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시 프로덕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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虫プロダクション
무시 프로덕션 (통칭 '무시 프로')
공식 홈페이지
1962~1973년까지 존재한 애니메이션 제작사. 당시에 경쟁하던 회사로는 토에이 애니메이션, 철인 28호로 유명한 TCJ, 타츠노코 프로덕션, 도쿄 무비, 즈이요 엔터프라이즈였다. 창업주는 데즈카 오사무.
1961년 데즈카 오사무가 도쿄도 네리마구 후지미다이에 있는 사저 옆에 창고 건물을 짓고 설립한 후, 스태프로 토에이 동화 출신 사카모토 유사쿠와 오토기 프로덕션[1] 출신 야마모토 에이이치를 합류시켰다. 이 셋은 1962년 실험작품 <어느 길모퉁이 이야기>를 만들어 제1회 오후지 노부로상 등을 받았고, 1963년 일본 최초 주간 연재 20분 애니메이션 철완 아톰을 제작하면서 일본 TV프로그램에 주간 TVA 제작 붐을 일으켰고, 업계 최초로 해외 진출을 했다. 주로 밀림의 왕자 레오, 리본의 기사, 도로로 등 데즈카 만화를 애니화했다. 타 만화가 작품을 원작으로 제작한 것 중 가장 유명한 건 내일의 죠이다. 작품의 성공으로 스태프 수도 조금씩 늘어 1964년 230명, 1966년 400명이 됐다.
신생 제작사라 데즈카 오사무가 직접 '''토에이 애니메이션의 급료의 2배를 주겠다.''' 라는 조건으로 사람들을 스카우트하고 다녔다고 한다. 그래서 직원들 상당 수가 자동차를 끌고 다닐 수가 있었고 데자키 오사무와 아라키 신고처럼 만화가를 포기하고 애니메이터가 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럼에도 한국 및 일본에서는 애니메이터를 저임금으로 착취하는 회사라고 잘못 알려지기도 했다.
그러나 1960년대 말부터 데즈카의 인기 만화 원작이라는 소재가 고갈되고, 데즈카 사장의 독단적 제작방식과 라이벌 회사와의 경쟁, 지나친 인건비, 인력난 등으로 제작비와 인건비의 빚이 쌓이자 1966년 기준 4백 명에 이르던 종업원이 이듬해를 기점으로 점점 줄어들었다. 이에 따라 사카모토 유사쿠 등 초기 멤버들이 회사를 떠났고, 1968년에 데즈카 사장이 독자 프로덕션을 세우고 1971년에 사장직을 사임하면서 주로 데즈카와 관계없는 애니들을 제작해 오다가 1973년 8월 관계사 무시프로덕션상사가 파산됐고, 말기에는 은행으로부터 차입을 못 받아 방송사들의 발주까지 끊겨 11월에 최종 도산했다.
남은 직원들은 신에이 동화의 전신격인 A 프로덕션으로 모였다. 이 회사는 토에이 애니메이션에서 쫓겨난 사람들도 불러 모았는데 연출을 중시하는 무시 프로덕션 출신과 작화를 중시하는 토에이 출신들의 스타일 차이, 서로가 서로 때문에 직장을 잃었다는 원망 때문에 싸움이 끊이지 않았으며 얼마 안 가서 해체되었다.
그리고 남은 직원들은 뿔뿔이 흩어졌다가 훗날 다시 뭉치는데 이 회사들이 선라이즈, 매드하우스이다.
일부만 뽑아도 이 정도. 데즈카 오사무가 얼마나 인재를 잘 뽑았는지 실감케한다. 특히 야스히코 요시카즈처럼 학생운동 경력이 있어 취업이 거의 불가능했던 인물까지 받아주었다. 정말 재능만 보고 뽑았다는 것이다. 야스히코 말로는 토에이 애니메이션은 도쿄 예술 대학 정도는 나와야 정직원으로 들어갈 수 있는 엘리트 회사였고 무시 프로덕션은 학력 하나도 안 보고 정말 능력만 보고 뽑았다고 한다. 사내 분위기도 연공서열 그런 거 없고 능력있는 사람이 광속으로 승진, 능력있는 사람 말은 무조건 따르는 능력 위주였다고 한다. 그래서 생판 신인이었던 토미노 요시유키나 데자키 오사무가 20대의 나이에 감독까지 할 수 있었다.
안타까운 건 이 사람들은 무시 프로가 망하고 나서야 재능을 발휘했다는 것이다. 코즈마 신사쿠는 무시 프로덕션이 만든 애니 중에 괜찮은 것도 있지만 이 정도의 환경에서 그거 밖에 못 만든 데즈카 씨는 능력이 부족한 거라고 하기도 했다.
1979년에 구 무시프로덕션 노조원들이 사명을 물려받고, 주로 아동 대상의 소규모 상영회를 위한 교육용 애니메이션 영화를 만드는 회사가 되었다. 가장 유명한 대표작은 어린 소녀의 태평양 전쟁 체험담을 그린 <うしろの正面だあれ>
본사는 도쿄도 네리마구 후지미다이 2쵸메 30-5에 있다.
제작 시간순
虫プロダクション
무시 프로덕션 (통칭 '무시 프로')
공식 홈페이지
1. 개요
1962~1973년까지 존재한 애니메이션 제작사. 당시에 경쟁하던 회사로는 토에이 애니메이션, 철인 28호로 유명한 TCJ, 타츠노코 프로덕션, 도쿄 무비, 즈이요 엔터프라이즈였다. 창업주는 데즈카 오사무.
