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리마키

 


1. 개요
2. 상세
3. 역사
3.1. 김밥의 유래는 노리마키인가
3.1.1. 노리마키가 기원이라는 증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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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토의 호소마키
간사이의 후토마키

1. 개요


海苔巻(のりまき
'''노리마키'''는 김으로 밥과 재료를 싸서 만든 초밥의 일종이다.
일본어로 '노리'는 '김'이고 '마키'는 감싸거나 돌돌 만다는 뜻이다. 약칭은 '''"마키"'''. 한국어로 직역하면 김말이(초밥), 또는 김초밥이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요즘 스시야에서는 그냥 마키라고 부르는 것이 대세이다.

2. 상세


도쿄를 위시한 간토 지방에서 노리마키는 원래 주로 한 가지 재료만을 간단히 넣어서 먹던 음식이었으며, 이를 간사이식 '후토마키'와 구별하여 '호소마키'라고도 부르기도 한다. '후토'는 통통하다는 뜻, '호소'는 가늘다는 뜻이다.
참치 붉은살(뎃카마키), 오이(캇파마키), 박고지(칸표마키), 단무지(신코마키) 등을 일반적으로 쓴다. 보통 가벼운 마무리 입가심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며, 그만큼 품격이 떨어지게 생각하기도 한다. 전통있는 스시야에서조차 노리마키는 일손이 부족할 때 안주인이 만들어주는 취급이다.
간사이에서는 다양한 재료를 넣어 먹었는데, 그 겉모습은 얼핏 보면 한국의 김밥과 다른 점을 찾기 힘들게 유사하다. 다만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소스와 재료가 달라서 맛은 확실히 차이가 있는 편이다. 현대 한국 김밥의 기원, 또는 그에 준하는 막대한 영향을 준 음식으로 여겨진다.
해외에서 김밥이라는 이름 하에 이걸 파는 등, 명칭이나 유래에 관한 마찰이 간간히 있다. 김밥은 한국인이 일상적으로 소비하는 음식이라 많은 사람들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부분이 있어서 한때 인조이재팬의 식지 않는 떡밥이었다.
일본 명절 중에 이 후토마키를 자르지 않고 한 줄을 다 먹는 날이 있는데, 그런 날 백화점 등에서는 한줄에 10만 원이 넘는 김밥도 판다. 최고급 참치와 마츠사카규 등이 들어가면 만 엔대를 가볍게 넘는다.
일식조리기능사에 나오는 김초밥, 참치 김초밥이 이 노리마키다.

