로 이에 감히 충심을 토로하여 숭엄하신 성상을 번거롭게 해 드리는 바이니, 삼가 바라건대 자애로우신 성상께서는 굽어살피시어 신의 직명을 속히 체차하심으로써 나라의 체모를 바로잡고 사람들의 마음을 풀어 주소서.……”

하였는데, 받든 칙지에,

“상소를 보고 잘 알았다. 지난번의 일은 세상이 변해서 그런 것이니, 경 한 사람만이 당한 일이 아니다. 다시 무슨 말을 하겠는가. 이를 이유로 사직까지 하는 것은 만부당하다. 좀더 조리를 잘하고 속히 공무를 행하라.”

하였다.

승정원일기 고종 35년 무술(1898) 2월 14일(무진, 양력 3월 6일)

그래도 한 차례 다시 몸조리를 청하는 상소를 올리자, 고종은 이를 수락하고 얼마 안 가 김홍륙을 한성부 판윤에 임명한다. 이때가지만 해도 고종은 적어도 겉으로는 김홍륙을 아끼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한성 판윤으로 임명받은 김홍륙이 계속 사직을 청하는 상소를 올리자, 고종은 "업무를 해야 할 시간에 어찌 상소만 일삼는가"라며 타이르는 데 그쳤다.
이 무렵 김홍륙의 상관인 러시아 공사는 베베르에서 슈페이에르 공사를 거쳐, 1898년 4월 마튜닌으로 바뀌었다. 조선인들의 불만을 의식한[9] 마튜닌은 김홍륙을 러시아 공사관에서 해임했고, 이로 인해 김홍륙은 서서히 정치적인 영향력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2.2. 김홍륙 독차 사건


지난 11일 밤 10시경 궐내의 만찬에 부름을 받았을 때 황제 폐하 및 황태자 전하께서는 갑자기 병을 얻어 폐하, 전하가 함께 토사하고 전하는 한때 인사불성이 되어서 궁정의 염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선부(膳部) 중에서 무엇인가 식사의 장애를 일으키게 한 소행이 있었는지 각각 그 원인을 추구하였습니다.

폐하께서는 때때로 즐겨 양식을 찾으시는 일이 있는데 항상 먼저 커피를 찾으시는 것이 상례였습니다. 그날 밤에도 역시 전례와 같이 먼저 커피를 드렸는데 커피는 상시로 변하는 것인지 맛이 좋지 않다고 하시면서 아주 소량으로 두세 번 마셨고 황태자께서는 거의 한두 번에 반잔을 마셨습니다. 그 후 얼마 안 되어서 두 분 모두 불쾌함을 느꼈는데 황태자 전하께서 먼저 토사하고 곧 이어서 황제께서도 역시 토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날 밤 시봉(侍奉)한 자의 면면은 내시(內侍) 7명, 여관(女官) 3명, 별입시(別入侍)[10]

1명으로 그 중 남은 커피를 시음한 사람은 누구 할 것 없이 모두 중독되어, 이로써 그 해독이 음식물에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1898년 9월 25일, 주한 일본 변리공사 가토 마스오(加藤增雄)가 오쿠마 시게노부 당시 일본 외무대신에게 보낸 비밀서신

궁내부 대신(宮內府大臣) 이재순(李載純)이 아뢰기를,

"방금 삼가 듣건대, 전하(殿下)와 태자(太子)가 동시에 건강을 상하였다고 하는데 수라(水剌)를 진공(進供)할 때 애당초 신중히 살피지 못하여 몸이 편치 않게 되었으니, 너무나 놀랍고 송구합니다. 거행한 사람들을 모두 법부(法部)로 하여금 철저히 구핵(鉤覈)하게 하고 근본 원인을 조사하여 나라의 형률을 바로잡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경무청(警務廳)으로 하여금 근본 원인을 엄히 밝혀내게 하겠다."

하였다.

