숀 켐프
1. 개요
엄청난 운동능력을 바탕으로 90년대 NBA 최고의 파워포워드 중 한명으로 자리매김했던 선수. 부족한 자기관리로 인해 전성기가 짧았던 선수이며 NBA에서 14시즌을 뛰었으나 실질적인 전성기는 그 절반이 채 안 된다.[4]
아마레 스타더마이어, 블레이크 그리핀 이전 90년대 파워덩커의 아이콘 이다. 우연히도 이 3선수 모두 각자의 이유로 전성기가 상대적으로 짧았다. 아마레는 피닉스, 뉴욕 초창기 까지 약 8년, 켐프는 시애틀 시절 부터 캐브즈 1년 까지가 실질적 전성기였고 데뷔때 부터 센세이널 했고 no.1 파워포워드로 예상했던 그리핀은 최근 3시즌 연속으로 부상결장이 눈에 띄게 증가하고 있으며 시즌 평균 60경기에 미치지 못하고 있고 복귀이후 중요한 플레이오프에서도 다시 부상으로 결장하고 있다.[5]
2. 생애
2.1. NBA 이전
고등학교 시절 이미 전국구 선수로 주목받았으며, 켄터키 대학교로 진학한다. 그러나 불미스럽게도 절도 사건을 일으키고(...) 트리니티 밸리 커뮤니티 칼리지로 전학간 후 한 경기도 출전하지 않은 채로 한 학기만에 중퇴, 19세의 나이로 NBA 드래프트를 신청한다.
1989년 NBA 드래프트에서 1라운드 17순위로 시애틀 슈퍼소닉스에 지명받으며 NBA 커리어를 시작했다. 당시 NBA 최연소 선수였다.
2.2. 시애틀 슈퍼소닉스 시절
루키 시즌 백업으로 나오며 NBA 적응 기간을 가진 켐프는 2년차인 1990-91 시즌부터 주전 파워포워드로 발탁, 신인 포인트가드 게리 페이튼과 함께 팀을 이끌어 나가며 활약했다. 특히 무지막지한 운동능력을 바탕으로 한 탄력 넘치는 덩크와 인사이드 장악력은 그를 리그 최고의 파워포워드 중 한명으로 자리매김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된다. 그로 인해 94년부터 3년 연속 NBA 올 세컨드 팀[6] 으로 선발되었으며, 슈퍼소닉스 역시 서부의 강호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조지 칼 감독 이하 게리 페이튼, 데틀레프 슈렘프[7] , 허시 호킨스, 숀 켐프, 샘 퍼킨스[8] , 네이트 맥밀란 등으로 이루어진 매우 탄탄한 라인업을 자랑하던 팀.
93-94 시즌 소닉스는 무려 63승 19패로 정규 시즌 1위를 차지하지만, 1라운드에서 8번 시드 덴버 너기츠에게 2연승 후 3연패로 업셋당하는 굴욕을 당한다. NBA 최초의 8번 시드 업셋이었다(...).
94년 세계남자농구선수권대회 드림팀 2에 뽑혔다. 드림팀 1 멤버들을 제외하고 젊은 선수들로 구성한 대회였는데 당시 켐프를 비롯하여 샤킬 오닐, 알론조 모닝, 래리 존슨, 데릭 콜먼 등 20대 초중반으로 구성된 PF, C의 활약이 대단했다. 무엇보다 이 선수들 모두 코트에서 젊은 혈기와 분노(?)를 보인 대회이며 역대 드림팀 중 가장 뜨겁고 열정적인 모습을 펼쳤다.[9][10]
95-96 시즌은 켐프 커리어의 정점을 찍은 해였다. 평균 19.6득점 11.4리바운드 2.2어시스트, FG 56.1%로 시즌 스탯도 최상이었고 팀도 플레이오프에서 새크라멘토 킹스, 휴스턴 로키츠, 유타 재즈를 차례로 꺾고 NBA 파이널에 진출한다. 그러나 상대는 하필이면 그 시즌 72승을 찍은 시카고 불스(…). 켐프는 파이널 6경기에서 평균 23.3득점 / 10리바운드 / 2블록으로 미친듯이 활약했으나 2승 4패로 시카고 불스를 넘는 데에는 실패하고 말았다.[11]
소닉스의 프랜차이즈로 남을 것 같았던 켐프였지만 96-97 시즌이 끝나고 소닉스를 떠나게 되었다. 계약 문제로 인한 팀과의 갈등이 원인이었는데, 소닉스가 빅맨 보강을 위해 워싱턴 블리츠에서 게오르그 뮤레산의 백업으로 뛰던 수비형 센터 짐 맥일베인에게 거액의 돈을 안겨주는 계약을 하면서 갈등이 수면 위에 올랐다. 숀 켐프는 자신의 팀 기여도에 비해 낮은 연봉에 불만을 토했고, 결국 팀과의 관계가 최악으로 치달으며 켐프는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로 트레이드되었다. 트레이드 된 후 클리블랜드와 7년간 1억7백만달러 계약을 맺으며 고액 연봉자의 반열에 올랐다.