3. 역사


우리의 김밥과 비슷한 김 초밥(노리마끼)은 쿄토(칸사이)와 에도(칸토)지방에서 각기 다른 기원을 가지고 있다.
칸토의 노리마키는 김 1장을 반으로 잘라 하나에서 셋 정도의 절제된 내용물만 집어넣어 길죽하게 썰어내는 '''호소마키'''(細巻)에서 시작했으며, 보통은 초밥과 김에 오이 또는 칸표(干瓢, 속을 긁어 말린 물건. 박고지) 등의 재료만 넣어서 만든다. 한국에서 알고 있는 작고 길죽한 일본 김밥이 바로 이 호소마키. 모양이 총을 닮았다고 하여서 조총의 일본어 철포(鐵砲, 뎃포)를 따서 ‘뎃포마끼’라고도 부른다. 에도 앞바다에서 김 양식이 성공한 것이 1716년이고 노리마키가 요리책에 처음 등장한 것이 1750년이기 때문에 노리마키는 이 시기 중간 어디 즈음에 생겨난 것이라고 보고 있다.
여기서 한 단계 발전한 것이 '''데까마끼'''(鐵火券: 생선말이김밥)로, 에도 시대 말부터 메이지 시대 초기 사이에 도쿄의 한 초밥집에서 발명되었다. 참치 살이 붉어서 데까라고 불렀다는 설도 있지만, 도박장(=데까바)에서 놀던 사람들이 색다른 마끼를 부탁하여 박고지 대신에 참치를 넣고 와사비를 첨가해 먹기 편하게 작게 싼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그 이후로 이것 저것 속을 다양하게 늘린 마끼가 생겼으며, '호소마끼'때와 달리 김을 반으로 자르지 않고 그대로 싼다는 뜻에서 대비되게 '''후또마끼'''(太券:‘오오마끼’라고도 함) 부르게 되는데, 관서에도 비슷한 물건이 있었기 때문에 관서와 관동의 노리마끼는 비슷한 모양으로 수렴하게 된다. 미스터 초밥왕 배달초밥편에서 결전 무기로 등장하는 "초대형 김밥"은 한국 독자 입장에서는 뜬금없었지만 사실은 가장 화려하게 발전한 후또마끼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칸사이 지역에서는 그냥 노리마키라고 부르면 이 후토마키를 뜻하는데, 칸사이 마끼의 기원은 절분에 칠복신에게 복을 기원하며 7가지 재료를 넣어서 먹는 '''행운마키즈시'''(幸運巻ずし)에서 유래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다만 이건 썰어서 먹는 게 아니라 줄김밥처럼 통째로 들고 먹는다는 점에서 김밥과는 차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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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와 7년(1932년)도에 풍습에 맞춰 에호마키(절분마키즈시)를 판촉하는 오사카 스시상인조합의 벽보자료가 남아 있다. 우측상단의 삽화와 더불어 마키즈시와 복의 신(巻寿司と福の神) / 절분의 날에 통째로 먹기(節分の日に丸かぶり) / 행운마키즈시(幸運巻寿司)라는 단어 등을 확인 가능하다. 근현대 가시기록을 정리해 둔 재팬 아카이브즈에서 볼 수 있는 쇼와 45년(1970년)의 광고 역시 절분에 행운의 마키즈시를 통째로 먹기(節分に幸運の巻きずしを丸かぶり)란 단어를 확인할 수 있다.
다만 칸사이에서만 이어지던 풍습이 전국단위로 퍼진 것과, 에호마키(恵方巻)라는 이름이 붙게 된 건 헤이세이 시대 이후에야 세븐일레븐의 마케팅을 통해서이다.
노리마키 중에서 김을 안쪽으로 해서 바깥으로 밥이 보이게 말아서 만드는 우라마키(裏巻き) 방식은 장식초밥에 가끔 쓰이는 희귀한 기교였지만 1960년대에 미국으로 건너가 '''캘리포니아 롤'''로 변화되었다. 이 캘리포니아 롤은 다시 한국의 누드김밥에 영향을 주었다.
후토마끼는 오이와 달걀지단이 들어가며, 짧게 써는 방식과 굵기라는 점에서 김밥과 가장 유사하지만, 보통 단무지 대신 초반을 쓰고, 동물성 재료를 넣는 일은 드물다는 점에서 완전히 같지는 않다. 일각에서는 최근 만들어진 사라다마키(サラダ巻き)가 김밥과 가장 유사하다는 오해도 있으나, 오히려 후토마키 쪽이 일반적인 김밥에 가깝다. 사라다마키는 이름 그대로 샐러드김밥쪽과 비교하는 게 더 비슷.

3.1. 김밥의 유래는 노리마키인가




결론부터 따지면, 한국의 김밥 제작법이나 제작 기구 등 그 유래는 '''일본의 노리마키가 맞다'''.
노리마키 기원설의 핵심은 '김밥은 노리마키에서 출발하여 해방 후 한국 식문화에 알맞게 빠른 속도로 현지화되어 속재료나 맛의 방향성 등이 차별화된 것이다.'라는 것.