【음력으로 올해 7월 10일 김홍륙(金鴻陸)이 유배 가는 것에 대한 조칙(詔勅)을 받고 그날로 배소(配所)로 떠나는 길에 잠시 김광식(金光植)의 집에 머물렀는데, 가지고 가던 손 주머니에서 한 냥의 아편[11]

을 찾아내어 갑자기 흉역(凶逆)의 심보를 드러내어 친한 사람인 공홍식(孔洪植)[12]에게 주면서 어선(御膳)에 섞어서 올릴 것을 은밀히 사주하였다. 음력 7월 26일 공홍식이 김종화(金鍾和)를 만나서 김홍륙에게 사주받은 내용을 자세히 말하고 이 약물(藥物)을 어공(御供)하는 차에 섞어서 올리면 마땅히 1,000원(元)의 은(銀)[13]으로 수고에 보답하겠다고 하였다. 김종화는 일찍이 보현당(寶賢堂)의 고지기〔庫直〕로서 어공하는 서양 요리를 거행하였었는데, 잘 거행하지 못한 탓으로 태거(汰去)된 자였다. 그는 즉시 그 약을 소매 속에 넣고 주방에 들어가 커피 찻주전자에 넣어 끝내 진어(進御)하게 되었던 것이다.】

고종실록 38권, 고종 35년(1898년) 9월 12일 양력 2번째 기사

김홍륙 독차 혹은 독다 사건이라고 하기도 한다. '茶'는 '차'와 '다' 두가지로 읽는다. 차로 읽는건 녹차, 홍차 등, 다로 읽는 건 다방, 다도, 다과 등이 있다. 다만 현대 한국어에서 독다란 말을 쓰지 않으니 독차라고 해야겠지만, 오래된 사건을 가리키는 고유명사에 가깝다 보니 독다사건이라 기록한 곳이 많다.
김홍륙은 고종의 신임을 얻어 출세에 출세를 거듭했는데 출세했다고 갖은 횡포를 부리자, 보다 못한 고종이 러시아와의 통상에서 거액을 착복한 혐의로 김홍륙을 내쫓아버렸고[14], 이에 앙심을 품은 김홍륙이 황제와 황태자가 마실 커피아편을 넣어 독살하려고 계획을 세운 것이었다. 아편을 많이 먹으면 사람이 죽기에 충분한 독이 되고, 고종은 워낙 커피를 좋아하는 터라 성공 가능성이 있기도 했다.
고종의 47세 생일인 1898년 9월 12일, 김홍륙은 궁내에서 일하던 공홍식과 김종화를 매수하여 아편을 잔뜩 넣은 커피를 고종에게 올리게 하였다. 그러나 고종이 커피 애호가답게 커피 맛을 알던 터라, 맛이 이상한 것을 알고[15] 두세 모금만 홀짝인 뒤 바로 뱉어버려서 실패했다. 부작용은 속이 조금 메스꺼운 정도에 그쳤다고 한다. 문제는 황태자에게 닥쳤다. 황태자 순종은 커피에 익숙치 않아 맛을 잘 모르다 보니,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해 꽤 많은 양[16]을 들이키고 말았다. 가뜩이나 태어날 때부터 약했던 순종[17]이 대량의 아편을 먹었으니, 구토와 실신을 거듭하며 혈변을 쏟고 이가 모두 빠지는 등 몸을 크게 상했고, 남은 일생동안 틀니를 하고 지내야 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더불어 후유증으로 바보가 되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순종이 바보가 되었다는 소문은 단순히 떡밥에만 그치지 않고, 고종 사후에 복벽주의가 사라질 정도로 순종의 인기와 신뢰를 크게 깎아먹는 등, 사건의 여파는 매우 심각했다.
영화의 소재가 되기도 하였다. 가비(영화) 참조. 토지(소설)에도 김홍륙의 진독 사건으로 나온다.

