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가파르바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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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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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낭가파르바트(Nanga Parbat)는 히말라야 산맥 끝에 위치하고 있으며, 해발고도가 8,126미터로 세계에서 9번째로 높은 산이다.
'낭가파르바트'는 우르두어로 '벌거벗은 산'이란 뜻이다. 셰르파들 사이에서는 '''악마의 산'''으로 불리고 외국에서도 공공연히 'Killer Mountain'이란 명칭을 쓸 만큼, 등정 난이도가 높고 사망자가 많이 나온 산으로 더더욱 유명하다. 산의 남동쪽 벽인 루팔 벽[4][5] 은 높이 4500미터의 '''수직''' 암벽으로, 히말라야의 3대 난벽으로 꼽히는 곳이다.[6][7]
아래 사진을 보라. 안내판에 Killer Mountain이라고 대놓고 적혀 있다. 안내판에는 "당신의 왼쪽을 보시오. 죽음의 산. 낭가 파르밧"이라고 적혀 있는데 아래 사진에서 왼쪽에 있는 정상은 구름에 가려서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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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키스탄 내에서 두 번째로 높은 산으로, 이 지방 주민들은 '산 중의 왕'이란 뜻으로 '디아미르(Diamir)'라고 부르며 숭앙한다. 8000미터 이상급 산 중에서는 '''가장 무섭다고''' 손꼽히는 곳. K2도 무섭지만[8] 이쪽은 히든 보스인 셈이다. 그래도 사망률이 많이 줄었고 안나푸르나에 최악의 산 자리를 내주었다.[9]
K2처럼 겨울 시즌에 등정된 바가 없는 산이었지만, 2016년 시모네 모로의 팀이 동계초등정에 성공하여 K2만이 동계등정이 안 된 유일한 산이 되었다.[10]
2. 등정 역사
1895년 영국의 알버트 프레데릭 머메리가 구르카 2명과 함께 처음으로 등반을 시도했다가 실종되었다. 그저 눈사태에 휘말려 죽었으리란 추정만 나올 뿐이다.
1932년 독일인 빌리 메르클, 빌로 벨첸바흐가 이끄는 독일 등산대가 도전했으나 1차는 실패했다. 1934년에 2차 도전에 나섰으나 악천후로 하나둘 쓰러져 죽고 메르클과 빌란트ㆍ벨첸바흐 등 독일인 4명과 가이라이ㆍ다그시ㆍ니마노르부 등 현지인 포터 6명이 목숨을 잃었다. 포터인 앙체링이 극적으로 내려와서 마지막에 남은 메르클과 포터 가이라이를 살려달라고 애원했지만 눈보라 속에서 후발 등산대는 구경만 해야했고, 남은 이들은 끝내 스스로 내려오지 못했다.
이렇게 살아남은 마지막 생존자 앙체링은 무려 70년이나 더 살다가 2003년에 약 100살 전후 나이[11] 로 세상을 떠났다. 앙체링은 1960년대까지도 60대 나이까지 이후로 30여 년 동안 포터로 일했다. 90년대 후반, 해외 언론이 앙체링을 찾아가 인터뷰하자 그는 이 당시 일을 아직도 기억한다고 하고, 그때 죽은 다그시와 가이라이는 친구라서 더더욱 잊지 못한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텐징 노르게이가 네팔 셰르파의 영웅이라면 그는 파키스탄 셰르파의 영웅으로 추앙받았다. 당시 앙체링이 두 사람을 놔두고 홀로 달아났다느니 헛소리로 매도하는 이들도 있었으나....앙체링부터가 동상으로 발가락도 잘라내야 했고 그야말로 죽기 살기로 겨우 내려왔는데 두 사람이나 데리고 온다는 것부터가 말이 안된다고 까였다. 앙체링은 이런 비난에 그렇게 할 수 있다면 똑같은 조건으로 낭가파르바트에 가서 그렇게 사람들 데리고 내려올 수 있는지 실험이나 하라고 비웃었고 누구도 그렇게 솔선수범 나서지 못했다.
한편, 게르만 민족의 우월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나치와 히틀러가 낭가파르바트 등정을 지원하기로 하고 1937년 6월 7일 칼 비엔(Karl Wien,1906~1937) 대장이 이끄는 독일등산대가 재도전에 나선다. 그들은 6,180 m 지점에 제4캠프를 구축했다. 그리고 6월 14일 저녁 정상 공격을 위해 독일인 대원 7명과 셰르파 9명이 제4캠프에 모였고 그 자리에서 잠을 잤다. 그러나... 바로 그날 밤 거대한 눈사태가 제4캠프를 덮쳐 자고 있던 '''16명 모두가''' 그 자리에서 숨을 거뒀다. 생존자가 없다보니 며칠이 지나서야 사건이 파악되어 수색이 이뤄졌다.
