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창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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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昌模
1907년 4월 23일 ~ 2002년 3월 13일
대한민국의 전 의료인, 정치인이다. 호는 야성(野聲). 종교는 개신교이다.
1907년 평안북도 선천군 남면 삼성동#에서 수원고등농림학교를 졸업하고 훗날 선천금융조합장을 역임하는 문승훈(文勝勳)의 아들로 태어났다. 배재고등보통학교,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현 연세대 의대) 이비인후과 과정을 졸업하였다.
배재고등보통학교 5학년에 재학중이던 1926년 6월 10일 6.10 만세 운동이 서울에서 전개되자 참여했다. 하지만 시위 계획이 사전에 발각되는 바람에 경찰의 탄압으로 만세운동이 더이상 지속되지 않자, 그는 서울 서대문에 있는 피어선성경학교 기숙사에서 서울시내 고등보통학교(高等普通學校) 대표자들과 회합을 가진 뒤 제2의 6.10 만세 운동 거사 계획을 협의했다. 그는 격문과 선전문을 작성, 인쇄하는 책임을 맡았다. 6월 18일 거사계획이 발각되어 경찰에 체포되었지만 6월 3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기소유예 처분을 받고 석방되었다.
이후 의사로 활동한 그는 1932년 황해도 해주의 구세병원 의사로 기반을 잡았고, 1938년 감리교총회 대의원으로 활동하면서 정춘수, 윤치호 등 친일 기독교인들이 함리감리교회를 일본 메소디스트 교회에 종속시키기 위한 행각을 벌이자 반대투쟁을 전개했다. 1941년 3월 정춘수 등이 국민총력(國民總力) 조선기독교감리회연맹 명의로 감리교 3부연회를 해산하고 일본의 교단규칙에 따라 일본기독교조선혁신단(日本基督敎朝鮮革新團)을 창립하려 하자, 1942년 10월 해주 대표로 총회에 참석하여 이규갑, 조신일(趙信一) 등과 함께 정춘수의 불신임안을 결의했다. 그러나 1943년 10월 정춘수가 일제의 비호로 다시 교권을 장악하면서 무위로 돌아갔다.
8.15 해방 후에는 마산결핵요양소 소장, 세브란스병원 원장, 대한결핵협회 사무총장, 원주기독병원(현 원주세브란스기독병원) 원장, 원주문이비인후과 원장 등을 지냈다. 한국전쟁 당시에는 육군 군의관으로 종군(1949년부터 1955년까지 복무)했다. 대한결핵협회 사무총장으로 재직할 당시에는 대한민국 최초로 크리스마스 씰을 발행하는데에 기여하기도 했다.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당 후보로 경기도 김포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현역 지역구 국회의원무소속 정준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강원도 원주시-원성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당 박영록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통일국민당 전국구 국회의원 제1번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85년 모교인 연세대학교에서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과 명예 박사 학위를 받은 것이 인연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시 역대 국회의원 중 최고령 당선자(만 84세)로 주목받았다. 참고로 해당 선거에서 지역구 당선자 중 최고령은 민주당 홍영기(만 74세)였다.[1]
그러나 고령의 나이에다가 의정 활동으로 바쁜 와중에도 그가 경영하던 원주의 문이비인후과 병원에서 새벽 진료를 본 후 서울 의사당으로 올라가고, 다시 원주로 내려와 진료를 하는 바쁜 나날을 보내야만 했다고 한다. 이 때 의사당으로 출근할때에도 항상 청진기와 진료가방을 가지고 갔다고 하니, 천생 의사였다는 평이 가장 잘 어울리는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이후 1996년에 임기 만료 후 평범한 의사이자 야인으로 되돌아갔고, 2001년에 건강상의 문제[2]로 의료 활동을 그만둔 뒤 이듬해인 2002년 3월 13일에 지병으로 별세했다. 향년 94세.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문창모에게 건국포장을 수여했다.
[1] 반대로 역대 최연소 국회의원 당선자는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만 26세의 나이로 당선되었고, 문창모 의원과는 같은 선거에서 민주자유당의 전국구 국회의원 제1번으로 출마하여 당선된 김영삼 당시 민주자유당 총재였다.[2] 손에 마비가 와서 더 이상 진료를 볼 수가 없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