켐프 이적 후 소닉스는 밀워키 벅스에서 빈 베이커를 영입하며 리그 최고 수준의 강팀으로서의 위용을 유지했으나, 켐프 이상으로 몸관리가 안되던 베이커가 2000 시즌을 기점으로 완전히 망가지면서 서서히 몰락하기 시작한다.[12] , 7년 연속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던 팀은 이후 11년간 단 4번의 플레이오프 진출에 그치며 2008년 연고지를 옮겨 오클라호마시티 썬더로 재창단된다.
2.3.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 시절, 몰락의 시작
97-98시즌엔 고액연봉자다운 활약을 보이며 새로운 팀에서 활약했다. 하지만, 97-98시즌 종료 후 직장폐쇄가 일어났고 종료 후 단축시즌(50경기)에서 그는 전년도에 비해 살이 엄청나게 찐 모습으로 나타났다. 전성기 시절 균형잡힌 몸매와는 거리가 좀 있어진 것. 하지만 클래스는 어딜 가지 않았는지 클리블랜드에서의 마지막 시즌인 99-00시즌까지 18-10을 꾸준히 찍어주는 활약을 보였다. 그러나 시애틀 시절의 다이나믹한 모습은 이미 사라져 있었다. 체중관리가 잘 되지 않는 모습에 팀은 켐프를 좋게 보지 않았고, 켐프는 명문구단으로 가기 위해 아낌없이 현질을 시전하던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로 이적하게 되었다.[13]
2.4. 진짜 몰락
체중관리에 실패해 이미 클리블랜드 시절부터 127kg까지 쪄버렸던 숀 켐프는 포틀랜드에 이적하고 나서는 거의 씨름선수급의 몸매로 변화했다.[14] 게다가 알콜중독에 코카인까지 손을 대며 자다가 연습에 지각하는 해프닝을 빚기도 했다. 결국 2000-2001시즌 주로 백업 멤버로 뛰며[15] 평균 6.5득점 / 3.8리바운드라는 처참한 기록을 남기고 말았다. 전성기 시절에도 기본기보다는 운동능력으로 먹고 살던 선수였기에, 운동능력을 상실하자 말 그대로 몸빵밖에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포틀랜드에서 두 시즌을 보낸 뒤, 켐프는 올랜도 매직으로 이적하게 되었다. 이적 후 한 시즌간 백업 파워 포워드 겸 센터로 뛰었으며, 2002-2003시즌을 끝으로 NBA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올랜도 매직에서 방출된 후, 다이어트를 하며 댈러스 매버릭스, 피닉스 선즈와 단기 계약을 맺으며 NBA 재입성을 노렸으나, 실패로 끝났으며 2005년에는 마리화나 소지 혐의로 체포되기도 했다(…). 그리고 2006년에는 '''대구 오리온스 입단 루머가 퍼져''' 화제가 되었다. 2008년 이탈리아 프레미아타 몬테그라나로와 1년 계약을 맺기도 했으나 프리시즌 중에 고향에 밀어닥친 허리케인 때문에 귀국, 계약이 파기되었다.
2.5. 은퇴 후
그는 선수를 그만둔 뒤 2010년부터 시애틀에서 스포츠 바 'Oskar's Kitchen'을 운영했으나 2015년 들어 문을 닫았고, 2020년에는 대마초 매장 'Shawn Kemp's Cannabis' 까지 차렸다. 이건 본거지인 시애틀이 대마 판매를 법적으로 허용하는 워싱턴 주라서 이런 장사가 가능한 것이다.
