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녕공주

 

'''고려의 역대 왕후'''
충숙왕
복국장공주
조국장공주
경화공주
명덕태후

'''충혜왕비'''
'''덕녕공주'''
희비

공민왕
노국대장공주
혜비
익비
정비
신비
순정왕후
1. 개요
2. 생애
3. 평가
4. 미디어


1. 개요


德寧公主
1310년대[1]~1375
고려의 제28대 국왕 충혜왕의 1비이자 제29대 국왕 충목왕의 모후. 이름은 보르지긴 이린진발(孛儿支斤 亦憐眞班). 원나라 진서무정왕 초스발(焦八)의 딸이다. 1367년 원으로부터 정순숙의공주(貞順淑儀公主)로 다시 책봉되었기에 정순숙의공주라고도 불린다.

2. 생애


덕녕공주는 쿠빌라이 칸의 4대손으로, 아버지 초스발은 쿠빌라이 칸의 7남인 오그룩치의 손자이며 원 황제였던 문종과 7촌 관계다. 덕녕공주는 쿠빌라이 칸의 막내딸 제국대장공주의 남매인 오그룩치의 증손녀이고 남편인 충혜왕쿠빌라이 칸의 딸 제국대장공주의 증손이므로, 결국 충혜왕과 덕녕공주는 팔촌이 된다.
덕녕공주는 충혜왕이 원나라에 체류하던 1330년에 그와 혼인하여, 같은 해에 고려로 들어왔다. 당시 충혜왕은 16살이었고, 당시 덕녕공주의 나이는 언급되지 않으나 충혜왕이 죽은 뒤 덕녕공주가 성년(盛年)으로 궁중에 있었다는 것으로 보아 적으면 10대 초반, 많아봐야 10대 후반으로 보인다.
충숙왕은 아버지 충선왕처럼 원 황실과 가까운 인척도 큰 공로도 없었기 때문에 원 내에서의 지위가 낮았다. 이런 상황에서 심왕이 고려국왕 자리까지 노리자 이에 대한 견제로서 태자와 원 공주를 결혼시킨 것으로 보인다.
원나라에서 배우자들 중 덕녕공주를 지정한 구체적인 이유는 알 수 없다. 공주의 아버지 초스발은 결혼 당시 원 황제였던 원 문종과 칠촌으로 먼 편이었고 당시 원 종실 주류인 쿠빌라이의 장남 진금 태자 계열도 아니었다. 하지만 초스발은 원 무종 때부터 문종 대에 이르기까지 30여 년에 걸쳐 각지의 반란군을 토벌하는 무공으로 황실의 신임을 얻은 인물이었다.
초스발은 덕녕공주가 결혼한 해인 충숙왕 17년 운남왕으로 자립한 제왕(諸王)을 진압하러 가서 다음 해 1월에 운남을 진압하는 공을 세웠고, 이보다 앞서 사천 반란을 진압한 적도 있다. 덕녕공주는 충숙왕 17년 3월에 혼인했는데 그 해 11월에 운남 진압에서 처음 승전보를 올렸기 때문에 딸의 결혼 참석 이후에 운남 진압을 하러 간 것으로 보인다. 충숙왕이 많은 종친 공주들 중에서 덕녕공주와 태자를 혼인시킨 것은 많은 무공으로 원 황실의 신임을 받던 진서무정왕 초스발의 딸이었기 때문이다.
진서무정왕은 일자왕(一字王)은 아니었으나 덕녕공주 혼인하기 바로 전 해에 문종의 정통성과 관련된 중대한 반란을 진압한 이력이 있다. 이 때 반란군이 진서무정왕에게 군대를 요청하기도 했지만 진서무정왕은 거절하고 반란을 진압했다. 진서무정왕은 몽골 서부를 영지로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중앙 황실에게 충성하고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서부 반란세력과 결탁할 위험성을 배제할 수 없었다.