1938년 파울 파우어 대장이 이끄는 독일 등산대가 다시 도전했으나 악천후에 시달려 결국 라키오트 루트(북동쪽) 무어즈 헤드 부근에 있던 얼음굴에서 4년 전 조난당한 빌리 메르클 대장과 포터 가이라이의 시신을 발견하고 물러나야만 했다. 두 사람은 눈보라에 휘말려 필사적으로 내려오고자 했지만 힘이 다해서 이 동굴에 들어가 잠시 쉰다는게 그대로 영원히 잠이 들었다. 80년대 초반에 나온 클로버 문고에서 1권짜리 세계의 산악 등정을 다룬 만화에서는 이 둘이 앉은 채로 얼어죽은 모습으로 그려졌던 바 있다. 이 과정에서 포터인 히야이룸과 독일인 등산대원 리하르트 발뢴코프가 목숨을 잃으면서 사망자는 31명으로 늘어났다.
1939년 페터 아우프취나이터가 이끄는 독일 등반대 4인이 낭가파르바트 디아미르(서쪽 벽) 머메리 립(rib) 좌측에 위치한 거대한 바위 스퍼의 6,100m 지점까지 올라갔으나 역시 악천후로 물러났다. 히틀러도 연이은 실패에 노발대발했지만 곧 터진 2차 세계대전 여파로 등산은 흐지부지 밀려났다.[12]
1953년 독일인 의사 카를 마리아 헤를리히코퍼(1916~1991)가 등반대를 조직했다. 바로 그는 1934년 조난당한 빌리 메르클의 이복동생으로, 등반에 문외한이었지만 형이 못한 걸 이루겠다는 집념으로 도전에 성공했다. 하지만, 문제는 헤를리히코퍼가 등반에 문외한이고 독선적이며 고집이 세서 다른 등반대와 충돌했다는 것. 결국 다른 인원들이 그를 무시했고, 당시 29살 헤르만 불이 본부의 지시를 어기고 단독으로 등정을 시도, 41시간 만에 살아 돌아왔다.
헤르만 불의 모습.
여담으로 등정하고 내려온 헤르만 불은 온갖 추위와 고생으로 얼굴이 주름투성이가 되어 60대 할아버지처럼 보이는 노안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리더 카를은 모든 영광을 빼앗겼다고 생각해서 불을 치료하지 않았고, 불은 결국 동상을 발가락 2개를 잘라야 했다. 이유야 어쨌든 31명이 죽은 마의 산을 등정한 헤르만 불은 영웅이 되었다. 그리고 그가 쓴 책에서 헤를리히코퍼를 엄청나게 비난하면서 고소와 맞고소가 이뤄지며 둘은 원수지간이 되었고 불은 1957년 카라코람 산맥의 초골리사 등정에 도전했다가 조난당해 33살로 세상을 떠났다.
결국 헤를리히코퍼는 스스로 오르고자 재도전에 나서 1961년 재등정에 나섰지만 루퍼트 뢰브와 한스 킨스호퍼가 추락사하면서 실패하고 만다. 그리고 우습게도 그 이듬해인 1962년, 독일인 토니 킨쇼퍼(1931.2.16~1964.10.24)가 이끄는 등정대가 2번째 정상에 올라 헤를리코퍼에게 굴욕을 안겨줬다. 하지만 이 등정에서도 지크프리트 로우(Siegfried Löw,1933~1962)가 죽고 안데를 만하르트(1939~ )와 킨쇼퍼는 발가락을 절단해야 하는 중상을 당해야 했다. 킨쇼퍼는 1964년 목숨을 잃었는데 헤르만 불과 똑같은 33살이었다. 킨쇼퍼가 등정하다가 죽은 곳은 조국 독일 바덴바덴에 있는 Battert라는 높이 568미터 언덕이다. 킨쇼퍼는 여기서 추락해 죽었는데, 8,000미터가 넘는 산도 등정하고 살아남은 사람이 고작(?) 560미터 밖에 안되는 언덕에서 죽은 것이다. 이 이야기는 산악인이라면 동네 작은 산에서도 얼마든지 죽을지 모른다며 이야깃거리가 되기도 했다.