3. 플레이스타일
무지막지한 운동능력으로 덩크를 엄청나게 꽂아댔고, 인사이드 장악력도 뛰어났다. 특히 주특기인 정글 덩크는 정말 호쾌하게 스파이크하는 맛이 일품. 빵빵한 운동능력을 가진 파워포워드 계보는 이후 아마레 스타더마이어, 블레이크 그리핀으로 이어진다.
덩커 이미지와는 좀 다르게 블록슛 능력도 나름 수준급. 중거리 점퍼 능력도 있어서 페이튼의 패스를 잘 받아먹었다. 자유투도 70% 중반으로 평균 수준은 됐다. 다만 거친 플레이때문에 파울관리가 매우 미숙해서 자주 파울 트러블에 빠졌고, 출장 시간이 그리 길지 않았다.
하지만 두 번의 이적과 자기관리의 실패로 인해 운동능력을 상실, NBA 말년에는 주로 상대 빅맨의 몸빵용으로 뛰었다.
4. 여담
현역시절 별명은 레인 맨(Reign Man). 별명의 어원은 시애틀 슈퍼소닉스의 아나운서 케빈 칼라브로가 "Reignman"이란 이름이 붙은 포스터를 보고 켐프와 어울리겠다 싶어 붙여준 이름이다. [16] 그가 전성기를 달리던 시대에는 저 별명의 영문철자에서 보여지듯이, 경기를 지배하는 남자로 통했다. 물론 망가지고 난 후에는 그런 거 없다.
아들로 숀 켐프 주니어가 있는데 대를 이어 농구를 했으며 아버지와 거의 같은 206cm의 포워드이다. 2012년 워싱턴 대학교에 입학해 농구부에서 뛰었다. 아버지만한 재능은 없는 건지 2015년 7월에 열릴 KBL 트라이아웃에 응시했으나 떨어져 11월 새크라멘토 킹스 산하 G리그 팀 레노 빅혼즈(현 스탁턴 킹스)로 입단했다가 별 활동을 못하고 이듬해 웨이버 공시됐다.
슬램덩크 강백호 최종 진화 버전이며, 기존 데니스 로드맨의 장점인 공격 리바운드 능력과 농구센스를 기본으로 전국대회 편 부터 보여준 중거리점퍼 장착과 엄청난 운동 능력을 바탕으로한 앨리웁과 블록 그리고 연재초기부터 전국대회 전까지 파울관리의 미숙함으로 인한 출전시간 감소의 단점들까지 그렸다.
[1] 후술하겠지만 여기서 단 1경기도 안 뛰었다.[2] 착화 신장 208cm (6' 10")[3] 전성기 시절 한정. 클리블랜드 이적 후에는 127kg까지 불었으며 포틀랜드 이적 후에는 더 쪘다(…).[4] 켐프는 올스타급으로 올라간 이후 추가적인 성장이 적었고(고질적인 문제인 수비 불안과 파울 관리가 결국 보강이 안됐다) 올스타급에서 내려가는 동시에 드라마틱하게 몰락했기 때문에 올스타 선정된 저 6년이 그대로 전성기라고 보면 된다.[5] 데뷔 이후 잔부상으로 내구성을 의심받던 앤서니 데이비스는 최근 2시즌 간 꾸준히 70경기 이상 출전하고 있으며 어느덧 현역 최고의 파워포워드는 AD로 넘어갔다.[6] 그 앞을 가로막은 NBA 퍼스트팀 포워드는 바로 칼 말론과 스카티 피펜이다.[7] 독일 출생. 20대는 인디애나, 30대는 시애틀에서 전성기를 보낸 선수로 슈팅이 굉장히 정확한 SF. 1997년에는 서부 올스타에도 뽑혔다. 더크 노비츠키의 선구자적 인물이다.[8] 3점 던지는 센터의 시초라고 보면 된다. 조던과 같은 해 데뷔한 노스 캐롤라이나 대학교 동문으로 조던보다 선배.[9] 물론 역대 넘버 1은 의심여지 없이 드림팀 1이지만 당시 20대 후반 30대 초반선수들로 이루어졌기에 에너지가 넘치는 혈기 왕성한 팀이라기 보다는 그야말로 압도적인 농구의 신 컨셉(특히 래리 버드. 금메달 따위는 관심도 없고 벤치 코트사이드에 계속 누워있다가 찔끔 플레이하고 다시 눕기. 그만큼 대회 자체가 긴장감과는 거리가 멀었다.)