따라서 원 입장에서는 덕녕공주를 원에서 가장 동쪽 봉토인 고려 태자비로 보내는 것으로 이 통혼을 이용한 것이다. 진서무정왕이 중앙 조정과 직접 통혼하면 되는 거 아니냐고 하지만, 몽골은 족내혼(族內婚)을 포기하지 않은 고려와 달리 전통적으로 족외혼(族外婚)을 했기 때문에 아무리 황금씨족인 보르지긴氏라도 그걸 무시하고 직접 통혼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즉 덕녕공주 가문은 황제와의 혈연이 멀었고 쿠빌라이 칸의 서녀 제국대장공주나 2대 칸 계승에서 밀려난 원 성종의 형 카말라의 딸이자 훗날 진종으로 즉위하는 이순테무르의 누나인 계국대장공주에 미치지는 못하더라도 그렇게 격이 떨어지는 집안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런 덕녕공주 집안의 위세는 오래가지 못했다. 자기 아버지인 진서무정왕이 운남 회복 이후 얼마 안 가 죽었기 때문이다. 1331년 1월 운남 대책을 조정에 건의하고 얼마 안 가 졸하였다는 기록을 보아 덕녕공주가 고려에 온 1330년 7월로부터 일 년도 채 안 되던 때로 보인다. 진서무정왕의 봉토를 이어받은 남자 형제는 1335년 반란을 토벌하다가 전사했고, 서평왕(西平王)으로 봉해진 형제는 다음해 그 아들이 서평왕의 인印을 받았다는 것으로 보아 얼마 안 가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덕녕공주는 결혼한지 5~6년 만에 집안의 기반인 아버지와 형제들을 모두 잃어버린 셈이며, 이는 덕녕공주의 고려에서의 권세가 제국대장공주나 계국대장공주보다 적은 상황을 만든 것으로 보인다.
충혜왕과는 13년 동안 부부로 지냈다. 덕녕공주는 충목왕과 장녕공주 등 1남 1녀를 낳았고 이들 사이가 좋았는지 나빴는지는 기록이 없어 알 수가 없다. 덕녕공주는 남편의 바람기 때문에 투기가 심했던 제국대장공주나 이를 빌미로 남편을 폐위까지 시켜버린 계국대장공주와 달리 다른 고려인 왕비들과 별다른 트러블이 언급되지 않는다. 고려인 비빈들의 간택이 공주의 허락을 받고 이루어졌다는 언급은 없으니, 친정이 일찍 소멸해서 별 힘을 못 쓴 탓에 무시당했다고 보는 게 더 맞을 듯.
충혜왕은 덕녕공주 이후에 희비 윤씨, 화비 홍씨, 은천옹주 임씨와 혼인했다. 그런데도 충혜왕은 관료의 아내를 비롯하여 자신의 서모인 부왕 충숙왕의 3비 경화궁주와 충숙왕의 후궁 수비 권씨까지 강간했다. 특히 경화궁주 강간 사건은 심왕파인 조적의 난이 발생하는 원인이 되었다.
하지만 덕녕공주가 이를 가지고 불쾌히 여겼거나 따진 적은 없다. 경화궁주가 충혜왕의 폐행인 정천기를 정동행성에 감금하자 덕녕공주는 그를 석방시켜 궁궐 내에 숨겼다. 이는 덕녕공주의 친정이 일찍 사라진 탓에 원에서도 별 힘을 쓰지 못한지라[2] 하다못해 고려국 왕비라는 자기 자리를 보존하기 위해서 남편을 감싸는 게 자신에게 더 유리하다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높다. 또 자기 아들 충목왕이 아직 어리기 때문에 사적인 감정은 억눌렀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이 시기 덕녕공주는 별다른 권세 없이 무척 조용히 살았다. 하지만 충혜왕이 폐위되고 어린 아들 충목왕이 즉위하자 충목왕의 친모이자 원 공주였던 덕녕공주가 주목받게 되었다. 충혜왕 폐위 당시 충목왕은 원에 있었는데, 고용보에게 안겨 들어간 그에게 부모 중 누구를 배우겠냐고 황제가 묻자 충목왕은 어머니를 배우겠다고 하였고, 이에 황제는 충목왕이 고려국왕 자리를 물려받는 걸 허가했다. 원에서도 어리기는 하지만 원 공주가 낳은 아들이 왕위를 물려받는 게 낫다고 여긴 것으로 보인다. 충혜왕이 폐위된 11월부터 충목왕이 즉위한 다음 해 2월까지 고려국왕 자리는 비어 있었다. 충혜왕의 소환을 담당한 도치는 고용보에게 명을 내려 국사를 담당케 하였으며, 기철과 홍빈에게 정동행성의 일을 임시 주관하게 하였다.