2.3. 연좌제와 관련된 후폭풍


이러한 사건이 일어났으니 당연히 고종은 크게 분노했고 가만히 있을리가 없었다. 조사끝에 김홍륙과 그 공범들 두 명까지 잡아[18] 10월 10일 오후 6시경 교수형에 처했는데[19][20], 여기까지는 법적인 문제가 없었다. 문제는 법부 대신 신기선범인들의 가족까지 잡아와 고문하는 연좌제를 행하고 범인들의 시신을 방치하여 분노한 민중들에게 갈기갈기 찢기게 한 것이다. 유럽이라면 18세기 중반 즈음까지나 가능했을 행태이며 조선 기준으로 봐도 갑오개혁 이후 연좌제 법이 없어진 이후인데 이를 무시하는 초법적인 행위를 한 것. 여기에 고종이 개입했는지는 알 수 없는데, 김홍륙 처형 직후 신기선을 파직하긴 했으나, 보여주기식이었을 뿐 사실은 뒤에서 사주했을 가능성도 무시할 순 없다. 만약 정말로 고종의 의중이었다고 본다면, 자기도 죽을 뻔 했고 민비가 남긴 유일한 아들도 염라대왕 앞까지 갔다가 골병이 든 채 겨우 살아남았으니, 심정적으로는 이해의 여지가 있긴 하다. 하여튼 이로 인해 외국은 물론 국내의 독립협회까지 반발했다. 김홍륙의 아내 김 조이[21] 역시 남편이 역모를 꾸미는데도 모를 리가 없다는 이유로 처음에 태형 100대와 노역형을 선고받았다가, 칙령에 따라 3년 백령도 유배형으로 대체되었다. 김홍륙은 유배를 떠나기 전 아내에게 공홍식이 건네는 편지는 지체하지 말고 자기에게 전달해야 한다고 언질을 줬던 적이 있는데, 이게 아내의 재판에 불리하게 작용했다.
또한 이 사건을 담당한 판사 함태영[22]은 이 사건을 조사하면서 김홍륙이 독살사건에 관여했다는 증거가 없어 그를 무죄 석방하려고 하였으나 민씨 척족[23]으로부터 김홍륙을 역모로 다스리라는 압력을 받았으며 이에 함태영이 증거도 없이 김홍륙을 역모로 다스리는 것을 거부하자 고종이 이 사건을 다른 판사로 교체하여 김홍륙을 역모로 사형에 처했다고 하니, 정황상 의문스러운 점도 있다. 1960년대 초의 함태영의 회고에 의하면 처형당하는 순간에도 당당한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김홍륙의 먼 친척이라고 하는 김재준 목사와 함태영의 대화 기록이다. 출처
김홍륙의 마지막 러시아인 상관인 마튜닌 공사도 김홍륙의 죽음을 정치적인 음모로 해석했으며, 실제 배후로 이재순을 지목했다. 김종화를 궁에 처음 들인 사람이 이재순이기도 했고, 이전부터 김홍륙과 이재순은 서로 경쟁 관계였기 때문이다.

3. 기타


김홍륙은 독립협회 입장에서는 척결 1순위에 해당하는 인물이었으나, 독립협회 설립을 위한 자금 모금 시에 의외로 김홍륙도 자금을 대 준 기록이 남아 있다. 그가 냈던 돈은 1원.[24]
김홍륙의 집은 돈의문에서 대여섯 보 떨어진 남쪽 대로변에 있었다고 한다. 러시아 공사관과 매우 가까이 있었기에, 그의 집은 러시아 해군 대위 흐멜레프 (Khmelev)가 시위대 등 일부 조선군 병력을 훈련시키던 장소로도 활용되었다. 그의 집 근처에는 한러은행 서울 지점이 설립되기도 했으나 영업한 지 1개월 8일 만에 문을 닫았다.
조선총독부 관보에 따르면, 김홍륙의 명의로 된 연초 소매점 한 군데가 황해도 해주면에 서류상으로 1919년까지 한동안 남아있다가, 회사령의 일환으로 연월일 불상 소멸을 사유로 허가를 취소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를 보면 벌렸던 사업의 규모가 상당히 넓었던 듯하다.
1864년 러시아로 불법 월경하며 러시아인의 투서를 전달한 혐의로 조선 조정에 의해 참수당한 조선인 중 김홍순(金鴻順)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활동 지역과 항렬자가 겹치는 것으로 보아 김홍륙과 인근에 살던 가족 혹은 친인척, 혹은 최소한 수안 김씨에 속했던 인물인 듯 보이나, 사료가 없어 정확한 관계는 불명이다.
이상재와 관련된 야사가 있다. 아관파천 시절, 매관매직을 청탁받은 김홍륙이 인사발령 문서를 보자기에 싸서 고종에게 올렸는데, 마침 일 때문에 공사관을 찾은 이상재가 이를 눈치채곤 "날이 추우니까 폐하를 위해 땔감을 가져오셨구려"라고 말하고는 그 보자기를 집어채 불타는 벽난로에 던져버렸다는 일화이다.
매천야록에 따르면, 남정철은 내부 대신 자리를 노리고 당시 외부협판 김홍륙의 첩과 자신의 첩이 자매 관계를 맺게 해서 내부 대신 자리를 얻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후 남정철의 첩이 김홍륙과 정을 통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를 알게 된 김홍륙의 첩은 남정철이 베푼 연회에 난입해서 남정철에게 욕을 퍼부으며 '첩 간수도 제대로 안 하고 남의 애정에 훼방이나 놓는 네가 그러고도 대신이냐'며 따졌고, 이로 인해 다른 손님들에게 제대로 망신당한 남정철은 다른 일을 핑계로 세 번이나 상소를 올려 내부 대신 자리에서 물러났다고 한다.#

