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영기(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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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년 12월 3일 ~ 1999년 2월 10일
1. 개요
2. 상세
3. 기타


1. 개요


대한민국의 전 법조인, 정치인이다. 본관은 남양(南陽).#

2. 상세


1918년 전라북도 순창군 복흥면 어은리##에서 태어났다. 고창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43년 일본 도호쿠대학 법문학부를 졸업했다. 1943년 동아연맹 사건으로 일본에서 2년간 복역 후 1945년 출옥했다.
1948년 대한민국 육군 군법무관으로 임관하였으며, 1950년 육군본부 법무감실 법무차감(중령)을 역임하였다. 1952년 군법무관 전형시험에 합격(대령)하여 육군본부 병무차감을 역임하였고, 이듬해에는 육군대학교를 졸업했다. 1954년 서울에서 변호사 개업을 하였다.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전라북도 순창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자유당 임차주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민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역시 자유당 임차주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신파 소속이었다.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전라북도 순창군-임실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공화당 한상준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65년 한일기본조약에 반대하여 의원직을 사퇴한 윤제술의 뒤를 이어 제6대 국회의원 선거재보궐선거에서 서대문구 을 보궐선거에서 민중당 후보로 당선되었다.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 공천에서 탈락하자 한국독립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신민당 윤제술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70년에는 신진자동차 법률고문을 역임하기도 했다.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 소속으로 성동구 을 지역에서 당선되었다.
1972년 10월 유신 직후 육군보안사령부에 끌려갔다. 고문당할 위기에 처하자 몸에 힘을 주어 고혈압이라고 하여 고문당하지는 않았다.
1980년 5.17 내란으로 인해 정치규제를 당하였다. 1984년 민주화추진협의회에 몸담았다. 그러나 1985년 3월에야 정치규제에서 해금되어서 그 해 2월에 있었던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는 출마하지 못하였다.
1987년 통일민주당에 입당하여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영삼을 도왔다. 그러나 1988년 초 통일민주당을 탈당하여 김대중평화민주당에 입당하였고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전라북도 임실군-순창군 선거구에서 당선되었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임실군-순창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는데, 당시 최고령 지역구 당선자였다.[1] 1994년부터 1996년까지 국회부의장을 역임하였다.
새정치국민회의 창당 때 민주당에 남았다. 이후 박일과 함께 민주당 공동대표를 지냈다.

3. 기타


코리아게이트에서는 남일우가 그를 연기하였다.


[1] 비례대표까지 포함하면 당시 통일국민당의 전국구 1번으로 당선된 문창모 의원이었다. 당시 문창모 의원은 만 84세로 역대 국회의원 당선자 중 최고령 기록을 세웠다.