그 뒤로도 3번이나 헤를리히코퍼는 재도전에 나섰지만 그 스스로 정상에 오르는 건 죄다 실패했다. 그 중 하나인 4차 도전 당시(이탈리아-독일 합작으로 등정 시도)인 1970년에 팀에 동생 귄터 메스너와 함께 합류한 이탈리아의 라인홀트 메스너[13] 가 귄터와 단둘이 최초로 루팔 벽을 통해 등정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서쪽의 디아미르 벽을 통해 하산하던 중 눈사태로 동생 귄터를 잃고 혼자 내려왔다. 여담인데 이때도 대장인 헤를리히코퍼는 젊은 메스너[14] 가 영광을 차지하는 게 배가 아파서 메스너가 기록을 세우기에 급급해 정상에 오른 걸로 만족하지 못하고 고산병에 시달리는 동생을 강제로 더 위험한 루트로 내려보내다 죽인 거라고까지 했다. 분노한 메스너는 "나는 내 동생을 죽이지 않았다!"는 입장을 밝히며 비로소 헤르만 불을 이해하겠다는 말로 그 역시 헤를리히코퍼를 공식적으로 비난했다. 참고로 이 등정을 그린 2010년작인 독일 영화 <운명의 산 낭가 파르밧/Nanga Parbat>(2013년에 국내개봉)에서도 헤를리히코퍼는 찌질이 악역급으로 나왔다. 그뿐만 아니라 처음에는 메스너 형제가 정상에 오르기를 적극 지지했으나 실제로 이들 형제가 정상에 오르자 태도가 돌변했다고 그려졌다.
이렇게 헤를리히코퍼가 등정에 연이어 실패할 때 체코의 이반 갈피가 3번째 도전에(1969년에 1차 실패) 나선 1971년에 4번째 정상 등정에 성공하였다. 이전 3번의 등정은 모두 독일인 및 독일과 합작으로 이뤄졌는데, 비독일 나라가 홀로 등정에 성공한 것. 이 일은 헤를리히코퍼를 또다시 좌절시켰다. 결국 그는 낭가파르바트에 직접 오르기를 포기했고 등산가로서 잊혔으며, 되려 헤르만 불이나 메스너를 질투한 찌질이로서 등산 역사에 추하게 남았을 뿐이다.
여성으로서는 1984년 프랑스의 릴리앙 베르나르(1948~1986)가 남편인 모리스 베르나르(1941~1986)와 같이 처음으로 등정에 성공했다. 생몰연도를 보면 알겠지만 이 내외는 1986년 6월, K2(산) 등정 도중 같이 목숨을 잃었으며 나중에 그녀의 시신을 발견하여 묻어준 등정대가 바로 한국 등정대였다. 월간 사람과 산에서 당시 상황을 목격한 한국 산악인은 그야말로 얼굴이 남아있지 않은 시신을 발견하여 다들 우을해하며 묻어주고 명복을 빌어줬고 몇가지 유품을 챙겨 내려와야 했다고 회고했다.
우리나라에서는 1990년 7월 광주전남합동대가 등정을 시도했으나 실패, 7900미터 지점에서 정성백 대원이 실종, 아니 사망했다. 이후 1992년 우암산악회가 첫 등정에 성공했다. 그리고 1999년에는 엄홍길 대장이 디아미르벽을 통해 등정하는 데 성공했다. 2005년엔 한국 루팔벽 원정대의 이현조, 김창호 대원이 라인홀트 메스너에 이어 35년 만에 루팔벽 재등에 성공하였다. 당시 기사를 보면 등정 루트가 자세하게 나와 있다. 이 기사에 의하면 날씨가 좋아질 때까지 3개월을 기다렸다고 한다. 2009년에는 고미영이 등정 후 하산하는 중에 실족하여 사망하는 안타까운 사고가 발생하기도 했다.[15]
2016년 이탈리아 등산가 시모네 모로의 팀이 동계초등정에 성공했다. 시모네 모로 팀이 2014년 동계 등정을 시도하면서 인터뷰했던 영상
등정 루트로는 대표적인 것이 아래 사진과 같이 Kinshofer 루트와 Diama 루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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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사진을 보면 헤르만 불과 라인홀트 메스너가 올라간 루트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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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글 어스 3D로 등반하는 기분을 느껴 보자.
K2에서도 그랬는데 여기서도 스키를 타고 하산하는 용자가 있다. 그것도 2012년에 말이다.
3. 여담
- 2013년 6월 22일 탈레반이 낭가파르바트 베이스캠프에 마구잡이 총격을 가하여 우크라이나인 5명, 중국인 3명, 체코인 1명, 파키스탄 가이드 1명을 비롯한 10명이 사망했다.[16] 이 사건에 대하여 아시아 산악연맹은 강력비난하는 성명을 냈으며 나아가 치안이 엉망인 파키스탄 정부 책임을 묻고 국제산악연맹과 손을 잡아 파키스탄 여행금지 및 산악등정 금지를 결의했다. 아시아 산악연맹 회장 이인정이 밝히길, 이에 대하여 파키스탄 정부가 당황해하며 문화부 및 외교부장관이 와서 재발방지를 약속했다고 한다. 파키스탄에도 제법 쏠쏠한 수익이 들어오는 이곳 등정을 국제적으로 금지하면 당연히 큰 경제적 타격이 가기 때문에 이렇게 저자세로 굽신거리는 것. 이 덕분에 중무장한 현지 병력이 곳곳에 배치 중이라고 한다.