이 사람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자가 고용보였는데, 그는 원에 들어가 황제를 만나는 자리에 배석하였다. 고용보는 황제의 총애를 받아 권세를 휘둘러 친왕(親王)과 승상이라도 절을 올릴 정도였다고 한다. 원나라 어사대에서 이처럼 탄핵한 내용이 과장된 면이 없지는 않겠지만, 원에서 중요한 인물이었던 것 같다.
고용보가 탄핵을 받아 금강산에 유배를 왔을 때도 충목왕은 그와 원 조정을 위해 연회를 베풀었다. 따라서 고용보에 대한 충목왕의 후대는 그를 통해 원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자 하는 덕녕공주의 뜻이 있었을 것이다. 고용보는 기황후와 긴밀했다고 하지만 확신하기는 어렵고, 고용보가 강해진 뒤 기씨가 현직에서 멀어져 톡토와 기씨 일파가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고 벨케부카-태평-고용보가 정국을 주도하는 등 사이가 나빠진 것으로 보인다. 고용보는 훗날 조일신의 난에 도망치고 출가해 해인사에 있다가 공민왕에게 죽었는데, 세간에는 공민왕의 형 충혜왕 폐위에 고용보가 도왔기 때문이라고 했다.
홍빈은 처음에는 조적의 난에 협조했지만 심문을 받을 때는 오히려 충혜왕을 옹호해 일등 공신에 책봉된 특이한 전력의 인물이었다. 도치가 정동행성의 일을 임시 담당케 했음에도 불구하고 병을 핑계로 일을 돌보지 않았으므로 정국에 주요한 변수는 아니었다. 기철도 이 시기에는 별 행적이 없는데, 기황후와 고용보의 관계 때문으로 보인다.
이런 정국 속에서 덕녕공주가 정계의 핵심으로 자리잡은 것 같다. 충목왕을 책봉하기 위해 원에서 사신이 파견되었는데 이들을 위한 연회에서 덕녕공주가 남면(南面)하고 왕은 서면(西面)했다. 왕이 아닌 덕녕공주가 남면했다는 것은 덕녕공주가 수렴청정을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덕녕공주는 실질적으로 권력을 장악하고 국정을 행사했다.
권력 행사의 매개는 다름아닌 충혜왕 이래의 측근 세력으로, 측근 세력과 결탁해 정계의 주도권을 장악했다는 점은 정방 혁파와 복치復置 과정에서 드러난다. 정방은 폐단이 심해 이제현의 상소로 충목왕 즉위년 12월에 사라졌지만 한 달 만에 다시 설치되었다. 이들 세력은 신예, 전숙몽, 강윤충 등이었고 이들은 충목왕 대에 인사권을 남용하였다.
하지만 충혜왕의 폐행이 모두 덕녕공주의 측근이 되지는 않았는데, 전숙몽은 덕녕공주의 비위를 거슬러 동래로 유배되었다. 당시 전숙몽의 관직은 대언(代言)이었는데 이 때 정방제조가 재상, 대언으로 이루어졌고 충혜왕 폐행세력과 덕녕공주 결탁으로 이루어진 것을 고려할 때 덕녕공주가 원하는 인사를 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배제된 것으로 보인다.