3.1.1. 노리마키가 기원이라는 증거들


노리마키 기원설에는 많은 증거가 있다. 일단 사각형 김 위에 밥을 깐 후 길쭉하게 썬 속재료를 넣고 대나무발(일본어로는 巻きす(마키스))이라는 특수한 도구를 사용해 원통형으로 마는 것은 김밥과 노리마키의 가장 큰 공통점이다. 우리가 흔히 보는 형태의 김밥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 1950년대인 것을 볼 때, 김밥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한국 요리문화에 전파된 음식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노리마키의 변형이거나 노리마키의 영향을 받았을 뿐이라는 주장은 있어도 지금의 한국 김밥이 노리마키와 아무 관련없다고 보기는 무리인 게 사실이다. 외형부터가 누가 봐도 거의 똑같게 생겼기 때문이다. 이 원형의 형태는 김밥과 노리마키의 대표적인 외형적 특징이자 아이덴디티인데 김밥의 노리마키를 닮은 이러한 형태는 일본에서 개발된 일본의 요리 도구인 마키스를 이용해서 만들고 있기에 일본의 영향을 말하지 않는게 요리 단계에서 부터 불가능하다. 애초에 일본의 요리 도구를 써서 김밥의 그 자체라 할수 있는 원형의 형태를 만들고 있는것이다. 형태는 원래 갖춰져 있었는데 효율을 위한 요리도구의 수입일 뿐이라 한 다면 그 이전에도 소위 김쌈이 지금과 같은 원형 막대의 형태로 만들어졌다는걸 증명해야 하지만, 그런 수렴진화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는다.
해방 후 오래 시간 동안 김밥의 조리법이 노리마키와 비슷했다는 것은 당시의 신문 기사에도 잘 나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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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어도 1970년대 중반까지는 초밥의 일종인 노리마키의 조리법 영향이 그대로 전해져 참기름이 아니라 '''식초'''를 넣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국에서 식초를 친 밥, 즉 '초반'을 쓰는 경우는 '''일본 요리'''인 유부초밥을 제외하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는것을 생각해보면 김밥과 일본음식의 연관성은 누가 생각해도 자연스러워진다.
김밥에 초반을 쓰는 방식은 1980년대까지는 계속 이어져왔는데 이는 그때까지의 김밥의 위상은 일상식이라기보다는 '소풍갈 때 싸가는 특별한 음식' 취급이었기 때문이다. 야외에 도시락으로 싸가는 김밥은 초반을 안쓰면 경우에 따라 밥이 쉬어버릴 수 있기 때문에 초반의 사용은 반 필수에 가까왔다. 초반의 식초 성분이 음식이 상하는걸 막아주기 때문. 애초에 소풍이나 운동회에서 먹기 편한 마끼를 싸가서 먹는 문화 자체가 일제강점기 때 일본을 통해 전파된 것이다. 이러니 지금처럼 김밥이 대중화 된 데 일본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는 셈. 이는 하나다 소년사 같은 작품을 통해 접할 수 있다.
김밥에 넣는 식초는 80~90년대를 거치면서 빠진다. 김밥이 '싸고 빠르게 사먹을수있는 인스턴트 음식'이 되면서 보존식으로서의 위상이 사라지게되고, 이에 따라 번거로운 초반 대신 일반적인 밥으로 바뀌고 신 맛은 단무지만으로 대신하게 된것이다. 현대 한국의 김밥과 일본 노리마키를 가르는 가장 큰 차이점이 바로 이 밥과 단무지, 그리고 참기름의 유무다. 김밥과 그나마 가장 유사한 후토마키의 경우도 거의 달걀 초밥이라 불러도 될 정도로 지단의 비중이 크고 고급 요리로 전문점에서 취급된다.
김밥의 원형대로 초대리와 밥을 섞어 초반을 만들던 레시피는 한국 식문화와 이질적이기에 점차 80년대를 거치며 참깨와 소금, 참기름을 넣고 비빈 밥으로 대체되었고,이는 지역과 가정의 취향에 따라 달랐다. 게다가 서울을 중심으로 한 중북부 지역은 날씨가 그다지 덥지 않았기 때문에 식초가 안 들어가도 밥이 하루 정도는 버틸 수 있었고, 김밥용으로 가공되어 같이 파는 날 재료를 그대로 쓰는 일이 많은 요즘과 달리 (익히면 아식함이 줄어들며 식초가 들어 있어 상할 걱정이 덜한) 단무지를 제외하고는 들어가는 재료를 전부 한 번 기름에 살짝 볶아서 사용하기도 하였기 때문에[1] 아침에 만들면 점심때까지는 문제가 없었다. 초가 들어가는 것은 상하는 것을 걱정해야 하는 식당이나 노점상, 조금씩 생기기 시작한 뷔페식당 쪽이었으며 그나마 오래 지나지 않아 사라진다. 밥에 식초를 넣는 것 자체가 한국 식문화에는 익숙하지 않은 것이기에 일어난 일이다.