4. 같이 보기



[1] "총애를 잃은 뒤 황제를 독살하려 한 죄로 고발당해 교수형에 처해진 귀족원 경 김옹뉵(Kim Ong-niouck, 김홍륙), 그의 시신은 거리에 끌려온 끝에 종로 광장에 이르렀고 군중 중 한 사람이 그의 배를 가르자 나머지 사람들이 따뜻한 간을 꺼내 먹었다"라는 설명이 쓰여 있다. 수행원들이 입은 옷이 겨울철 복장이 아닌 점, 수행원이 쓴 상복에 해당하는 백립인 점, 그러면서도 김홍륙이 상복이 아닌 제례에 쓰는 금관조복을 입은 점 등을 볼 때 해당 사진이 찍힌 시점은 고종의 대한제국 황제 즉위식과 환구대제가 있던 1897년 양력 10월 11일~14일 경으로 추정된다.[2] 김재준 목사의 먼 친척이라고 한다.#[3] 김재준 목사의 증언에 의하면, 그는 경흥읍에서 태어났다고 한다.#[4] 당시 사료에서는 Кин Ток Иок이라고 음차되어 나타난다. 국사편찬위원회 국역에서는 이 인물을 김홍륙이라고 보고 있다.[5] 김홍륙과 비슷한 시대에 러시아어 통역으로 활동했던 연해주 이주민 출신 김도일이라는 사람은 니콜라이 2세의 즉위식에 민영환을 따라가서 통역을 맡았는데, 이 사람도 학식이 짧아서였는지 조선어가 서툴렀는지 '황태후'를 황제 에미라고 통역할 정도로 심각한 수준이었다고 한다. 결국 중요한 내용은 일행으로 따라갔던 윤치호가 영어를 거쳐 통역했는데, 당시 윤치호를 견제하라는 언질을 조정으로부터 받았던 민영환은 의도적으로 윤치호를 최소한으로만 회의에 합석시켰고 김도일만 통역으로 썼다. 김도일은 김홍륙의 측근이기도 했으며, 법적으로 러시아인이었기 때문에 조선에 있는 동안 김홍륙과 별 다를 바 없이 안하무인으로 행동했다.[6] 1884년경부터 조선 정부는 블라디보스토크(해삼위) 지역에 살던 이주민들의 존재를 파악하고, 이들 중 쓸모 있어 보이는 인원들을 관직에 등용하고 있었다.[7] 그의 위세가 최고조에 달했던 1898년 당시 윤치호 일기의 기록에 따르면, 미국인 고문 자격으로 조선에 와 있던 서재필이 한국 정부로부터 (당시 미국 달러 기준으로) 매달 300달러를 받았다고 하는데, 이것만으로도 서재필이 자기 본업이었던 의사 일로 벌 수 있던 돈보다 한참 많은 액수였다. 당시 조선에 주재하고 있던 외국 외교관들은 매달 1천 달러에 가깝거나 그 이상의 돈을 받고 일하고 있었다. 이에 비해 김홍륙은 인삼 거래로 2천 달러씩을 받고 지방관직을 팔았고, 인삼 거래로는 6만 달러를 벌어들여 4달 만에 10만 달러를 벌어들일 정도였다고 한다.[8] 큰형 김홍익은 단천 군수, 작은형 김홍석은 회령 군수, 조카딸 김진옥은 북묘의 묘지기, 장인 김용원은 광산국 국장 등등 화려했다. 형제 중 김홍경이라는 사람은 김홍륙과 비슷하게 러시아어를 잘 했는지, 러시아인 행세를 하며 온갖 행패를 부리다 체포되었다고 한다.[9] 당시 러시아 외교문서에 따르면, 이미 러시아 측에서도 김홍륙이 의도적으로 오역을 해가면서 황제에게 공포감을 심어주고 사리사욕을 취한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10] 입궁하여 임금과 사적으로 독대하던 신하.