이였고 94년 이후 구성된 그 어떤 드림팀도 당시 드림팀 2만큼 터프한 팀은 없었다.특히 2012년 대회부터 3점, 중장거리 비중이 대폭 증가했고 오닐, 모닝 같은 정통 센터의 부재도 한 몫 했다. 물론 드마커스 커즌스와 앤서니 데이비스의 존재는 어마무시 하지만 대표팀에서 활약 만큼은 아직까지 오닐, 모닝의 존재에 다가가지 못했다.[10] 2004년 부터는 마누 지노빌리, 파우 가솔의 활약이 눈부셨다.[11] 하지만, 소닉스는 72승의 시카고 불스 상대로 정규시즌 1승을 포함, 가장 많은 3승을 따낸 팀이 되었다.[12] 켐프가 이적한 첫 해에는 61승을 거두는 등 오히려 그의 마지막 시즌(57승)에 비해 성적이 올랐다. 위에 서술되어 있듯이 소닉스 몰락의 계기는 사실 베이커였다. 베이커는 천재적인 재능을 지닌 다재다능한 포워드였으나 연습 도중에 술냄새가 날 정도로 심각한 알콜중독자였다. 그는 직장폐쇄로 단축시즌이던 99시즌을 기점으로 평균 득점이 5점 넘게 폭락했으며 (이때 부상으로 50경기 중 34경기에만 나왔다.), 그 다음 시즌에는 전성기 211cm, 105kg의 슬림한 몸이 135kg 전후까지 불어버렸다. 결국 몸무게는 112kg 전후까지 줄이는데 성공했으나 사라진 기량은 결국 돌아오지 않았고 널뛰기 경기력을 보이다 02시즌 이후 팀을 떠나게 된다. 이후 소닉스는 2003시즌 중반에 팀의 오랜 에이스이자 상징이었던 게리 페이튼까지 떠나보내면서 기존의 조지 칼 체제의 마지막 흔적까지 없애게 된다.[13] 98-99시즌은 세대교체가 나타나기 시작인 본격적인 시즌 첫 해이다. 조던, 드렉슬러는 코트를 떠났으며 정규시즌 MVP는 칼 말론이 수상했지만 그 해 우승과 파이널 MVP은 팀 던컨 수상했고 에이스 역할이던 데이비드 로빈슨은 던컨을 보좌했다. 유잉, 하킴, 바클리, 로드맨, 스탁턴 등도 분명 전성기 시절과는 어느정도 거리가 있는 플레이와 스탯을 나타났다. 사실이 선수들 대부분 60년대 초반 생들로서 이미 30대 중반이 넘은 나이였기에 전혀 이상할 게 없는 현상이었다. 이 해 신인들인 빈스 카터, 제이슨 윌리암스가 화려함 그 자체로 리그에 활력을 주었고 마이크 비비, 폴 피어스, 앤트완 제이미슨 역시 훌륭한 루키 시즌을 보냈다. 당시 덕 노비츠키도 9순위로 데뷔했지만 당시 주목도는 거의 없었다. 또한 앨런 아이버슨, 크리스 웨버가 한 단계 스텝업을 하여 각 각 득점과 리바운드 1위로 리그 중심으로 떠올랐고 샤크와 코비가 본격적으로 원투펀치를 결성한 시즌이기도 하다. 그 밖에도 모닝, 키드, 힐, 가넷, 레이 알렌, 라쉬드 왈라스와 당시 최고 포인트가드였던 '''게리 페이튼'''이 주요 선수였고 페니는 부상복귀 하여 시즌 대부분을 소화하여 팀을 동부 3위로 이끌었지만 전성기 기량에는 미치지 못했다.[14] 거의 150kg까지 쪘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다.[15] 구단주 폴 앨런의 아낌없는 현질덕에 여러 선수들을 스카우트해왔지만 켐프와 같은 포지션의 선수들을 중복 스카우트했고(라시드 월러스, 데일 데이비스 등) 선수들끼리도 마음이 맞지 않아 플레이오프에서 결국 LA 레이커스에게 굴욕적인 패배를 당한다.[16] 출처: http://old.seattletimes.com/html/stevekelley/2016439949_kelley09.html?cmpid=27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