게다가 한 가지 더 고려해야 할 것이 있는데, 당시의 요리책이나 신문-잡지에 실리던 레시피는 일본 것을 그대로 번역하고, 일부 재료를 현지화한 것이 많았다는 것이다. 일제시대부터 있던 레시피를 그대로 답습한 것도 있고. 위의 자료에 나온 요리법을 보면, 국내에서 잘 먹지 않는 박오가리를 넣는다든지, 미미소를 넣는다든지, 문장을 보아도 일본 것을 번역한 느낌이 난다. 80년대 중반 이전까지만 하여도 시중에 쥐는 초밥이든 마끼든 초밥이란 것이 잘 알려져 있지 않을 때이며, 초밥을 먹을수 있는 일식집(화식집, 스시야)은 있긴 하였으나 아주 고급 요릿집으로 여겼지 대중화되기 전이었다 당연히 요즘의 초밥 전문점 같은 것도 없던 때이다. 그런 때에 밥에 초대리를 넣는 일본식 요릿법이 일반적이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리이며, 밥에 초가 들어간 당시 레시피 자료가 많이 남아 있다고 그게 시중의 대세였다고 추측하는 것은 곤란하다. 김발에 김을 놓고 밥-재료 순으로 넣고 말아서 만드는 방법이 마끼에서 유래된 것은 확실하므로 마끼 기원설이 부정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밥에 식초를 넣는 레시피가 기록에 남아 있다"는 사실 하나 때문에 김밥의 기원이 마끼라고 보는 것은 식초를 넣는 것이 대세가 아니던 당시 현실과도 안 맞고, 논점을 벗어난 일이다. 물론 마찬가지 의미에서 "김밥이 대중적인 요리가 아니었던 시절이므로 당시 마끼 형태의 김밥 레시피는 현대 김밥과는 별개이다"역시 완벽히 부정된다.
80년대에는 소득 증대와 중산층 증가로 인해 햄이나 맛살 등과 같은 가공육 판매가 일반화되면서 속재료면에서도 노리마키와 확연하게 달라졌다. 즉, 김밥도 야키니쿠짜장면과 같이 현지인의 입맛에 맞춰 사실상 본토의 것과는 달라져 버린 사례 중 하나인 것이다. 그렇지만 1935년 동아일보 기사와 1938년 동아일보 기사에서도 '김밥'을 언급하는 것을 보면 일제강점기 때부터 이미 조금씩이나마 한국식으로 현지화가 이루어지고 있기는 했던 것 같다.
김쌈 기원설의 경우 식재료의 배치와 완성 형태, 조리법 등을 생각하면 오늘날의 김밥과 연결짓는 것은 대단히 무리다. 이는 마치 '철판에 구워먹는 고기'라는 문장 하나만을 놓고 삼겹살스테이크를 동일시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억지다. 김밥이 김쌈에서 발전한 것이라면 그 중간 단계적인 음식이 기록으로 남았어야 하는데, 그들이 주장하는 판형 김 > 김쌈 > 김밥의 단계 중 '''김쌈이 김밥으로 변하는 과정을 추정해 볼 수 있는 증거는 단 하나도 없다.''' 그렇기에 누가 먼저 김을 누가 먼저 먹기 시작했는지 이야기 외에는 할 말이 없는 것이다.
현대 요리의 구분은 조리법을 가장 기본으로 하는데, 만약 김밥이 한식을 베이스로 시작했다면 조리법에서 일본과는 차별되는 한식만의 요소가 있어야 하거나 재료의 손질이나 관리에서 아주 약간의 차이점이라도 있었다는 것을 입증해야 한다. 하지만 김밥은 이때까지 잘 보았겠지만 오히려 '''처음에는 일식 요리와 비슷하다가 가면 갈수록 한식에 가까워지고 있다.''' 전형적인 외국요리의 현지화이다.