[11] 검거 후 김홍륙의 진술에 따르면, 그는 평소 체증으로 인해 아편을 상비약으로 쓰고 있었는데, 아편이 독약으로도 쓰일 수 있음을 알고는 남은 양을 범행에 쓸 결심을 했다고 한다.[12] 일부 기록에서는 '공창덕'이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다. 아관파천 당시 베베르 공사가 고용한 요리사였으며, 김홍륙의 추천으로 전선사 주사가 되어 궁궐에서 외국 요리를 담당했다.[13] 당시 독립문 건립을 위한 견적을 냈을 때 3,825원이 들 것으로 책정되었다고 하니, 이는 엄청난 액수다. 1,000대한제국 원을 현대의 화폐 가치로 환산하면 2020년 기준 약 3억에 해당한다.[14] 이때 김홍륙의 추천을 받아 정계에 진출했던 가족, 친인척, 지인들도 대거 해임되었다.[15] 생아편은 달콤하고 톡 쏘는 향과 강한 쓴맛이 나기 때문에 어딘가에 타서 음용하는 용도로는 잘 쓰지 않는다. 김홍륙은 커피가 맛이 쓰다는 점 때문에 아편을 사용하기로 생각했던 듯하다. 셜록 홈즈 시리즈에서도 아편을 타서 손님들을 잠재우는 범인이 나오는데, 향과 맛이 강한 커리에 아편을 타서 손님들을 속여넘겼다.[16] 당시 주한 일본 변리공사 가토 마스오(加藤增雄)가 본국 일본에 보낸 전보에 따르면, 두세 모금 만에 잔에 있던 커피의 절반을 들이켰다고 한다.[17] 순종은 태어날 때부터 성년이 될 때까지 잦은 병치레로 죽을 고비를 여럿 넘겼고, 천한 후궁 소생 왕자들이 왕위에 오르는 꼴은 죽어도 못봐 유일한 아들인 순종을 살리기 위해 어머니 민비는 영험한 무당을 찾고 제사를 올리는 등 여러모로의 일로 국고를 탕진했다.[18] 이 중 공홍식은 구금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칼로 상해를 입었다고 한다. 자해인지 혹은 누군가에 의한 상처인지는 당시로서도 알 수 없었다고 한다.[19] 맹꽁이 서당에서는 공범들이 김홍륙이 보낸 자객의 손에 살해당하는 걸로 나오고 이후 김홍륙까지 참수형으로 처형되는 것으로 묘사했다.[20] 당시 조선에서 활동하던 캐나다인 의사 올리버 애비슨(Oliver Avison)의 회고에 따르면, 김홍륙은 처형 전날 몰래 입수한 칼로 자살을 시도했다고 한다. 목 부위를 찔렀다고 하는데, 어떤 '장기'의 절반 가량을 도려냈을 정도로 상처가 깊었으나 애비슨의 치료를 받아 자살에는 실패했다고 한다. 이를 두고 당시 항간에는 처형 직전 김홍륙이 혀를 잘랐다는 소문이 퍼졌다.[21] 김홍륙의 장인과 아내는 남편과 성이 같았는데, 이를 볼 때 동성동본이 아니었거나, 애초에 천출이었기 때문에 성씨 문제에 크게 개의치 않았을 수도 있다. 혹은 같은 주인을 둔 상태에서 주인집의 성씨를 그대로 따른 경우일 가능성도 있다.[22] 독립운동가이고 후에 이승만 정권 3대 부통령이었다. 당시 20대의 젊은 나이였는데, 조선의 관직을 지낸 이가 대한민국에서도 활동한 매우 드문 예이다.[23] 특히 민영찬(閔泳瓚)을 그 배후로 지목했다.[24] 1898년을 기준으로 쌀 1이 4 대한제국 원이었다고 하니, 2020년 기준 가치로 환산하면 약 30만 원에 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