충목왕 대에 덕녕공주의 최측근으로 두드러진 자들은 신예, 강윤충, 배전이었다. 신예는 충혜왕이 원 조정에게 붙들려 있을 때 자기 매부 고용보와 짜고 군사를 매복시켜 궁궐 외곽을 수비한 이력이 있는 사람으로 자신도 원 관직을 가지고 황제의 명을 받들어 금강산에 오는 등 양국을 왕래하며 위세를 떨치던 사람이다. 강윤충은 충숙왕을 섬겨 호군이 되었으며 조적의 난 때 왕을 호위해 일등 공신에 봉해진 충혜왕의 폐행이었다. 배전 역시 충혜왕의 폐행으로 조적의 난을 진압한 노고로 일등 공신에 봉해진 인물이다.
배전은 강윤충과 더불어 출입하면서 총애를 받았다. 강윤충은 인당 등이 원사 자격으로 온 고용보에게 숙청을 건의하는 일이 있었지만 강윤충이 고용보의 어머니에게 뇌물을 바쳐 모면하였다. 충목왕 대에는 정치도감으로 여러 개혁을 했지만, 이 개혁이 실패한 이유 중에 하나가 정방이었고 정방의 인사를 장악한 자들이 덕녕공주의 측근이었다. 김륜과 이제현이 올린 상소에서는 강윤충이 정방제조가 되어 개혁을 그르쳤다고 비판했다. 사람들은 전민과 관련된 폐정 개혁보다 인사권 남용을 먼저 바로잡아야 한다고 여겼지만 덕녕공주는 출신 때문인지 측근 정치를 버리지 않았다. 이제현은 충목왕과 충정왕 대에는 별 활약을 못하다가 공민왕 대에 이르러 다시 정계에서 활약을 하게 된다.
1348년 아들 충목왕이 12세의 나이로 승하하자 후사의 선정을 둘러싼 갈등이 발발하게 된다. 충목왕은 충혜왕의 적장자라서 큰 문제가 안 되었으나 충목왕 사후의 상황은 그때와 달랐다. 후보자로는 충혜왕과 희비 사이에서 태어난 왕저충혜왕의 동복 남동생인 강릉대군 왕기였다.
덕녕공주는 충목왕이 위독해지자 재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는데, 밀직부사 안목의 집에 옮겨 거주하면서 모든 사무를 처리하고 왕이 죽자마자 기철, 남편 충혜왕과 공민왕의 어머니 덕비 홍씨(德妃 洪氏)로 하여금 정동행성의 일을 주관하게 하였다. 수렴청정의 정치적 영향력을 유지하고자 했던 것이다. 기철은 기황후 세력과의 연대로 고용한 것으로 보이는데, 당시 원 황실에서 기황후의 정치력이 약해지고 있었다는 지적이 있어 속단하기에는 이르다. 하지만 덕비와 기철에게 주관하라고 해 놓고서도 정사는 자기가 처리한 것으로 보아 이는 그냥 형식적인 절차로 보인다.
덕비는 이제현을 원에 보내 새 왕을 간택할 것을 요청하는 표문을 올렸다. 충목왕의 후사 간택을 요청하는 표문에서 왕기를 왕저보다 앞서 거론하고 왕저의 어린 나이를 표출시키면서까지 민망民望을 따라달라고 한 것, 권준, 이곡, 윤택 등이 왕기를 왕으로 세워달라 요청한 것을 보아 당시 고려는 왕저보다는 왕기를 더 고려하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원은 충목왕 사후 두 달 뒤 다음 해 2월 왕저를 원에 오게 한 뒤 5월에 왕위 계승을 확정했다.
사신史臣은 충정왕의 즉위 과정에 대해 강릉군은 국민의 인심을 얻고 원의 원조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윤씨가 붕당을 만들어 탐욕을 함부로 하여 화근을 만들었다고 비판했다. 이를 보아 충목왕의 사망 이후 충정왕 즉위 때까지 고려의 정치세력은 양분된 것으로 보인다. 이런 소용돌이 속에서 덕녕공주는 강릉군보다 어린 왕저가 즉위하는 게 자기 권력에 더 유리하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충정왕 즉위 과정에서 생모 희비 윤씨 세력과 덕녕공주가 손을 잡았을 수도 있다. 희비는 고려인이고 덕녕공주는 충목왕 대 이래 권력의 핵심이었기 때문이다. 희비 입장에서는 자기 아들을 즉위시키기 위해서는 덕녕공주와 손잡는 게 합리적이었다. 덕녕공주도 자신이 원의 공주이기는 하나 정치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명분인 충목왕이 죽은 상황에서 권세를 누리기 위해서는 희비와 손잡아야 했다.
