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츠 그라프 슈베린 폰 크로지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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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네임'''
'''Johann Ludwig Graf Schwerin von Krosigk'''
요한 루트비히 그라프 슈베린 폰 크로지크[1]
'''출신 정당'''

'''생몰년'''
1887년 8월 22일 ~ 1977년 3월 4일 (만 89세 6개월 10일)
'''재임기간'''
1945년 5월 1일 ~ 1945년 5월 23일 (22일)
1. 개요
2. 생애
2.1. 초기
2.3. 여생
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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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일의 관료로,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부터 나치 독일에 이르기까지 재정부 장관을 역임했으며 1945년 5월 8일 나치의 제2차 세계 대전 항복 선언 이후 약 3주간의 짧은 기간 동안 카를 되니츠가 이끄는 플렌스부르크 정부의 명목상 수장이 된 것으로도 유명하다.

2. 생애



2.1. 초기


폰(von)이 들어간 이름에서 짐작이 가듯이 1887년 안할트 지역의 유서깊은 귀족 가문에서 출생했다. 모계는 스웨덴의 전 왕실[2] 출신. 법학정치학을 전공한 이후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유학생활을 하기도 했던 그는 1차 대전이 발발하자 육군으로 참전하여 철십자 훈장을 받기도 했다. 최종 계급은 중위. 종전 이후 수립된 바이마르 공화국의 재정부에서 일하기 시작한 폰 크로지크는 1929년에는 예산국장으로 승진한 데 이어 1931년에는 베르사유 조약으로 인한 전쟁 배상금의 감축 문제를 놓고 독일이 협상국 측과 벌인 협상의 책임자로 일하기도 했다.

2.2. 나치 독일 시기


아직 나치가 집권하기 전이었던 1932년 총리 프란츠 폰 파펜에 의해 재무부 장관으로 임명된 폰 크로지크는 1933년 나치가 집권한 이후에도 파울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의 요청을 받아 계속해서 재무부 장관직을 수행한다. 입각할 당시에도 무소속이었던 그는 나치 집권기에도 여전히 무소속으로 나치당과는 거리를 유지한다. 이것은 그가 정치와는 거리가 있는 재무부 장관이기에 가능하기도 했던 일. 거기에 아돌프 히틀러 본인이 워낙 행정절차는 무관심해서, 1938년까지 히틀러와 경제문제를 놓고 회의를 가져본 적 조차 없었다고 한다(...).
이후 2차 대전이 종말로 치닫던 1945년 5월 1일, 파울 요제프 괴벨스가 자결하자 히틀러의 유언장에 따라 대통령 자리에 오른 카를 되니츠 제독은 그에게 플렌스부르크 정부[3]의 총리직을 권유하고 고심끝에 그는 이 제안을 받아들인다.이후 며칠 동안 폰 크로지크는 되니츠와 함께 서방측과의 평화협상을 진행하면서 동부전선의 독일군을 소련군에게서 벗어나게 할 시간을 최대한 벌고자 노력했지만,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를 필두로 한 연합군 수뇌부가 양쪽 전선에서 동시에 무조건 항복을 하지 않는 이상 어떠한 협상도 하지 않겠다고 하는 바람에 무산되고 말았다. 이후 5월 23일 연합군은 플렌스부르크 정부를 해산하고 그 수뇌부를 전범으로 체포한다.[4] 크로지크도 당연히 여기에 포함되어 뉘른베르크 재판에 회부되었지만, 상대적으로 덜 돋보이는 재무부 장관이었던 점 때문인지 10년 형을 선고받는다. 하지만 오래 지나지 않은 1951년 석방되었다.

2.3. 여생


이후 두 권의 회고록을 포함하여 각종 경제학 관련 저서를 내놓으며 집필활동을 하다가 1977년 89세를 일기로 에센에서 사망한다.

3. 여담


  • 노동장관 프란츠 젤테와 더불어 나치당의 집권 기간(1933~1945)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장관직을 유지한 인물. 다만 장관직(Reichsminister)이 아니라 각료직으로 따진다면 빌헬름 프리크도 포함된다. 프리크는 1943년에 하인리히 힘러에게 내무장관직을 빼앗기고 보헤미아-모라바 보호령의 국가호국관(Reichsprotektor)이 되었는데 여전히 장관급 관원으로 각료 신분이었다.
  • 헤르만 괴링처럼 전혀 상관없는 분야에 대한 겸직을 해본 장관이기도 했다. 플렌스부르크 정부가 구성될 당시 카를 되니츠는 기존의 외무장관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를 유임하지 않아서 아르투어 자이스잉크바르트가 잠시 외무장관에 보임되었지만, 그도 며칠 안에 사임하여 최종적으로 크로지크가 외무장관도 겸임했기 때문.
  • 철의 장막이라는 표현을 최초로 쓴 사람 중 하나이다. 정확히는 괴벨스가 선동기사에서 최초로 이 표현을 썼고, 이 기사를 읽은 뒤 폰 크로지크가 플렌스부르크 정부 총리의 자격으로 1945년 5월 2일 행한 대국민 연설에서 쓴 것이 두 번째. 그리고 윈스턴 처칠이 다시 이 표현을 연설에서 사용하면서 세계적으로 유명세를 타게 된다.
  • 그의 외손녀 베아트릭스 폰 슈토르히(Beatrix von Storch)는 독일 극우 정당 독일을 위한 대안(AFD)의 당원으로 독일연방공화국 하원의원이다.

[1] 국립국어원의 외래어 표기 용례대로는 '폰크로지크'가 된다. 게르만어권 인명의 전치사 및 관사는 뒤 요소와 붙여 적도록 하고 있다.[2] 다만 좀 많이 옛날이다. 14세기 왕실이니..[3] 연합군이 사실상 독일 전역을 장악한 것을 생각하면 식물 정부나 마찬가지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행정력이 미치는 몇몇 곳이 있기는 했다.[4] 연합국에서 서방 측은 플렌스부르크 정부를 인정하려는 듯한 제스처를 잠시 취했지만 소련 측이 이에 강력히 반발하자 플렌스부르크 정부를 해산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