2. 역사
2.1. 전성기에서 몰락까지
1961년 데즈카 오사무가 도쿄도 네리마구 후지미다이에 있는 사저 옆에 창고 건물을 짓고 설립한 후, 스태프로 토에이 동화 출신 사카모토 유사쿠와 오토기 프로덕션[1] 출신 야마모토 에이이치를 합류시켰다. 이 셋은 1962년 실험작품 <어느 길모퉁이 이야기>를 만들어 제1회 오후지 노부로상 등을 받았고, 1963년 일본 최초 주간 연재 20분 애니메이션 철완 아톰을 제작하면서 일본 TV프로그램에 주간 TVA 제작 붐을 일으켰고, 업계 최초로 해외 진출을 했다. 주로 밀림의 왕자 레오, 리본의 기사, 도로로 등 데즈카 만화를 애니화했다. 타 만화가 작품을 원작으로 제작한 것 중 가장 유명한 건 내일의 죠이다. 작품의 성공으로 스태프 수도 조금씩 늘어 1964년 230명, 1966년 400명이 됐다.
신생 제작사라 데즈카 오사무가 직접 '''토에이 애니메이션의 급료의 2배를 주겠다.''' 라는 조건으로 사람들을 스카우트하고 다녔다고 한다. 그래서 직원들 상당 수가 자동차를 끌고 다닐 수가 있었고 데자키 오사무와 아라키 신고처럼 만화가를 포기하고 애니메이터가 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럼에도 한국 및 일본에서는 애니메이터를 저임금으로 착취하는 회사라고 잘못 알려지기도 했다.
그러나 1960년대 말부터 데즈카의 인기 만화 원작이라는 소재가 고갈되고, 데즈카 사장의 독단적 제작방식과 라이벌 회사와의 경쟁, 지나친 인건비, 인력난 등으로 제작비와 인건비의 빚이 쌓이자 1966년 기준 4백 명에 이르던 종업원이 이듬해를 기점으로 점점 줄어들었다. 이에 따라 사카모토 유사쿠 등 초기 멤버들이 회사를 떠났고, 1968년에 데즈카 사장이 독자 프로덕션을 세우고 1971년에 사장직을 사임하면서 주로 데즈카와 관계없는 애니들을 제작해 오다가 1973년 8월 관계사 무시프로덕션상사가 파산됐고, 말기에는 은행으로부터 차입을 못 받아 방송사들의 발주까지 끊겨 11월에 최종 도산했다.
남은 직원들은 신에이 동화의 전신격인 A 프로덕션으로 모였다. 이 회사는 토에이 애니메이션에서 쫓겨난 사람들도 불러 모았는데 연출을 중시하는 무시 프로덕션 출신과 작화를 중시하는 토에이 출신들의 스타일 차이, 서로가 서로 때문에 직장을 잃었다는 원망 때문에 싸움이 끊이지 않았으며 얼마 안 가서 해체되었다.
그리고 남은 직원들은 뿔뿔이 흩어졌다가 훗날 다시 뭉치는데 이 회사들이 선라이즈, 매드하우스이다.
2.2. 전설적인 멤버들
- 스기이 기사부로
- 니시자키 요시노부
- 마루야마 마사오
- 린 타로
- 데자키 오사무
- 사사가와 히로시
- 토미노 요시유키
- 칸다 타케유키
- 타카하시 료스케
- 스즈키 요시타케
- 호시야마 히로유키
- 스기노 아키오
- 아라키 신고
- 카나야마 아키히로
- 야스히코 요시카즈
- 나카무라 카즈오
- 아시다 토요오
- 카와지리 요시아키
- 요시카와 소지
- 오오하시 마나부
- 히라타 토시오
- 누노카와 유우지 - 스튜디오 피에로 창업주.
일부만 뽑아도 이 정도. 데즈카 오사무가 얼마나 인재를 잘 뽑았는지 실감케한다. 특히 야스히코 요시카즈처럼 학생운동 경력이 있어 취업이 거의 불가능했던 인물까지 받아주었다. 정말 재능만 보고 뽑았다는 것이다. 야스히코 말로는 토에이 애니메이션은 도쿄 예술 대학 정도는 나와야 정직원으로 들어갈 수 있는 엘리트 회사였고 무시 프로덕션은 학력 하나도 안 보고 정말 능력만 보고 뽑았다고 한다. 사내 분위기도 연공서열 그런 거 없고 능력있는 사람이 광속으로 승진, 능력있는 사람 말은 무조건 따르는 능력 위주였다고 한다. 그래서 생판 신인이었던 토미노 요시유키나 데자키 오사무가 20대의 나이에 감독까지 할 수 있었다.
안타까운 건 이 사람들은 무시 프로가 망하고 나서야 재능을 발휘했다는 것이다. 코즈마 신사쿠는 무시 프로덕션이 만든 애니 중에 괜찮은 것도 있지만 이 정도의 환경에서 그거 밖에 못 만든 데즈카 씨는 능력이 부족한 거라고 하기도 했다.
2.3. 파산 후
1979년에 구 무시프로덕션 노조원들이 사명을 물려받고, 주로 아동 대상의 소규모 상영회를 위한 교육용 애니메이션 영화를 만드는 회사가 되었다. 가장 유명한 대표작은 어린 소녀의 태평양 전쟁 체험담을 그린 <うしろの正面だあれ>
본사는 도쿄도 네리마구 후지미다이 2쵸메 30-5에 있다.
3. 대표작
제작 시간순
4. 참고 자료
- 일본 애니메이션 역사 - 야마구치 야스오 저. 김기민/황소연 역. 미술문화. 2005.
[1] 신문만화 <후쿠쨩> 작가 요코야마 유이치가 세운 애니메이션 제작사이다. 당시 스태프 수는 20~30명으로 토에이의 1/10 규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