왕저를 추대한 세력은 노책과 최유 같은 부원배, 손수경, 이군해와 같은 충혜왕 폐행, 왕저의 외척 민사평, 윤시우 등이었다. 덕녕공주가 왕저를 지지한 것은 손수경과 이군해가 왕저를 받들고 원에 간 것으로도 알 수 있다. 대간의 반대를 무릅스고 원에 갔으므로 추대의 중추적 존재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손수경, 이군해는 충혜왕의 폐행이지만 덕녕공주와 그리 밀착된 관계는 아니었다. 손수경은 충혜왕이 복위를 위해 뇌물을 줘서 원으로 보낼 정도로 신임했고 충혜왕의 수감 당시 같이 감옥에 갇혀 국문을 당하기까지 해 1등 시종 공신에 책봉된 측근이었다. 다만 충혜왕 폐위 이후 충목왕 즉위가 확정되지 않은 시기에 손수경이 원에 가서 뇌물을 바친 것으로 보아 충목왕 즉위에 어느 정도 도와준 것 같다. 충목왕 이후에도 고위 관직을 역임하고 있었으므로 강윤충만큼 밀착되지는 않아도 서로 우호적인 편이기는 했던 것 같다.
이군해는 충숙왕 복위 후 충혜왕의 폐행이라는 이유로 해도로 유배를 갔다가 충혜왕의 복위로 복귀한 인물이다. 충목왕이 즉위한 뒤 정방제조를 맡기도 했으며 충목왕이 병이 났을 때 덕녕공주가 이군해에게 천마산에서 수륙회를 베풀고 기도를 드리라고 한 것으로 보아 충분히 가까운 사이였다고 볼 수 있다.
충정왕 대 초에는 덕녕공주의 정치적 위상은 전대에 버금갈 정도였다. 충정왕이 즉위한 뒤 국사를 전담한 사람은 이군해이며 희비 계 인물인 민사평과 더불어 정방제조였다. 이어 내려진 대대적인 인사 이동에서도 손수경과 이군해는 관삼사사와 도첨의찬성사의 요직에 임명되었다. 수상인 첨의정승은 노책이었고 민사평을 비롯한 희비 윤씨 세력도 주요 관직에 포진하여 상응하는 영향력을 발휘했지만, 이미 몇 년 간 섭정을 했던 만큼 정치적인 권세는 더 우위였을 것으로 보인다.
원 조정이 충정왕에게 국왕인을 전달하고 베푼 연회에서 덕녕공주가 남면하고 왕이 동면한 사실은 여전히 과거의 지위를 유지했음을 보여준다. 또 요왕潦王이 충정왕과 덕녕공주에게 사신을 보내 향응을 베푼 것으로 보아 국내외적으로 덕녕공주의 위세를 인정한 것으로 보인다. 이 때 정방제조 김광재가 반발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인사권을 장악해 정국을 주도하려고 했던 것 같다. 충정왕 2년 9월 김광재의 건의가 받아들여져 정방이 사라지게 된다.
덕녕공주의 섭정이 전조와 다른 점은 충정왕 측근 세력과 권력을 나누어 가졌다는 점이다. 충정왕 초에 권력을 농단한 주 인물은 윤시우와 배전으로 배전은 충목왕 대에 덕녕공주의 측근으로 권세를 가졌고, 충정왕 대에도 변함없이 정계의 핵심이었다. 윤시우는 충정왕 측근에서 강대한 권력을 행사해 이왕伊王이라고 불릴 정도였다. 윤시우는 충정왕의 곁에서, 배전은 덕녕공주의 궁중에서 각각 세력의 중추를 맡고 있었다.