김밥 문서의 김쌈 기원설에서는 김밥과는 전혀 상관없는 김 식용문화 이야기만 하며 요리와 식재료를 구분조차 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일본의 김 식용도 1800년도라는 주장과 달리 701년의 다이호율령천황에게 바치는 진상품 중 하나로 기록돼 있을 정도로 역시 오랜 역사를 자랑하며 현재 일본의 김 협회에서는 율령이 시행된 2월 6일을 '김의 날(海苔の日)'로 지정해 놓고 있다. 일본의 김 식용에 관련하여 18세기가 언급되는 것은 일본의 '종이 김' 역사가 에도시대 이 후 아사쿠사에서 시작되었으며 그 점이 양식과 더불어 조선보다 뒤쳐졌기 때문이다.[2]
김쌈 문서에서는 김 식용이 한국이 먼저라는 이유 하나로 김을 사용한 모든 음식이 한국음식이라는 논리 오류를 서슴지 않고 범하고 있다. 국수를 가장 먼저 먹기 시작한 나라는 중국이다. 그렇다면 모든 면요리는 중국 기원의 요리라고 해야 하는가? 우동이 중국요리인가? 파스타가 중국요리인가? 어불성설이다.[3] '''김쌈이 김밥으로 변한 과정을 조금도 설명하지 못하니 식용문화와 역사책 이야기 외에는 할 이야기가 없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배타적으로 한 식재료의 종주국을 자처하며 김을 사용한 모든 음식은 한국 고유음식이라 주장하는 행동을 서슴치 않고 있다. 이는 논리적으로도, 직관적으로도 그 어느쪽으로 생각해봐도 옳지 않은 주장이다. 삼각김밥이 일본에서 유래되었음은 김밥문서에서조차 차마 부정하지 못하는 사실이다. 김을 먼저 먹었다고 삼각김밥마저 한국의 유래가 되는가?''' 김밥 문서에서 그토록 강조하는 김의 식용문화는 오늘날 김밥의 유래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증거 중 하나이다. '''
노리마키 제작의 특징인 대나무발 조리법 또한 김쌈 문서에서는 일본에서는 겨우 19세기때나 그런 조리법이 나왔으며 노리마키가 김밥의 원형이 아니라는 방증으로 활용하고 있는데 일식의 발전에 대한 역사를 모르는 사람이 주장하는 억지일 뿐이고, 이 또한 김을 먼저 먹었으니 요리법은 언제 나오건 한국의 김 식용 역사보다는 늦었으니 상관 없다는 논리적 오류일 뿐이다. 19세기의 노리마키 조리법 보다 대나무발을 먼저 사용해 원통형의 김밥을 만들었다는 사료적 물증이 없는 이상 재료 이용의 역사는 부차적인 사항일 뿐이다.
참고로 이 항목은 김밥 문서의 김밥의 한국 기원에 관한 서술(=김쌈 기원설)의 반론과 반박이었으나, 토론 합의에 따라 분리되었다.


[1] 당연히 재료를 집에서 전부 준비해야 했으니까. 익히고 간을 해서 맛을 돋구는 목작도 있다.[2] 김은 에도 시대 중기까지는 대부분이 자연 채취 방식이라서 생산량은 양식에 비해 많지 않았다. 에도시대 후기, 지금의 도쿄만에서 김 양식이 시작됐지만 품질은 그리 균일하지 못했다고 알려져 있다.[3] 정말로 중국은 이러한 논리를 내세워 김치를 파오차이의 일부이자 중국음식의 한 갈래로 취급하는 김치공정을 진행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