당시 이 사건현장으로부터 10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머물던 등산인 겸 기자 김영주의 책에서도 당시 이 사건이 보도되며 등산객들이 하산하기 바빴다고 설명한다. 그 때문에 이 척박한 산지에서 등산객 상대로 장사하던 현지인들은 울상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김영주나 몇몇 해외 등산객들이 가지 않고 남으니까 군병력 수십여 명이 기관총을 가득 가져와 경호를 해줬다고 한다.
- 작가 김연수의 소설 '다시 한 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은 이 산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함부로 오르지 못해 제대로 알지 못하는 불가지의 산, 그리고 아무리 오래 함께 지내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불가지의 사람이라는 두 개의 소재를 엮어 쓰여진 작품이며 '젊은 문학평론가가 뽑은 2000년대 최고의 한국문학' 단편 부문에서 선정되었다.
- DC 코믹스에 나오는 가상의 도시인 난다 파르바트(Nanda Parbat)은 낭가파르바트에서 이름을 따 왔다.
[1] 히말라야의 8천미터급 고봉중에 지형학적 상대높이는 2번째로 높다. K2보다도 높다. 그야말로 독립적으로 우뚝 선 거봉.[2] 다울라기리의 지형학적 모체 봉우리는 K2, K2의 모체 봉우리는 에베레스트다. K2의 손자, 에베레스트의 증손자뻘 되는 산인 셈이다.[3] 농담 안하고 10명 중 8명이 죽는 레벨. 그야말로 악마의 산이다.[4] [image] [image][5] 두 번째 사진은 2005년 미국의 슈퍼 알피니스트 스티브 하우스가 개척한 앤더슨/하우스 루트('''4,100 m''', M5/5.9, WI4).[6] 나머지 2개는 로체 남벽, 안나푸르나 남벽.[7] K2의 북벽은 시도조차 된 적이 없기 때문에 난이도를 따지지 않고 그 위의 최종보스 취급을 받는다.[8] 물론 등정 난이도는 K2가 넘사벽이다. 사망률이 '''생각보다''' 낮은 이유는 애초에 시도조차 잘 안 하니까(...).[9] 등정 시도가 많지 않은 상황에서 아래 설명된 재앙급 사망사고 때문에 사망률이 심하게 올라가긴 했다.[10] 2021년 1월16일, 네팔 셰르파 들로 이뤄진 등반대가 K2의 동계 초등정에 성공하여 8000m 14좌의 동계 등정이 모두 이뤄졌다.[11] 이렇게 쓰는 이유는 1903년쯤에 태어났다고 '추정'할 뿐, 본인도 자기의 정확한 생년을 몰랐기 때문이다. 다만 주변인이라든지 몇몇 기록을 참조하면 1902년 또는 1903년생인 듯.[12] 이 등반대에 참가했던 오스트리아의 등산가 하인리히 하러는 낭가 파르밧이 위치한 인도를 식민 지배 중이던 영국에 포로로 억류되었다가 티벳에 한동안 체류했고, 달라이 라마와도 교류했다. 그는 당시 경험을 토대로 <티벳에서의 7년>이라는 회고록을 썼고, 이는 1997년 브래드 피트가 주연을 맡아 영화화되었다.[13] 이탈리아어: Reinhold Messner 레이놀드 메스네르. 이름이 독일풍같아서 독일인으로 많이 아는데 이탈리아에서 태어난 이탈리아인이다. 물론 이름처럼 독일계 조상을 둔 독일계 이탈리아인이다. 또한 잘 알려져 있다시피 메스너는 세계 최초로 히말라야 14좌를 무산소로 완등한 위대한 산악인이다.[14] 1944년생으로 1970년 당시 26세였고, 동생인 귄터는 그와 3살 터울로 1947년생이다. 귄터 역시 어렸을 때부터 등산에 남다른 소질을 보였다고 하니 만약 저 때 23세의 나이로 안타깝게 요절하지 않았더라면 형 못지 않게 저명한 산악인이 됐을지도 모른다.[15] 무려 1천 미터 가까운 높이를 떨어졌다고 하며 중간에 튀어나와 있던 바위에 머리를 부딪혀 아주 심각한 두부손상을 입어 사망했다고 한다. 발견 당시 머리에서 피를 많이 흘린 모습이었다.[16] 기사에는 러시아인이라고 적혀 있으나 2014년 10월에 나온 중앙일보 기자 김영주가 쓴 히말라야 14봉 가이드 책에서는 체코인이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