한편 충정왕 말년부터 공민왕이 즉위하기까지 고려와 원에서는 계승을 둘러싼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다. 공민왕은 1349년 가을 노국대장공주와 혼인하여 왕권을 항한 새로운 준비를 하였다. 공민왕은 충숙왕 시절부터 원에 머물며 후일을 도모한 것이다. 결국 덕녕공주는 1350년 정통 관료들의 반발과 정치적 위상 하락에, 살아있던 친정은 오래 전에 없어졌고, 딸인 장녕공주도 원 노왕(魯王)에게 시집간 상황에서 더 이상 권력을 행사할 의욕이 사라졌는지 원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덕녕공주는 1354년에 다시 고려로 귀국했다. 덕녕공주 체류 당시 원은 매우 혼란에 빠져 있었는데, 황하의 범람으로 인한 수재, 기근, 전염병의 유행으로 민심은 매우 흉흉했으며 대규모 화폐 발행으로 인한 극인플레이션 현상, 홍건적의 봉기로 각지에서 농민 반란이 발발하고 있었다. 이 해에는 원 승상인 톡토가 채하중을 통해 홍건적 토벌 군사를 요청할 정도였으며, 고려는 이를 받아들여 유탁 등이 수천 병사를 이끌고 가서 공을 세우기도 할 정도였다. 이런 상황이니, 그냥 고려에서 여생을 사는 게 더 안정적이고 나을 것이라고 여긴 것 같다.
공민왕은 즉위하자마자 덕녕공주 세력들부터 없앴으며, 이미 즉위한 지 3년이 돼서 자리가 잡힌 상태라 덕녕공주의 영향력도 소멸한 상태였으므로 형수의 귀국을 받아들였다. 귀국한 뒤 공민왕은 덕녕공주를 잘 모셨고 삼전(三殿)과 동등하게 받들었다고 하지만, 이미 이 시기에 가서 덕녕공주의 정치적 영향력이 완전히 사라졌기 때문으로 보인다. 또 초기 공민왕은 원을 자기 쪽에서 배제하기 전에는 가급적 우호 관계를 유지하고자 원 공주의 귀국을 받아들인 것일 수도 있다.
한편 덕녕공주의 귀국과 관련된 노왕(魯王)의 행보도 두드러지는데, 귀국한 2월 바로 전 달인 정월에 노왕은 사신(使臣)에게 연회 비용으로 저폐 150정을 보냈다. 이 노왕은 덕녕공주의 딸인 장녕공주/장녕옹주의 사위였다고 하지만 당시 장녕공주는 사위를 보기에는 젊은 나이였고[3] 남편과 사위가 똑같은 작위를 사용하는 것도 의문이다. 현대 중국의 여서女壻에는 사위 외에 남편이라는 뜻도 있기 때문에 남편인 노왕을 칭하는 말일 수도 있지만, 장녕공주가 실절失節(절개를 잃음)이라 비난받은 기록이 있기에 장녕공주가 처음 노왕과 결혼한 뒤 위 사료에 나오는 노왕의 아버지에게 재가했을 수도 있다.
아울러 덕녕공주가 귀국한 2월 공민왕의 연경궁까지 가서 원 사신에게 연회를 베푼 사실도 어느 정도 관련된 것 같지만 확실한 연관은 알기 어렵다. 고려사에는 이 시기 공민왕이 원 조정과 함께 국가 원로와 고위 관리들에게 연회를 베풀었는데, 이 비용은 원 황제가 보내 준 저폐로 충당했다. 공양왕 원년에 고려에서 노왕의 초상을 위문하러 갔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노왕은 공민왕에게 저폐를 보낸 노왕으로 보인다.
장녕공주는 1368년에 주원장이 원나라의 수도 대도(현재의 북경)를 함락하여 원나라 황실이 몽골로 도망가는 와중에 실종되었다가, 1370년에 고려로 돌아왔다. 공민왕은 절개를 잃었다고 비판받은 장녕공주를 찾아 어머니와 함께 지내게 했다. 이후 1367년 원으로부터 정순숙의공주(貞順淑儀公主)로 다시 책봉되었으며, 우왕 원년에 일생을 마감하였다.

3. 평가


덕녕공주의 섭정은 성리학이 자리잡히기 이전 고려와 전통적 몽골 사회의 관습에서 어느 정도 기인하는 측면이 있다. 한반도에서는 일찍부터 모권제母權制와 유사한 제도가 있었다. 남녀차별이 일찍부터 강했던 중국에서도 성姓이 본래 모계 씨족 사회에서 기원한 거라 타 문화권과 달리 혼후에도 성씨가 안 바뀌었으며 한국도 조선 초기까지 사위, 외손자 재산 상속 및 집안 상속 개념이 남아있어서 지금도 성이 안 바뀌는 제도가 있다. 일본도 메이지 유신 전까지는 혼후에도 본래 성을 그대로 유지했다.
귀족-평민 집안의 대를 잇는 데서 족내혼(族內婚)이 허락되었고 적자 상속만을 인정하는 대신[4] 딸이 있으면 데릴사위에게 물려주고 부녀婦女(며느리)의 지위가 낮지 않았으며, 신라시대에도 일본처럼 부계계승 원칙이기는 했지만 선덕여왕, 진덕여왕, 진성여왕이 즉위하기도 했다.
13세기 몽골 사회도 며느리가 가정이나 저치에서 결정을 내릴 수 있었고, 원 황제 즉위를 보면 칸을 선발하는 쿠릴타이에서 후비와 공주가 제왕諸王, 부마와 함게 나란히 참가하거나 원에서 모후 섭정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대표적으로 원 인종의 어머니 다기) 즉 원 공주가 어린 아들이나 의붓아들이 즉위하자 정사에 관여한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덕녕공주는 수렴청정을 하면서 아들인 충목왕을 도와 여러가지 업적을 남겼고, 충목왕 역시 12살로 요절할 때까지 신진사대부를 등용하고 권문세족들을 견제하는 등 '''미완의 명군'''이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직무를 잘 수행했다. 시동생 공민왕이 즉위한 후 고려가 반원정책을 펼치게 되지만, 덕녕공주는 섭정으로서 비교적 개념찬 행보를 보였기 때문에[5] 몽골인이지만 공민왕에게 우대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1375년 승하했다. 묘호는 경릉(頃陵)이며, 1377(우왕 3)년에 충혜왕의 진전(眞殿)에 부묘(祔廟)되었다. 1390년 태묘(太廟)로 옮겨 합사하였다.

대체로 고려에 시집 온 몽골 공주들은 남편보다 더 먼저 죽어 단명한 편이었는데 덕녕공주는 이례적으로 남편 충혜왕보다 31년이나 더 살다 죽었다. 생년이 기록되어 있지 않아 사망 당시 자세한 나이는 알 수 없으나 대략 60세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덕녕공주를 빼면 고려에 시집 온 몽골 공주들은 모두 40을 못 넘기고 죽었다.

4. 미디어


[image]
사극 신돈에서 배우 김여진이 덕녕공주 역을 맡았다. 온화하면서도 고려의 앞날을 생각하는 모습으로 그려지며, 아들이 죽은 후 원나라로 일시귀국했다가 이후 공민왕 3년에 다시 고려로 돌아온다.
극중에서는 고려로 돌아온 것이 시동생인 공민왕을 감시하라고 기황후가 보낸 것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공민왕의 동태를 감시하라"는 기황후의 명령을 쿨하게 씹었으며, 오히려 공민왕의 왕비인 노국대장공주와 자매처럼 정을 나누고 충고를 해주는가 하면, 고려 왕실 내부에서 갈등이 발생할 때 부드럽게 중재하는 모습을 보인다. 한편으로는 신돈에 대해 "노비의 자식을 만족시키려면 세상을 다 줘도 부족할 것."이라고 발언하는 등 신돈에게 힘을 실어주는 것을 좋아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반대파는 또 아니어서 신돈을 죽이려는 공민왕을 말리거나 전민변정도감의 폐지에 관해 직언을 남기는 등 신돈의 개혁 취지에는 동감하는 것으로 나왔다. 실제로도 나름 충목왕 때 개혁을 시도했었고, 그 역시 미완의 명군이라 불릴 정도로 평가가 나쁘지 않으니 어느 정도 일리 있는 행적이긴 하다.

[1] 1314년 생이라는 주장이 있으나 근거가 없다.[2] 원에서는 이 사건 가지고 충혜왕에게 뭐라고 한 적이 없다.[3] 덕녕공주가 1330년에 결혼한 데다 충목왕의 여동생이기 때문에 최대한으로 올려 잡아도 20대 초반이다.[4] 고려시대는 조선시대와 달리 국왕을 제외하면 일부일처제였고 첩의 존재조차 인정하지 않아서 비공식 서얼은 있어도 본질적으로 정부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였다. 그게 원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5] 어디까지나 '비교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기황후의 세력을 등에 업은 기씨 일가 등 부원배가 날뛰는 막장 시대였기 때문에, 덕녕공주가 개혁 성향의 신하들을 앞세워 도모한 정치개혁은 실패했다. 또한 덕녕공주 스스로도 배전과 강윤충과 같은 간신배들을 비롯한 측근세력의 부패를 눈감아주는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